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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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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책봉 배경3. 추존황후?
3.1. 추존 황후의 지위로 나타나는 황실 내부 위계상의 오류들3.2. 명성황후의 사망 반포 시점에 관하여
3.2.1. 고종실록의 사망반포 기록3.2.2. 승정원일기의 사망반포 기록3.2.3. 명성황후의 사망반포는 고종의 뜻이 아니었다
4. 정식으로 책봉된 황후가 맞다
4.1. 고종실록과 대례의궤
4.1.1. 고종실록의 총서의 추봉(追封)에 관하여4.1.2. 순종실록 부록의 고종태황제 행장 중 추책(追冊)에 관하여
4.1.2.1. 追의 의미에 대하여: 위 뻘글에 대한 반론4.1.2.2. 追의 의미에 대하여: 위 뻘글에 대한 반론에 대한 반론
4.2. 명성황후책봉 금책과 금보4.3. 문화재청의 세계기록유산 기념메달 제작 및 판매4.4. 승정원일기
4.4.1. 국역 고종대 승정원 일기의 명성황후 "추존" 기록에 관하여
4.5. 선원보략수정의궤

1. 개요

명성황후의 책봉에 관한 문서

2. 책봉 배경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는 사망하였으나 김홍집 등이 추진하려 하였던 국장(國葬)은 여러 차례 연기되었다.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때문이었다. 또한 아관파천 이후 통치권을 되찾았음에도 고종은 “복수를 하여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춘추(春秋)』 복수론에 따라 장례를 연기하였다. # 그동안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탈출했던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 후 경효전을 설치하여 명성황후의 관과 신주를 그곳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개국한 날 황후에 책봉하였고 이후 국장을 시행하였다.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산 사람으로 취급하던 당대의 예법에 따라 죽은 사람에게 하는 추촌이 아닌 산 사람에게 하는 책봉을 하였던 것이다. 책봉 이후 시행한 장례는 한달을 넘어 넘어 11월 22일에 명성황후의 국장이 마무리되었다. #

3. 추존황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청나라의 형제국에서 속국으로 조선의 지위가 격하되는 과정을 겪고,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임진왜란 때 도와준 재조지은을 잊으면 안된다는 성리학의 논리가 조선이 망할때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곳곳에 관우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 데 그 중에 지금도 남아있는 유명한 관우사당이 서울 종로구 황학동의 동묘이며, 조선 왕실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경복궁 후원 안에 청나라의 서슬퍼런 감시를 피해가면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조선은 명나라를 계보를 이어가는 소중화국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외명부의 법도와 호칭의 위계에 관한한 명나라의 예법을 대부분 그대로 따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명나라 예법에 따르면 사망한 후에 추숭 또는 추존을 통해 후궁을 황후에 봉하는 경우는, 황후가 아닌 후궁들의 소생으로서 황제가 된 사람의 생모를 황후로 추존해왔었다.

이는 조선의 경우에는 왕비의 자식은 적자로 후궁들의 자식은 서자로 구분하는 적서분류법을 태종때부터 시행하면서 되도록이면 적자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시키려 매우 노력하였고 이는 영조가 강조한 3종의 혈맥이라는 것에서 숙종이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지는 왕통의 권위로 매우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고 정치판도를 바꾸기 위해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를 이용한 것을 봐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적서의 차별을 두지않고 황제의 아들은 모두 동일한 황자로 취급했고 그 황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황태자로 책봉하였으나 그 어미까지 황후로 즉시 높이지는 않았다. 대신 황후의 자식이 아닌 비빈의 자식이 황태자를 거쳐 황제로 즉위할 때 자신의 자신의 생모가 사망했으면 황후로 추존하고 살아있으면 황태후로서 불리지만, 황태후가 사망한 후에 황후로 추존하는 절차를 거침으로서 후궁 출신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여기에 적서를 더 강화한 황제가 가정제다. 가정제 이후에 황제의 정후만이 후호(后號)를 사용할 수가 있었고, 계후는 정식책봉절차를 거친 황후이던 후궁출신 황후이던 상관없이 후호(后號)를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정후와 계후마저도 차별을 두었다.

가정제의 할아버지 성화제 때, 황후 오씨가 폐위되고 왕씨가 새 황후가 되었다. 왕씨는 계후이므로 가정제 때 수립된 적서법에 따르면 시호에 후호(后號)인 "순(純)"을 사용할 수가 없어야 하는데, 폐황후는 황후로 취급하지 않았으므로 왕씨는 정후로 인정되어 "효정순황후"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가정제의 경우 황후가 2명인데, 첫번째 황후인 진씨만 제호(帝號)인 "숙(肅)"을 후호(后號)를 받아서 "효결숙황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두번째 황후인 방씨는 계후(繼后)이기 때문에 후호(后號)를 받지 못하여 "효열황후"라는 시호만 받았다. 이처럼 같은 황후였어도 정후와 계후의 위계 차이를 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3.1. 추존 황후의 지위로 나타나는 황실 내부 위계상의 오류들

이를 명성황후에 대입해보자. 중전 민씨를 사후 황후로 추존하면 그의 아들인 순종황제는 적장자가 아니라 서자가 되는 것이며, 명성황후는 내명부의 직급 출신 성분이 왕비가 아닌 고종의 후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궁은 엄연한 계급(정1품. 종1품 등등)이 있으나 세자빈은 정1품 계급인 "빈"일지라도 무품계급이다. 즉 서열이 세자빈 다음에 현재 왕위의 후궁들 중에서 정1품 빈이 자리하게 되는 서열법이다

이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사도세자의 생모는 영빈 이씨로서 내명부 직급상 "정1품 빈"이고, 사도세자의 아내 혜빈(혜경궁) 홍씨도 세자빈으로서 영빈 이씨와 동일한 "빈(嬪)"이지만 내명부내에서 다음 대통을 이을 왕세자의 부인인 관계로 경국대전 '이전(吏典) 내명부' 항목에 따르면 세자빈은 내명부 소속이면서 세자궁 소속으로서 무품이다,[1] 대내외 왕실행사에서는 세자빈인 홍씨가 생모 신분의 비종통법적 "친 시어머니"인[2] 영빈 이씨보다 상석에 좌정하게 되고 호칭 순서도 혜빈(혜경궁) 홍씨가 영빈 이씨보다 먼저 불리게 되는 것이 왕실의 법도였다.

즉 이를 황제국의 내외명부 위계상으로 대입하면 생전 황후 책봉이 아닌 사후 추존 황후가 된다는 것은 후궁의 지위(?)에서 황후로 추존되었으니, 순종황제의 왕세자 시절의 왕세자비로서 순종황제가 즉위한 후에 황후로 추존된 순명효황후 민씨보다 낮은 직급 서열 출신의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내명부 직급명칭(정1품)의 출신신분으로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엄귀비 엄씨와 동급이 되는 건데 이는 고종의 정실인 명성황후를 격하시키는 것이다.

영조의 경우 자신의 생모가 천한 무수리 줄신이라는 것이 평생의 컴플렉스로 작용해서,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이를 고종이 모르고 있었을리도 만무하다. 명성황후가 사망할 당시 고종이 명성황후와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는데, 명성황후의 아들로 자신의 황위를 이을 순종의 출신성분을 정비가 아닌 후궁 출생으로 격하시키는 "황후 추존 또는 황후 추숭"을 하겠는가?

영조의 경우에서 "삼종지혈맥(三宗之血脈)"을 매우 강조했다는 것을 실록의 기록만 보아도 매우 많이 등장하는데, 삼종혈맥설명 그만큼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지는 혈통에 근거한 왕의 권위과 권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고, 이러한 혈통에 기반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숙종은 비록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를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이용하면서까지 집권세력을 전부 교체해버리는 "환국(換局)"을 시행한 것 뿐만 아니라 1차와 2차에 걸쳐 일어난 예송논쟁이 일어난 진짜 속내는 왕의 혈통에 관한 문제였기에, 이 왕실의 혈통에 있어서 적자나 서자냐와 장자냐 차남이냐는 조선 후기에 있어서 보다시피 왕의 권위와 권력과 직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고종이 모를리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명성황후를 추존 황후로 법적인 절차를 처리해버리면, 적자인 순종이 서자출신의 황제가 되고 이는 황제의 권위와 황권의 약화를 불러온 다는 것쯤은 고종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추존이 아닌 책봉으로 법적인 처리를 했다고 보아야 한다.

혹자는 왕후라고 불리니 일제강점기 때 이왕비였던 이방자보다는 높은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겠지만, 조선조 왕들의 경우 승하하면 묘호와 함께 시호를 받는 추숭 작업이 따르지만 왕비는 그러지 아니하였고 그저 왕비에서 왕후로 존칭을 변경하는 수준으로 대우해왔다.

그 일례로 선조가 의인왕후 박씨에 대한 시호와 묘호 등을 영의정 이항복과 논하는 선조실록 127권, 선조 33년 7월 3일 갑진 3번째기사에서 "다른 일은 놓아 두더라도 시호에 있어서는 반드시 모후(某后)로 칭해야 할 터인데, 후(后)자는 황제의 후에 쓰는 글자니, 그 후자가 더욱 어렵다. 승지는 알고 있으라."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대행왕비의 시호를 정하면서 시호+왕후로 정해야하는데, 조응태무고사건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황제의 황후에게만 사용하는 후(后)를 사용하려니 명나라에서 또 꼬투리 잡을까봐 두렵다(실록 기록으로는 '어렵다'로 표기함)라고 할 정도로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조선식 의왕내제를 지켜서 사망한 대행왕비에게 시호를 부여함과 동시에 왕후로 높였다.

또한 황제국의 내명부 품계에 따르면, 황제의 비는 황후, 황태자의 비는 황태자비로 불리고, 황태자 이외의 왕족 중 친왕에 책봉된 사람의 비는 왕비 또는 왕후라고 부르게 된다. 영친왕은 일제강점기 때 이왕이 되었고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는 이를 따라가 이왕비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방자는 왕후라는 호칭으로 불리울 수 있는 대상이 되기에,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후로 불리게 되면 왕실적통법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되는 사람의 아내인 이방자와 동급의 호칭 품계를 지니게 되는 그야말로 족보가 꼬이고 꼬이는 것이 된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왕실 적통 법적 어머니는 아니었기에 고종 때에 와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혜경궁 홍씨도 왕후로 추존되었다. 이 탓에 원칙적으로는 추존된 호칭을 부르고 사용해여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에서는 잘 부르지는 않지만, 명성황후는 순종황제의 친모이자 왕실 적통 법적 어머니이기에 명성황후를 혜경궁 홍씨와 비교할 수는 없다.

조선 왕실의 대표인 고종이 이러한 예법과 법도를 모를리가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따라서 고종은 중전 민씨가 비록 을미사변으로 유명을 달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전 민씨를 황후로 "추존"하지 않았다.

3.2. 명성황후의 사망 반포 시점에 관하여

명성황후 추존론자들은 명성황후의 사망 반포가 이미 황후 책봉례를 거행하기 한참 전에 이루어졌다는 기록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명성황후는 이미 사망 선포가 공식적으로 있었고, 그 후에 황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추존이며 그래서 명성황후로 부르면 안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상장례가 간소화되고 전통 유교적 상장례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해버리면서, 역사학자들도 놓치고 하물며 대한민국의 역사관련 기관들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및 국사편찬위원회와 고전번역원에서 근무하는 학예사들과 편수연구관들조차, 이미 명성황후가 사망하여서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대행왕후라고 사용하였고 빈전이 설치되었다는 근거를 기반으로 추존론을 따르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며, 이러한 추존론이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르는 식민사관이라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까우며 아직도 친일사관을 걷어내는 것은 갈길이 멀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인 공자의 예기와 중용에 따르면 "죽은 자를 산자와 같이 대우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것이 바로 "欲事亡如存"이고, 죽은 자를 산 사람과 같이 취급해다는 증거가 바로 조석전과 상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며, 혼전(魂殿)이 아닌 빈전(賓殿)이라는 점이다.

조선의 상장례 예법에 따르면 조석전과 조석(朝夕) 상식은 발인 이전에만 거행되는 상장례 예법으로서 돌아가신 분이 살아 생전에 드셨던 음식을 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을 동일하게 올리는 것을 말하며, 빈전은 비록 돌아가셔서 혼백은 몸을 떠났어도 완전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죽은 몸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인을 마치고 묘소에서 신주에 돌아가신 분의 직책과 이름을 써서 돌아와 신주를 혼전에 모신 후에야 혼백이 돌아올 몸이 땅에 묻혀서 완전히 저 세상으로 건나가게 되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역사학자들조차도 명성태황후의 책봉례에서는 모두들 간과하고 놓치고 있기에,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만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시백 조차도 명성황후를 추존했다고 말하고 있다. (박시백, 신병주의 역사토크 서적 참조)

대표적인 조선왕실 전문 역사학자이자 교수인 신병주 교수조차 명성황후는 추존되었다고 설파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데다가, 명성이라는 시호가 반포된 것은 황후 책봉 후에 반포가 되었고 왕비 또는 대행왕후 시기에는 시호가 정식으로 반포되지 않아서 명성왕후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없음에도 명성왕후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서 설파하였다. 관련기사 링크

명성황후의 왕비 시절을 지칭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명성황후가 왕비 시절 처음으로 받은 존호인 "孝慈(효자)"를 사용하여서 효자왕비라고 하면 되는데, 이를 입증할 유물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孝慈王妃殿新年奉箋稱賀文 (소장번호 K2 - 2748)"이 있다.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소혜왕후 한씨의 경우 대비 시절에 받은 존호가 바로 "인수"이기에 "존호+직첩명" 표기에 따라 대비 시절은 인수대비라고 기록하는 만큼,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명성황후의 왕비 시절에 관하여 서술할 때에는 "효자왕비"라고 써야 올바른 표기법임에도 조선왕실 전문가라는 신병주 교수조차 그러한 예법을 무시하고 있는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책봉례는 공자의 예기와 중용의 구절인 "欲事亡如存"의 사상에 입각하여 명성황후이 관인 재궁(梓宮)이 빈전인 경효전에 모셔저 있음으로, 죽은 사람을 산 사람과 동일하게 여긴다는 당시의 사상에 입각하면 명성황후의 재궁이 발인 전이기 때문에 절대로 추존례를 거행할 수가 없고 책봉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역사학자나 한국사 교수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관련 기관들에 종사하고 있는 학예사들이나 편수연구원들조차 모르고 여전히 추존론을 주장하고 있는 현실인데, 이러한 점은 빠른 시일 내에 바뀌어야 할 점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한 날부터 명성황후 훙서 반포일 사시에 김홍집 내각은 칙서를 위조하여 임의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제1차 단발령을 내렸었고 이때 고종황제의 상투를 강제적으로 잘랐다. 그러나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어디를 봐도 1차 단발령 조칙을 인정하거나 반대했다는 기록이 없었음에도 1차 단발령을 계속 시행하거나 중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민심은 김홍집 내각을 불신하고 저항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김홍집 내각 주도의 명성황후 사망 반포는 고종 자신의 의지대로 반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고종을 중심으로 하는 제2차 단발령을 포고하고 반포했을 때에는 저항하는 백성이 별로 없었다는 점 또한 간접적인 반증이다.

3.2.1. 고종실록의 사망반포 기록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음력 10월 15일 임오 1번째 기사에서 '왕후의 승하를 반포하다'에 "조령을 내리기를,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王后)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오래되니 그 날에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하였다. 개국(開國) 504년 8월 20일 묘시(卯時)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昇遐)하였음을 반포하라." 하였다.

3.2.2. 승정원일기의 사망반포 기록

고종 32년 을미(1895) 음력 10월 15일(임오)의 7번째 기사에서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그날 붕서(崩逝)하였음이 증거로 보아 틀림없다. 개국 504년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하였노라.”하였다.

3.2.3. 명성황후의 사망반포는 고종의 뜻이 아니었다

위의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만 보아서는 고종이 자신의 의지로서 명성황후의 사망을 선포한 것으로 읽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고종에게 있어서 명성황후의 사망반포는 기시감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바로 임오군란 때에 흥선대원군이 자기 멋대로 명성황후의 사망을 반포하고 국장을 선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한 고종에게 있어서 임오군란때처럼 명성황후가 살아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는 추측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당시의 집권세력은 친일파였던 김홍집 내각이 집권하고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사망을 선포한 당일 날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매우 유의미한 기록이 있다.

승정원일기의 고종 32년 10월 15일 임오의 7번째 기사로 기록 사관이 작성한 "곤녕합 사변실기" 중에서 "흉악한 저 적도(賊徒)들은 혹 조령(詔令)을 위협하여 시행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들 유언비어로 선동하기도 하여, 임금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리기도 하고, 감히 사관(史官)이 직필하려는 것을 막기도 하였으니, 이것을 차마 한다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중략) 매우 분통하게도 저들이 요행히 법망을 벗어났으므로 일단 먼저 붓으로 주벌(誅罰)하노라, 아아, 애통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조령을 위협하여 시행하기도 하고"라는 말이 명성황후의 사망반포와 국장준비 기록들이 연달아 기록된 후에 최종적으로 곤녕합 사변실기로 마무리 하는 글에 나온다는 것은 "명성황후의 사망반포와 국장 준비 시작"이 고종의 자의가 아니라 일본을 등에 엎고 일본의 조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불법적으로 조령과 칙령들을 반포해가면서 이뤄졌다는 간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이는 임오군란 당시에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의지와 상관없이 명성황후의 사망반포와 국장 준비를 서둘러 시행했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이고,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조치로 감정이 상한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장례에 참석조차 하지도 않았었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에 즉시 명성황후를 폐서인하는 조칙을 고종의 명의로 반포하였으나, 고종의 서압 즉 서명이 들어가진 않은 상태로 불법적으로 반포하였는데, 그에 관한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1897년) 1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는 아래와 같다.

"역적의 괴수 김홍집(金弘集)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집안의 신하로서 지위는 정승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갑오년(1894) 이후부터 외교를 빙자하고 임금의 권한을 빼앗았으며 패거리를 만들어 음모를 꾸몄습니다. 작년 8월 20일 사변에 김홍집은 사실 흉적의 우두머리였으며 유길준(兪吉濬)·정병하(鄭秉夏)·조희연(趙羲淵)은 그의 우익으로서 호응하였습니다. 대소 사무를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재결(裁決)하도록 한다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전하를 위협하여 급히 반포할 것을 청하였으며 제멋대로 행세하는 것이 끝이 없었습니다.

22일에는 난을 일으킨 군사를 부추겨 칼과 포를 들이대면서 몰래 합문(閤門)을 둘러싸고 정병하로 하여금 불온한 말로 위협하여 왕후(王后)를 폐위시키는 내용의 조서를 빨리 내릴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는 유길준·조희연의 무리와 함께 건청궁(乾淸宮) 행각(行閣)에서 거짓 조서를 자신들이 지어서 제멋대로 서명하고는 반포하였습니다.
당황하여 어찌하지 못하는 때에 (김홍집) 스스로 왕비(王妃) 간택의 주본(奏本)을 가지고 궁내부(宮內府)에 가서 강제로 윤허를 청하였습니다.

11월 15일에는 지밀(至密)의 구역에 병사를 풀어 또 다시 대궐문에서 흉기를 휘두르게 하고 백방으로 위협하면서 침전(寢殿)에 곧바로 침입하여 전하의 머리카락을 억지로 잘랐습니다.

8월 20일 이후부터 군사들이 전하의 가까이에서 에돌면서 물샐 틈 없이 지키면서 충직한 관리들을 해쳐서 더욱더 전하의 형세를 고립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죄는 왕망(王莽)과 조조(曹操)보다 심하며 악한 것은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보다 더합니다.

같은 날의 역적 정병하는 한미한 집안에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고 외람되게 재상의 반열에 올랐건만 외국인과 통하여 음흉한 일을 감행하였으며 역적의 무리와 결탁하여 간사하고 은밀하게 계책을 꾸몄습니다.

8월 20일 대행 왕후(大行王后)가 화란을 피하려고 하자 길을 막고서 피하지 말도록 청하였습니다.

외국의 군사의 난입에 놀라자, ‘저 군대로 우리나라의 난군을 진압하였으니 애초에 악의가 없다’고 교묘하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오히려 흉계가 혹시 성사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외국 군사들이 와서 호위한다는 거짓 조서를 꾸며서 전준기(全晙基)로 하여금 가서 전하도록 하였으니 흉계에 호응한 정황이 명백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거짓 조서를 빨리 반포할 것을 청하고 단발(斷髮)의 의견을 급히 한 것에서 흉측한 정황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리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2월 20일 양력 2번째기사의 기록에는 "자신이 두목이 되어 은근히 흉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이 조조(曹操)와 동탁(董卓)보다 심한 자는 김홍집(金弘集)이며,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제멋대로 흉기를 사용한 자는 우범선(禹範善)과 이두황(李斗璜)입니다. 어로(御路)를 막고 적의 선봉을 맞아들인 자는 정병하(鄭秉夏)이고, 총리(總理)가 결재한 거짓 제칙(制勅)과 황후(皇后)를 폐위시킨다는 거짓 조서새 황후를 간택하는 주본(奏本)을 만든 자는 유길준(兪吉濬)과 조희연(趙羲淵)이며, 권형진(權瀅鎭)·이범래(李範來)·전준기(全晙基)·장박(張博) 등도 그 공모자입니다. 각 공관(公館)에 통지하여 글에 날인할 것을 청하고 황후가 폐위된 이유를 선포한 자는 김윤식(金允植)입니다. 황후의 폐위를 종묘(宗廟)에 고하는 글을 지은 자는 이승오(李承五)인데 그 글에 이르기를, ‘소자(小子)는 똑똑치 못하여 종묘(宗廟)와 사직에 근심을 끼쳤습니다. 명첩(命牒)을 거두어 왕비(王妃)를 교체합니다.〔小子不令 憂深宗祊 纔收命牒 用替坤裳〕’라고 하였습니다. 이 16자의 글을 지은 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신하의 명분이 없어졌고 나라의 기강이 퇴폐해졌습니다.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말하려면 목이 메입니다."라고 기록하여 김홍집 내각이 반포하고 서명한 문서들이 모두 거짓조서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을미사변이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일어난지 2일 후에 명성황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조서는 1895년 음력 8월 22일에 반포했고, 1895년 음력 8월 23일에는 폐서인된 민씨를 빈으로 삼는다는 조서가 반포되었다. 같은해 음력 8월 26일에 왕비 간택령이 반포되었으며, 같은해 음력 10월 10일에는 빈에서 왕비로 위호를 회복한다는 조서가 반포되었다[3] 같은해 음력 10월 22일에 명성황후의 시호를 "순경(純敬)"[고종실록]으로 정하였다.

1896년 양력 2월 11일 아관파천 당일에 "을미년(1895) 8월 22일 조칙(詔勅)과 10월 10일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라는 조칙을 반포하여, 명성황후의 폐서인과 빈으로 올린 것과 빈에서 다시 왕후로 위호를 회복시킨 모든 법적인 조치들을 완전히 무효화 시켜버렸다.

고종 35년(1897년) 양력 1월 3일에 의정부 찬정 김영수가 상소를 올려서 김홍집 내각이 정한 명성황후의 시호와 능호와 전호를 모두 바꿀 것을 주청하여 고종이 승인하였다.[5] 또한 이 날에 명성황후의 능지를 청량리로 결정하였다.[6]

1897년 양력 1월 6일에 명성황후의 시호를 "문성(文成)"을 1순위인 수망(首望)으로 ‘명성(明成)’ 을 2순위인 부망(副望)으로 정하여 올렸으며, 수망인 "문성"으로 정하였다.[7]

1897년 음력 1월 29일(양력 3월 23일) 정조의 시호에 사용되고 고종 자신과 정조의 대수(代數, 친족관계)가 그리 멀지 않은 관계로 명성황후의 시호인 "문성(文成)"을 폐지하고, 양력 1월 6일에 시호들을 적어올린 것들 중에서 2순위인 부망(副望)으로 올리라고 하였으며, 이 날에 명성황후의 시호인 "명성"[8]으로 확정하으나 반포를 하지 않았다.

명성이라는 시호를 정식으로 반포를 하지 않아서 승정원일기 및 명성황후 국장관련 기록들에는 여전히 "대행왕후"를 사용하는 걸 볼 수가 있다.

고종 34년(1897년) 양력 11월 5일 명성황후의 빈전에 고종이 나아가 명성황후의 시호를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였고[9], 시호를 책봉한 것에 대한 정식 조서가 반포[10]되어서 조선왕조 법적으로 공식적인 사망선포가 이루어졌다.

4. 정식으로 책봉된 황후가 맞다

하지만 일부의 추존 황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중전 민씨의 장례식 준비가 시작되었으며, 그 장례식의 준비 과정 속에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결정되었고 "대행왕비"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고종의 덕수궁 환궁과 칭제건원을 통한 대한제국 선포에 따라 황후가 되었으니 "추존황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는 모든 과정이 실록과 일성록과 의궤로 기록되는 나라이다. 하다못해 태조의 어진을 모사하는 것도 모사도감을 설치하고 모사도감의궤를 편찬할 정도로 기록에는 철저한 나라였으며, 화장실에 한 낙서도 지방수령이 장계로 중앙정부에 보고가 되면 그대로 중앙정부 문서나 일기류 또는 실록에 기록될 정도이다. 그러한 기록의 나라 조선과 조선을 잇는 대한제국의 의궤와 실록에는 중전 민씨를 "추존"하는 추봉도감이나 추숭도감이 설치된 적도 없고, 추숭 과정을 기록한 추숭의궤 또한 없다.

이러한 추존황후론을 따르면 또 다른 문젯거리가 발생하는데, 바로 순종황제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시호문제이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 박정희 정권시절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였는데, 당시 황후 윤씨의 시호를 정한 것은 전주이씨 종친회가 아닌, 박정희 정권의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주도한 "윤황후장례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다.

시호를 정한다는 것은 추숭이나 추존의 과정의 한 부분인데, 왕조국가의 왕이 정한 시호도 아닌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정한 시호는 인정하여 온 국민이 그 시호가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사용하면서도, 황후추존론 신봉자들은 명성황후는 추존황후임으로 황후가 아닌 명성왕후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종황제가 추존의 일환으로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추숭한 영조, 정조, 순조의 묘호를 모두 영종, 정종, 순종으로 되돌리자는 말을 명성황후 추존론 추종자들은 동시에 주장해야 자신들의 논리에 있어서 일관성이라도 있게될 것이지만, 그런 주장은 일언반구도 없이 유독 명성황후만 명성왕후로 불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은 스스로 자가당착이며 표리부동한 언행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일례로 영화 '마지막 황제'로 그 존재가 깊게 각인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선통제로 부르지 않고 그냥 푸이라고 부른다. 푸이는 묘호도 없다. 이처럼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후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순정효황후 윤씨를 그냥 시호없이 윤황후로 부르자고 하는 꼴과 같다.

4.1. 고종실록과 대례의궤

을미사변 이틀 뒤인 1895년 음력 8월 22일,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씨를 폐서인했다. 이 시기의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로, 이 당시 고종이 한 일은 사실 김홍집 내각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8월 23일 왕태자(순종)가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날 고종은 민씨에게 당시 조선의 후궁의 직첩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빈(嬪)의 칭호를 주었다. 10월 10일엔 왕후로 복위시켰다.

왕태자인 순종이 왕태자에서 물러나겠다고 상소를 올린 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폐서인이 되면 자신도 죄인의 자식이 되는 것이고 그 상태로 왕위를 이으면 왕권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되고 왕권의 권위 또한 심각하게 흔들리기 때문으로서, 자신의 어머니가 폐서인된 연산군의 예가 있고 조선 후기에 성리학이 가장 강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 적자출신 왕자임에도 차남이라는 이유로 효종과 효종비의 상복을 둘러싼 현종 시기의 예송논쟁만을 보아도 순종의 친모를 폐서인한다는 것은 고종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순종의 입장에서도 왕권의 약화와 왕권 권위의 추락은 불보듯 뻔한 것이기에 당연한 퇴위 상소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고종이 김홍집 내각의 폐서인 조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인 왕태자를 움직여서 왕태자 퇴위 상소를 올리게 한 것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정조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 및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심환지에게 비밀어찰을 보내서 상소를 올리도록 한 사실이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어찰첩의 발견으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원래 시호는 금방 결정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그녀는 현 조선의 군주의 아내였음에도 장례 일정이 2번이나 중단되는 바람에 죽은지 2년 뒤에야 시호를 받았다. 1895년 10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그녀의 시호 후보로 순경(純敬)을 올렸는데, 이후 아관파천이 발생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고종은 장례 일정을 중단했다. 1897년 1월, 조정에서 김홍집 내각이 올린 건 시호로 쓸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자 고종은 시호 후보를 새로 올리라고 했고, 시호 후보 3개 중 하나인 문성(文成)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3월 2일에 문성이 정조의 정식 시호에 쓰였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시호 후보 중 하나였던 명성(明成)을 쓰기로 한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왕후'로 시호가 정해졌을 것이나, 문제는 그녀의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에 장지(葬地) 근처에서 유해가 발견되는 등의 일 때문에 장례 일정이 또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그 해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면서 그녀를 황후로 추숭했다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고종이 황제즉위식에서 중전 민씨를 황후로 추승하면 추승금보를 만들어야하는 데, 현재 대한민국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의 어보와 국새"의 유물 목록에는 "황후 추승금보"라는 것이 없다. 대신 "명성황후책봉금보"만이 있을 뿐이며,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명성황후책봉금보 외에도 명성황후책봉금책도 같이 소장하여 보관하고 있다.

이 명성황후책봉금보는 2019년에 문화재청 의뢰로 조폐공사가 기념 메달로 제작하여 국민들에게 판매하였다. 관련기사

이는 임오군란 때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여주와 충주로 피신했다가 명성황후가 환궁한 경험을 고종은 겪었기에, 친일파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통해 빨리 장례를 치름으로써 혹여라도 중전 민 씨가 살아서 경복궁으로 환궁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일본의 시도와 압력을 고종이 눈치채고 공식적으로 중전의 사망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로 차일피일 미루고 아관파천을 해버렸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중전은 완전이 사망한 사람이 아닌 상태였기에, 고종은 황제즉위식 후에 명성왕후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봉례를 거행하고 책봉금보를 제작하였고 이를 추후 종묘에 안치하였다.

일제가 사망선포를 급히 하도록 압력은 넣은 것은 조선시대에 탐관오리를 지금의 광화문광장 끝자락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 앞에 있었던 포도청에서 탐관오리를 처형하는 조선시대 형법 상의 팽형을 착안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팽형이라는 것은 포도청 앞에 장작을 쌓아놓고 가마솥은 얹은 후 가마솥 안에 탐관오리를 들어가게 한 후,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꺼내서 유가족들에게 탐관오리를 인계하였는데, 이때에 꺼내지는 탐관오리는 시체처럼 죽은 척을 했어야했고 유가족은 시체를 인계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실제로 장례식도 치러야 했으며, 처형일을 기일로 삼아 제사도 지냈다.

하지만 팽형을 당해서 죽은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생활을 하나면, 그 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에 거주하되 진짜로 죽을 때까지 그 건물 밖을 나올 수도 없었고 가족들은 그 건물 출입구를 봉쇄하고 일정량의 음식만 팽형을 당한 사람에게 넣어주었다. 즉,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 팽형인 것이다

따라서 일제가 명성황후의 사망선포를 서두르도록 압력을 한 것은 당시 친러파인 명성황후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었기에 일본이 제거한 것이라는 명분을 획득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팽형을 응용하여서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오더라도 팽형을 당한 사람처럼 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노리고 고종황제에게 조속한 사망선포를 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또한 이는 임오군란 때에 여주로 피신한 명성태황후를 흥선대원군이 단독으로 명성태황후의 사망을 선포하고, 급히 국장을 준비했던 것을 경험한 고종황제의 입장에서는 비록 실제적으로 명성태황후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임오군란 때처럼 명성태황후가 환궁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측면도 있었다는 점을 현대인들은 이해해야 한다.

황후로 책봉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고종실록 36권, 광무 1년 즉, 고종34년 양력 10월 12일자 실록에 분명이 "추승 또는 추존"이 아니라 "책봉"이라는 단어를 분명히 사용하고 있고, 고종실록 편찬감독관으로 일본인들이 참여했음에도 해당 단어인 "책봉"이라는 단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또 하나의 역사적 기록에 의한 팩트는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 일본의 압력을 받지 않은 시기에 조선의 관리에 의해 고종황제의 즉위식을 기록한 의궤인 "대례의궤"에 분명히 고종은 황궁우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후 저녁에 축하연을 개최하였고 다음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한 후에 왕비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봉례를 거행하였다고 기록하였지, 추숭 또는 추존례를 거행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수가 있다. 즉 고종은 중전 민씨를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황후로 임명한 것이 역사적인 팩트이다.

이는 조선의 상장례 예법상 사망 후 3년 시묘살이가 끝난 후에야 오늘날과 같은 정식 사망으로 처리한 관습에서도 유레한다고 봐야하며, 가장 중요한 조선시대의 상장례의 기본 사상은 공자의 예기와 중용에 따르면 "죽은 자를 산자와 같이 대우한다"라는 구절인데, 그것이 바로 "欲事亡如存"이고, 죽은 자를 산 사람과 같이 취급해다는 증거가 바로 조석전과 상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며, 혼전(魂殿)이 아닌 빈전(賓殿)이라는 점이다.

조선의 상장례 예법에 따르면 조석전과 조석(朝夕) 상식은 발인 이전에만 거행되는 상장례 예법으로서 돌아가신 분이 살아 생전에 드셨던 음식을 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을 동일하게 올리는 것을 말하며, 빈전은 비록 돌아가셔서 혼백은 몸을 떠났어도 완전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죽은 몸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인을 마치고 묘소에서 신주에 돌아가신 분의 직책과 이름을 써서 돌아와 신주를 혼전에 모신 후에야 혼백이 돌아올 몸이 땅에 묻혔음으로 혼백이 돌아오고 싶어도 더이상은 못돌아옴으로 이제는 완전히 저 세상으로 건나가게 되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역사학자들조차도 명성태황후의 책봉례에서는 모두들 간과하고 놓치고 있기에, 신병주 교수와 같은 역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만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시백조차도 명성황후를 추존했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박시백, 신병주의 역사토크 서적 내용중 명성황후 참조)

대표적인 조선왕실 전문 역사학자이자 교수인 신병주 교수조차 명성황후는 추존되었다고 설파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데다가, 명성이라는 시호가 반포된 것은 황후 책봉 후에 반포가 되어서 왕비 또는 대행왕후 시기에는 시호가 정식으로 반포되지 않아서 명성왕후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없음에도 명성왕후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서 설파하였다. 관련기사 링크

명성황후의 왕비시절을 지칭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명성황후가 왕비시절 처음으로 받은 존호인 "孝慈(효자)"를 사용하여서 효자왕비라고 하면 되는 데, 이를 입증할 유물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孝慈王妃殿新年奉箋稱賀文 (소장번호 K2 - 2748)"이 있다.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소혜왕후 한씨의 경우 대비 시절에 받은 존호가 바로 "인수"이기에 "존호+직첩명" 표기에 따라 대비시절은 인수대비라고 기록하는 만큼,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명성황후의 왕비시절에 관하여 서술할 때에는 "효자왕비"라고 써야 올바른 표기법임에도 조선왕실 전문가라는 신병주 교수조차 그러한 예법을 무시하고 있는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책봉례는 공자의 예기와 중용의 구절인 "欲事亡如存"의 사상과 그게 기반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상장례에 입각하여 명성황후를 모신 재궁(梓宮)이 빈전인 경효전에 모셔저 있음으로, 죽은 사람을 산 사람과 동일하게 여긴다는 당시의 사상에 입각하면 명성황후의 재궁이 발인 전이기 때문에 절대로 추존례를 거행할 수가 없고 책봉례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역사학자나 한국사 교수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관련 기관들(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고전번역원 등)에 종사하고 있는 학예사들이나 편수연구원들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이며, 여전히 추존론을 주장하고 있는 현실인데,이러한 사람들이 국가에 소속된 역사전문가이자 역사연구자들이라는 점이 역사왜곡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러한 점은 빠른 시일 내에 바뀌어야 할 점이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삼정의 문란이 극심할 때에도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 군포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물릴 수 있었던 것 또한 3년 시묘살이 관습에서 유래한 실시간 호적정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조선에서는 중앙정부차원의 호적조사 및 정리를 매년하지 않고 특정 간지가 도래하는 년도에만 집중적으로 호적조사와 정리를 실시한 탓도 있다

현대와 같은 사망신고 처리기한을 정한 것은 순종황제가 즉위한 직후에 실시한 것으로서 순종실록에는 "사망한 자는 사망한 날로부터 1주일 이내로 경성경찰서에 신고한도록 하라"는 칙음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순종황제의 칙음 선포 이전에는 조선시대때 사망신고 기간을 특별히 정해놓은 것이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기에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사망한지 2년이 지났어도 법적으로는 사망자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이 가능했고 또한 그러한 법적 신분으로 황후에 추존이 아닌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이 역사적 팩트이다.

4.1.1. 고종실록의 총서의 추봉(追封)에 관하여

고종실록은 분명히 말하지만 관찬 역사서이기는 하고, 역사 서지학적으로 2차 사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종실록의 편찬은 고종 황제가 사망하여 3.1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 즉시 편찬작업을 실시한 것이 아니며, 순종황제가 사망한 후인 1926년에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편찬 및 교정을 감독하고, 편찬 실행은 조선총독부 산하의 이왕직에서 실행한 기록물로서 고종과 순종 실록 및 순종 실록 부록을 한꺼번에 편찬하였다.

이렇게 한꺼번에 편찬하면서 편찬위원에 일본인이 들어가 있고,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검열에 의해 편찬되었기에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차사료인 정식 조선왕조실록이나 정식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고종과 순종실록의 시대상황을 알아보는 제1차 사료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종과 순종 실록은 국가지정문화재 조선왕조실록의 목록과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의 목록에서는 제외되어 있으며, 고종실록의 기록은 다른 기록물과 역사 서지학적으로 비교 검토를 반드시 해야 하는 1차 사료 취급을 분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한민국 역사관련 국가기관들에 종사하는 학예사들이나 편수연구원들은 고종실록의 기록을 역사 서지학적인 비평이나 검증없이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고종실록의 국역과 원본을 맹신하여, 명성황후가 추존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 더불에서 실록에 왕후책황후(王后冊皇后)의 책(冊)은 책봉을 의미하는 책(冊)인데, 없는 글자인 추(追)가 생략된 책(冊)이라고 넘겨 짚으면서 니가 역사학자도 아닌데 뭘 알아?를 시전하면서, 즉 추책 곧 추존이라고 설파하는데 명성황후 추존론자와 대한민국 역사관련 기관들의 학예사들과 편수연구관들이 단골로 들먹이는 근거들 중 하나가 바로 고종실록의 총서에 있는 추봉(追封)이라는 단어이다. 이 설명을 못믿겠으면 국민신문고를 통해서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고전번역원에 "홈페이지에 명성황후 추존이라고 유물 해제와 각종 설명에 잘못 기재되어 있으니 명성황후 책봉으로 수정해달라"는 내용으로 민원을 내어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체험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고종실록의 편찬은 1926년에 시작했다.
고종실록의 총서는 고종실록 즉위년 12월의 기사가 작성되기 전에 맨 앞에 나와 있어야 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실록편찬의 원칙이다. 하지만 고종실록의 기사는 고종 즉위년 12월 8일(음력)부터 시작하는데, 그 보다 앞에 있어야할 총서가 12월 13일자 기사에 슬며시 끼워져 있는 상태인데, 이는 조선왕조의 실록편찬 원칙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다.

그리고 총서 내용을 살펴보면, 대정 8년이라는 일본의 연호가 등장하고 명성황후의 홍릉이 청량리에서 현재의 남양주시 지역으로 천장한 내용까지 나옴으로 이는 조선총독부의 검역 삭제에 의해 명성황후의 지위를 낮추고자 추봉(追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역사 서지학적인 1차 사료와 2차 사료의 비교 연구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종실록과 동시에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실린 고종태황제 행장을 비롯하여, 대례의궤, 경효전일기,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고종의 명성황후 어제행록, 선원보략수정의궤(1902) 모두 사망한 후에 추존한 것을 의미하는 추책(追冊)이란 단어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 서지학적으로 1차 사료로 간주되는 고종실록의 총서의 추봉(追封)은 2차 사료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와 선원보략수정의궤, 고종의 명성황후 어제행록 등으로 역사 서지학적인 비교연구를 한다 하더라도 오류이거나 조선 총독부의 의도적인 삽입 단어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4.1.2. 순종실록 부록의 고종태황제 행장 중 추책(追冊)에 관하여

명성황후 추존론자들이나 대한민국 역사관련 기관에 소속된 학예사들이나 편수연구사들이 바로 윗 단에 언급한 대례의궤, 경효전일기,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명성황후 어제행록, 선원보략수정의궤(1902)에 명기된 "왕후책황후(王后冊皇后, 왕후를 황후로 책봉하였다)의 책(冊)을 추책(追冊)의 약자로 오인하여서, 명성황후는 추존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에 하나가 바로 순종실록 부록에 실린 고종태황제 행장이다.

왕이나 황제가 붕어한 후에 발인하기 전에 그 일생일대를 정리한 것을 행장이라고 하는데, 고종태황제의 행장은 순종실록 부록 10권, 순종 12년 3월 4일자로 기록되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3004_004

여기에서 국문번역문이 " 명성왕후(明成王后)를 황후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 왕태자비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하였다."로 되어 있고, 원문으로는 "追冊明成王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문으로도 오역이고, 원문을 옮긴 것도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런 오역을 모르고 원본도 찾아보지도 않은 상태로, 대한민국 역사관련 기관들에 종사하는 학예사들이나 편수연구원들은 국사편찬위나 고전번역원에서 인터넷으로 제공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에서 검색만 하고서는 추존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안타까우면서도 식민사관에 대한민국 역사관련 기관들이 얼마나 자신들도 모르게 찌들어 있는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그 근거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고종태황제행장"의 해당 부분 원본 이미지를 아래에 첨부하고 설명하겠다.

파일:020 - 고종태황제행장 원본 이미지, 장서각 소장본.jpg

우선 위 사진의 맨 오른쪽의 원문 문장을 먼저 설명을 해야 왜 국문으로도, 원문으로도 완전한 오역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에 먼저 설명한다.

"進號大君主陛下, 王大妃殿爲王太后陛下, 王妃爲王后陛下, 王世子爲王太子, 王世子嬪爲王太子妃"
이를 국역하자면, "왕을 대군주 폐하로, 왕대비 전하를 왕태후 폐하로, 왕비를 왕후 폐하로, 왕세자를 왕태자로, 왕세자빈을 왕태자빈으로 진호(進號) 즉 호칭을 높였다"로 번역된다.
이 문장을 먼저 예를 든 것은 한문 원문의 번역상 "진호(進號)"는 "진호(進號)" 다음에 나오는 각 문장에 동시에 걸쳐지는 동사의 역할이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진 속 위의 문장의 바로 앞 문장을 가만히 보면 이미 명성황후가 10월에 승하했다는 것을 밝혀놓고도, 사망한 명성황후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여 고종과 왕대비인 효정왕후와 왕세자인 순종과 세자빈인 순명효황후 민씨를 모두 높여부르는 결정사항을 나열한 것 또한 매우 중요하며, 명성황후가 추존황후가 아니라는 증거들 중에 하나이다. 왕비를 왕후로 진호(進號)한다는 문장에서의 왕후는 왕비가 사망한 후에 높이는 의미로 조선왕조 내내 시호(諡號)의 의미로서 사용한 왕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계급을 높여부르는 의미의 왕후이다.

그렇다면 다시 "追冊明成王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라는 문장만 떼어서 국문으로 번역하면, 추책(追冊)이라는 동사는 "追冊" 이후의 모든 문장에 동시에 걸쳐지는 역할이 됨으로,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책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추책하고,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추책하였다" 또는 "명성왕후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추책하였다"로 번역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당시의 황태자였던 순종황제와 황태자비인 순정효황후 민씨는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럼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을 높이는 추존의 의미인 "추책(追冊)"을 했다는 번역문이 되어 버리기에, 현재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제공되고 있는 국역문과 한문원본은 모두 틀린 오역이자 틀린 표점표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고 번역을 해야 올바른 것이 되겠는가?
우선 한문 원문의 표점을 祭圜丘, 卽皇帝位 改國號曰大韓, 尊王太后爲明憲太后, 追冊明成王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에서 "祭圜丘, 卽皇帝位, 改國號曰大韓, 尊王太后爲明憲太后, 追冊, 明成王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로 바꾸고 한 문장으로 국역해야 올바른 번역이 된다.

제대로 번역하자면,
"원구단에서 천지의 신께 제사를 올리고 난 후에 황제의 위에 등극하면서 국호를 바꾸었는데 대한이라고 정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신 황제께서는) 왕태후를 명현태후로 존봉(=직첩을 높여 책봉)하고 동시에 또는 더불어서 명성왕후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이다.

우리가 음식점에서 추가로 뭐를 달라고 할 때의 "추가"라는 단어의 한자어를 보면 "追加"이다.
살아있는 왕태자와 왕태자비를 죽은 사람 취급해서 책봉했다고 할 수 없는 만큼, 고종태황제 행장의 추책(追冊)의 추(追)는"더불어서 또는 동시에 또는 연달아서"라고 번역해야 올바른 것이다.

한자 사전에서 추(追)의 뜻을 찾아보면, "잇닿다" 또는 "서로 이어져 맞닿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왕태후를 명현태후로 존봉하고 이어서 - 추(追) 왕후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책봉 - 책(冊)하였다"로 번역되어야 올바른 번역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명현태후로 존봉한 것이 가장 나중의 일이지만 왕실의 웃어른을 먼저 배치하여 기록하는 장유유서 예법에 비춰봤을 때에, 명현태후의 존봉 사실이 가장 먼저 나온다고 해서 이상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하였던 고종실록 황제등극기사와 대례의궤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선원보략수정의궤(1902), 경효전일기, 명성황후 어제행록 등등의 왕비책황후(王妃冊皇后) 또는 왕후책황후(王后冊皇后)의 책(冊)은 책봉(冊封)의 책(冊)이지 추존(追尊) 또는 추봉(追封) 또는 추책(追冊)의 의미도 없으며, 추존 또는 추봉 또눈 추책의 약어로서의 책(冊)도 아님이 역사 서지학적인 비교 분석법에 의해 분명해졌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황후 책봉을 추존이라고 기록한 하단에 설명할 선원보략수정의궤(1902)항목 내의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 총록의 기록은 역사 서지학적 비교연구결과 오류인 것이다.
4.1.2.1. 追의 의미에 대하여: 위 뻘글에 대한 반론
역사 서지학(?) 운운 장광설을 펼쳤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 주장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바로 글자의 의미이다. 追는 뒤 따른다는 뜻으로, 보통 이런 경우에는 '전에 했어야 했는데 안/못한 것을 나중에 한다'는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이다. 당장 예로 든 '추가'만 보아도 그렇다.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같이 주문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追) 더한다(加)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상이 죽고 사는 문제가 전혀 관련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벼슬이나 호칭을 올려준다는 '추존'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초 죽고 사는 문제와 관련 없다. 그저 시점이 뒤늦게(追) 올려준다는(尊) 의미이다. 대부분 죽은 사람이 추존의 대상이 되니까 사전의 풀이 같은 데에서 죽은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한다는 식으로 해설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의 追冊도 그저 책봉의 시점이 늦었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시점을 밝히지 않으려 했다면 그저 冊 한 자면 충분했을 것이다(추책이라 하지 않은 여러 의궤들). 이미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라 追를 덧붙인 것일 뿐이다. 追冊과 冊이 큰 차이 없다.

표점과 번역에 대해서 말하자면 기존 표점과 번역이 맞다. 사실 追冊은 황후에만 해당할 것이다. 당시 태자, 태자비가 살아 있었으니 追를 쓸 필요가 없다. 여기에 한문 관습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위 장광설대로 하자면 원문을 "追冊明成王后爲皇后, 以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 식으로 썼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작문은 문법으로만 글을 배운 초학자나 할 것이다. 우리 사료에서는 물론 중국 사서에서도 이러한 책봉, 제수 관련된 내용에서 '누구'를 '무엇'으로 삼았다고 하면, 맨 처음에나 以'누구'爲'무엇' 하지 그 이후에 연이어 쓰는 문장에는 '누구'爲'무엇' 정도만 쓴다. 심지어 처음 나올 때에도 '누구'爲'무엇'이라고 쓸 수도 있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누가' '무엇'이 되었다."고 하겠는가. 반란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아니, 그보다 학교에서도 以A爲B라고 할 때 以가 생략될 수 있다고 문법으로 가르치지 않나? 이렇기 때문에 번역문에서 追冊은 명성왕후에게만 해당시키고 왕태자, 태자비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追 한 글자를 가지고 장광설을 펼친 것은 '죽은 뒤에 받은 존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러니까 애써 '이어서 책봉했다' 하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역사 서지학적(이게 도대체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으로 글자와 문장을 가지고 썰을 풀게 아니라 원칙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을 공식적인 호칭으로 인정할 것인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받은 최종적인 호칭이 공식적인 호칭이다. 대상이 살았든 죽었든 관계 없이 최종 공식 호칭이다. 승하한 명성왕후를 책봉하였나 추책하였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한제국 조정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호칭을 올렸는가 중요하다. 명성황후가 공식 호칭이다.
4.1.2.2. 追의 의미에 대하여: 위 뻘글에 대한 반론에 대한 반론
위의 반론을 작성한 사람은 그야말로 뻘글이다
음식점에서 주문하지 못한 것을 나중에 주문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추가를 설명하였으나, 이미 먹고 있던 음식에 사리를 추가하였다고 치자 그런 후에 라면사리가 부족하여 사리를 더 달라고 주로 말을 한다. 그렇다면 "더 달라"는 말은 추가가 아니라는 소리인 것인가? 한문으로 적시한다고 하여 한글인 "더 달라"는 말이 "추가"라는 단어와 별개의 단어인 것처럼 설명하는 자체가 어거지인 것이다.

또한 순종실록 부록 고종태황제 행장의 기록인 "追冊明成王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사인 "책봉하다(冊)"의 표기를 중복을 피해서 맨 앞의 명성왕후에만 표기했다는 점을 망각하였다.
누구를 뭐로 삼았다라고 할 때의 삼았다는 행위와 예식 등을 표기한 것이 "책봉하다(冊)"이이다. 그런데 책이 추책이면? "나중에 책봉하였다"가 동사로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히 동사를 각 문장마다 살려서 축약없이 한글로 번역하면, "명성왕후를 황후로 나중에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나중에 책봉하고, 왕태자비를 나중에 책봉하였다."가 되며, 이 문장에서 중첩되는 부분을 생략하여 현대 한글로 번역하면 "명성왕후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죽은 사람들이니 ) 나중에 책봉하였다"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례의궤를 단 한번이라고 읽어본 사람이라면 저런 뻘글 같은 반론을 펼칠 수가 없다. '국역 고종대례의궤 상/하, 전통예술원 음악사료강독회 저, 민속원'을 바탕으로 설명하겠다.

고종은 황구단 또는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치른 후에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에 관료들의 하례와 문안인사를 받는다. 그런 후에 명현왕태후를 황태후(조선시대의 왕대비)로 책봉하는 것이 아니라 명현태후로 존봉(=지위를 높이는 것)하는 의식을 치른다. 왜 그렇게 했으냐면, 명현태후의 남편인 헌종이 황제가 아닌 "대왕" 신분의 시호를 가졌기 때문이고, 헌종을 황제로 추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현왕태후를 명현황태후로 책봉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왕후를 황후로 책봉하는 책봉례와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는 책봉례와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책봉하는 책봉례를 하루에 다 거행하였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역사드라마에 나오는 고증이 잘못된 화려한 왕위 즉위식을 책봉례에도 거행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 왕의 즉위식은 주로 선왕의 상장례 중에 거행하였음으로 티비 역사드라마에서 나오는 고증이 완전히 잘못된 화려한 즉위식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왕의 즉위식은 선왕의 장례기간임으로 주로 각 궁궐 정전의 문 앞에서 간소하게 치렀고, 즉위식이 끝나면 왕위에 오른 다음 왕은 바로 선왕의 빈전으로 가서 머리를 풀고 곡(哭)을 하여야만 했다.

고종황제의 등극식을 기록한 대례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황후책봉례와 황태자비책봉례는 아래와 같이 진행하였다. 고종황제가 덕수궁 중전인 중화전으로 나아간다. 그런 후에 만조백관들이 중화전 안으로 입시하여 들어온다. 책봉금보와 책봉금책을 신하가 내시를 통해서 황제에게 바치고, 황제를 금보와 금책을 받았다가 다시 황후 빈전과 황태자비궁에 전달할 담당 내시와 담당 관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고종황제는 책봉문을 낭독한 후에 만조백관의 하례와 인사를 받은 후 내전(內展)으로 들어가고, 금보와 금책을 받은 관리와 내시가 황후 빈전과 황태자비궁으로 가서 궁녀들에게 전달하며, 궁녀들은 책봉금보와 책봉금책을 받아서 황후는 빈전 안에 진설하고, 황태자비궁에서는 궁녀들이 황태자비에게 전달하였다가 황태자비가 받은 후 즉시 다시 궁녀들에게 내어 맡기는 것으로 책봉례의 거행은 종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追冊明成王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의 "추(追)"는 고종황제의 황제 등극식 "다음 날에 이어서"로 "책(冊)"은 "책봉례(冊)를 거행하였다"로 번역하여야 맞는 것이고, 대례의궤상의 예식의 진행 순서 기록에도 부합하는 번역이 된다.

더군다나 아래의 문단에서 기술한 왕실족보인 선원보략을 수정하자는 대한제국의 황실 일족이면서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완순군 이재완의 상소문을 옮긴 승정원 일기에서는 고종황제의 등극을 기록한 대례의궤와 명성황후의 국장을 기록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보다 그 후대의 기록인대, 승정원일기에서는 분명히 완순군 이재완이 황실족보인 선원보략에 명성황후로 추대되었다는 의미로 "황후 추존"이라고 기록해야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의 기록보다 시기 상으로 더 늦게 발행된 선원보략수정의궤에 실린 완순군 이재완의 동일한 상소문을 보면 "추존"이란 말이 빠지고 그 자리에 책봉을 의미하는 "冊"을 사용하였고, 이어지는 분문에 "왕후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왕태자비를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즉 기록물의 생산연대별로 보면... 대례의궤>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승정원일기>선원보략수정의궤>고순종실록 순이다

따라서 서지학적으로 고순종실록이 절대적 우위의 위치에 있지도 아니하거니와, 고순종실록의 편찬자가 일본 총독부 주관이었기에 서지학적으로도 신뢰성을 무한대로 부여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또한 승정원일기의 경우 필사본으로만 작성되었고 단 1부만 작성하던것이 관례였으며, 보관도 왕이 기거하고 정사를 펼치는 궁궐의 중심건물인 정전인 중화전 근처에 보관하였기에, 경운궁대화재 이후 수정되거나 재편찬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승정원일기의 경우 고종 이전에도 종종 재제작된 적이 있기 때문이고, 정조의 경우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아예 없애버리는 세초(洗草)를 영조에게 간청하여 시행해버리는 바람에, 현재의 우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마주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축약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상상이 가미된 역사적 해석의 한계 속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정조대왕이 만들어버리셨다.

또한 승정원일기는 필사본이고 실로 묶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어놓았기에 추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어느 부분이라도 필사본으로 작성해서 끼워놓아 바꿔치기를 했을 일말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다. 고순종실록을 조선총독부가 편찬하면서 승정원일기를 참고하였으나, 승정원일기를 온전히 보존하였다고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일본에 의한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이라는 학설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승정원일기의 고순종 시대의 조작도 무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선원보략수정의궤는 작성후 여러 권으로 작성되어 전국의 실록보관창고인 실록청에 보관하였고,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발행을 끝냈다는 잠과 어람용으로도 의궤는 별도로 작성되는 것이 관례라는 점을 보면, 완순군의 상소문에 "추존"이라고 하였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오기이거나 완순군 개인의 의견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대한제국정부가 이를 선원보략수정의궤에서 바로 잡아 기록함으로서 대한제국의 공식입장은 "추존"이 아니라 "책봉"임을 명시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이는 추존과 책봉이 이미 죽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뭐가 중요한 가??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공자의 예기에서 나온 "죽은 자를 산 자와 동등하게 대우한다"라는 가르침과 더불어 명성황후가 추존이냐 책봉이냐에 따라 고종황제의 황위를 있는 순종황제의 출신성분이 엄연하게 달라지는 즉 가계계승과 봉사손 지위의 위계가 흔들리는.. 그 당시에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라는 점을 현대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관련 지식을 잃어가면서 나오는 혼란인 것이다. 고종 자신도 흥선대원군의 친아들 또는 철종의 아들이나 헌종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 익종 즉 효명세자의 아들로서 즉위한 것이라는 점을 보면, 왕통의 계승은 누구의 족보를 이어가는 가에 따라 왕권이 강화될 수도 약화될 수도 있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영조가 "삼종의 혈맥"을 매우 강조한 것처럼 말이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정조대왕의 증손자이고, 고종은 고손자인 족보관계였었는데, 고종이 문효세자의 아들로 왕위를 이음으로서 왕실족보상으로는 헌종과는 형동생 사이가 되어버리고, 고종의 법적 할아버지는 순조, 법적 증조할아버지가 정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왕실족보상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촌수로는 정조대왕의 동일한 증손자 지위가 되어버렸다.

왕위계승은 단지 한 국가의 왕위를 잇는다는 개념도 있지만, 전주 이씨 이성계 가문의 가계계승권과 이성계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을 누가 잇느냐의 매우 중차대한 유교적 관념과 논쟁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명성황후의 황후위가 추존이냐 책봉이냐의 논쟁에 있어서 왜 대한제국이 추존이라고 하지 않고 책봉이라고 하였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1차와 2차에 대한 예송논쟁을 왕위의 혈통이라는 관점으로만 보면 절대로 이해할 수 가 없고 왕위와 봉사손(종손)이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봐야 완전히 이해가 되듯이, 그리고 인조가 자신의 생부를 박박 우겨가면서 원종으로 추존한 이유가 바로 종손의 혈통을 어떻게 이어가는가?라는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만, 명성황후의 추존이나 책봉이냐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명성황후의 정식명칭이 민비가 아니라 "명성황후"이다라고 규정하는 것보다 더 중차대하고 중요한 문제가 황후위의 추존이냐 책봉이냐인 것이다.

그리고 추존황후는 후호(后號)를 절대로 올릴 수도 없었고, 부여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 예법이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고종황제가 붕어하고 난 뒤에 황제의 제호(帝號)가 "태(太)"로 정해지자 명성황후의 후호를 정하는 후호 단자를 순종황제에게 올려서 수망인 ""태(太)"로 정하였는데, 명성황후의 후호는 사실 고종황제의 제호가 정해졌을 때 결정된 것이라고 봐야 하는데, 왜냐하면 황후의 후호는 황제의 제호를 같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후호를 정하는 후호단자롤 순종황제에게 올려서 수락하는 절차를 거친 것은 법적인 정당성을 갖추는 형식적 요식행위였을 것이다.

따라서 "명성황후"가 정식 명칭이 아니라 "명성태황후"가 정식 명칭인것이다.

4.2. 명성황후책봉 금책과 금보

명성황후책봉 금책 - 고궁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https://www.gogung.go.kr/mob/searchView.do?pageIndex=1&cultureSeq=169LJE&searchGubun=ALL1&searchText=%EA%B8%88%EC%B1%85

명성황후책봉 금보 - 고궁박물관 홈페이지 설명
https://www.gogung.go.kr/searchView.do?pageIndex=10&cultureSeq=168LJE&searchRelicDiv4=&searchGubun=ALL1&searchText=%EB%AA%85%EC%84%B1%ED%99%A9%ED%9B%84

4.3. 문화재청의 세계기록유산 기념메달 제작 및 판매

관련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1008054700005

4.4.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는 세계기록유산이면서 동시에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참고하는 제1차 사료체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 승정원일기는 일기를 작성하는 관리가 한자를 직접 필기체로 쓴 경우가 많아서 해독이 어려웠으나 다행이도 초서의 흘림체로 작성된 본문을 활제체로 교정교감하여 영인본으로 발간이 되었고, 또한 원문을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제공하고 있지만 완전한 한글번역본 완간에는 1백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이 되는 어머어마한 역사의 숨은 보고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승정원 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9월 18일(갑진, 양력 10월 13일)의 12번째 기사 "황제에 올랐으므로 고사를 상고하여 대사령을 행한다는 봉천승운 황제의 조령"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於今年九月十七日, 告祭天地于白嶽之陽, 卽皇帝位, 定有天下之號曰大韓, 以是年爲光武元年, 改題太社·太稷, 冊王后閔氏爲皇后, 王太子睿諱爲皇太子'
이를 번역하자면, "금년 9월 17일 백악(白嶽)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1년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쳤으며,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명성태황후가 추존황후가 아닌 책봉황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종 34년 정유(1897) 9월 14일(경자, 양력 10월 9일)의 9번째 기사에서는 "장례원 경 김영수(金永壽)가 삼가 아뢰기를,
“황후를 책봉한 뒤에 빈전의 명정(銘旌)을 고칠 길일을 일관 김동표(金東杓)에게 택하게 하였더니, 음력 9월 18일 신시가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날 이 시각에 거행하되, 고유전(告由奠)은 같은 날 조전(朝奠, 발인 전날에 도로(道路, 길)의 신에게 관이 무탈하게 잘 운구되기를 빌면서 동시에 집을 떠나게 되는 망자에게 술을 바치는 예식)과 아울러 행하고, 명정을 고친 뒤의 별전은 때에 따라 설행하겠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날 11번째 기사에서 "또 아뢰기를,
“이번에 황후를 책봉할 때의 정사와 부사는 궁내부로 하여금 차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상주합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관리들조차도 사망한 왕후를 "대행왕후"로 부르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행왕후"를 황후로 높이는 방법은 추존 또는 추봉이라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을 성리학적 지배이념과 명나라 예법을 모를리가 없는 관리가 "추존(追尊)" 또는 추봉(追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게만 사용할 수 있는 "책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는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의 주민등록법 상에서도 장례의 발인이 되어 땅에 뭍혔더라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행정안전부가 관리하는 주민등록 전상망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명성태황후는 실질적으로 사망을 했고 조선의 황제와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도 법적으로는 사망신고 이전인 상황임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황후로 책봉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다.

고종 34년 정유(1897) 10월 12일(무진, 양력 11월 6일)의 15번째 기사인 "대행 황후에게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책봉하고 마음이 흡족하여 은전을 베푼다는 내용의 봉천승운 황제의 조서"의 기록을 보면, "오늘날 위대한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데에는 실로 황후의 도움이 있었다. 하늘의 보살핌이 극진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음덕이 있어 짐이 황제의 칭호를 받고 황후도 함께 존귀해졌으니, 새로운 천명을 맞아 선대를 빛내고 후세에 은택을 끼치게 되었다. 황후의 거룩한 공이 아름답게 드러난 것을 돌아볼 때, 황후에게 큰 호칭을 올려 높이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상법(常法)을 상고한 다음 천지(天地), 종묘(宗廟), 태사(太社), 태직(太稷)에 공경히 고하게 하고, 본년(本年) 음력 10월 11일에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를 책봉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명성태황후 시호반포문은 "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가 지어 올린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4.1. 국역 고종대 승정원 일기의 명성황후 "추존" 기록에 관하여

고종시기의 승정원일기가 국역되어 있기는 하나,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딱 한가지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국역의 저본(底本)으로 무엇을 삼았느냐에 대한 학술적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편찬과정을 보면, 조선왕조실록 편찬과정에서 반드시 사관의 사초와 함께 승정원일기를 참고하였으나,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 있어서 승정원일기의 빠른 필기체 한자를 알아보는 조선인들에 의해 승정원일기가 조선왕조실록의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순종 실록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편찬되었고, 서울대 규장각 소장 및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고종시대 비서원일기 해제를 보면 조선통독부 조선왕조실록 편찬위에서 고순종 시기의 흘림체 승정원일기를 읽기 쉬운 정자로 옮겨적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나무위키나 한국어 위키백과의 승정원일기 항목을 보면, 승정원일기는 소실이 자주되었고 이를 개수하였지만 원본과 얼마나 달라지게 개수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설명이 늘 따라 붙는다. 1888년 고종 시대에서도 승정원일기가 화재로 소실되어 개수되었지만, 얼마나 원본과 달라졌는지 후대의 우리는 알 길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일제에 의해 정자체로 옮겨진 승정원일기는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어떤 내용을 첨삭했는지를 현대인은 모른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는 여러 권을 제작하여 분산 보관하였기에 서로 비교할 수 있지만, 승정원 일기는 분상용 책이 단 한권도 제작되지 않은 흘림체 한자를 사용한 유일본으로만 제작되어 전해지고 있기에 삭제되거나 첨가된 부분이 어느 부분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실록, 대례의궤, 선원보략수정의궤 등에서 "명성황후 책봉"이라고 대한제국 정부가 학실하게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 상의 '추(追)'에 '존(尊)'이라고 한글자 집어넣는 것 쯤이야 [11] 손쉬운 조작이 가능하기에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고종의 승정원일기의 저본이 일본이 정자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흘림체 한자로 작성된 원본인지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며 역사 연구자는 이를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이는 현대의 대한민국 메이저 신문사들이 신문에 수록한 기사들이 100년 후에는 역사적 자료로 활용될 것이지만,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이 전부 사실인 팩트(fact)만 기사로 송고했다고 간주하기 어렵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읽고 있는 신문기사를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1백년 후의 우리 후손들은 해당 신문기사가 오보인지 거짓인지 알기 어려워지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가 조선왕조실록보다 기록량이 방대하고 자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특히 고순종 시대의 승정원일기 기록의 신빙성 비교 및 비판없이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 이해와 해석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인 것이기에, 고전번역원에서 국역한 고종대 승정원일기의 저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반드시 규명해야 명성황후 추존론 분쟁의 마침표들 중에 하나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4.5. 선원보략수정의궤

선원보략이라는 것은 조선왕실의 족보를 말하는 것인데, 왕실족보인 선원보략을 수정한지 오래되어서 명성황후의 승하와 발인과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 선원보력을 수정해야한다고 주청을 1900년에 완순군 이재완이 올리게 된다.

고종 37년 경자(1900) 5월 2일(임인, 양력 5월 29일)자 승정원일기 26번째 기록에서 궁내부내대신 겸 종정원경(宮內府內大臣兼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왕실족보인 선원보략을 수정하는 주청을 고종황제에게 주청을 올리는 글에서 "光武建元, 皇帝陛下大君主進號, 皇帝陛下卽皇帝位, 明成皇后追尊皇后, 皇太子冊皇太子 (광무(光武)로 건원(乾元)한 일, 황제 폐하(皇帝陛下)에게 대군주(大君主)의 칭호를 올린 일, 황제 폐하가 황제에 즉위한 일, 명성황후를 황후에 추존(追尊)한 일, 황태자를 황태자에 책봉(冊封)한 일)"이라면서 명성태황후를 황후로 책봉한 것을 "추존"한 것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으며 승정원일기 원문이미지 상에도 분명히 "追尊(추존)"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있어서 이전과 다른 흐름이 등장하는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에는 책봉이라고 기록하다가 이 기사에서만 추존이라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추존황후론을 따르면서 명성태황후를 깎아내리는 부류에서는 활용하기 좋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의궤하면 우리가 주로 정조의 화성 융릉 참배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나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또는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화려한 반차도만을 기억하고 그러한 화려한 그림이 의궤의 전부인 것마냥 착각하고 있는 상황이 대부분이겠지만, 의궤는 그 의궤를 발행하게 된 행사나 예식을 치르기 전부터 왕 또는 황제의 명령과 각 관청에서 왕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과 답변 및 관공서 간에 오고간 문서와 지출내역이 의궤의 맨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고종 37년 경자(1900) 5월 2일(임인, 양력 5월 29일)자 승정원일기 26번째 기록도 선원보략수정의궤에 당연히 수록되어 있는 것임으로 승정원일기와 선원보략수정의궤는 서로 간에 교차검증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승정원일기는 기록담당 관리의 필사본이고 의궤는 국가공인 검증을 거쳐서 활자본으로 인쇄된 기록임으로 의궤의 기록이 조선의 공적인 기록이며 공식적인 조선정부의 입장으로 이해하고 우선시 해야하는 것이기에 교차검증을 함으로서 명성태황후가 추존인지 책봉인지를 살펴봐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유한 선원보략수정의궤(1902)[12] 원문 9페이지에 보면 위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완순군 이재완의 주청글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10페이지에서는 "皇帝陛下卽皇帝位 明成皇后冊皇后 皇太子冊皇太子(황제폐하께서 황위에 즉위하신 후에 황후로는 명성황후를 책봉하시고 황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셨다)"으로 기록하였다.

즉, 동일한 완순군 이재완의 주청 내용이 승정원일기에서는 "追尊(추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를 2년 후에 다시 활자판으로 인쇄하여 국가적으로 발행한 공식기록인 선원보략수정의궤에서는 "책봉"을 의미하는 "冊"으로 바뀌어 의궤를 발행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승정원일기 즉 고종시대에는 비서원일기라는 문서를 작성하는 부서인 비서원은 경운궁 정전인 중화전 인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비서원일기는 필사본 단 1부만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경운궁이 거의 전소하다시피되는 "경운궁 대화재"가 1904년에 발생하였고, 고종시기에는 유난히도 각 궁궐마다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기에, 이 완순군 이재완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비서원일기 즉 승정원일기가 경운궁 화재 이후에 개수또는 첨삭되었는지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방법인 사료학적 검토와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고 선행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연구결과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인지라, 승정원일기의 완순군의 "추존"발언은 신빙성이 상당히 낮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승정원일기는 필사본이고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 의궤류를 작성하는데 참고가 되는 제1차 사료이지만,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의 의궤류들은 인쇄본이고 국가의 관리들에 의해 철저히 검증하고 교정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국가가 공적으로 발행한 문서들이자 기록들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둘 다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 의궤를 놓고 봤을 때에 기록의 최종점인 의궤의 기록이 공식적인 기록이고 조선왕조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됨으로, 명성태황후는 추존된 황후가 아니라 책봉된 황후라는 점은 더욱더 명확해 진다.

그러나 이미 일제 식민사학설을 주장하고 고종-순종 실록의 기록상의 문제점을 문제삼아 실록에서 제외한 민족주의 사학계의 입장에서 볼때 이는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기록의 근거로 삼은 순종실록의 고종 행장 자체가 다이쇼 8년(1919) 연호를 쓰면서 고종을 수강 대왕(壽康大王) 순종을 사왕 전하(嗣王殿下)로 하고 있으니 고종-순종 실록을 근거로 명성황후라고 주장하는것 자체가 모순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승정원일기야 말로 당대 충실한 기록하여 왜곡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기록들을 담은 원전 이며 고종-순종실록은 일제가 편찬을 주도한 곡필의 대명사이다. 승정원일기는 일제에서 개입한적이 없고, 순조실록 이후 특정가문이 조정을 좌우하며 실록 기록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대폭 절하되었고 고종과 순종실록은 왜곡 정도가 심해 읽어보면 태평성대나 다름이 없고 그래서 학계에서는 19세기 이후 기록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등 다른 사료를 중심으로 보는 추세다.

위의 글에서 순종실록에 기록된 고종황제행장에 다이쇼 연호를 사용했다면서 기록의 신빙성이 없다는 뉘앙스의 글을 작성한 논리대로라면,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 모든 기록의 신빙성이 없어진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왜냐하면 인조 이전까지는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병자호란 이후로는 청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여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모든 공문서와 개인편지까지 작성되었다
그래서 다이쇼 연호를 사용한 근거로 기록을 부정하게되면 조선왕조 뿐만 아니라 고려와 삼국시대의 모든 기록과 문화유산에 세겨진 모든 기록과 심지어 직지까지 즉 우리나라 역사기록이 모두 통째로 부정되는 모순이라는 억지일 뿐이다. 왜냐하면 모두 중국황제의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제국은 1910년에 멸망하여 황제일가는 이왕공으로 격하되었기에 조선시기에 명나라/청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듯이 일본 천황의 연호를 사용해 년도를 구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1] 예외로 후궁임에도 무품으로 책봉되는 빈이 있었는데, 중국의 교명을 받은 원빈 홍씨나 수빈 박씨등이 이에 해당한다. [2] 이 서술의 의미는 종법상 사도세자는 정성왕후의 자식이고, 영빈 이씨는 생모지만 법적으론 남이었다는 의미이다. [3]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10월 10일 정축 1번째기사, ""왕후(王后) 민씨(閔氏)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 이달 8월 22일 조령을 격소(繳銷)하라."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10월 22일 기축 5번째기사,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를 순경(純敬)으로, 전호 망단자(殿號望單子)를 덕성(德成)으로, 능호 망단자(陵號望單子)를 숙릉(肅陵)으로 하였습니다." [5]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1월 3일 양력 4번째기사 [6]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1월 3일 양력 3번째기사 [7]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1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대행 왕후의 시호(諡號) 망은 ‘문성(文成)’ 【온 천하를 경륜하는 덕을 갖춘 것을 ‘문(文)’이라고 하며 예악을 밝게 갖추고 있는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 ‘명성(明成)’ 【온 천하를 굽어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예악을 밝게 갖추고 있는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 ‘인순(仁純)’ 【어진 일을 하고 의로움을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며 중정(中正)의 덕을 갖추고 화락(和樂)한 것을 ‘순(純)’이라고 한다.】 으로 하고, 능호(陵號)의 망은 ‘홍릉(洪陵)’, ‘희릉(熹陵)’, ‘헌릉(憲陵)’으로 하며 전호(殿號)의 망은 ‘경효전(景孝殿)’, ‘정효전(正孝殿)’, ‘성경전(誠敬殿)’으로 상주(上奏)하였는데, 모두 수망(首望)대로 하였다. [8]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1월 29일(기미, 양력 3월 2일), "대행 왕후의 시호는 부망인 명성(明成)으로 하였다. - 사방을 두루 비추는 것이 ‘명(明)’이고, 예(禮)와 악(樂)이 밝게 갖추어진 것이 ‘성(成)’이다" [9]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5일 양력 1번째기사 "태극전(太極殿)에 나아가 대행 황후(大行皇后)의 빈전(殯殿)에 올릴 시호(諡號)를 친히 전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10월 11일(정묘, 양력 11월 5일) 9번째기사 [10]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빈전에 시호를 올린 것에 대하여 조서를 반포하다" [11] 실제로 명성황후의 황후 책봉 사실을 왕실족보에 기록하자는 완순군의 상소 내용을 기록한 고종실록, 선원보략수정의궤, 승정원일기 중 '추존'이라고 명시된 것은 승정원일기가 유일하며, 규장각이나 장서각에서 제공하는 원문서비스에서도 "추존"이라는 글자의 확인이 가능하지만 조선총독부가 정자로 옮겨놓은 것을 원문으로 제공하고 있다. [12] 규장각 소장목록 - 奎(규) 14138이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은 '광무팔년갑진 선원보략수정의궤(光武八年甲辰 璿源譜略修正儀軌)'로 명기되어 있고, 두 곳 모두 원문을 이미지로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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