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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클로드 드 생제르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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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7년 전쟁 이전 경력2.2. 7년 전쟁2.3. 7년 전쟁 이후 경력

1. 개요

Louis Claude, Comte de Saint-Germain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 생제르맹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7년 전쟁 이전 경력

생제르맹 백작은 1707년 4월 15일 롱르소니에 근처 베르탐즈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위 귀족이었지만 형편이 가난했다. 그는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성직자가 되려 했지만 곧 뜻을 바꿔 군인이 되기로 했다. 그는 없는 돈을 긁어모아 준위 계급장을 샀지만 거기서 모종의 문제[1]로 프랑스를 떠나 오스트리아군에 복무했고, 뒤이어 바이에른으로 가서 대령까지 진급했다. 1736년 10월 1일, 생제르맹 백작은 에르가르드 마르게리트 데 라 오스텐과 결혼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 생제르맹 백작은 바이에른군에서 복무하며 전장에서 활약해 소장으로 증진했고, 1745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가 사망하자 잠시 프로이센군에서 복무하다가 플랑드르 전선에서 영국-네덜란드-헤센 연합군과 맞서고 있던 프랑스군 원수 모리스 드 삭스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1746년 10월 로쿠스 전투와 1747년 7월 라우펠트 전투에서 활약해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1747년 프랑스로 돌아온 생제르맹 백작은 그해 7월 새로 조직된 생제르맹 보병대의 대령이 되었다.

2.2.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할 시기인 1756년 중장으로 증진한 생제르맹 백작은 1757년 4월 하노버로 침공한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프랑스군이 점령한 베젤 요새의 수비대를 지휘했다. 그는 자신의 군단 사령부를 이끌고 리페에 자리를 잡은 후 햠으로진격했고 4월 말 립슈타트를 점거했다. 6월 중순, 그는 베르사유에서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과 함께 프로이센을 공격하기 위한 원정 계획을 논의했다. 이후 수비즈 공작은 생제르맹 백작과 함께 작센을 거쳐 프로이센 본토로 진군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757년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서 쇼타우와알스도르프 사이에 배치된 기병대를 지휘하던 생제르맹 백작은 수비즈 공작이 이끄는 본대가 프로이센군에게 박살나자 그들을 엄호하려 애썼다가 프로이센군의 맹공으로 다수의 병력을 상실하고 패주했다.

1758년 2월, 생제르맹 백작은 브레멘에 주둔 군대를 이끌고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과 맞섰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브레멘에서 철수해 바숨, 바일즈하우젠, 베흐타, 뵈르덴을 거쳐 오스나브뤼크로 후퇴했다. 그동안 그의 군대는 대부분의 천막과 군수품을 잃었다. 그해 3월, 생제르맹 백작은 헤르포트 인근에서 클레르몽 백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와 합세했다. 이후 그는 라인강을 도하해 프랑스 본토로 쳐들어오려는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크레펠트로 이동했고 6월 21일 크레펠트에서 연합군과맞서 태세를 갖췄다. 이후 6월 23일에 벌어진 크레펠트 전투에서, 그는 지리멸렬한 지휘를 일삼는 크레펠트 백작 때문에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3시간 동안 몰려오는 적에 맞서 항전했다. 그러나 결국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을 만회하지 못하고 퇴각해 크레펠트 전투의 패전을 면하지 못했다.그 해 9월, 생제르맹 백작은 프랑스군이 베스트팔렌을 향한 반격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 4개 여단을 이끌고 프랑스 본군에서 이탈하여 카스트로프로 진군했다.

1759년 4월, 생제르맹 백작은 14개 보병 대대와 4개 기병 대대로 구성된 군단의 지휘관으로 부임했고 4월 13일에 베르겐 전투에 가담하기 위해 진군했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해 7월, 그는 파더베른과 헤르포트에 주둔하고 있는연합군이 카셀에서 파견된 프랑스 수송부대를 공격하는 걸 막기 위해 하멜른으로 진군했고,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는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슴의 휘하에서 우익에 배치된 제2 보병사단을 지휘했지만 패전을 면치 못했다. 그해 8월, 그는 프랑스군의 퇴각을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760년, 생제르맹 백작은 독일 서부 전선에 투입되어 라인강 하류 방면 프랑스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해 6월, 그는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로부터 코르바흐로 이동하여 자신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7월 10일 브로이 공작은 자신과 생제르맹 백작의 합류를 막으려 들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를 격파하고 생제르맹 백작과 무사히 합세했다. 그러나 생제르맹 백작은 7월 20일 슈발리에 드 무이로 교체되었고 라인강 하류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에서 물러났다.

이후 생제르맹 백작은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의 뜻을 받들어 영국, 하노버, 헤센 연합국과의 화의를 모색하고자 헤이그로 갔다가 외무장관 쇼아줄 공작으로부터 국가 이반죄로 기소될 위기에 몰리자 프랑스에서 도피했고,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5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덴마크로 향했고 1762년 덴마크군 원수로서 군대의 재편성을 담당했다.

2.3. 7년 전쟁 이후 경력

1766년 프레데리크 5세가 사망한 후 프랑스로 돌아온 생제르맹 백작은 라우터바흐 근처 알자스에 있는 작은 영지를 사들이고 그곳에서 농사와 신앙 활동에 전녀했다. 1775년, 파산 지경에 몰린 그는 튀르고 재상의 초대를 받아들여 프랑스 고등법원에 가담했고 10월 25일 전쟁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교 수를 줄이고 군대의 기강과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야전 포대를재편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육군에 프로이센 군기를 도입하여 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았고, 결국 1777년9월 23일 사임했다. 이후 그는 루이 16세로부터 4만 리브르의 연금을 받았다가 1778년 1월 15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1] 일부 자료에는 그가 결투를 벌였다가 법의 처벌을 피해 달아났다고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