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3:03

법륜(승려)/윤회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법륜(승려)
{{{#!wiki style="margin:-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 파일:법륜(승려) 투명.svg 법륜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활동 윤회관 정토회 즉문즉설
}}}}}}}}} ||

1. 개요
1.1. 윤회설 포용
1.1.1. 괴로움을 없애는데 하등 중요하지 않은 질문1.1.2. 후대에 올바르게 이해될 수도 있는 윤회와 전생1.1.3. <정토불교대학 교재(2021)>
1.1.3.1. 저서 <실천적 불교사상(2001)>
1.1.4. 불교의 환생1.1.5. 불교 안에 들어온 문화적인 요소1.1.6. 현실에서 세가지 불교1.1.7. 결론1.1.8. 제언
1.2. 윤회설 배제
1.2.1. "고락윤회" 개념 제시1.2.2. 이분법적 구도1.2.3. 결론

1. 개요


다중 관점이 적용되는 문단입니다.

이 토론에서 다수 의견을 병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본 문단에서는 다중 관점이 적용됩니다. 이 방침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먼저 해당하는 토론란에서 의견을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법륜스님 즉문즉설 제439회 《윤회에 대하여 》

법륜의 윤회관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 그의 윤회관을 편의상 윤회설 포용과 윤회설 배제의 두 차원으로 구분하도록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항목에서는 법륜이 주장하는 윤회관이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법륜이 윤회설을 포용하는지 배제하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할 뿐이다.

1.1. 윤회설 포용

법륜이 윤회설을 포용하는지, 배제하는지를 볼 때 어떤 것으로부터 윤회설을 포용하고 배제하는지 명확히 해야한다. 사실 이를 명확히 하면 포용도 배제도 양립가능한 주장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법륜은 윤회를 불교의 문화로서, 혹은 우리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후대에 시대가 바뀌면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있는 이론으로서 윤회를 포용한다. 하지만, 법륜은 현재 우리가 윤회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실제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현실적인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불교의 핵심교리로서 윤회를 배제한다.[1]

법륜의 윤회관에 대한 위와 같은 요약이 근거가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이를 뒷받침하는 법륜의 말과 글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1.1.1. 괴로움을 없애는데 하등 중요하지 않은 질문

[...]
이렇게 살펴보면 ‘운명이 과연 정해져 있느냐, 정해져 있지 않느냐’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정해져 있다면 정해져 있는 대로 갈 테니 괴로울 일이 없고, 정해져 있지 않다면 내가 하는 만큼 만들어가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거나 안 정해져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욕심을 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리석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사람이 환생하거나 환생하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환생하느냐, 안 하느냐?’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환생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환생할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그런데 환생한다고 해놓고는 또 개중 몇 명만 환생한다고 하니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환생한다고 하면 ‘지금 생이 어떻든 다음에 또 태어나니까 별 걱정 없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 환생을 안 한다고 하면 ‘환생을 안 하니까 지금 생이 어떻든 별 걱정 없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천당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예요.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쁜 일을 하면 지옥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당 간다고 하면, 그냥 좋은 일을 하면 되잖아요. 아무런 걱정할 게 없습니다. 천당 가고 싶으면 좋은 일을 하면 되고, 나쁜 일을 했으면 지옥 갈 각오를 하면 돼요. 그런데도 왜 고민이 될까요?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 때문에 인간의 고뇌가 생기는 게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해놓고 지옥을 안 가겠다고 버티고, 천당 갈 짓을 안 해놓고 천당에 가고 싶어 하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욕심입니다. 돈을 빌려놓고는 안 갚으려 하고, 저축도 안 해놓고는 목돈을 받으려고 하니까 괴로운 겁니다. 돈을 빌리거나 저축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빌렸으면 갚으면 되지 왜 그게 괴로울 일이며, 저축을 안 했으면 목돈 탈 생각을 안 하면 되지 왜 그게 괴로울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저축하면 복을 받고, 빚을 지면 재앙을 받는 것처럼 생각해요. 사실 그것과 괴로움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마찬가지로 운명이 정해져 있든지 말든지, 천당과 지옥이 있든지 없든지, 다시 태어나든지 말든지, 그런 건 괴로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꾸 그런 얘기를 하면 그냥 웃으셨어요.

‘사람은 환생을 합니까, 안 합니까?’
‘천당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부처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네가 괴로워하는 문제와 그 질문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제가 이런 뜻으로 법문을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스님은 내생을 부정한다’
‘스님은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건 부정하느냐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질문 자체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간다면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뭐가 걱정이에요? 어떻게 하면 천당에 가냐고 물었더니 어려운 사람을 돕고 좋은 일을 하면 천당에 간데요. 그러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좋은 일을 하면 되잖아요.
[...]
그런데 여러분은 늘 천당과 지옥이 있느냐, 내생이 있느냐, 윤회를 하느냐, 이런 걸 두고 질문을 합니다. 돈을 빌려놓고는 안 갚겠다는 심보, 지옥 갈 짓을 해놓고는 천당 가고 싶어 하는 욕망, 이런 것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질문자도 ‘정해진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 때문에 지금 괴로운 게 아니에요. 정해진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는 생년월일시가 운명을 관장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이 명부를 갖고 운명을 관장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지은 업이 운명을 관장한다고 말하듯이 세상에서는 운명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것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으셨어요.
[...]
"사주팔자,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정말 있는 건가요?"

법륜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회를 하는지 여부는 지금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윤회를 하는지 여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수행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지금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법륜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를 하는지 여부가 지금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것이 다른 상황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는 그것을 인정 혹은 부정하는 것과는 별개 층위의 논의이다. 하나는 효용성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고 하나는 존재 유무와 그에 대한 믿음에 대한 문제이다. 법륜은 그런데 여러분은 제가 이런 뜻으로 법문을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스님은 내생을 부정한다’, ‘스님은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라고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본인의 말을 오해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1.1.2. 후대에 올바르게 이해될 수도 있는 윤회와 전생

[...]

정말로 전생이 있을까요?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어요.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수정란이 초기 분열을 할 때, 그 수정란을 두 쪽으로 내면 똑같은 두 사람을 만들 수 있고, 네 쪽을 내면 똑같은 네 사람을 만들 수 있어요. 16쪽을 내면 아예 신체적으로 유전형질이 동일한 존재를 그 수만큼 똑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이 16명의 존재를 과연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

이런 사실을 윤회와 전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요. 윤회와 전생으로 설명한다면 그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실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시대에서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이해한 내용인 거예요. 경전의 내용을 볼 때 경전을 기록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생각하며 봐야 합니다. 그중에서 올바른 것을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거예요.

경전 속 비과학적인 요소를 해석하는 관점

부처님의 말씀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서 어떻게 이해가 잘못되었는지를 살펴야 해요. 또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안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래 부처님 말씀에는 없지만 이런 의문이 많이 제기되니까 이런 설명을 만들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설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전생에 대해 부처님한테 물으면 부처님은 아마 ‘그런 건 놔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늘 ‘이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느냐’, ‘왜 저 둘은 다르냐’ 이런 것에 대해 궁금해하니까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의 말씀에 조금 덧붙여서 내용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잘못 이해했다고 볼 수도 있고, 원래의 말씀에 조금 덧붙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가능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 뭔가 설명을 덧붙이면 왜곡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논장(論藏)을 새로 만들어서 해석을 했어요.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아예 후대에 해석하거나 덧붙인 내용을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흘러온 것이 불교의 역사라는 거예요.

진실이 무엇인지 탐구하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믿을 때는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면 믿음이 흔들리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유일한 주안점은 ‘진실이 무엇인지 탐구하라’ 이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침이기에, 우리는 불교 경전마저도 연기법(緣起法)과 중도론(中道論)에서 벗어나면 재검토해야 합니다. 경전 내용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사람들이 남긴 글이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선택은 이겁니다. 정토대전 속에 복잡한 교리에 대한 설명은 넣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넣는다 하더라도 잡다한 설명은 간명하게 정리를 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현실에 맞게 해석을 해야겠죠. 그러나 우리가 임의로 해석하면 안 되고 원뜻에 맞게 해석해야 합니다. 원뜻에 근거를 달아서 ‘우리는 이 내용을 이렇게 해석하고 이해한다. 근거는 이렇다’ 하는 것을 만들어서 넣으면 돼요.

아무리 해석하려고 해도 의미가 애매하면 내용을 안 싣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새로 고치면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후대에 시대가 바뀌면 올바르게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도 안 맞고, 경험되어지지도 않고, 과학적으로도 안 맞는 내용은 틀렸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내용 자체를 정토대전에서 빼야 해요. 혹시 논쟁적인 질문을 하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그 문제에 논쟁하기보다는 지금의 내 문제에 집중합시다. 그런 학문적 논쟁이라면 우리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는 잘 모른다고 외면하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문제는 굳이 ‘있다, 없다’ 하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현실적인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공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에서 수행할 때 탐구해야 할 과제는 아닙니다.”

[...]
"경전 속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위의 법륜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윤회를 현재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시대가 바뀌면 올바르게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윤회의 개념을 새로 고치면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다. 또한 윤회는 우리가 실제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현실적인 도움이 안 된다. 이러한 세가지 이유 때문에 정토회의 소의경전(所依經典)[2]에서 배제하자고 하는 것이지 윤회를 부정해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3] 오히려 윤회를 후대에 시대가 바뀌면 올바르게 이해될 수도 있는 이론이라고 함으로서 윤회를 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글은 마치 현재 항목과 같은 학문적 논쟁을 예견한 듯 하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1.3. <정토불교대학 교재(2021)>

[...]

1)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
과거생과 현재생, 현재생과 미래생이 겹쳐 삼세가 서로 겹쳐 있다는 것이 삼세양중인과이다. 노사란 삼생을 두고 인간이 윤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이는 인도의 전통적인 윤회사상과 불교사상을 결합시켜 불교를 설명한 방식이다.

2) 찰나 연기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는 그 찰나찰나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수행적 관점에서 지금과 지금 이전, 지금 이후를 한 생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의 행위, 생각은 하나의 생生과 같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곧 한 생이다. 한 생각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느냐, 한 생각이 일어나서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사라지느냐, 거기에 따라서 내가 어떻게 움직여지느냐, 이것을 분명하게 규명해 둔 것이다.

[...]
<정토불교대학 교재(2021)>, 근본불교 2주차, 제3강 십이연기十二緣起, 1.연기적 사고, p.25
또한 그가 지도법사로 있는 정토불교대학의 교재에서 윤회가 삼세양중인과라는 개념을 통해 불교 교리를 설명한 방식 중 하나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1.1.3.1. 저서 <실천적 불교사상(2001)>
[...]

윤회의 바퀴는 돌고 돈다

[...] 그러므로 업에 의한 윤회를 믿지 않고 현생의 즐거움만으로 인생을 종결지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여름 한철 살고 죽는 곤충은 사계절을 알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도 윤회를 알지 못한다. 내일이 있고 10년 후 가 있기에 오늘 고생이 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듯, 미래생이 계속되기에 현생을 올바르게 열심히 사는 의미가 존재한다. 윤회를 모르는 자는 하루를 설계하고 사는 하루살이와 같이 현생을 헛되이 삶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다같이 망친다. 보살이 전생에 수행을 할 때 한 마리의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한마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것도 모두 내일을 위한 오늘의 선행인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자

나의 운명은 신에 의해서도, 전생의 업에 의해서도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좌우되지도 않는다. 오직 업의 힘에 따라 좌우된다.

파일:윤회관_법륜.png

그런데 업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며 변화한다. 상놈의 업도, 양반의 업도, 불변하는 근본 종자가 따로 없는 것, 단지 조건에 따라 이루어진 현상일 뿐이다.

[...]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 정토출판, 개정판 5쇄, 2001. 2. 2, p.76, p.77, p.78
또한 그는 2001년도에 발행된 그의 저서에서 생과 사를 반복하는 윤회를 설명하고 있다. 혹자는 이 책이 너무 오래되었다고 그 사이에 법륜이 모종의 사상적 전환을 겪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위의 정토불교대학에서 이론으로서 소개하고 있는 모순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처럼 전기, 후기로 해당 인물의 사상적인 지위를 나뉠수 있으려면 그 위상에 걸맞은 근거가 뒷받침 되어야한다.

1.1.4. 불교의 환생

[...] (윤회는) 아무 관계가 인생살이에 없는 문제에요. 이런거를 헛생각한다고 해요. 망상을 피운다. 헛생각하면서 현재 인생을 낭비한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생이 있다 없다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불교를 전연 모르는 소리이다.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없느니 뭐 이런 얘기하는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거랑 차이가 뭐가 있어요? 다 똑같은 얘기지. 천당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증명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겠어요? 내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겠어요? 이런 거를 뭐라고 한다? 믿음에 속한다.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줄 아는 거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아는데, 있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없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거에요 이거는. 그러고 설령 있든지 없든지 아무 인생살이에 상관없는 일에 속한다. 그러니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불교하고는 도무지 관계가 없는 얘기다.
왜 불교에서 이런 얘기가 많습니까. 불교가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인도에서 왔지. 인도 사람은 다 사람이 죽으면 내생이 있다고 하는 그런 문화에요. 그러니까 불교가 인도에서 오다보니 같이 묻어가온거에요. 이거 자체는 불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거에요. 이거 자체는 불교하고 관계가 없다. 그럼 불교는 윤회 안한다는 얘기냐 그런 얘기가 아니다. 윤회 한다 안한다는 인도의 전통 문화다 이말이에요. 불교가 인도에서 오다보니 같이 묻어 왔다 이런 얘기에요.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가장) 바깥에 있는 옷을 가사라고 해요. 가사라는 말은 인도에서 스님들이 입던 옷이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제가 또 (가사 안에) 입고 있는 이 옷은 또 뭐라고 하냐. 장삼이라고 해요. 이건 어디서 왔냐. 중국에서 왔어요. 이건 중국에서 옛날에 도사들이 입던 옷이에요. 그럼 요 안에 있는 (장삼 안에 있는) 요건 뭐라고 하냐. 요건 승복이다. 근데 요건 어디서 왔냐. 요건 한복에서 왔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승복이라고 정장을 해서 딱 나오면 삼국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요게 인도로 부터 중국을 거처서 한국으로 왔다. 이것을 반증한다 이말이에요.[...]
그런 것처럼 이 윤회 사상은 인도로부터 온 힌두교 사상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와서 주객이 전도 돼서 뭐가 돼버렸다? 불교자리를 이게 떡 차지하고 있어서. 마치 윤회를 인정하면 불교신자고. 윤회를 인정 안 하면 불교신자가 아닌 것처럼 지금 이런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그래서 이것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이거는 인도의 사상이고. 이건 그냥 두고. 불교는 어리석음을 깨치면 법의 이치를 올바르게 알면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러니까 종교인이라 그러면 이치에 더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종교인이다 이 말이에요.
법륜스님 즉문즉설 제382회 《불교의 환생》 (2010), 3분 30초 부터
위의 강연에서도 법륜은 분명히 불교가 불교는 윤회 안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라면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못박고 있다. 다만 그는 윤회를 하는지 안하는지 가지고 따지는 것이 석가모니가 진리로 설한 불교 교리중 핵심 가르침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불교를 설명하는 핵심교리로서 채택하지 않겠다는 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1.1.5. 불교 안에 들어온 문화적인 요소

[...]

불교 안에 들어온 문화적인 요소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세상을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이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 교리 역시 이렇게 복잡해졌고, 대승의 가르침이 새로 나오자 당시 사람들에게 다시 파격적으로 다가간 겁니다. 대승이 또 복잡하게 변해가니까 중국에서 일어난 선사의 가르침이 또다시 사람들에게 파격적으로 다가간 거예요.

소승 불교의 교리 해설을 보면, 어떤 설명에서도 윤회 사상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참신하게 교리 설명을 해도 대부분의 학설이 사람이 죽어서 윤회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불교 교리가 체계화되는 과정은 곧 불교가 인도 사람이 믿는 윤회를 수용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이 가르치셨던 ‘무아’와 ‘무상’은 윤회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윤회를 받아들여야 인도에서 불교가 정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교가 앞으로 기독교 믿음이 강한 문화권이나 무슬림 지역에 들어가려면 신성을 부정하고는 매우 어려운 것과 같아요. 유럽에서는 지금 자체적으로 비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불교를 바로 얘기해도 되지만, 중세처럼 기독교 문화가 아주 강한 상황에서 불교를 전파하려면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죠. 마치 천주교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제사를 안 지낼 수 없었던 것처럼요. 기독교는 이미 조선 사회에서 유학이 무너지는 시기에 들어왔으니까 제사를 안 지내고도 전파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들어오던 시기에는 제사를 안 지내고는 전파가 불가능했거든요.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 결국 천주교는 제사를 수용했습니다.

이런 것처럼 불교가 인도에서 살아남으려면 윤회를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거기에 맞게끔 교리 체계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석을 읽어봐도 윤회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예 경전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불교 경전의 내용에는 윤회를 수용해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교훈적인 얘기도 있고, 지금 여기 깨어있어서 해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고, 이렇게 내용이 모순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전에는 아들이 죽어 슬퍼하는 여인에게 부처님께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가져오라’ 하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여인이 겨자씨를 구하다가 어떤 집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없다는 것을 탁 깨달아서 ‘겨자씨를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해설한 주석서를 찾아보면 ‘그 여인은 전생에 어떤 관계였고, 그래서 깨달았고, 내생에는 어떻게 됐다’ 이렇게 설명이 나와 있거든요. 법구경 한 줄 한 줄이 다 그런 식으로 주석서에 해석되어 있습니다. 경전의 많은 부분이 전생 얘기이고, 신이 와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인도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인도에서 신은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신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경전에도 좋은 신, 나쁜 신 등 늘 신이 등장합니다.

이런 문화적인 요소를 정토대전에도 넣을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고수를 불교 음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인도 음식이거든요. 오신채를 안 먹는 것이 불교문화로 인식되고 있는데, 사실은 인도의 문화입니다. 그냥 하나의 문화로 생각하면 괜찮은데 철학으로까지 의미 부여를 해서 해석을 하거든요. 백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문화로 수용하고 갈 건지, ‘진짜 지옥이 있고, 지옥 중생이 천상으로 천도가 된다’ 이렇게 의미부여를 해서 갈 건지 선택을 해야 해요. 고수나 오신채, 백중 등이 문화적 충돌이라면, 윤회는 인도의 전통 믿음과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우리가 지금 같이 안고 있습니다. 문화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고 어느 정도까지 배격할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대로 다 수용하면 새로운 불교라고 할 게 없고, 다 배격하면 세상 사람들이 불교라고 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중도 안 지내고, 윤회도 안 믿고, 교리도 부정하면, 그런 것을 불교라고 알고 있던 사람은 ‘불교 아니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죠. 여기서 중도적인 선택이 필요합니다.

[...]

초기에 원칙적으로 철저하게 배격을 하더라도 대중화가 되면 결국은 수용이 됩니다. 대중은 문화적인 요소를 요구하기 때문에 계속 배격을 하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문화를 수용해 줘야 대중이 참여하지, 문화를 배격해 버리면 대중은 참여할 공간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문화를 잘못 수용하면 완전히 종교적으로 가게 되는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
"불교 교리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위 글에서 백중, 윤회는 모두 문화적인 요소에 해당하고 교리는 이러한 문화적인 요소를 다루는 교리를 뜻한다. 여기서 법륜은 대중은 문화적인 요소를 요구하기 때문에 계속 배격을 하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법륜은 윤회를 포함한 문화적인 요소를 계속 배격하지 말고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할 것임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그 다음에 문화를 잘못 수용하면 완전히 종교적으로 가게 되는 문제가 또 발생한다는 말과 매끄럽게 연결된다. 즉, 법륜은 과거에는 불교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윤회가 핵심적으로 사용됐었지만 지금은 핵심교리가 아닌 불교의 문화적 요소에 포함시키고 포용해야한다고 한다. 이런 입장과 일관되게 백중재와 천도재 등 윤회설이 반영된 재례의식도 정토회의 공식적인 행사로 시행하고 있다. # #

1.1.6. 현실에서 세가지 불교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661회 현실에서 세 가지 불교

법륜은 현실에서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있다고 주장한다. 위 영상 6:02을 보면 그가 이끄는 정토회에서는 그 중에서도 수행으로서의 불교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종교로서의 불교나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없는 것은 아니고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놓고 종교로서의 불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고 ( 7:24)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잘못하면 종교로서의 불교나 철학으로서의 불교에 배타적일 수 있으니 그러지 말아야하고 이를 경계해야한다고 한다.( 8:50). 따라서 생과 사를 반복하는 윤회는 철학, 수행으로서의 불교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로 종교로서의 불교의 측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배타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주장을 도출할 수 있다.[4]

1.1.7. 결론

법륜은 윤회를 불교의 문화로서, 혹은 우리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후대에 시대가 바뀌면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있는 이론으로서 윤회를 포용한다.

1.1.8. 제언

여러 출처를 통해 법륜이 기존의 윤회라는 단어를 고와 락이 반복되는 현상으로 재정의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항목은 기존의 생과 사를 반복하는 윤회에 대한 법륜의 관점에 대해 조망했기 때문에 그가 새롭게 주장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못했다. 법륜은 고와 락이 반복되는 현상을 불교 교리의 핵심에 두고 이를 통해 불교의 진리, 즉 불법(佛法)을 21세기에 맞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교리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을 담을 <정토대전>이라는 잠정적인 이름을 가진 소의경전(所依經典)은 아직 집필 중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의 교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새로운 교리에 대해서 기존의 교리와 맞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전통에 호소하는 오류에 속한다.[5] 불교에서 중시하는 연기(緣起), 중도(中道) 등의 관점에서 새로운 교리가 모순되지 않는지, 현대사회의 인류가 쌓아올린 지혜와 모순되지 않는지, 그리고 대중의 현실속에서의 실질적인 경험과 모순되지 않는지를 살필 때 비로서 합당하고 건설적인 비판이 될 것이다.

1.2. 윤회설 배제

법륜은 타인의 윤회관을 존중하며 그가 이끄는 정토회에서는 윤회 관련한 종교의식을 문화로서 수용하였지만, 동시에 법문에서는 전통적인 불교 윤회관이 아닌 법륜의 독자적인 윤회관을 설파한다. 그는 '고통과 즐거움이 반복됨'을 가리키는 "고락윤회"란 개념을 제시한 후, "생사윤회"가 아닌 "고락윤회"가 곧 진정한 불교, 진정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법륜은 윤회라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직접적으로 단정짓지는 않았지만, 윤회와 전생 등의 개념으로는 자연현상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윤회에 기반한 해석은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하며 법륜과 정토회의 불교관에서 배제하였다.

1.2.1. "고락윤회" 개념 제시

예를 들어 윤회(輪廻)라고 하면 우리는 사람이 죽은 뒤 천상에 태어나거나, 개나 소나 말 같은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건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용어는 같이 쓰지만 개념이 다릅니다. 사람의 심리는 욕구가 충족되면 즐거움이 일어나고,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늘 되풀이돼요. 이처럼 고(苦)와 락(樂)이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2020.1.31 인도 ▶︎ 한국 도착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이유”

법륜은 초기 불교 교리 해석(이른바 "근본 불교")과 더불어, 공성(空性)을 논하는 대승의 반야(般若) 사상과 돈오(頓悟)를 추구하는 선불교(禪佛敎) 등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6][7] 반야 사상은 승의제(勝義諦)인 공성을 주로 다루므로 윤회와 같은 세속제(世俗諦)를 자세히 다루지 않으며,[8] 선불교 또한 즉각적인 깨달음인 돈오를 추구하기에 전생이나 내생 등 윤회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공통점이 있다.

1.2.2. 이분법적 구도

지엽적인 개념 vs 핵심적인 개념

법륜은 전통적인 경전적, 사전적 의미의 생과 사가 반복되는 윤회 개념이 힌두교 사상, 브라만교 사상, 인도 전통문화에 기원을 두기 때문에 생과 사가 반복되는 윤회를 지엽적인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본인이 주창한 "고락윤회", 즉 고통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윤회야말로 진정한 석가모니의 가르침, 진정한 불교로 보았다.
그런 것처럼 이 윤회 사상은 인도로부터 온 힌두교 사상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 와서 주객이 전도 돼서 뭐가 돼버렸다? 불교자리를 이게 떡 차지하고 있어서. 마치 윤회를 인정하면 불교신자고. 윤회를 인정 안 하면 불교신자가 아닌 것처럼 지금 이런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 그래서 이것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이거는 인도의 사상이고. 이건 그냥 두고. 불교는 어리석음을 깨치면 법의 이치를 올바르게 알면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러니까 종교인이라 그러면 이치에 더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종교인이다 이 말이오.
법륜스님 즉문즉설 제382회 《불교의 환생》 (2010)
이 세상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는데,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면 즐거움이 생기고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 바람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며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나고 죽는 것의 반복이 아니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며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우리가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자동으로 따라와서 돌고 돌 수밖에 없는 겁니다.
2016.2.5 (인도 31일째) 인도인 활동가 수련
예를 들어 윤회(輪廻)라고 하면 우리는 사람이 죽은 뒤 천상에 태어나거나, 개나 소나 말 같은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건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용어는 같이 쓰지만 개념이 다릅니다. 사람의 심리는 욕구가 충족되면 즐거움이 일어나고, 욕구가 충족이 안 되면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늘 되풀이돼요. 이처럼 고(苦)와 락(樂)이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해탈의 개념도 다릅니다. 다시는 안 태어난다는 개념이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면, 고락(苦樂)의 반복이 사라져 마음이 늘 고요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에요.
2020.1.31 인도 ▶︎ 한국 도착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된 이유”

1.2.3. 결론

법륜은 윤회를 주관적인 믿음의 영역으로 분류하며 타인의 윤회관을 존중하였고 그가 이끄는 정토회에서는 백중재, 천도재 등 윤회설이 반영된 종교의식을 일부 수용하는 등 경우에 따라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또한 아직 출판되지 않은 정토회 소의경전(所依經典)인 《정토대전》에서 윤회 관련한 부분을 제외할지를 고려하는 등 논쟁 자체를 회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전반적으로 타인의 윤회관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반발과 논쟁을 최소화하려는 실용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한편 법륜은 독자적인 불교관을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법륜이 이끄는 정토회에서도 신도행자[9]들에게 법륜의 주장을 가르친다. 법륜은 자신의 윤회관을 대중이 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고락윤회"라는 기존 개념과 유사한 어휘를 사용한 대체 개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자신의 윤회관과 전통적인 윤회설과의 양자(兩者) 구도를 설정하고 후자를 비과학, 비합리로 평가하여 배제하였다.

[1] 그의 주장이 이렇기 때문에 그는 더 나아가 윤회하는지 하지 않는지 궁금해하거나 논쟁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아니고 오히려 수행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한다. 애초에 부처님도 14 무기를 말씀하시면서 그런 거에 집착하지 말라 하셨다. [2] 신행(信行)을 비롯하여 교의적(敎義的)으로 의지하는 종단의 근본경전. [3] 정토회는 현재 가칭 '정토대전'이라 하는 소의경전을 집필 중인데, 아직 집필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륜이 배제하자고 하는 것도 실제로 배제가 될지, 아니면 보조적인 내용으로 제한적으로 실릴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사실 이런 식으로 출간되지도 않은 저작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적절한 비평이 되기 어렵다. [4]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현 항목에서는 법륜이 종교/철학/수행의 측면으로 불교를 조망한 것이 교리상 자의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윤회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를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 논점이다. [5] 애초에 기존 교리와 같았으면 새롭다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다. [6] "한 번 윤회하고, 두 번 윤회하고, 이런 표현을 자꾸 쓰는데, 부처님께서 사용한 윤회란 단어는 죽어서 소 되고 말 되고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런 용어 자체를 부정해 버렸습니다. 금강경에 일상무상분에서 이 네 가지 단계를 모두 부정해버렸어요. 제법이 공한 줄을 알아버리면 단계란 것이 없다는 겁니다. ‘무슨 한 단계 올라가고, 다시 한 단계 올라가고 그러느냐?’ 하는 문제 제기를 한 거예요. 꿈을 꾸다가 눈을 뜨면 ‘꿈이구나!’ 하고 끝이지, 무슨 1단계 꿈을 깼다가 2단계 꿈을 깼다가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건 아직 꿈을 덜 깼다는 얘기라는 거예요. 이렇게 근본 교리를 공부해보니까 어때요? 역시 대승불교 배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2020.12.17. 정토대전 회의, 행복한대화 온라인 즉문즉설 “부자가 되고 싶어요” [7] “인도에는 요가 등 수많은 것에 오래 전부터 단계론이 존재해 왔습니다. 불교도 단계론의 영향을 받아서 사향사과(四向四果) 단계론이 나왔잖아요. 불교 초기에는 이런 단계론을 부정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에도 단계론이 나오니까 대승에서 단계론을 다시 부정합니다. 금강경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이 바로 이런 단계론을 부정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대승 후기에 가면 또다시 보살 52위(五十二位)라고 해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 (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이렇게 52단계론이 나옵니다. 나중에 선불교가 나오면서 또다시 단계론을 일거에 부정해 버렸죠." 2021.7.15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 "불교 교리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8] 불교에서 진리를 두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는 이제설(二諦說)에 따르면, 진리는 세속의 진리인 세속제와 궁극적 진리인 승의제로 구분된다. 《중론》에 따르면 승의제를 획득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지만, 승의제는 세속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세속제와 승의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9] 정토회에서는 신도, 신자라는 단어가 아닌 수행자 혹은 행자라는 표현을 쓰거나 아예 회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통해 불교를 신을 믿는 신앙으로서의 종교가 아닌, 삶의 가르침으로서의 종교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11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11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