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6-04 10:19:12

레서(마비노기 영웅전)/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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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1. 개요

마비노기 영웅전의 캐릭터 레서의 배경을 설명하는 문서.

2. 배경


새벽의 종.
이계의 신 '아라운'의 교도로서, 신의 목소리를 따라 동방 대륙에서 서방으로 넘어온 지
수백 년이 지난 일족의 이름.

신이 그들에게 내려준 힘은 생명의 '영기'를 다루는 힘이었다.
영기라는 것은 생명을 구성하고 정의하는 자아의 힘이며,
죽으면 흘러나와 자연으로 순환하는 영적인 것.

일족은 신의 가르침에 따라 '생명의 올바른 순환을 이룬다'는 교리 아래
생명이 자리 잡은 온갖 '터'에서 그들의 죽음에 의한 영기의 발생과 순환을 감시했다.

때때로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수천의 생명을 꺼뜨리는 사건이 발생하거나
드물게는 강대한 영기를 가진 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
흘러나온 대량의 영기가 터의 자연에 모두 흡수되지 못하고 다른 생명에게 흘러들곤 했다.

그렇게 흘러든 죽은 자의 영기는 산 자에게 이상을 일으켰는데,
인간과 마족, 동물을 가리지 않는 질병 피해와 건강 악화, 흉포해진 짐승의 습격,
강한 영기를 흡수해 각성한 자가 휘두르는 힘과 새로운 전쟁 등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많은 생명의 죽음을 불렀고, 그로 인해 또다시
영기의 대량 발생이 반복되며 생명의 순환이 아닌 죽음의 순환이 이뤄지는 상황.

새벽의 종 일족은 이를 막기 위해 움직여왔다.
전쟁이나 전염병을 미리 막을 수는 없지만,
일족의 힘으로 영기를 다루어 이미 넘쳐흐른 영기를 흡수해 처리함으로
죽음의 연쇄를 막을 수 있었다.

일족의 활동은 그들이 서방 대륙에 도착해 남부 협곡 끝자락에
마을을 이룬 후부터 일족의 임무로서 수백 년간 반복됐다.
자신들의 신이 어떠한 연유인지 더는 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계속된
오랜 시간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온 활동.
영기의 이상을 감시하고, 일족을 파견하여 잠복하고,
어떤 사고라도 벌어지면 임무를 완수하는 나날….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 어느 날,
일족에 얼마 전 6살 생일을 맞이한 한 소녀가 있었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를 뒤로 올려 묶어 단아한 느낌이 나는 소녀였다.

일족의 일원으로서 6살이 되면 영기를 다루는 힘의 수련과 함께,
그 힘을 사용하는 도구이자 무기 '크레스트'를 다루는 체술 수련을 위해
기초 수련에 참가해야 했다.
1년간의 기초 수련 결과와 평가에 따라 수련을 계속 이어가 임무에 편성되거나,
일족의 의식주를 담당하는 일을 맡게 될지 결정되는 식이었다.

소녀도 나이가 참에 따라 기초 수련을 받게 된 지 3일째였던 날.
그날도 소녀는 익숙지 않은 수련을 시작했다.
소녀 외에도 짧은 머리의 다른 소녀가 함께 '첫 번째 종'이라 불리는 어른의 지도에 따라
어설픈 자세로 팔과 다리를 뻗어대고 있었다.
두 소녀 모두 오른쪽 손등에는 글자 같기도, 그림 같기도 한 모양의 크레스트가 은은히 빛났다.

"레서, 저기 좀 봐! 어른들이 임무에서 돌아왔나 봐!"

단아한 느낌의 소녀를 '레서'라고 부른 짧은 머리 친구의 이름은 '리제'였다.
리제는 레서보다 어두운 갈색 단발머리에 씩씩한 목소리와 쾌활한 얼굴을 하고 있어
밝고 활기찬 성격이 얼굴에 잘 나타나는 아이였다.

"두 분이 가셨던 것 같은데."

보통 일족의 임무에 나서는 건 두 명이라는 걸 아는 레서는 의아하단 식으로 말했다.
확실히 저 멀리 마을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마중 받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왜인지 마을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는 게 보였다.

"둘 다 수련은 잠깐 멈추도록 해라. 잠깐 저기로 가보자꾸나."

소녀들을 지도하던 어른이 마을 광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새내기들의 수련 스승이자, 새벽의 종 일족에서 첫 번째 종이라는 지위를 가진,
일족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크레스트를 이용한 체술에는 뛰어나지 않지만, 영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아이들의 기초 수련과 함께 영기를 다루는 능력을 키워주는 수련 스승을 맡았다.
노인이라 할 순 없지만, 중년의 끝자락에 걸친 외모로,
아이들에게는 인자한 어른으로 평판이 좋았다.

"네! 얼른 가봐요!"

리제의 힘찬 대답과 함께 그들은 마을 광장 방향으로 이동했다.
잠시 걸어가 마을 광장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임무에서 돌아와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있던 이의 얼굴이
무척 괴로운 표정이란 게 멀리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엇, 이봐!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부축하던 이가 놀라며 물어봤지만 계속 괴성을 지르고 몸부림칠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변 사람들이 급히 뛰어와 상태를 확인했다.

"영기의 상태가 이상해! 뭔가 뒤섞여 있어!"

"이, 이건…."

"지, 진정해요!"

"이런, 다들 도와줘요. 힘을 일으키고 있어!"

순식간이었다.
그는 괴성을 멈추고 감싸 쥔 머리를 풀더니, 자신을 붙잡고 억누르는 이들을 뿌리쳤다.
그리곤 손이 움직인다 싶더니 곧장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아아! 무슨 짓을!"

뿌리쳐진 이들 중 한 명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몸에 구멍이 뚫린 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캬갹… 크르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공격자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더니 어느새 움직였다.
레서와 리제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일족의 체술로 휘둘러진 그의 손은 경악에 빠져 굳어 있던 남은 한 명의 가슴을 꿰뚫었다.

"으아아아…."

마을 광장의 주변과 외곽에는 여러 사람과 레서 일행이 있었다.
리제는 충격에 빠져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냈고, 레서는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스승님!"

레서가 스승을 부름과 동시에 공격자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거라!"

레서와 리제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스승이 앞으로 나섰지만,
그는 전투에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빠르게 격파당하고 레서와 리제가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그때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와 공격자가 달려오는 방향을 가로막았다.

"아이들을 부탁드려요!"

"리제, 레서! 얼른 도망쳐!"

광장 우물에서 물을 긷던 레서와 리제의 어머니들이 달려온 것이었다.
그녀들은 마을의 가축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고, 임무에 편성된 사람들처럼
체술의 역량은 없었지만, 자신들의 딸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무작정 달려왔다.

그러자 리제가 어머니를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가려다 스승에 의해 붙잡혔고,
레서는 달려가지도, 도망치지도 않고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은 모두 광장으로! 다르칸이 미쳤소!"

스승이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이미 여기저기서 광장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엄마아아아아아!"

"아아!"

갑자기 리제가 비명을 지르고 레서가 신음을 흘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눈앞에서 두 어머니가 무참히 당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어찌 이런 잔혹한 일이…."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두 소녀는 얼어붙은 채 눈물을 흘렸고,
스승은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함에 탄식하며 충격에 빠진 그들의 눈을 가렸다.

그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도착했다.

"나야! 나라고! 뭐하는 거야, 정신 차려!"

"안돼! 제발… 죽으면 안 돼!"

그중 공격자를 아는 사람들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먼저 쓰러져 있던 이들 중 가족을 확인한 사람들은 절망했다.

잠시 후 레서와 리제의 아버지도 차례차례 도착했고, 누가 쓰러져 있는지 보고 말았다.
그들이 말을 잇지 못한 채 현실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이
공격자의 움직임이 이어졌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계속 도착하는 사람들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날, 괴이한 영기가 뒤섞인 통제 불능의 단 한 명이 휘두른
압도적인 힘에 일족이 멸족에 이를 뻔 했던 날.

그가 공격을 멈춘 시점에는 이미 그 손에 일족 대다수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난 후였다.
레서와 리제의 스승은 두 제자의 눈을 가린 채 모든 순간을 지켜봤고,
그런 그를 향해 이 사태를 만든 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영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이것은…."

스승의 눈에 그의 영기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도중에 가진 힘이 모두 다 한 듯 무릎을 꿇고 주저앉더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며 마치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어, 르신… 저는… 제가, 아니…."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던 채로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헉, 헉… 너 따라 움직이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리제의 말에도, 레서는 묵묵히 수련에 임할 뿐이었다.
7년 전, 마을에 일어난 비극 이후, 레서의 일과는 대부분 수련으로 채워졌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버텨내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한 도피적인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다른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마을에서 맡은 잡무가 끝나면
오로지 수련에 몰두했다. 그나마 가끔 리제와 함께 수련하거나 주변을 나서는 정도였다.

숨을 고르던 리제는 무언가 생각난 듯 레서에게 말했다.

"오늘 오후엔 통발 걷으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갈래? 물고기로 영기 흡수도 연습할 겸."

"통발…? 리제는 정말.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아."

레서는 수련을 멈추고 관심을 보였다.
리제는 레서와 다르게, 맡은 일 외에도 마을의 다양한 일을 스스로 나서 돕고 있었다.
수련에서 레서의 체력과 집중력을 따라갈 수 없기도 했고,
일족의 인원이 많이 줄어든 만큼 일손을 더 도와야 한다는 어른스러운 면도 있었다.

"스승님이 사람마다 잘 하는 게 다른 거래.
그리고 넌 체술에서 스승님을 뛰어넘었잖아? 정말 말도 안 된다니까?"

"이건 별로. 마을에 도움도 안 되니까."

레서의 자신 없는 말투에 리제는 귀엽게 코웃음 쳤다.

"흥, 이미 임무조 후보로 정해졌으면서 겸손하기는.
어른이 되면 일족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야."

리제의 말에도 레서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일족의 사람들 모두와 잘 지내고 항상 누군가와 얘기하고 웃고 있는
리제의 모습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리제와 함께 광장으로 나가거나 주변을 나설 때면
그녀가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운지, 또 그들이 그녀를 많이 아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일. 맡게 되는 거… 딱히. 모르겠어. 리제가 같이. 임무조가 된다면 모를까."

천천히, 마디가 끊어지듯 이어지는 레서의 말.
리제는 이런 레서의 말투에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친구이자 같은 비극을 겪고 함께 슬픔을 나누며 극복해온 사이.

레서의 말을 계기로 리제는 생각했다.
단 하나 뿐인, 가족 같은 친구. 레서를 혼자 두지 않아야겠다고.

"그래? 그럼 나도 노력해볼까? 내일부터 수련 시간 두배로!"

리제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레서였다.

"또 임무인가요? 그것도 두 개나? 돌아와서 아직 못 만난 사람들도 많은데!"

스승님께 불평하듯 말하지만, 이미 지령서를 챙겨 넣은 후인
실실 웃는 듯한 밝은 표정의 리제였다.
벌써 수년째, 레서와 리제는 일족의 임무로 외지에 파견되어 영기를 흡수하는 일을 맡아왔고
지금도 새로운 임무를 받아 마을을 나서는 길에 스승님의 배웅을 받고 있었다.

"임무조를 더 늘릴 수 없어 미안하구나.
일족이 세상을 도울 수 있는 중요한 일이니 힘내주거라."

일족의 가장 높은 사람, 첫 번째 종의 지위를 가진 레서와 리제의 스승님.
그는 과거의 비극 이후 크게 줄어든 일족의 수로 인해 수백 년간 반복된 임무 활동을 중단시켰다.
그 후 레서와 리제를 비롯해 비극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시점에
다시 탐색조와 임무조를 편성했다.
탐색조에는 체술은 부족하지만 영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이를,
임무조에는 체술과 영기를 다루는 능력 모두 뛰어난 이로 편성했는데
레서는 이미 어릴 때부터 탁월한 실력으로 임무조 후보가 되었고,
리제는 어느 날부터 눈에 띄게 성장하며 결국 레서와 함께 임무조로 편성되었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괜찮아요."

레서의 말에 스승님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 또 그렇게 말하는구나. 너희들이 임무를 맡아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다."

"근데 스승님 요즘 말이에요, 드디어 레서가 임무 말고 다른데 관심 가진 게 있어요!"

갑자기 주제를 바꾸더니 신난 듯 리제가 말을 잇자 스승님도 기뻐하며 물었다.

"오오, 레서도 이제 좀 보이는 게 생기나 보구나. 그래, 무엇이냐?"

"그냥. 귀여워서. 쳐다보는 거 뿐이야 리제."

"고양이요! 고양이만 보면 이런 표정으로 정신 못 차리고 쫓아간다니까요?"

변명하듯 말하는 레서였지만 리제가 멍한 표정을 흉내 내며 정체를 밝혔다.

"고양이라고? 허허, 그래 고양이는 귀엽지. 그런데 좀 다른 것들도 있지 않으냐.
옷이라던가, 장식품이나, 책 같은 것 말이다."

스승님은 레서가 임무로 마을 밖에 나가는 김에 좀 더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밝아지거나 어떤 것이든 의욕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레서가 대답하길 머뭇거리자, 리제가 어깨동무를 걸며 말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제가 잘 구경시켜주고 있어요.
세상 물정도 제가 먼저 배우고 레서한테도 알려주면서요."

그렇지? 하며 쳐다보는 리제에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서.
그 둘을 보며 스승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그래, 둘이 잘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마침 이번 임무의 첫 번째 장소가 고양이를 모시는
풍습이 있는 마을이란다. 탐색조 얘기로는 고양이가 아주 많다고 하니 레서가 좋겠구나."

레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가는 걸 보며 스승님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법황청에서 인퀴지터가 파견되면서 풍습은 쉬쉬하게 된 모양이다.
이미 이교도로 몰려 죽은 자들이 많으니 마을의 영기를 잘 살펴보고 대응하거라."

"네."

레서가 먼저 대답했고, 리제는 계속 설명에 집중했다.

"두 번째 임무 장소는 콜헨이라는 마을이다. 이곳은 이미 영기가 발생한 게 아니라,
최근에 강대한 영기를 가진 존재가 다수 모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량의 영기가 발생할, 큰일이 일어날 조짐이군요."

스승님의 설명에 리제가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듣고 말했다.

"용병단에 모였다는 것 같구나. 무슨 일을 벌일 셈인지… 아무튼 발생하지 않은 영기를
미리 흡수할 순 없으니, 두 번째로 배치해두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지령서를 자세히 읽어라."

"발생하지 않은 영기… 음, 알겠어요. 지령서를 이따 확인…."

뭔가 생각하듯, 또 정리하듯 대답한 리제는 곧이어 출발을 알렸다.

"그럼 저희 이제 슬슬 출발할게요? 갈까, 레서?"

"응. 출발하는거로. 스승님.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힘차게 말한 리제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마을을 출발했다.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럴 때를 대비해 체술을 수련하는 것이지만 스승님의 눈에는 항상 십수 년 전의
어린아이들로 보였기에 마지막까지도 걱정이 담긴 배웅 인사가 뒤에서 들렸다.
손을 흔들며 스승님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첫 번째 임무 장소 하노크 마을로 향했다.

며칠을 걸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문득 리제가 혼잣말인 듯 아닌듯한 말을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발생하지 않은 영기… 애초에 발생하지 않게 막는 방법…
무고한 희생을 막는…."

어느새 레서와 리제는 하노크 마을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마을을 살피고 있었다.
너무 큰 마을이라 둘러보는데도 온종일 걸릴 것으로 보였고,
스승님이 말한 것처럼 마을 이곳저곳에는 고양이가 많았다.
도착한 첫날에는 가볍게 마을을 둘러볼 겸 숙소를 나온 것이었지만
리제는 어느새 사람들을 웃음 짓게 만들며 환심을 사고 있었고,
레서는 고양이의 관심을 끌어보려 노력하다 하루가 지나갔다.

이윽고 시작된 영기 흡수 활동.
며칠간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며 리제가 알아낸 얘기로는 마을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다.
보름 정도 전 법황청의 인퀴지터와 병사들 몇 명에 의해 하루 만에
수십 명이 이교도로 몰려 즉결심판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풍요를 가져온다는 오래된 전승에 따라 마을 곳곳에 세워진
사당 형태의 건물에서 고양이를 보살피며 때로는 기도를 올리던 풍습.
이미 건물은 모두 불탔고 목숨을 잃은 자들의 영기가 터의 자연에 흡수되고 있었지만
아직 곳곳에 흡수되지 않은 영기가 남아있었다.

"수백 명까지는 아니라서, 터에 흡수되지 않은 영기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

리제가 남은 영기의 양을 살필 때, 레서는 영기가 가진 성질을 보고 있었다.

"분노나 격렬한 느낌은. 전혀 안 느껴져. 그냥 따듯하지만 서늘한. 슬픈 느낌."

"…."

레서의 말에 리제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꺼냈다.

"있잖아, 레서. 지령서에서 본 것처럼 인퀴지터는 우릴 보면 바로 이교도로 심판할 거야."

"응. 멀리서부터. 인퀴지터의 영기가 보이면. 마주치지 않게. 피하라는거였어."

"그렇지…. 그랬었지."

리제는 지령서의 내용을 확인하듯 얘기하더니, 잠시 후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람을 지키는 것과 임무를 완수하는 것, 그중에 무엇이 먼저일까?"

"…응?"

리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레서는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일족의 임무로서 지령을 받고 임무를 완수해내는 나날의 반복 속에
레서의 생각은 임무라는 것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고, 어린 시절부터
집중한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레서를 작은 세계로
몰아가고 있었다.

"흐흥, 아니야. 묻기 전에 나부터 잘 생각해봐야겠어."

조금은 어색하게 얘기를 마무리하는 느낌이었지만,
레서는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알겠다고 할 뿐이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마을의 상점 거리에서 고양이를 안아 든 한 노인이 위기에 처해있었다.

"당신이 한 행동은 분명히 이교도의 증명이오."

말한 자는 법황청의 인퀴지터.
고양이에게 풍요를 빌던 노인을 목격하고 즉결심판을 행하려던 참이었다.
노인이 어떤 말을 해도 인퀴지터의 입장에선 이교도의 증명이 늘어날 뿐,
전혀 설득되지 않았다.

"법황님의 자비로 마을 전체에 미리 경고했음에도 여전히 이교도가 있다니."

검을 빼 들며 말하는 인퀴지터와 두려움에 벌벌 떠는 노인.

"당신을 즉결심판으로 처형하겠소."

인퀴지터가 처형을 선언하며 노인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안돼!"

레서와 함께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리제가 어느새 달려가
인퀴지터와 노인의 사이를 막아선 것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 리제와 인퀴지터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지만
레서는 혼란에 빠져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저 리제가 노인의 생명을 구하려고 한다는 것과 어째서? 라는 생각을 하던 중
며칠 전 리제와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을 구하는 것, 임무의 목적은, 결국 생명을 구하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도중에 인퀴지터와 병사들의 검이 리제를 향해
쇄도했고, 리제가 가까스로 피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레서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리제! 인퀴지터를 이길 순 없어!'

레서와 리제는 인퀴지터의 영기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은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노인을 구하기 위해 뛰쳐나간 리제였고, 레서는 하나뿐인 친구이자 가족인
리제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는데도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제대로 따라주지 못해 자책했다.
생각을 보류하고 무작정 달려가는 찰나, 리제의 오른손에서 희고 검은빛이 일렁였다.
그리곤 리제가 일족의 힘을 해방했다.
"끄아아아아!"

리제가 지르는 비명과 인퀴지터를 비롯한 병사들이 지르는 비명이 울렸다.

'저럴 수는…! 리제, 살아 있는 사람의 영기를 흡수한 거야?!'

인퀴지터와 병사들이 쓰러지며 몸에서 영기가 빠져나와 리제의 오른손에 흡수되는 것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의 눈엔 갑자기 인퀴지터와 병사들이 쓰러진 것으로 보일 장면이었고
다들 경악에 빠져 리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제! 리제!"

레서가 달려가 리제를 부여잡자, 앞으로 꼬꾸라질 뻔한 리제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멈췄다.

"나… 무슨 짓을… 하하…."

힘겹게 말하는 리제를 부축하며 레서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안. 흑. 내가 아무것도…."

레서의 말을 막듯이 리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멋대로… 미안해."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레서, 그때 레서의 눈에 리제의 영기가 다른 것과 뒤섞여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본 적 없는 영기의 상태였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마을로 돌아가야 해."

걱정스러운 상태의 리제를 보며 조급해진 레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리제를 업어 들곤 빠르게 하노크 마을에서 빠져나왔다.


올 때는 며칠이 걸려 왔던 길이었지만,
중간에 최대한 많은 길에 돈을 아끼지 않고 마차와 배를 빌려 이틀까지 단축할 수 있었다.
걸어야 할 때는 최대한 레서가 리제를 업으려고 노력했고, 리제도 부축을 받으면
조금은 걸을 수 있었다. 혼자서 걷게 하면 넘어질 듯 비틀거렸고, 때때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서 레서는 걱정과 함께 조급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 상태로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채 이윽고 그들은 일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광장으로 들어오며 레서가 연신 스승님을 찾아 외쳤다.

"스승님! 스승님!"

멀리서 보아도 리제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고 레서의 목소리가 너무 다급했기에
얼마 없는 일족의 인원이 모두가 뛰쳐나와 레서와 리제에게 달려왔다.

"레서, 리제!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저마다 달려와 리제를 부축하자, 레서는 긴장이 풀려 어질어질해졌다.
이틀간 리제를 업고 오다시피 했기에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레서! 리제!"

멀리서 스승님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레서는 스승님을 마중하듯 다가갔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있던 리제의 입에서 믿지 못할 말이 흘러나왔다.

"이교도를 처단하라."

조용히 바닥으로 깔리듯 내뱉어진 말에 주변에 정적이 일었다.

"이건, 무슨?!"

누군가 던진 한마디와 함께 리제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나 싶더니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레서가 그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자 눈에 들어온 것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마치 십수 년 전에 이곳에 일어났던 비극의 장면과 같았다.

"인… 퀴지터의… 영기가 어떻게…."

지금 리제의 몸을 뒤덮고 있는 것은 강대한 인퀴지터의 영기였다.
이틀 전 사건의 현장에서 봤던 것은 알 수 없는 영기가 섞였다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강대한 인퀴지터의 영기에 눌려 리제의 영기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아아…."

체력도 정신도 이미 바닥난 레서로선 리제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한 충격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레서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인퀴지터의 의지와 힘이 담긴 리제의 공격으로
어느새 대부분의 사람이 쓰러졌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른에서부터 아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까지 모두.
남은 건 레서의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스승님과 레서 뿐이었다.

"레서, 아무래도 그날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구나.
그때는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엔 네가 알 수 있을 테지.
이제 곧 리제는 쓰러진다. 영기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스승님의 말을 듣고 레서가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충격음과 함께 스승님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급히 몸을 받쳤지만 흥건히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의 양은 레서를 절망으로 빠뜨렸다.

"스승님, 안 돼요! 대체 왜 이런 일이!"

울먹이는 레서에게 스승님은 자신의 생명이 끝나감을 느끼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신의… 가르침이나… 일족의 이름보다… 쿨럭. 서로를 아끼고…
세상을 돕는… 그게… 우리란다. 쿨럭."

"네! 알겠으니까! 돌아가시면 안…."

"그렇게 살아가길… 좋은 사람들과…."

레서의 품에서 스승님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많지 않던 일족 모두와 함께, 일족을 이끌던 스승님까지 잃은 이 순간.

레서는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리제가
앞에 있으며 상태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스승님을 바닥에 눕히고 리제를 바라보자 스승님의 말처럼 그녀의 몸을
가득 덮었던 인퀴지터의 영기와 또 다른 영기 모두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리제!"

영기가 빠져나간 리제의 몸이 마치 먼지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레서는 리제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리제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레서를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니었어. 레서… 미안해. 모두에게도… 전부… 나 때문에…."

"아냐! 처음부터 내가! 보고만 있지 않았으면!"

레서에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리제가 손을 들어 닦아주려 했지만
뜻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 욕심이… 돌이킬 수 없는… 아…."

제대로 말하기 힘든 리제의 모습에 레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레서,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 살…."

"안돼, 리제! 안…."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정말 잠깐의 대화밖에 나누지 못하고
리제는 레서의 품에서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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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와 스승님, 그리고 일족 모두를 잃은 레서는 마을을 뒤로하며 다짐했다.

'다시는 가만히 방관하지 않을 거야.
달라질 게 없더라도,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고향을 떠난 레서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콜헨 마을이었다.
일족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마음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서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리제와 스승님이 마지막까지 레서에게 바랬던 것에 대한 응답.
레서는 많은 것들을 가슴에 안고 콜헨에 도착해 용병단을 찾았다.

"여행 중이신가요?"

'무녀? 법황청의, 모리안의 무녀인가.'
마을 중앙의 건물 앞에 서 있던 무녀가 레서에게 말을 걸었다.
레서는 최근의 일로 분명 법황청과 관계된 것엔 거부감이 들 거라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이 사람에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영기에서부터 뭔가 좀 다른 것이 느껴졌지만 잘 알 수 없었다.

"콜헨에 용병단. 있다고 들어서…."

거부감 없이 대답한 레서였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무례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리를 숙이고 우체통 위에 고양이만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칼브람 용병단이라면 저쪽이에요."

레서는 그제야 얼굴을 들고 무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칼브람. 용병단. 음, 이름이 좋은 느낌…."

무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레서는 용병단의 입구에 서서 옷을 가다듬었다.

'리제, 지켜봐 줘. 이번 임무는. 모두를 지킬 테니까.'

잠시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