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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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5년 |
인천광역시 | |
직업 | 화가 |
1. 개요
20~21세기 인천을 대표하는 화가제16대 한국미술협회 인천광역시지회 부회장(2021~) 출처1
2016 인천국제아트페어(IIAF) 운영위원장 출처 출처2
2. 상세
30년경력의 서양화가이자 명화실 대표 명화실 사이트. 명노선 작가는 2002년 캐나다미술교류전을 시작으로 유화, 수채화 등을 한다. 명 아트크루'라는 전시회를 해마다 열고 있다.명노선 씨의 인생을 얘기할 때 그림을 빼놓을 수는 없다. 논현초 교장선생님이던 부친을 따라 그는 논현동 사택에서 자랐다. 당시 완전 시골이었던 논현동은 그에게 많은 예술적 감흥을 주던 곳이었다. 사택 앞 큰 나무를 스케치북에 옮기길 좋아했고 송월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자유공원과 인천바다를 화폭에 그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다. 7남매 중 막내였던 명 화백에게 엄마는 '그리움'이었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명노선의 삶은 텅 비어있었다. 우울감이 너무 커서 그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바닷물이 빠진 바다에 배 한 척이 쓰러져 있는데 마치 내 삶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쓰러진 배 한 척을 그려서 학교에 냈고 미술 선생님께 불려가서 엄청 혼난 기억이 있습니다. 왜 쓰러진 배만 그리냐고 말이죠.", "소래포구는 제 유일한 놀이터였어요. 소래철교만 건너면 내 부족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 철길을 걸었어요. 철교 끝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것 같았죠."라고 기사에서 말했을 정도이다. 출처 소년의 그리움과 외로움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블로그 인물작가회 아름다운 큰그림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한 명 화백은 졸업 후 입시미술학원을 차렸다. 13년 간 미술학원은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은 망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는 길가로 내몰렸다. 집에 전화를 하려해도 10원짜리 동전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부인과의 오해도 생겼고 결국은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명 화백에게는 인생의 쓰디 쓴 맛이 찾아왔다. 막노동부터 보험회사, 명화 위작, 콩국수 배달까지 안 해본 일 없이 마구잡이로 일을 시작한다. 어느 날 콩국수 배달 일을 할 때였다. 새벽에 일어나 콩국수와 콩 국물을 받아서 각 공급처에 배달하는 일은 새벽에 도착해야 당일 만든 국수와 국물을 받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콩국수 재료를 받으려고 새벽 같이 나갔지만, 항상 1등을 놓치는 것이었다. 평상시 보다 더 서둘러 새벽 4시에 나갔는데 누군가 큰 트럭에 물건을 던지고 내려왔다. 그는 그의 눈을 의심했단다. 두 다리가 잘린 남자가 시동을 걸더란다. 다리도 없는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거래처를 뚫고 일등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모습에 퍼뜩 생각이 스쳤다. "좌절하지 않고 성실만하다면 나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재개에 성공했다. 링크 링크2
2.1. 가족 관계
- 아버지: 명재식(교장)
- 장남: 명재영 디자이너
3. 기타
- 한국 미술협회 회원 인천 미술협회 서양화분과 위원장- 환경미술협회 서양화분과이사(기획운영위원)
- 인천남동구예술협회 미술분과회장. 16 아트페어 운영위원장
- 세계평화미술대전 초대작가
- 동춘동 바위섬 소묘및회화 미술지도, 신세계 문화센타 유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