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17:39:53

배준호(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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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상
평안북도 구성
사망 1921년 1월 20일
묘소
본관
가족
학력
서훈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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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3·1운동 후 남만주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만세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창립총회에서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 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 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등이다.

배준호가 활동한 대한독립단에서는 이 시기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위해 군자금의 모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에서는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의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의 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대한독립단의 지단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 연호(年號)의 사용문제를 계기로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열되었다. 민국독립단은 기원독립단과 달리 공화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요 간부들은 기원독립단에 비해 젊은 층인 30, 40대로서 신학문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주요 인물로는 조병준(趙秉準, 도총재)·변창근(邊昌根, 부총재)·조정환(曺正煥, 諮議部長)·신우현(申禹鉉, 총단장)·유응하(劉應夏, 부단장)·백기준(白基俊, 총무부장) 등을 들 수 있다. 바로 이 민국독립단에서 배준호는 국내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민국독립단·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 대표 등이 모여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조직하자, 광복군사령부의 국내특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10월 박찬계(朴燦啓)와 함께 남만주의 관전현(寬甸縣)으로 회귀(回歸)하던 도중 압록강변에서 왜적과 충돌하여 박찬계가 전사하였다.

한편 배준호는 1920년 12월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에 가담하여 평북 구성군 경감(警監)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산중에서 잠복활동하다가 1921년 1월 20일 석굴에서 왜적과 교전하다 일본 순사 1명을 저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자신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