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9:54

문동경

파일:문동경.jpg
성명 문동경(文同京)
이명 문균(文均)
생몰 1907년 1월 2일 ~ 1985년 12월 16일
출생지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봉동
사망지 전라남도 구례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동경은 1907년 1월 2일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동양대학 경제학부에 재학했다. 그러던 1928년, 그는 방학을 맞이해 구례로 돌아온 뒤 7월 12일에 구례청년동맹회관에서 ‘임시대회를 맞아’라는 제목으로 글을 작성하고, 약 60부를 인쇄 반포했다. 그 내용은 “우리 피압박 대중, 즉 조선 민족은 모든 폭압과 착취의 맹습을 받아,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투쟁적이고도 반항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다만 투쟁의 두 글자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7월 2일에는 구례청년동맹회관에서 개최된 구례청년동맹 임시대회에서도 청중 약 50명 앞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 내용은, “우리의 모든 운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합치되지 않는다. 조선에 있어서의 각종 사회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하여 맹진하고 있는가. 우리들의 전도에 아무리 많은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굽히지 않고 매진할 뿐이다. 우리들은 결속하여 유일의 목적인 우리들의 사회를 창조할 필요가 절실하다. 적어도 조선인으로서 우리들의 운동을 비판하고, 논단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들에 대하여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8년 10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일본 검사가 판결에 불복해 공소했고, 1928년 12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문동경은 출옥 후에도 일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1929년 8월, 그는 구례공립보통학교 동창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인은 겉으로 내선융화, 차별 철폐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인에 대하여 차별적 대우를 하고 있다.”

이 일로 구례 경찰에 체포된 그는 순천지청 검사국으로 보내졌고, 1929년 10월 16일 순천지청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구례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5년 12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문동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