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동부 기독교 구역 (구도심)의 모르 바르사우모 성당 일대
시가지 서부 무슬림 구역 (신도심)
1. 개요
튀르키예어, 영어 Midyat쿠르드어 Midyad
아람어 ܡܕܝܕ
아랍어 مديات
튀르키예 동남부의 도시. 마르딘에서 동쪽으로 45km, 누사이빈에서 북쪽으로 30km, 하산케이프에서 남쪽으로 25km, 지즈레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인구 7만의 소도시지만 역사가 깊다. 특히 터키 내에서 종교 / 민족적 다양성이 큰 곳이다. 시내는 쿠르드 & 아랍 무슬림과 기독교도 구역이 나뉘어 있고, 근교 농촌 마을에는 야지디인들이 거주한다. 70년대까지 터키에서 유일하게 기독교도가 다수였던 도시로, 특히 시리아 정교회의 거점이었다. 다만 80년대 쿠르드 무장 봉기와 함께 대도시나 국외로 이주하여 현재는 1천여만이 남아있다.
기독교 구역에는 5개의 오래된 교회가 있고, 동남쪽 12km 지점에는 터키 최대의 수도원 중 하나인 모르 가브리엘 수도원이 자리한다. 2020년대 들어 도심에서 데린쿠유에 버금가는 지하 동굴 도시가 발견되어 발굴 중에 있다. 주민들은 직물과 금속 장신구 등을 만드는 수공업에 주로 종사한다. 해발 950m의 고지대에 위치했지만 분지 지형인 탓에 여름에는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덥다.
2. 역사
1915년 늦여름 기독교도들이 최후의 저항에 나선 미드야트 동쪽의 이와르도 (아인 와르다) 전적지
도시 자체는 기원전 3천년경 후르리 인이 정착한 후 기원전 9세기부터 마티아테로 불렸고, 중세 시기까지 방어를 위해 동굴에 지하 도시를 이루고 살았다.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대립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시기 제국들의 변경 지대에 입지했지만, 한때 7만의 인구를 지닐 정도로 번영했다. 1915년 아시리아인 대학살 당시 현지 기독교도들은 강경파인 헤르메즈 가문과 온건파인 사파르 가문으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전자가 후자의 지도자 한네 사파르 파샤를 죽이고 주류를 이루었다. 현지 지방관 누리 베이는 기독교도 학살 명령을 거부했다가 숙청되었고, 6월 백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관공서를 습격, 전화선을 끊었다.
오스만 당국은 현지 아랍 / 쿠르드 부족들을 무장시켜 반격에 나섰고, 8월 초엽까지 기독교 민병대 수백명이 전사하는 격전 끝에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에 2만 2천의 기독교 주민들은 1차 대전을 대비하여 요새화된 인와르도 (귈괴제) 마을로 향하였다. 얼마후 마르딘에서 모집된 1만 3천의 쿠르드 군대가 마을을 포위하였고, 7천의 수비대는 같은 처지인 야지디 인들의 보급을 받으며 60일 간의 전투 끝에 수성에 성공하였다. 양측 합산 1천의 전사자가 나올 정도로 치열한 전투 후 맺어진 휴전에서 오스만 당국은 기독교도들의 자치를 인정하였다.
따라서 지즈레나 누사이빈과 달리 미드야트에는 70년대까지 기독교도가 다수를 점하였다. 1960년 통계에 따르면 주민 중 기독교도는 5천, 무슬림은 2백에 불과하였다. 마르딘 도에서도 인구의 10%인 5만이 미드야트 군 일대의 기독교도였다. 다만 80년대 터키군과 쿠르디스탄 노동자당 간의 전쟁 중 아시리아계 시장이 암살되는 등 혼란이 이어지자 1만에 달하던 기독교도 대부분이 이스탄불, 디야르바크르나 인접국 혹은 유럽으로 떠났다. 이후 2백여 만이 남았다가, 시리아 내전 후 5백여 시리아 기독교들이 이주해오며 현재는 1천의 기독교도가 거주하고 있다.
3. 갤러리
메소포타미아 일대 최대의 수도원 중 하나인 모르 가브리엘 수도원
야지디인들이 거주하는 미드야트 동남쪽 교외 카르바야 (예니제) 마을
기독교 구역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