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9:47:37

마에다 토시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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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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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토시이에
前田利家 (전전리가 / まえだ としいえ)
( 1539년[1] 1월 15일 ~ 1599년 4월 27일[2])
파일:마에다 가몬(검은 배경).svg
마에다 가문의 매화 일본명 카가 매화 그릇 가몬[3]

1. 개요2. 생애
2.1. 오다 노부나가 휘하2.2. 도요토미 정권에서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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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이자 다이묘. 오대로의 한 사람이자, 에도시대 카가 번(加賀藩)[4] 마에다 씨의 시조.

2. 생애

2.1. 오다 노부나가 휘하

오와리 지방의 호족이었던 마에다 토시하루(前田利春)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이누치요(犬千代). 어려서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들어갔으며, 노부나가 휘하의 엘리트 부대인 아카호로슈(赤母衣衆) 창설 멤버이자 필두로 활약한다. 그도 그럴 것이 통칭 '창의 마타자(槍の又佐)'로 불릴 정도로 창의 명수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인 180cm의 키[5]에 6m가 되는 장창을 들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다고 하며, 젊었을 때는 호쾌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559년, 노부나가의 이복동생인 쥬아미(拾阿弥)가 자신의 칼을 훔치자 쥬아미를 노부나가의 앞으로 데리고 가서 훔친 칼을 자신에게 돌려주고 동료를 처벌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가볍게 한, 즉 그 쥬아미가 한 짓은 별 뜻 없는 그런 행동이라고 대답하였다. 격분한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앞에서 동료를 단칼에 베었고, 화가 난 노부나가는 토시이에를 해고하였다.[6]

그러나 토시이에는 해고되었음에도 2년에 걸쳐 오케하자마 전투나 이나바 산성 공략 등에서 자기 혼자 마음대로 참가해서 사이토 가문의 용장 아다치 로쿠베에를 죽이는 등 군공을 세우게 된다.[7] 결국 2년 만에 노부나가도 용서하면서 오다 가로 복귀하게 되었고 전공을 인정받아 오히려 봉급은 더욱 늘어났다.[8]

하지만 토시이에는 이때의 가난한 생활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가신들에게 주는 봉록이 적었고 돈을 사용하는 것에 크게 인색하였다. 삿사 나리마사가 8천명을 이끌고 토시이에를 공격하자 토시이에의 가신들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려 병력은 2500명밖에 모을 수 없었다. 평소 가신들의 봉록을 가증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토시이에에게 묵살당하던 마츠 부인은 토시이에에게 찾아가 돈과 함께 전장에 나서라고 말하는 둥 핀잔을 주었지만 회의 중인 토시이에와 그의 가신들의 앞으로 가서 "만약 성이 함락된다면 토시이에님은 성으로 돌아오시지 말고 전사하시고 가신 여러분들께서도 전장에서 전사하십시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죽겠습니다. 끝까지 싸우다 전사합시다."라는 식의 말을 하였고 마츠 부인의 진심이 담긴 이 말을 들은 가신들은 평소 적은 봉록을 잊고 필사적으로 싸워 토시이에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후에는 형인 토시히사가 병약하여 무사로서 전장에 설 수 없다는 이유로 노부나가의 명을 받고 마에다가의 가독을 토시이에가 잇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서 야심이 있던 토시이에가 노부나가에게 청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토시이에는 출세하여 이제는 노부나가의 우마마와리(馬廻)[9]가 되었으며 그 때문에 전장에 직접 나설 일은 거의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틈틈히 전공을 세워서 점점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1574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10]가 되었다. 그 후에는 카츠이에를 따라서 각지에서 농민반란을 진압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후츄 3인중이라 불리며 다이묘가 되었다. 노부나가가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계속 두지 않고 전투가 있는 곳으로 전지를 바꿔서 계속 파견했고, 1581년에 노토(能登) 1국을 가증 받아 영지 23만석의 쿠니모치가 되었다.

2.2. 도요토미 정권에서

1582년 6월, 토시이에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때마침 토시이에는 카츠이에의 밑에 있었고 이에 따라 개인적인 교분이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와 카츠이에의 중재에 노심초사했다. 토시이에는 노부나가의 명으로 카츠이에의 요리키가 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츠이에의 밑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교전을 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토시이에는 본래라면 별동대와 합류해야 하는데 갑자기 철군하고 만다. 이 철군 때문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는 설이 주로 떠도나, 실제로는 토시이에도 히데요시 군세랑 맞서 싸워서 사상자를 내긴 했다.[11] 아무튼 토시이에가 철군은 했을지언정 모반은 뜻은 아니었는지, 그 후에도 잠깐 동안은 카츠이에의 밑에 있었고 카츠이에도 토시이에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동안의 공을 칭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히데요시측에 투항했고,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츠이에 측의 무장이었던 사쿠마 모리마사(시바타 카츠이에의 조카)를 죽이고, 모리마사의 영지였던 카가(加賀)국을 몰수해 토시이에에게 카가(加賀)국의 2개 군(郡)을 가증함으로써 그를 중용했다.

그 후에는 히데요시의 심복으로서 지속적인 공을 쌓았고 일본을 장악한 히데요시가 대륙 정복의 야심에 불타오르자 그 첨병으로 출진하게 된다. 그러나 직전에 명과 화친이 맺어져 출진하지 않고 일본내에 남게 된다.

1594년에는 종3위의 관직을 받게 되었으며 관직의 서열상으로는 오히려 토시이에보다 석고[12]가 높은 우에스기 카게카츠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13] 이것은 오다 가의 가신 시절부터 함께 한 토시이에를 믿었기 때문에 외부세력인 우에스기와 도쿠가와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부러 토시이에의 힘을 키워준 것이라고 추정되며 더욱이 히데요시와 토시이에는 서로 맹우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1598년이 되어 노령에 접어든 토시이에는 병을 얻어서 은퇴한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의 징조를 느낀 히데요시는 2인자 도쿠가와 견제를 하는 역할을 바랐기에 토시이에의 은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년 8월 히데요시는 결국 죽었고 죽어가면서도 토시이에에게 히데요리의 후원 및 지지를 부탁했다고 한다.

1599년이 되자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사적 혼인을 금하는 정책을 깨고 정략결혼을 통하여 자신의 세력을 급격히 성장시킨다. 그것에 제동을 걸은 것이 토시이에로 당시 마에다가의 석고는 83만석 정도였지만, 256만석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14]이었다.

그러나 토시이에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여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는 도요토미 가문에게 먼저 손절당한 뒤 도쿠가와 편에 서기 시작해 결국에는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물리친 후 1603년 쇼군이 된다.

3. 평가

원래 거칠었던 토시이에의 성격도 나이를 먹으면서 온유해졌고 이 때문에 많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토시이에를 좋아했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의 신분이 낮았을 때부터 부부 단위로 교우를 가졌으며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후로도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친구로서 사귀었다고 한다. 일본을 통일한 이후 폭군이 된 히데요시도 토시이에의 간언만큼은 들어주었다는 설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며 말년에 히데요리를 맡긴 것도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도요토미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실력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망이 모였는데 히데요시 사후 둘로 갈라진 무단파와 문치파 모두 토시이에의 말만큼은 거스르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전일본 중에서 유일하게 양자의 중재역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의 사후 야심이 있었으면 일본을 가질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도 있으며 도쿠가와도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야 직접적인 행동에 옮겼다.

반면에 가족 관계에는 다소의 불행이 있어서 원래 4남이었던 그가 마에다가의 가독을 잇게 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당시 마에다가의 가주였던 토시히사가 병약하여 병역을 치를 수 없다는 이유로 세력확장 때문에 인재가 아쉽던 노부나가가 그의 등을 밀어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토시이에가 음모를 꾸며 노부나가에게 탄원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거나 갑자기 쫓겨나게 된 토시히사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나 후에 토시이에와 화해하기 위해서인지 토시히사는 출가[15]했고 토시이에도 자신이 부재중의 대리인으로 형 토시히사를 내세우기도 한 것을 보면 화해했다고 추측된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조카인 마에다 케이지와의 관계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후세의 창작이라고 생각된다. 케이지 자신도 마에다 가문에서 나가며 가족을 남겨두고 간 것을 보면 양자의 관계는 좋지는 않더라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겨울철 케이지가 물을 덥혀놓았으니 탕에 들어가라고 권하여 토시이에가 탕에 들어갔는데 실은 냉탕이었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것은 후세의 창작인 듯 하다. 하지만 케이지가 토시이에에게 장난을 자주 쳤다는 것은 진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삼촌에게 그렇게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촌이자 아내인 마츠와는 금슬이 무척 좋았던데다[16] 아이를 많이 가지는 사람이 많았던 옛날 사람이라는걸 고려해봐도 총합 11명이라는 자식을 둔 걸로도 익히 알려져있다. 그러나 최후까지 도요토미 가문을 택하고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던 토시이에와 달리, 마츠는 토시이에 사후 그보다 빠르게 시국을 읽고는 아들들에게 '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니들 아버지만은 못하니 걍 기어라' 라고 가문 방침을 못박으면서 사실상 도요토미 가문도 여차하면 포기할 수 있는 식으로 태세전환을 했고, 그런 빠른 태세전환 덕에 오히려 마에다 가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다이묘로서 존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여담

  • 토시이에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도 젊은 시절에는 남다른 기행을 저질렀으나 토시이에는 그보다 한층 더 해서 가부키모노였다. 그렇다보니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여성용 의복을 자신의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하거나 털가죽을 걸치거나 긴 창을 가지고 다니거나 했다. 늙어서는 시동들에게 "젊었을 때 어느 정도 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을 그리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점이 조카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명.
  • 1560년 전후로 부상을 당해 애꾸눈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는 토시이에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참전한 전투인 이노우 전투(稲生の戦い)[17]에서 적군의 미야이 칸베에(宮井勘兵衛)가 쏜 화살이 오른쪽 눈 밑에 명중했음에도 "아직 적의 수급을 하나도 거두지 못하였다."며 화살이 꽂힌 채로 미야이 칸베에의 목을 거둔 일화에서 기인한다. [18]
  • 노부나가와는 젊었을 때 와카슈도의 관계였는데 후에 토시이에가 나이를 먹고 그것을 공개하자 주변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의 상식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당시의 다이묘들은 모두 중도를 당연히 받아들였다.
  • 부인인 호슌인 부부 관계가 아주 좋았고 둘 사이에 자식들도 많았다. 카가번 초대 번주 마에다 토시나가는 마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다만 토시나가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복동생인 마에다 토시츠네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물려줘 토시츠네는 카가번(加賀藩)의 3대 번주(藩主)가 된다. 둘 사이의 딸들 중에 셋째 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고 넷째 딸은 히데요시가 양녀로 삼아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보내 히데이에의 정실이 되었다. <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부부 사이가 좋아 토시이에가 측실이 거의 없고 측실들이는 것도 꺼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토시이에는 5명 정도의 측실을 두었다.[19]
  • 쥬아미를 베어죽이고 집에서 쫓겨나 무직이 되었던 시절 먹고 입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인지 유독 그 시절에 대한 발언이 남아있다. "자기가 힘들 때 말을 걸어오는 자야말로 진정한 친구"라 하였으며 이 때의 경험 탓인지 상황적으로 힘든 자를 도와서 그의 신임을 얻는 방법을 사용했다. 카츠이에를 배신했을 때도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그에게 원망을 사지 않았으며 히데요시가 가톨릭을 금하자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한 다이묘의 후원을 하고 그를 자신의 부하로 삼는 등 처세술에도 몹시 뛰어났다. 다만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거쳐서인지 에 집착하는 기질이 있어 수하 가신들에게 봉록을 적게 주는 짠돌이였다고 한다.
  • 출신지는 오늘날의 아이치현에 해당하는 오와리지만 오늘날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도 많이 사랑받는 무장인데 도시이에가 이 지역의 영주를 지냈기 때문. 그 당시에는 카가(加賀)라고 불렸는데 토시이에가 주인공인 NHK 대하드라마 < 토시이에와 마츠>의 부제도 '카가 100만석 이야기'이다. 또 카가번(加賀藩)의 마에다 가문이 거성(居城)으로 삼았던 성(城)이 카가에 있는 가나자와성(金沢城)이다.
  • 중년이 넘어선 이후에는 학문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가토 기요마사 등 후배 무장들에게 영주로서 학문을 익히도록 권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 말년에는 정원 조성법을 배워 대규모 정원을 직접 설계하고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일본의 삼대 정원 중 하나이자 가나자와시의 특급명물이며 국가지정 명승지인 '겐로쿠엔'이다. 1630년, 마에다 토시이에부터 시작해 1840년까지 무려 200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식생의 종류와 풍경의 기교에서는 삼대 정원 중에서도 탑급으로 꼽힌다. 참고로 겐로쿠엔의 옆에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의 가신이자 역사상 유일한 조선인 출신 사무라이 와키타 나오카타가 4대에 걸쳐 완성한 정원 쿄쿠센엔이 위치하고 있다.
  • 토시이에 사후 토시이에의 영지 일부인 노토국은 그의 차남 마에다 토시마사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카가국은 장남으로 이미 엣추(越中) 1국의 다이묘였던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토시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전투 후 토시마사의 영지 노토1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몰수된데 반해 토시나가는 동군으로 서군 다이묘들과 싸웠기에 전후 논공행상에서 영지(서군에 가담한 토시마사의 노토1국과 서군 다이묘의 영지 일부)를 가증받아 카가, 노토, 엣추 3개국에 걸쳐 120만 석의 거대한 영지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에도 막부가 세워짐으로써 마에다 가문은 120만 석을 가진 카가번(加賀藩)의 주인이 되었다. 3대 번주(藩主) 마에다 토시츠네[20] 시절에는 토시츠네가 노년에 은거를 하면서 120만 석 중 18만 석 정도를 각각 차남과 삼남에 분배해 지번(支藩)을 세워 카가번의 최종 고쿠다카는 1,025,000석(실제 고쿠다카는 1,338,000석)이 되었고 에도 막부 시기에는 여러 번(藩)(신판, 후다이, 토자마)들 중에 가장 높은 고쿠다카(石高)를 가진 번이 되어 막말까지 존속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내내 마에다 가의 카가번은 유일하게 100만 석을 넘는 최대 번으로 많은 특혜를 누렸다. 카가 번주(마에다 당주)는 쇼군과 도쿠가와, 마츠다이라 유력자만이 앉을 수 있는 상석 오오로쿠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1국 1성령[21]의 예외를 받아 가나자와 성 이외에도 코마츠 성을 재건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혜 조치는 대정봉환, 메이지 유신, 폐번치현 등 일련의 반 막부 사건에 마에다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낳았고 결국 카가 번주 마에다 가는 102만 석에 달하는 석고와 위상에도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이는 72만 석 시마즈와 36만 석 모리가 메이지 유신 주도로 공작 작위를 받은 것에 대비된다.[22]
  • 5남 마에다 토시타카(前田利孝)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즈케(현 군마현) 시치카이치(七日市)번 1만석을 따로 받아 독립했다.

5. 대중매체에서



[1] 1536년 또는 1537년의 설이 있다. [2] 음력 3월 3일 [3] 마에다 가문은 매화를 가몬으로 삼았다. [4]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일대 [5] 지금도 일본에선 180 넘으면 꽤나 키가 큰편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인 평균 키가 155cm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거구다. [6] 원래대로라면 죽을 죄였으나, 시바타 카츠이에 등의 탄원으로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 [7] 다른 가문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토시이에는 거부하였다. [8] 오와리 통일전 이후의 봉록이 100관 정도였는데 오다 가로 복귀한 직후의 봉록은 300관 정도였다고 한다. [9] 이름처럼 말을 타는 무사로 다이묘의 경호나 연락을 맡았다. 현대의 개인비서겸 연락장교에 해당한다. [10] 일종의 파견무장이다. [11] 이는 카츠이에와 토시이에는 토시이에가 카츠이에를 친부라고 부를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으며 기록이 얼마 없어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이미 자신의 휘하장수 상당수가 히데요시로 넘어가면서 패배를 직감한 카츠이에가 그를 보냈다는 설. [12] 당시 토시이에는 약 83만석이었고 우에스기는 약 120만석이었다. [13] 도쿠가와는 대체로 마에다와 관위가 같거나 한 등급 높았다. 가령 임진왜란 발발 당시 마에다는 종사위하 참의였고, 도쿠가와는 이미 종이위 권대납언이었다. 히데요시 사망 당시 도쿠가와는 정이위 내대신이었고, 마에다는 권대납언이었다. 도요토미 입장에서 도쿠가와를 견제하는 용도로 마에다를 키울 요인은 있었겠으나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2인자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였다. [14] 당시 토시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맹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어서 7본창에게도 인망이 높았으며 히데요시랑 같이 오다 가문 출신의 원로격인 그의 위상은 석고의 규모와 상관없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사이가 안 좋기로 소문난 무투파 가토 기요마사와 문치파 이시다 미츠나리 두 앙숙의 충돌을 중재할 만큼의 발언력도 있었기에 만약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낸 순간 토시이에를 중심으로 친도요토미 가문이 결집할 수 있었다. [15] 출가한 사무라이는 가문의 일에는 직접 연관되지 않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이에 따라 말을 듣지 않던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케다 신겐도 출가한다고 위협을 가한 적이 있다. [16] 정략혼이 많은 이 시기에 꽤나 드문 연애혼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건 친한 사이이자 주군이었던 히데요시 부부도 연애혼이었다는 것. [17] 노부나가와 오다 노부카츠 간에 벌어진 가독 상속 싸움. [18] 야마우치 카즈토요 하후돈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19] 드라마 내에서도 마츠 이외에 이와, 치요보의 2명의 측실이 등장한다. 노히메와 키츠노의 2명이 나오는 오다 노부나가는 많고 120명이 넘는 측실을 들여 네네와 마츠를 기함하게 만들었고 작중에서도 5명의 측실이 등장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하면 적지만 어쨌든 작중에서는 측실이 좀 나오는 편. [20] 토시이에의 4남, 토시나가의 양자 [21] 1개 쿠니(国) 혹은 1개 번에 1개의 성 소유만을 허락하여 번의 위세를 누르고 유사시 막부의 무력 동원에 손쉽게 제압당하게끔 한 조치. [22] 어찌보면 당연하다. 공작 작위는 유신의 주역인 삿초 번주에 더해 도쿠가와 가주( 도쿠가와 이에사토, 이후 한참 뒤에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받았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이와쿠라 도모미 산조 사네토미처럼 원래 신분이 높았던 이들, 공경 중에서도 최상위인 고셋케만이 받은 작위로 사실상 메이지 유신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쇼군 밑에 남았던 카가번은 쇼군보다 아래에 위치하는 것이 합당하며 쇼군 가 바로 아래 반열의 무가인 고산케, 흔히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알려진 유신삼걸도 처음 부여된 작위는 후작이었다. 마에다 가는 그나마 협조하지 않고 방관만 해서 후작이라도 받은거지 오우에츠 열번 동맹을 주도하며 메이지 정부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오슈 센다이 번은 원래 70만 석 수준의 대영주였음에도 해당 건으로 신정부에 단단히 찍혀서 10만 석급 다이묘 취급받고 백작으로 굴러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분가였던 시코쿠 우와지마 번의 우와지마 다테 가가 본가와 동렬인 백작이었다가 후작으로 승급하면서 본가보다 위상이 높아져 버린 것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