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3:05:41

벨기에의 루이즈 공주

루이즈 마리 아멜리에서 넘어옴
<colcolor=#000000>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필리프 공자비
벨기에의 루이즈
Princesse Louise de Belgique
파일:Louise_of_Belgium,_Princess_of_Coburg.jpg
이름 프랑스어 루이즈 마리 아멜리
(Louise Marie Amélie)
네덜란드어 루이세 마리 아멜리
(Louise Marie Amelie)
독일어 루이제 마리 아멜리
(Louise Marie Amelie)
출생 1858년 2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사망 1924년 3월 1일 (66세)
바이마르 공화국 비스바덴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필리프 공자
(1875년 결혼 / 1906년 이혼)
자녀 레오폴트 클레멘스, 도로테아
아버지 레오폴드 2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형제 레오폴드, 스테파니, 클레망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결혼3.3. 불륜과 소송3.4.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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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 레오폴드 2세 마리 앙리에트 왕비의 장녀.

친척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필리프와 결혼했다. 결혼 후 각종 스캔들을 일으키고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파일:Princess_Louise_of_Belgium_(1858-1924).jpg
어린 시절의 루이즈 공주
1858년에 브라반트 공작 시절의 레오폴드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리에트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 후계자가 될 아들을 원했던 레오폴드 2세는 딸 루이즈가 태어나자 매우 실망했지만 할아버지 레오폴드 1세는 루이즈를 귀여워했다.

루이즈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레오폴드 2세는 아들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딸과 부인에겐 무관심했다. 어머니 마리 앙리에트는 아이들을 엄히 교육시켰지만 주로 가정교사에게 자식들을 맡겼고, 아이들을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훗날 루이즈는 자신은 부모님으로부터 어떠한 친밀함이나 애정도 느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형식적이고 냉랭한 가족 사이는 외아들이었던 루이즈의 남동생이 사망하고 더 악화되었다.

루이즈는 호기심이 많고 활발한 아이로 자랐다. 또한 거짓말을 자주 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3.2. 결혼

파일:Coburg_Philipp_Louise.jpg
루이즈 공주와 필리프
1875년, 17살이 되기 직전의 루이즈는 5촌이자 6촌인[2]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필리프와 결혼했다. 필리프는 당시 영국, 벨기에 등 여러 왕실 가문을 배출한 유럽 최고의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헝가리계 분가,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의 수장이자 뒷날 불가리아 왕국 초대 국왕이 되는 페르디난트 1세의 맏형이었다.[3] 그는 매우 부유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 루돌프 황태자와 친밀한 사이였다.[4] 그의 영향력은 이후 루이즈와의 결혼 생활의 트러블에서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개입할 정도였다.[5] 사족으로 이 남편 필리프는 루돌프가 마이얼링에서 사망했을 때 함께 있던 목격자 중 하나였다.

루이즈에게 있어 필리프와의 첫날밤은 끔찍한 기억이 되었다.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결혼한 루이즈는 충격을 받고 맨발로 신혼방을 뛰쳐나갔다. 깊은 밤 잠옷 차림으로 정원 깊은 곳에 박혀 울다가 발견(...)되면서, 성질 더러운 레오폴드 2세는 딸 교육을 안 시켜서 망신을 당하게 했다고 아내를 못 살게 굴었고, 어머니의 회유로 루이즈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야 했다. 필리프는 고압적인 남편이었다. 그는 14살 연하의 아내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려고 했다. 필리프는 사소한 것들까지 다 통제했으며 악몽같은 첫날밤 이후 루이즈에게 술을 먹인 채로 자신이 소유한 에로 소설과 관능적인 예술품들을 보여주며(...) 자신의 취향에 맞게 아내를 성교육시켰다.

남편에게 불만을 가진 루이즈는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처음 오스트리아에 도착했을 때 벨기에에 비해 복잡하고 엄한 오스트리아 궁중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루이즈는 점점 사교계에 적응하면서 일종의 파티걸이 되었다. 루이즈는 매력적이었지만 굉장히 사치스러웠으며[6]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루이즈의 추문은 멀리 벨기에까지 퍼졌다. 어머니가 처신을 똑바로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통해 딸을 여러번 설득하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 완전히 루이즈에게 질려버린 마리 앙리에트 왕비는 둘째딸 스테파니가 결혼할 때 네 언니랑 상종하지 말라고 조언하기까지 했다.

3.3. 불륜과 소송

파일:Louise Belgium.jpg
중년의 루이즈 공주
1895년에 루이즈는 10살 연하의 크로아티아 출신 오스트리아 장교 게자 마타쉬스 백작과 사랑에 빠졌다. 루이즈는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펑펑 쓰며 요란하게 만났고, 오스트리아의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루이즈와 마타쉬스의 관계를 알았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7] 루이즈를 불러들여 그녀가 유부녀라는 걸 상기시키고, 루이즈와 마타쉬스의 궁정 출입을 금지시켰다. 굴욕감을 참을 수 없었던 필리프는 마타쉬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루이즈는 빚이 너무 불어나 감당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루이즈는 돈을 구하기 위해 자기 속옷까지 팔았다. 그럼에도 사치부리는 걸 멈추지 않아 어음에 동생의 사인을 위조해 물건을 샀다. 이런 수치스러운 행각에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필리프한테 아내 간수 좀 잘하라고 닦달하고, 루이즈의 아버지 레오폴드 2세에게도 당신 딸 빚 좀 갚으라고 연락을 취했다. 이 일로 레오폴드 2세는 큰 딸을 매우 미워하게 되었다. 벨기에의 공주라는 사람이 각종 스캔들을 일으키는 걸로도 모자라 빚을 지고, 심지어 그 부담이 돈을 긁어모으는 데 환장하던 레오폴드 2세 자신에게까지 갔으니 말이다. 레오폴드 2세는 딸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져 빚을 대신 갚아주는 걸 거절했다. 루이즈는 마타쉬스와 함께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남편과 빚에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프랑스로 도망친 그들은 오래지 않아 붙잡혔다. 마타쉬스는 위조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고, 필리프는 딸을 되찾은 후에 황제에게 아내가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루이즈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레오폴드 2세의 동의 하에 미리 준비된 정신감정서를 통해 되블링에 위치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4년 후, 마타쉬스는 사회주의자의 도움으로 무죄가 입증되어 감옥을 나왔다. 이때 루이즈는 사람들의 눈에 덜 띄는 시설로 옮겨간 상태였다. 루이즈가 어디에 수용되었는지 알아낸 마타쉬스는 3년 간의 노력 끝에 루이즈를 탈출시켰다. 7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있었던 루이즈는 1905년에 파리의 사법 당국을 통해 그녀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진단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필리프와 정식으로 이혼했다.

하지만 여전히 빚에 쫓기고 있던 루이즈는 아버지 레오폴드 2세가 자신의 몫이 될 어머니의 유산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이즈는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유산을 받지 못한 동생 스테파니와 함께 소송을 걸었다. 결과는 두 공주의 패소였다. 레오폴드 2세는 변호사를 보내 마타쉬스와 헤어진다면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루이즈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1909년에 레오폴드 2세가 사망했다.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정부와 서자들에게 모든 유산을 남겼다. 3명의 공주들은 자신의 몫을 얻어내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동생들은 소송을 포기했지만, 돈이 절실했던 루이즈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결국 원하던 결과를 얻어내진 못했지만, 1913년에 벨기에 정부는 세 공주에게 각각 600만 프랑을 지급하기로 판결을 내렸다.

3.4. 말년

문제는 소송이 끝나고 다음해인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을 치르게 된 벨기에 정부는 공주에게 지급할 돈을 마련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결국 루이즈는 5년 후에야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루이즈는 마타쉬스와 빈에서 살고 있었는데, 적국인 벨기에의 공주가 오스트리아에 머물 수 없었다. 이에 루이즈와 마타쉬스는 곧장 빈을 떠났지만 독일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하지만 마타쉬스는 반란 혐의로 경찰에게 잡혀 2년 동안 부다페스트 근처의 감옥에 갇혔고, 전쟁 동안 루이즈는 파산 신청을 할 정도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루이즈와 마타쉬스는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아야만 했다. 이후 루이즈는 마타쉬스가 사망한 뒤에 비스바덴으로 이주했고, 마타쉬스가 사망한 다음해인 1924년에 마타쉬스의 초상화를 가슴에 안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벨기에의 루이즈 공주
(Princess Louise of Belgium)
<colbgcolor=#fff3e4,#331c00> 레오폴드 2세
(Leopold II)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드 1세
(Leopold I)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Saxe-Coburg-Saalfeld)
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로이스 여백작
(Countess Augusta Reuss of Ebersdorf)
루이즈 도를레앙
(Princess Louise of Orléans)
루이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I)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8]
(Princess Maria Amalia of Naples and Sicily)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
(Archduchess Marie Henriette of Austria)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
(Archduke Joseph of Austria)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공주[9]
(Infanta Maria Louisa of Spain)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 여공작
(Duchess Maria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작
(Duke Louis of Württemberg)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테 공녀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레오폴트 클레멘스
(Prince Leopold Clemens of Saxe-Coburg and Gotha)
1878년 7월 19일 1916년 4월 27일
1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부인 도로테아
(Dorothea, Duchess of Schleswig-Holstein)
1881년 4월 30일 1967년 1월 2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에른스트 귄터 2세
남편 필리프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루이즈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들은 주로 가정교사에게 맡겼다. 아들 레오폴트 클레멘스는 어머니를 매우 싫어했으며 늘 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딸 도로테아도 어머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루이즈가 말년에 파산한 뒤에는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레오폴트 클레멘스는 역사상 단 둘뿐인 비아시아권 출신 대훈위 금척대수장 수훈자이다[10].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하여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는 꽤나 끔찍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카밀라 리비카라는 평민 애인과 결혼을 약속했다가 귀천상혼으로 지위와 재산 상속 자격을 박탈당할까 두려워 약속을 취소했는데, 분노한 카밀라는 레오폴트 클레멘스에게 총을 쏜 뒤 황산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 총으로 자살해버렸다. 약 6개월을 고통에 발버둥치던 레오폴트 클레멘스는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와 아들이 둘 다 신분에 비해 매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딸 도로테아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에른스트 귄터 2세와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사망한다.

5. 여담

  • 자기과시적이며 거울을 바라보는 걸 매우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자기 자식들보다 거울을 더 많이 봤을 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돈으로 칠갑하고 극장에 앉아있는 루이즈를 본 어느 저명인사는 그녀를 두고 '이 시대의 마지막 이브'라고 조롱했다고.
  • 말년에 루이즈는 이미지 개선을 위해 자서전을 냈다. 자서전에서 루이즈는 자신을 철저히 세상에 농락당한 피해자로 묘사했다. 글솜씨는 있었던 것 같지만 워낙 루이즈가 평소에 거짓말을 자주 했으며, 몇몇 주장들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거나 근거가 없었기에[11] 자서전의 내용은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1] '벨기에의 공주 전하'라는 작위는 1891년 3월 14일부터 규정되었다. [2] 루이필리프 1세 기준으로 하면 5촌,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기준으로 하면 6촌이다. [3]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은 필리프의 할아버지이자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공자가 시조인데, 필리프의 사후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 수장 지위는 동생인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에게 돌아갔다가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장남 페터가 자식이 없어 그 조카 라이너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라이너의 아들 요하네스 하인리히가 2010년에 후사 없이 죽으면서(아들 1명이 있었으나 요절, 라이너에게 남동생 1명이 있었지만 귀천상혼을 해서 그 후손들은 계승권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마지막 왕 시메온 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4] 후에 루이즈의 동생 스테파니가 루돌프 황태자와 결혼해 황태자와 동서 사이가 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필리프의 입지는 더욱 커졌다. [5] 필리프의 어머니 클레망틴 도를레앙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부친 프란츠 카를 대공과 이종사촌이라 필리프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6촌이었다. 또한 필리프의 첫째 여동생 클로틸데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당숙인 요제프 카를 대공의 부인이었으며, 둘째 여동생 아말리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남동생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의 부인으로 엘리자베트 황후의 올케였기에, 필리프는 오스트리아 황실과 복잡한 친인척 관계로 엮여 있었다. [6] 루이즈는 후에 자신의 사치가 남편을 향한 복수였다고 변명했다. [7] 루이즈의 여동생 스테파니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스테파니의 남편 루돌프 황태자의 아버지) [8] 페르디난도 1세의 5녀이자 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손녀이다. [9] 카를로스 3세의 차녀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녀이다. [10] 또다른 수훈자는 프로이센의 왕자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11] 남편 필리프가 사실 루이즈의 어머니 마리 앙리에트 왕비를 사랑했다는 등.정신 나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