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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백철 白喆|Baek Che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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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6년 8월 2일 ([age(1956-08-02)]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동 | |
학력 |
서울고등학교 (
졸업)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
현직 | 무직 |
당적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경력 |
평화민주당
영등포구 지구당위원장 신정치개혁당 영등포구 갑 지구당위원장 통합민주당 영등포구 갑 지구당위원장 한나라당 영등포구 갑 지구당위원장 자유민주연합 강서구 갑 당협위원장 서울부동산컨설팅 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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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2. 생애
2.1. 초반부
1956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태어났다. 서울고등학교,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2.2. 정치 경력
1985년 자신의 고향 영등포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으로 정계 입문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으며, 상당히 이른 축에 속한다. 3년 뒤에는 우리정의당이란 군소정당 당적[1]으로 출마하나 역시 낙선했다. 1988년 이후 잠시 평화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보이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선전 벽보를 보면 영등포구 지구당위원장까지 맡았다고 한다. 이후 새한당에서 영등포 조직책을 맡았다가 # 모종의 이유로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에 입당해 역시 지구당위원장까지 꿰차고 출마하나 역시 낙선했다. 5년 뒤 신한국당과 합당 직전에 통합민주당 영등포구 지구당위원장을 맡았으며, 1997년 한나라당에서도 잠시 맡았다. 아마 한나라당에 그대로 있었으면 당선됐을지도 모른다.[2]한나라당 탈당 후 2000년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도 출마했으나 조금 높아진 득표율로 역시 신기남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2000년대에는 충청권 보수정당 소속으로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제외한 모든 선거에 출마하나 딱히 나아지지 않는 득표율로 계속 낙선했다. 자유민주연합 강서구 갑 지구당위원장도 지냈으나 당이 당이고 2000년대에는 자민련이 서서히 몰락하던 시기였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회창의 후광이 있는 자유선진당 소속으로도 소폭 상승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2012년에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출마하나 역시 낙선했다. 특이한 점은, 거의 모든 지역의 선진당 후보가 다 득표율이 떨어지던 상황에도 백철은 약간 올랐다는 것. 어쨌든 2010년대에도 그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2012년을 제외하고 2020년까지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있는데, 2014년과 2016년에는 본인의 최고 득표율을 경신했지만 이후로는 다시 하락세이다. 다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신기남보다는 득표율이 높게 나왔다. 물론 신기남이 강서구청역이 깔리는 지역구를 착각한 대참사도 한 몫 했다.
2020년에도 출마했으나 굳건한 양당 체제로 민생당, 정의당 등 원내 정당 소속 후보들도 힘든 상황에서 무공약 무소속 후보의 반전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결국 12번째로 낙선했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또 출마했다. 이번이 13번째 출마인데, 본인 나이가 나이인지라[3] 본인 말로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번에는 강서구가 아닌 양천구청장 선거에 출마한다고 한다. 근데 다른 지역도 아니고, 까치산역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까치산역은 양천구가 아닌 강서구에 속한다. 다만 이게 아예 터무니없는 행동은 아니다. 凹 모양으로 기형적으로 생긴 양천구 행정구역의 특성 때문에 까치산역은 신월 1,2,3동 주민들도 많이 이용하고 있기 때문. 어쨌든 보다 못한 시민이 여긴 강서구지 양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3월 25일에는 신정역(양천구 신정동 소재)에서 1인 유세를 진행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목동역 사거리에서도 드물게 보였다. 그렇게 지역구까지 바꾸면서 선거 운동에 임했으나 국민의힘 이기재 후보에게 밀리며 13번째 고배를 마셨다.
3. 컬트적 인기
강서구에서 20대부터 꾸준하게 선거에 출마했지만 수없이 낙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공보물을 보면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겠다'와 '전부 도둑놈이니 자신 같은 가난뱅이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4] 밖에 없으며, 국회의원이 되어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지지자에게 이익을 가져올지에 대한 설득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1만 표 정도는 받는 이유는 선거에 계속해서 나와서 강서구 주민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덕분에 어느 정도의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 역 출입구 앞에 혼자 서서 육성으로 "백철입니다." 하면서 큰 목소리로 선거운동을 하는데 강서구 (특히 강서구 갑 지역) 주민이면 모를 수가 없다. 선거 유세 차량 없이 홀로 자전거를 타면서 홍보를 하는 모습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나름 신선한 모양이다.4. 평가
선거에 여러 번 나온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정치적 경력이 없음에도 2014년, 2016년에는 1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한 것을 보면 기초의원으로 출마했다면 당선이 되었을지도 모르나, 국회의원이나 구청장 등 본인이 거물이 아닌 이상 당의 지지가 필연적인 선거에만 출마하다 보니 계속해서 낙선만 기록했다.[5] 무소속 기초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해 점차 체급을 올려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인물도 여럿 있음을 생각하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행보다.[6] 여러모로 뚜렷한 정책 없이 정치 혐오층과 일부 무당층의 표에만 기대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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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1988 | 정계 입문 |
[[정의평화당| |
1988 | 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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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88 - 1989 | 정당 해산 |
[[평화민주당| |
1989 - 1991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1 - 1992 | 탈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2 | 창당준비위원회 |
[[신정치개혁당| |
1992 - 1994 | 입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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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1995 | 합당[7] |
[[자유민주연합| |
1995 | 합당[8]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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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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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1997 | 입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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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합당[9]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7 | 탈당 |
[[자유민주연합| |
1997 - 2005 | 복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5 - 2008 | 탈당 |
[[자유선진당| |
2008 - 2011 | 입당 |
[[자유선진당| |
2011 - 2012 | 합당[10]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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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현재 | 탈당 |
- 근 35년간의 정치 경력 중 정당에서 18년, 무소속으로 17년을 지냈다. 무소속으로 많은 시간을 지냈기에 1980~1990년대의 정계 급변에도 당적이 많지 않다. 다만 이 또한 추정이 들어가 있어 정확한 것은 아니다.[11] 사실 한 정당에 있으면서 계속 활동해왔다면 어느 정도 당선 될 여지도 있었겠지만 상술한 허황된 공약 및 잦은 소속 정당의 변경으로 인해 지지 기반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어서 전혀 당선권과는 거리가 먼 것. 자민련에라도 쭉 있었더라면, 평판이 구린(...) 구상찬 보다는 당선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6.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영등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1,782 (5.26%) | 낙선(6위)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영등포 갑 |
|
2,599 (2.67%)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신정치개혁당| |
3,932 (4.16%) | 낙선(4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강서 갑 |
[[자유민주연합| |
4,938 (5.47%) | 낙선(3위) | |
2002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서울 영등포구청장 | 6,192 (4.42%) | 낙선(4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강서 갑 | 3,122 (2.52%)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자유선진당| |
4,574 (4.51%) | 낙선(3위)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6,328 (4.80%) | ||||
2014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서울 강서구청장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088 (7.08%)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강서 갑 | 8,309 (8.22%) | 낙선(4위) |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서울 강서구청장 | 15,740 (5.26%) | |||
2020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강서 갑 | 5,490 (4.84%) | 낙선(3위) | ||
2022 |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서울 양천구청장 | 2,433 (1.17%)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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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총선 (서울 영등포구) | 13대 총선 (서울 영등포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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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총선 (서울 영등포구 갑) | 16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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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지선 (서울 영등포구청장) | 17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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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 19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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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지선 (서울 강서구청장) | 20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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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지선 (서울 강서구청장) | 21대 총선 (서울 강서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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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지선 (서울 양천구청장) |
- 13번 출마 13번 낙선이라는 뼈아픈 기록을 가졌다. 모든 선거에서 낙선한 장기표가 떠오르지만 장기표는 그래도 득표율을 두 자릿수로 얻었던 적이 여러 번 있는 것과 달리 백철은 모든 선거에서 득표율 10% 이하를 기록했다.
7. 여담
이름이 같고 성씨가 다른 석철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은 1995년 1회 지방선거부터 지금까지 중앙정치에 예속되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오로지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구의원(수성구 바선거구)에만 출마하고 있다. 그 지역구는 4인이 당선되는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하는 곳으로, 2002년과[12] 2014년에 두 번 당선되었다. 다만 이후로는 다시 낙선을 거듭하고 있다. 대구 서구의 서중현 만큼은 아니지만, 석철도 대구 수성구에서 잦은 선거 출마를 한 점으로 인해 지역 내 언론에서는 꽤나 유명인사인 듯하다.
[1]
그래서 의외로
신기남과 한솥밥을 먹은 적도 있다.
[2]
이때
한나라당의 상황은 굉장히 나빴다.
문민정부가 IMF까지 겹치며 7%라는 지지율로 몰락하자, 다음 정치인생이 위태롭다고 생각한 일부 정치인들이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이탈하였다.
원유철이 이즈음에
신한국당을 나가고
국민신당에 입당해
새정치국민회의의 일원이 되었다.
[3]
나이 때문에 하던
자영업 또한 그만두었다고 한다.
[4]
합동 송부되는 선거공보가 다른 후보들은 예산에 따라 두꺼운 책자거나 적어도 컬러 인쇄거나 하는데, 손바닥만한 반쪽짜리 갱지였던 적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선거에서 선거비 반액 보전 득표율인 10%도 넘은 적이 없는데 35년 동안 계속해서 출마하려면 가난뱅이 수준의 재력으로는 힘들다.
[5]
대구 서구에서 수없이 낙선한
서중현 전 대구 서구청장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쪽은 그래도 본인의 지지세가 적지 않아 두 번을 제외하고 모두 선거비 전액 보전을 받았고 실제로 당선도 세 번이나 되었다.(구청장 2회, 시의원 1회)
[6]
당장 울산만 보더라도, 무소속 기초의원, 무소속 광역의원과 한나라당 소속 남구청장을 거쳐서, 울산시장까지 당선된
김두겸 울산시장도 있으며, 1기 울산시장은 아예 당내 전업 정치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울산시장까지 당선된 민선 1, 2기
심완구 전 울산시장도 있다.
[7]
통일국민당과 신설 합당.
[8]
자유민주연합에 흡수 합당(법적으로는 신설).
[9]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
[10]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
[11]
예를 들어 우리정의당 소속 기간, 신정당 소속 출마 후 언제
통합민주당 소속이 되었는지 등이 있다. 이외에도
평화민주당 소속 기간과
자유민주연합 탈당 시기 등 많은 것이 불명확하다.
[12]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없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