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18:52:37

배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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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3년 10월 27일
서울
사망 1949년 4월 14일
묘소
본관
가족
학력
서훈 2005년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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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903년 10월 27일 서울 의주통2정목(義州通2丁目, 현 중구 의주로2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직업은 양복상이었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노동회보(勞動會報)』라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3월 22일 봉래정(蓬萊町)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7일경 조선약학교 학생 김공우(金公瑀)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정지현(鄭志鉉)에게서 노동자들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노동회보』를 배포하도록 부탁받았다. 이때 김공우와 함께 『노동회보』 배부를 논의하였다. 3월 20일경 김공우와 함께 『노동회보』 11매를 화천정(和泉町, 현 서울 중구 순화동 일대) 부근에서 배포하였다.

3월 21일, 다음 날인 22일에 노동자대회에서 있을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들었다. 3월 22일 오전 9시 30분 봉래정(蓬萊町, 현 중구 봉래동 일대)에서 노동자들의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는 ‘노동자대회’가 개최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신형균(申衡均)·설규성(薛奎成)·김공로(金公璐) 등 중림정(中林町, 현 중구 중림동 일대)·화천정 지역의 노동자 300~400명을 포함한 군중 약 700명과 함께 깃발을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를 부르며 의주통에서 아현리(阿峴里)로 행진하였다. 결국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았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같은 해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은 후,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이후 춘천에 거주하였으며, 1927년 춘천청년회에서 교양부원을 맡는 등 민족운동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