1. 개요
보길도지(甫吉島識)는 고산문학의 산실인 명승 제34호 보길도 윤선도 원림이 위치한 부용동을 찾아 그곳의 조경과 풍습을 소상하게 밝힌 기행문이다. 윤선도의 5대 손인 윤위(尹愇 : 1725-1756)가 그가 타계한 78년 후에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 유적지의 배치와 구조, 고산공의 생활상을 듣고 낱낱이 기록한 것이다. 그가 손수 지었다는 낙서재를 비롯하여 그와 얽힌 일화 등을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처음 보길도를 둘러본 윤선도가 물외(物外)의 가경(佳景)이요 선경(仙境)이라고 찬탄하며 부용동(芙蓉洞)이라고 이름 붙인 이 섬은 지금도 문향(文香) 넘치는 조경 예술과 함께 절경의 명소로 꼽히고 있다.2. 전문
주위가 60리인 보길도는 영암군[1]에 속하는 섬으로 해남에서는 수로로 70리 거리이다.북쪽에는 장자(獐子), 노아(鷺兒) 등의 섬이 있는 이외에도 10여 개의 섬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그 남쪽에는 제주와 추자도(楸子島)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망망대해여서 수세(水勢)가 험악하고 바람과 파도가 늘 일고 있다.
배릍 정자(亭子)머리 황원포(黃原浦)에 댔다. 정자에서 황원까지는 10리이며, 황원에서 격자봉(格紫峰) 아래 까지는 5리 남짓하다. 주산인 격자봉은 높이가 6:70장(丈)이 된다.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정북향으로 혈전(穴田)이 떨어졌는데 이곳이 낙서재(樂書齋)의 양지바른 터가 되는 곳이다.
격자봉에서 서쪽을 향해 줄줄이 뻗어 내린 그 중에는 낭음계(朗吟溪)·미전(薇田)·석애(石崖)가 있고, 서쪽에서 남쪽으로. 남쪽에서 동쪽을 향해 구불구불 돌아 서로 만난 곳이 안산(案山)이 되어 세 봉우리가 아울러 높이 솟았는데, 오른쪽 어깨도 다소 가파르다.
격자봉과의 거리는 5리이며 그 가운데에 높고 큰 봉우리. 곧 중만(中巒)의 허리를 못 미쳐 석실(石室)이 있고, 동만(東巒)의 동쪽에는 승룡대(昇龍臺)가 있으며 동만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동쪽에서 북쪽으로 굴러 내린 봉만의 산발치가 외수구(外水口)가 되어 장재도(藏在島) 오른쪽 기슭과 맞닿고 있다.
장재도는 남쪽에서 산줄기가 띠 모양으로 끌고 오다가 둥근달 같이 생긴 섬으로서, 양쪽 산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격자봉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져 선회하면서 세 가지로 나뉘어 완연히 북으로 꺾어져 끌고 가다가 낙서의 동쪽을 곱게 싸돌며 승룡대와 마주하고, 둥근 모자와도 같이 우뚝 솟아 있다.
여기에는 곧게 자란 소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는데, 이곳은 하한대(夏寒臺)이다. 대체로 보아 석전은 낙서 좌측이 되고 미전과 석애는 내룡(内龍)이 되고 하한대는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석전은 낙서와의 거리가 거의 5리쯤 되는데 미전과 석애는 그 속에 있고, 하한대는 화살을 헤아리던 곳으로 대의 높이는 주봉에 비하여 3분의 2가 안되며, 그 가지가 굴러 내려온 것이 또 하한대에 비하여 반쯤 높아보인다.
대의 아래는 곡수당(曲水堂)이 되고, 대의 북쪽은 승용대가 낟가시와 합하여 내수구(內水口)가 된다. 그 물은 낭음계에서 흘러 북산(北山)의 밑을 돌아 가운데로 연정(蓮亭)을 만들고, 하한대의 북쪽을 돌아서 동쪽으로 나와 세연정(洗然亭)을 만들고, 황원포로 흘러 개울물과 합하면서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을 만들고 있다.
오른쪽으로 떨어지면서 셋으로 나누어진 것 중의 하나는 하한대가 되고 가운데로 떨어진 것이 혁희대(赫羲臺)가 되어 하한대와 모습을 같이 하고 있으나, 다소 하한대의 좌측 평지(平枝)의 위에 솟아 있는 것이 사람의 어깨로 포개놓은 것 같아 모두 살펴볼 수 없다. 그밖의 가지가 모서리를 이루며 회전하여 동쪽으로 떨어지면서 옥소대(玉簫臺)를 만들어 그 그림자가 세연정 못 속에 거꾸로 비치고, 다시 뻗어 나와 외수구(外水口)를 만들며 장재도의 좌측과 만난다. 우측과 서로 만나는 곳은 수십 보 떨어져 있는데 바닷물이 장재도 안으로 들어가는 곳으로서, 원형을 이루고 물이 맑아 완연히 평평한 못을 이루어 놓은 듯하다. 장재도 밖에 꿈틀꿈틀 옆으로 안고 돌아 바다 기운을 담뿍 감추고 있는 곳은 노아도(鷺兒島)이다.
석전의 서쪽 승룡의 북쪽을 중첩으로 안고 돈 지엽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낙서재에서 보이는 곳은 오직 미애와 석전 및 안봉(案峰) 또는 하한대와 혁희대가 상투처럼 반쯤 보일 뿐이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면 푸른색 아지랑이가 창울하게 떠오르고, 첩첩이 나열한 봉만이 반쯤 핀 연꽃 같아 부용(芙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대체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낭음계에서 발원하여 세연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활해진 물빛은 푸른빛을 띠고 백옥같은 암석은 짐승의 모양과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어 하나 하나 이름 지을 수 없는 광경을 보이고 있어 유람객들은 한결같이 중흥(中興)의 돌(石), 삼청(三靑)의 물(水) 이라며 찬미해 마지않는다. 더러는 동방의 절승지는 오직 삼일포(三日浦)와 보길도만이 최고라 하면서도 조용한 취미를 갖게 하는 곳은 삼일포가 보길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산이 무더운 구름과 장기(瘴氣)가 가득한 바다 가운데에 솟아 있지만 지기가 청숙(清淑)하여 한번 부용동에 들게 되면 이 산 밖에 바다가 있는 줄을 잊게 한다. 그런가 하면 한달 내내 음음한 비구름이 덮고 있으나 주초(柱礎) 사이에 습한 기운이 없고 산속에는 사슴, 돼지, 노루, 토끼는 있어도 호랑이나 표범 또는 뱀이나 전갈(蝎)에 상처를 입을 걱정이 없고 나무로는 소나무, 떡갈나무, 추나무, 밤나무, 산차(山茶), 유자, 석류나무로서 온 산이 늘 푸르고 죽순과 고사리, 버섯, 가라지 등 산과 들에서 나는 진미와 태화(苔花)와 복합(鰒蛤) 맛은 철따라 다르지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산진해수(山珍海羞)를 모두 갖추었다 할 것이다.
암석을 의지하여 드문드문 살고 있는 주민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으나 산새와 들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나무 그늘 풀 밑에서 조용히 쉬다가 고사리도 캐고 상수리와 밤을 줍기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돼지와 사슴을 벗삼는 것이다.
이것이 보길도 경관의 대략이다.
오! 우리 선조께서 만년에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요, 세상을 등지고 발자취를 남기신 곳이기도 하다.
다만 가정에 전해오는 말과 지난날 마을 노인들이 들려주던 전설을 떠올리며 육지와 바다가 가로막힌 것과 같이 신선과 평민의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꿈속에 그린지 대체로 20년이 되었다. 이제서야 다행히 순풍을 만나 진경(眞境)을 밟을 수 있었다.
강산(江山)의 모습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터도 어렴풋이 남아 있었으며, 기울어진 난간과 정자에는 선조의 손때가 남아 있어 이를 만져보고 살펴보는 동안 선조의 발자취를 생각한 대로 비슷하게 살필 수 있어 백년간 추모해 오던 성심을 위로할 수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간 오늘날에는 딴 사람에게 맡겨져 있었다.
우리 선조께서 이 고장을 버린 것은 지금부터 78년이나 흘렀지만 오가시던 오솔길도 없어지고 초목만이 우거져 있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대사(臺謝)도 무민당(無憫堂)과 서와(西窩)·곡수(曲水) ·세연정(洗然亭)뿐이고 낙서재와 동와(柬窩)·석실(石室)은 터만이 완연할 뿐 썩은 기둥, 무너진 단들이 황초 위에 흩어져 있고 서재·연정(蓮亭)·정성암(靜成庵) 등은 다만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사이 사이에서 남긴 터전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물이 마른 골짜기의 안석 및 소나무 소리, 아름다운 사석(沙石), 우거진 수목은 비록 행인 과객이라도 역시 고금의 역사를 생각할 때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하물며 미약한 후손으로서 지난날의 선조를 추모하매 흘러내리는 눈물로 이곳을 찾아 상심하는 나의 마음은 도리어 꿈속에서 그리워하니만도 못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곳을 지키며 살고 있는 사람은 이동숙(李東淑)으로 학관(學宫:아들 직미)의 사위였다. 학관의 아들 청계(請溪)는 일가 노인으로서, 같이 이곳을 찾게 됨으로 해서 선조께서 남긴 발자취를 하나하나 알게 되었다. 옛날에 들은 말을 나를 위해 들려주고, 또 선고(先考)께서 추모하던 성의와 수호하던 노고에 대해 들려줄 때, 나는 전성시절에 와보지 못하고 나이 들어 겨우 황폐한 폐허만을 찾게 된 것을 슬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폐한 유허(遺墟)에서나마 옛날에 듣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일가노인이 살아 있고 이군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데서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뱃머리를 돌린 뒤 일가 노인은 몇 개월이 안되어 세상을 떠났고 이군도 이곳을 떠나 육지로 나왔다.
이때부터 부용동에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곳을 다시 찾아 선조가 남긴 유적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 해도 비슷한 것을 찾아볼 길이 없다. 하물며 세월이 오래고 세대가 멀어진 주인 없는 강산(江山)에 옛 자취가 남아 있을리 없다. 또 남아 있다 해도 그 평천(平泉)과 유석(遺石)이 타인의 소유물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를 일이다. 이 뒤에 이곳을 찾는 자는 보길도가 어떻게 생긴 곳이며, 나의 선조께서 발자취를 감추었던 곳이 후세에 이르러 영구히 흔적이 없어졌음을 알 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이에 방문한 사실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또 옛날에 들은 것을 보아 뒤에 부록함과 아울러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선조를 추모하는 후손들로 하여금 이 기록을 통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상상케 하려는 것이다. 1748(戊辰) 가을 5세손 위(愇) 근지(謹識)
·낙서재(樂書齋), 무민당(無憫堂)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내려오면서 소은병(小隱屛)이 있고, 소은병 밑에 낙서재 터가 되어 있는데, 그 혈전(穴田)은 높고도 넓은 곳으로서 좌측은 양(陽)에, 우측은 음(陰)에 속하며, 입술(唇)은 다소 끝이 뾰족하고, 우측에는 맑은 물이 출렁대며 맴돌고 있다.
충헌공(忠憲公. 고산74 )이 병자(丙子)년에 국사를 위해 물길로 떠난 뒤 수일이 안되어 강도(江都)가 침략되며, 공은 생각하기를 호남(湖南)으로 급히 돌아가면 영로(嶺路)는 통할 수 있을 것이고 조정의 명령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서산(西山)의 고사리(薇)와 기자(箕子)의 거문고(琴), 관녕(管寧)의 탑(榻)을 의지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급히 영광 땅으로 돌아왔을 때는 성 밑(편집자 주 : 남한산성 밑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뒤였다.
공은 복받치는 충정과 울분을 참지 못한 채, 육지를 다시 밟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배를 저어 남쪽을 향해 내려갔다. 처음에는 탐라(耽羅)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보길도에 배를 대 곧 바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을라 영숙(ER) 한 산기(山氣)와 절기한 수석을 보며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의 발자취를 기다린 곳이 이곳이다 하고
고 수려한 봉만을 바라보고는 거처를 마련하기로 하였으나 수목이 울창하여 산맥(山脈)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게 하고 격자봉에서 오르내리며 고저와 향배를 헤아려 낙서재 터를 잡던 처음에는 초막을 짓고 살다가 그 뒤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 때는 견고하게만 하고 조각을 하지 않았었다. (낙서재는 삼간집이지만 사방으로 퇴를 달아 건물이 매우 컸었다)
또 낙서재 남쪽에 외침(外寢)을 짓고(한간이지만 사방으로 퇴를 달아 매우 광활하다), 또 두 외침에는 동서(東西)로 움집을 구축하였다(각기 한 칸씩에 사방으로 퇴를 달았음). 늘 외침에서 거쳐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뜻을 담아 무민(無憫)이라는 편액(扁額)을 달기도 하였다. 건물에 비록 단청을 하지 않았어도 높고 넓은 방실(房室)과 조정(藻井)을 갖추었다(조정은 속명에 반자(攀子)), 이곳에 앉아 한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절승한 모든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거니와, 섬돌 아래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어 아름다움을 한층 더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학관(學官)이 연못을 지금의 난간 아래 좌우에 옮겨 파고 화계(花階)를 쌓아 온갖 꽃을 줄지어 심고 그 사이에는 기암괴석으로 꾸며 놓았으며 뜰 아래에는 화가(花架)와 섬돌이 있는데, 모두가 귀문(龜文)을 한 잡석을 사용하여 조각한 흔적이 없는 자연석임에도 지금까지 일그러지지 않은 채 단단하게 남아 있다.
낙서재는 옛날에 소은병(小隱屛) 밑에 있었다. 뒤가 낮고 앞이 높았던 것은 대체로 지형에 따랐던 것이다. 소은병은 지형이 평탄하여 뒤 처마 밑과 좌우 난간 가에는 괴석이 늘어서 있고, 뜰 앞 가운데에는 거북이 모양을 한 암석이 있어 이를 귀암(龜岩)이라 이름하였다. 이것은 곧 소은병에서 내려온 여맥(餘脈)이다.
학관의 아들 이관(爾寬)의 말로는 내침(內寢)이 협소하여 이를 철회하고 개축할 때 뒤를 파헤쳐 고르기 위해 모든 암석을 제거하는가 하면 소나무를 베어 오량각(五梁閣)을 극히 사치스럽게 지었는데. 그때 기초를 전보다 훨씬 낮추었고, 앞 기둥이 귀암을 누르게 하였지만 이 암석 또한 반은 흙에 묻어버리는 등으로 난간 가의 기암괴석을 찾아볼 수 없다.
일찍이 들은 말이지만 이관이 옛터들 헐고 넓힐 적에 일하던 자의 꿈에 신선 같은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귀암에 걸터앉아 탄식하는 말에, 날으는 용(龍)의 왼쪽 뿔을 깍아버렸으니 자손은 장차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일하던 자는 이관에게 고했지만, 그는 성을 내며 만일 영감(令監)이 꿈속에 내려왔다면 어찌 나에게 고하지 않고 너에게 고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횡역(横厄)을 만나 가산을 탕진하매 이 건물도 팔아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옛날에는 후원에서 수동(水简)으로 섐물을 끌어 지붕마루를 넘겨 뜰 가운데로 떨어지게 하고 커다란 구유통으로 받아 썼는데 지금은 서와(西窩) 쪽으로 옮겨 놓았다.)
·소은병(小隱屛)
소은병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4, 5인이 앉을만한 넓이다. 주자(朱子)가 은거한 대의를 취하였으나 다소 작았기 때문에 소은(小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한 골짜기의 크고 작은 것부터 모든 것이 눈앞에 펄쳐지는데, 고리처럼 두른 병풍과 우거진 장송(長松)·풍백(楓柳)들은 공이 가장 아꼈던 것들이다. 비록 차가운 엄동설한이라도 옷깃을 헤치고 북쪽을 향해 앉아 있노라면 가슴이 활짝 열리는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석실(石室)
낙서재 터를 잡던 처음에 안산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가 얼마 뒤에 가마를 타고 곧바로 석실로 향해가서 황무지를 개척할 적에 기교하고 괴이한 석문(石門)·석제(石梯)·석난(石欄)·석정(石井)·석천(石泉)·석교(石橋)·석담(石潭)은 모두가 인공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모양 따라 명명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한칸 집을 석함(石函) 속에 짓고 명명하기를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였던 곳이다.
대체로 안산 봉우리 중만(中巒) 기슭에서 수십 보들 올라 산길 따라 돌아가면 산허리에 닿게 되는데 여기에는 갑자기 층급(層級)이 분명한 석제(石梯)가 눈에 띄게 한다. 마치 사람이 축소한 것 같다.
이 석제를 따라 오르면 석문이 있는데 양쪽에 석주가 마주 서 있고 그 밑에는 깎은 듯한 괴석이 문지방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이같은 모양을 겹겹이 하고 있는 그 안에는 두어간 되는 반석(盤石)이 있는데 가운데는 오목하고 겉은 깎은 듯하다.
그 중앙에 동이와도 같은 돌이 놓여 있는 것을 공은 사랑하여 부용(芙蓉)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그리고 곧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이곳을 찾아와 골짜기와 격자봉 낙서재의 건물이 환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구경하였고, 무릇 시간이 있으면 무민당
기를 달아 서로 호응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입석을 붙들고 산행할 때의 발걸음은 나이 젊은 건각들도 공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석실 우측에는 높이 한 길 남짓하여 수명이 앉을 만한 석대(石臺)가 있고 석대 밑에는 또 석문 석제가 있으며 석문 밖으로는 매우 위험한 석폭(石瀑)이 있다.
등넝쿨을 붙들고 내려오면 맑게 흘러내리는 샘물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단풍나무, 소나무 그늘이 덮여 있는 밑에는 겉붉은 이끼가 돋아 있으며 물은 떨어지면서 석담(石潭)을 이루고 있다.
또한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 석담 가에는 석정(石井)이 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는 장노(匠奴)가 범죄를 저지르고 속죄하기 위해 이를 팠다고 한다.
한간 남짓한 석정에는 티 없이 맑은 물이 넘쳐 흘러내리고, 그 밑에는 석교(石橋)가 있다. 이는 곧 문집에서 말하고 있는 희황교(羲皇橋)이다.
승룡대(昇龍臺)
안산 봉우리인 동만(東巒) 기슭에서부터 산길이 매우 높고도 길다. 좌측 산허리를 따라 오르내리면 거대한 암석이 깎은 듯이 서 있는데 석면이 평탄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돌은 깨끗하고 방정하나, 돌 밑이 깎아지른 듯하여 감히 굽어 볼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석실 같은 것이지만 더욱 높이 보인다. 대 동쪽에는 작은 암석이 하나의 좌석을 마련해 주므로 공은 늘 지팡이를 의지하고 걸터앉아 돌아가기를 잊은 채 시를 읊었다는 것이다.
곡수당(曲水堂)
하한대의 서쪽이며 두 언덕의 중간 지점으로 소쇄하고 아늑한 이곳을 공은 사랑하여 수시로 왕래하였는데,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던 곳이다.
학관이 조그마한 초당을 지어 휴식할 곳을 마련하자는 요청이 있을 때 공은 건물 짓는 것을 싫어하여 학관으로 하여금 이 공사를 맡도록 하매 학관이 드디어 사재를 털어 이를 구축 하였던 것이다.(한간의 건물에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남쪽 난간은 취적(取適)이며, 서쪽 난간은 익청(益淸)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는 학관의 글씨이다)
정자는 세연정보다 다소 작지만 섬돌과 초석을 놓는 데는 정교함을 다했다. 초당 뒤에는 평대(平臺)를 만들고 3면으로 담을 둘러 좌우에 작은 문을 두고 있다. 그 중간에는 꽃과 과목을 심고 담장 서쪽 끝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三층의 층계는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으므로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다.
담 밑에 흐르는 물은 낙서재 우편 골짜기에 정자 10여보 아래 조그마한 연못으로 흘러 내리는데 이곳에는 일삼교(日三橋)가 가설되어 있다(학관은 늘 서재에 있었고 공은 초당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이 다리를 경유하여 왕래한 때문), 일삼교에서 몇 걸음 돌면 유의교(有意橋)가 가설되어 있고(언덕의 복숭아, 오얏나무를 의지하여 가설 했기 때문에 떨어지는 꽃이 뜻이 있다는 의의를 취하였음), 이 다리 밑으로는 곡수(曲水)가 흐른다.
초당 앞에 이르러는 평지수(平池水)가 되어 반석 위에 떨어지는 물이 길지도 않고 넓지도 않으면서 월하탄(月下灘)을 만들고 있다.
그 여울가에는 예부터 담을 에운 죽림이 무성 하였으나 초당 뒤편이 더욱 무성해 보인다. 지금은 남김없이 모두 베어냈고, 그 밑에는 불차문(不差門)을 냈다.
연못 서쪽 언덕 위에는 두어층의 암석을 축조하여 익청헌(溢清軒)으로 이어지는 무지개다리가 가로질러 놓여져 있고, 그 위편에는 연못(蓮池)이 있고 연못 동편에는 작은 대(臺)를 구축하였으며, 대 위에도 석정(石亭)을 축조하고 그 밑에는 반석(盤石)을 깔았으며 돌을 쌓아 기둥을 세워 교량을 가설하였는데 대체로 조각돌이지만 단단해 보였다.
취적헌(取適軒) 아래 유의헌(有意軒) 위쪽에 파놓은 연못의 넓이는 대와 서로 비슷하여 두어간의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석축 한 것이 매우 높았다.
후면에는 두어층의 제단을 만들어 꽃과 괴석을 심었으며, 동남쪽에도 방대(方臺)를 높이 축조하고 대 위에는 암석을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어 놓았는데 높이가 한길 남짓하다. 다만 뾰족한 멋을 취했을 뿐 기교를 가미하지 않았고 허리 부분에는 구멍 하나를 뚫어 석통(石筒)을 이용하여 후은(後隱)에서 홈통으로 물을 끌어 구멍을 통하여 연못으로 흐르게 하고 비래폭(飛來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연못에 물이 차면 홈통을 가산으로 옮겨 단부(短阜)쪽에 대는테 단부에는 풍차(楓茶)와 소송(疏松)만 있었다.(초당 서남쪽 모퉁이 계단 위에는 백산차(白山茶) 한 그루가 있는데. 높이는 처마를 웃돌고 눈빛의 꽃이 연못에 비치고 있다. 산차는 곧 속명으로 동백이다)
낭음계(郞吟溪)
격자봉 서쪽의 심원하게 돌고 돈 셋째 골짜기는 수석이 더욱 절묘하다. 옛날에는 술잔을 흘리는 곡수(曲水)와 목욕반(沐浴盤)이 있었고, 송삼(松杉)이 울창하고 암벽이 깨끗하다.
공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죽장을 끌고 소요하고 영가(詠歌) 하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내가 이 섬을 찾았을 때는 마침 계속되는 장마로 개울물이 범람하여 끝내 이곳을 찾아 놀지 못하고 말았다.
서재(晝齋)
곡수(曲水) 남쪽 두 골짜기 안에 예부터 서재가 있었는데 지금은 빈터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에 학유공(學諭公) 심진사 주(沈進士柱), 심판서 단(沈判書檀), 정판서 유악(鄭判書維岳), 이처사 보만(李處士保晚), 안생원 서익(安生貝瑞翼)이 학관 등 수명과 더불어 같이 과업(課業)을 강학할 때에는 언제나 닭이 울면 함께 일어나 지팡이를 끌고 낙서재 침소(寢所)에 이르러 공이 관대를 갖추기를 기다려 문안을 드린 뒤, 차례로 들어가 배송(陪誦)하고 구수(口授)를 받고 나오면 그 이하 수명도 각자 나아가 강을 받았다.
제공들이 수강하고 물러난 뒤 정오가 되면 또 한번 문안을 올리고 석후에 또 문안하고 공께서 침실에 든 뒤에야 물러나오곤 하였다.
글을 읽는 여가에는 시를 지어 화답하는가 하면. 더러는 암석 사이를 소요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지만 학유공은 육지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때로 들어와 문안을 올린 뒤에는 자주 부름을 받았고, 혹은 공을 모시고 세연정을 유람하는 동안에는 대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하는가 하면, 저녁에 물러나와 글을 읽기 시작하면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 끈기를 보였다.
·연정(蓮亭)
조산(造山)안에 예부터 연정이 있었는데 어느 때에 헐었는지는 모르나 지금은 그 지형이 낮아 논이 되었고, 희미하게 토대(土臺)가 있을 뿐이다.
조산(造山)
주산(主山)에서 떨어져 내려온 은은한 산맥은 들판을 건너면서 차츰 날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안산봉인 중만(中巒) 아래에 해당하는 것으로 높이는 두어 길에 지나지 않고 길이는 수십 보이다. 사초(沙草)가 매우 깨끗하고 위편에는 소나무, 노나무가 있어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연히 조그마한 병풍이 되어 안산의 기슭을 가리고 있어 인공으로 축조한 것 같다 하여 조산이라고 하였다.
이 산 뒤편에는 낭음계의 하류가 안산의 기슭을 감고 돌아 세연정 못으로 흘러내린다.
하한대(夏寒臺)
그리 높지는 않아도 둥근 모습을 하고 우뚝 서 있는 하한대에는 장송이 울창하다. 일찍이 선박을 장식하는 아전이 이곳에 와서 소나무를 벌채하니까 '눈 앞의 낙랑장송을 대할 때마다 심신이 맑아지니 다른 산에서 베어가라'는 공의 말을 들은 뒤에는 다시 이 골짜기에 들어가 소나무를 베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혁희대(赫羲臺)
하한대보다는 다소 높아서 안으로는 한 골짜기가 굽어보이고 밖으로는 황원포를 대하고 있다 이것은 격자봉 다음으로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정북향이 멀리 바라보이기 때문에 황대에 올라 옛날을 회고한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하고, 대궐을 연연한다는 의미를 붙였다.
석전(石田)
미전(薇田)나 석애(石崖)의 서쪽에서 다소 먼 위치에 있다. 거대한 암석이 가로누워 있고 산등성이에 이랑이 지어 있어 완연히 밭을 간 흔적과 같다.
정성암(靜成菴)
역시 남은 터는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하한대 동쪽에 있어 세연정을 왕래하는 때의 휴식지가 된다.
세연정(洗然亭)
한 칸에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낙서재·무민당 및 세연정에는 모두 판호(板戶)를 위아래로 달아 그를 열면 기둥 위로, 처마 및 땅으로 드리우게 되고 닫으면 마주 합하여 판옥(板屋)이 되어 바람과 비를 방지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세연정이 높이는 한 길이며 섬돌 높이 또한 한 길 남짓하다.
연못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에서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개울물과 합하여 이곳에서 방지(方池)를 이루고 있다.
자못 넓어서 동서로는 6, 7간이 되고 남북으로는 이보다 배나 된다.
굴곡된 지형을 따라 석축을 하고 암석을 의지하여 대(臺)도 만들고, 혹은 흙을 쌓아 제방을 만들기도 하면서, 돌아가며 짧은 제방이 있는 곳에서는 산차(山茶)와 영산홍(瑛山紅)을 심었다.
봄이면 꽃잎이 어지럽게 떨어지는가 하면 푸른 이끼 또한 하나의 비단철을 이루고 있다. 부용에서부터 장송이 울창한 사잇길을 따라오게 하면 다소 평원한 제방둑에 이르게 된다. 정자 서쪽 제방 동쪽에는 겨우 한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고, 그 중앙에 엎드린 거북이와 같은 암석이 높여 있다. 그 등에 다리를 가로로 가설하였기에 비홍교(飛虹橋)라 하는데 이 다리는 상루교(上樓橋)와 이어지고 있다. 그 남쪽에는 혹약재연(或躍在淵) 등의 일곱 암석이 있으므로, 정자 서편의 편액을 칠암(七岩)이라 하였다(중앙은 세연, 남쪽에는 낙기(樂肌), 서쪽에는 동하(同何), 동쪽에는 호광(呼允)이라 하였음). 암석이 모두 정결하고 말쑥한 데다 더러는 제방을 지고 물을 마시고 더러는 흙을 이고 있어 소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수원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굽이굽이 둘러친 그 경관이야말로 이 모두가 인공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장송의 그늘은 수면 따라 움직이고 암석을 가리고 있는 단풍잎, 참나무 잎이나 푸른빛을 띤 수칙의 물속에 비치는 기암들 모두가 어느 것도 정결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홈통 따라 흐르는 물을 보노라면 외계를 잊게 한다.
남쪽 증앙에는 암석이 어지럽게 모여 조그마한 섬을 이루고 있는데 송죽(松竹)이 그 위에 자라고 있다.
연못 북쪽에는 대소가 비슷한 섬을 구축하였고 동쪽 좌우에는 방대(方臺)를 구축한 것이 각기 3층으로, 이를 이름 하여 동서지(東西池)라 한다.
남쪽 봉우리 위에 있는 석대(石臺)도 이름 하여 옥소대(玉簫臺)로서 그림자가 못 속에 거꾸로 비치고 있다. 정자 위로는 미전과 석애를 쳐다볼 수 있고 동으로 장재도를 대하고 있으며 전후좌우로는 푸른빛이 쌓여 있고, 그 위에 황윈포는 평답(平潭)을 이루고 있는데, 앉으면 소나무 숲속에 묻히게 되어 장재도를 왕래하는 고깃배만 은연히 보일 뿐이다.
하늘빛, 바다 빛이 천태만상으로 변하기 때분에 정자 동쪽에 한간의 조그마한 다락을 지어 호광(呼光)이라 하고, 공은 매양 난간을 의지하고 조망(挑望)에 심취하였다는 것이다.
공은 늘 무민당에 기처하면서 닭이 울면 일어나 경옥주(瓊玉酒) 한 잔을 마신 다음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앉아 자제들의 강학을 살폈으며, 아침식사 뒤에는 사륜거(四輪車)를 타고 풍악이 뒤따르는 가운데 혹은 곡수에서 놀고 혹은 석실에 올랐다가 날씨가 정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을 향해 곡수의 후록을 거쳐 정성암에서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학관은 매양 주찬(酒饌)을 갖추어 소거(小車)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게 되면 제자들이 시립하고 모시는 가운데 못 가운데에 작은 배를 띄워 남자아이로 하여금 채색옷을 입고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지은 바 어부수조(漁父水調)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면 당상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된다.
어린아이 수명으로 하여금 동서 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에서 춤을 추는데 그림자는 못 속에 떨어진다. 음절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고 혹은 칠암에서 낚시를 드리우기도 하고 혹은 동서도(東西島)에서 연꽃을 따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와서는 촛불을 밝히고 야유를 하는데 질병과 걱정할 일이 없으면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하루도 즐겁게 놀지 않으면 심성을 수양하며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은 일찍이 섬 속의 모든 경치를 평하기를, 석실을 신선(神仙)에 비교한다면 그중에 제일이 되고, 세연정은 번화하면서도 청정한 낭묘(廊廟)를 겸비한 기구이며, 곡수는 정결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자라고 하였다.
학유공은 늘 가사를 간검(看檢)하기 위해 육지에 있다가 수개월이 되면 공을 찾아뵈었다. 이때 공은 그가 온다는 말을 듣게 되면 격자봉의 정자 모든 곳에 사람을 보내어 북을 울려 서로 호응케 하는가 하면 노복(奴僕)을 시켜 황원포에 나와 맞이하게 하였다.
학유공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큰 소리로 공의 안부를 묻고는 달려가 골짜기로 들어가노라면 공은 벌써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맞이하였다 하니 그 사랑과 연모의 정이 돈독하기 이와 같았다.
공은 모든 첩의 자식들을 사랑함에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선조의 유업은 감히 서손들에게 멋대로 나누어주지 않았고 나누어 준 것은 모두 공이 자영한 것들이었다.
임종시에 학관이 시종토록 가장 오래 모셨다는 이유로 학관이 사랑을 받았지만 부용동을 개척하는데 노고가 있다 하여 이것을 주었으나, 혹은 그 사이에는 남모르는 뜻이 개재되었다는 말을 하는 자도 있었다.
기장(機張)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산으로 땔나무를 하러 갔던 어린 종이 도가류(道家流)로 보이는 한 어른이 암석 위에 걸터앉아 시 한수를 써주며, 돌아가거든 너의 상사上舍)에게 드리라는 말에 어린 종은 이를 받아가지고 있다가 잠깐 사이에 그의 소재를 잃어버렸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봉래산 한 골짜기 남쪽 땅에 떨어지니
절경을 감상하노라면 천하에서 드문 곳임을 알게 된다네.
산은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북녘으로부터 에웠고.
개울물은 옥대가 되어 동쪽을 향해 돌아 흐르네
숲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은 석애에 반사하고,
연기 속에 내리는 이슬비는 산야에 자태를 새롭게 한다.
성긴 숲을 마주하고 앉아 한 수의 시를 짓노라니.
솔솔 부는 바람에 초의를 움직인다.
공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두루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으나, 부용에서 본 경관은 한마디로 이 시에서 그린 경관과도 같았다.
평일에도 사고가 있지 않으면 일찍이 세연정에 나와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나가지 않았는데 노비가 연못가에서 세연정 안에서 나는 바둑 놓는 소리를 분명히 듣고 공이 나와 놀고 있는가를 생각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시중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용에 돌아가 보니 공은 낙서재에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그 일을 아뢰었던 바 공이 사람을 시켜 곧바로 가서 사실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모든 장식품이 그대로이고 사람의 자취는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에 놀라고 있는데 공은 말하기를
「이는 곧 산신령의 희극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이였다.
부용은 비록 골짜기가 깊어서 나무는 많아도 원래 호랑이와 표범은 없었는데 갑자기 포효하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공이 축문을 지어 산제를 지낸지 며칠 뒤에 나무를 하던 자가 암석에 눌려 죽은 호랑이를 보았다는 말에 가서 확인한즉 과연 그러하였다.
尹柱玹 朴浩培 共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