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기운(朴氣運) |
생몰 | 1880년 3월 17일 ~ 1945년 7월 27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군위군 악계면 창평리 |
사망지 | 경기도 고양시 한지동 보광리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기운은 1880년 3월 17일 경상북도 군위군 악계면 창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수교 신도로, 1917년과 1919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의 봉천성 서간도에서 천황에게 항일통문(抗日通文)을 작성하여 발송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귀국하여 동년 7월에 이순화(李順和), 이원근(李元根), 진응수(秦應洙), 전여수, 노원장(盧元長) 등 예수교도 5명과 함께 태극기와 유사한 8괘기(八卦旗)와 십자기(十字旗) 대소 십수본을 만들어 서울의 사대문에 계양하고 항일문서를 4개문의 각 성벽에 첨부하여 대한독립을 기도했다.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박기운은 1920년 11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12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해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경기도 고양시 한지동 보광리에 거주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내다가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기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