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8ba><colcolor=#ffffff> 레녹스 루이스 Lennox Lewis CM[1] C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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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녹스 클로디어스 루이스 Lennox Claudius Lewis |
출생 | 1965년 9월 2일 ([age(1965-09-02)]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뉴엄 웨스트햄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96cm / 112kg / 213cm |
체급 | 헤비 |
스탠스 | 오소독스[2] |
복싱 전적 | 44전 41승(32KO) 2패(2KO) 1무[3] |
링네임 | The Lion |
가족 | 배우자 바이올렛 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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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헤비급 복싱 선수.
196cm의 큰 키와 헤비급에서도 굉장히 긴 213cm의 리치에서 나오는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압살하는 타입의 선수였다.
2. 커리어
18세였던 1984년 영국 대표로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복싱 슈퍼헤비급에 출전했으나 8강전에서 당시 미국복싱의 기대주였던 타이렐 빅스에게 판정패하면서 메달을 따내는 데 실패했다.[4] 이후 올림픽에 재도전하기 위해 국적을 캐나다로 바꾸었으며 결국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캐나다 대표로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 때 결승전에서 미국복싱의 또다른 기대주였던 리딕 보우를 만나 1라운드 보우에게 밀렸지만, 2라운드 초반부터 보우의 안면에 정타를 터뜨리면서 결국 2라운드 RSC[5]로 승리했다. 물론 당시 리딕 보우가 뜻밖의 가족사가 터지는 바람에 멘탈이 나간 상태였긴 하지만 이 때 보여준 레녹스 루이스의 경기력은 분명히 인상적이었다.서울 올림픽 직후 영국국적을 회복하였으며 이듬해에 프로로 전향하였다. 루이스가 프로에 데뷔했을 당시 헤비급은 지존무상으로 여겨졌던 타이슨이 사생활 문제로 무너진 상황이었고, 그의 빈자리는 리딕 보우와 에반더 홀리필드가 노리고 있었다. 이 시기 레녹스 루이스는 이 둘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받는 언더독으로 평가받았지만, 과거에 자신에게 패배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타이렐 빅스를 3회 KO로 꺾었고, 캐나다의 기대주였던 도노반 러독[6]도 2회 KO로 압살해버리면서 리딕보우가 갖고 있던 WBC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 도전자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리딕보우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루이스와의 대전을 계속 거부했으며, 결국 WBC 챔피언 벨트를 쓰레기통에 넣는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챔피언 타이틀을 그냥 포기해 버렸다. 이에 WBC는 루이스에게 챔피언 자격을 인정함에 따라 루이스는 경기를 치르지도 않고 WBC 챔피언이 되었다.[7]
싱겁게 챔피언이 된 루이스 앞에는 당분간 적수가 없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4차 방어전에서 뜻하지 않게 올리버 맥콜이라는 복병에게 럭키 펀치를 얻어맞고 2라운드 KO패하고 만다. 이 때 루이스가 턱이 약하다는 약점이 드러나게 된다.[8] 경기 후 루이스는 기존의 트레이너였던 페페 코레아에게 계속 지도를 받기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그를 해고하고 맥콜의 트레이너였던 엠마뉴엘 스튜어트를 새로운 트레이너로 고용했다. 맥콜과의 시합 전부터 루이스의 잠재력을 간파했던 스튜어트는 즉시 그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표했고, 그 덕분에 루이스는 스튜어트의 지도 아래 여러 가지 기술적 결함들을 교정할 수 있었다.[9]
이후 맥콜이 영국에서 인기를 끌던 하드펀처 프랭크 브루노에게 패배하며 타이틀을 내주는 동안 루이스는 라이오넬 버틀러, 토미 모리슨 등의 강자들을 꺾으며 WBC 헤비급 랭킹 1위에 등극했다. 하지만 WBC가 프로모터 돈 킹의 입김 때문에 당시 수감생활을 마치고 링으로 복귀한 마이크 타이슨을 브루노의 1차 방어전 상대로 지명하는 바람에 루이스의 타이틀 도전이 미루어지는 억울한 상황이 발생했다.[10] 모두의 예상대로 타이슨이 브루노를 KO시키며 WBC 챔피언이 되었고, 루이스는 대신에 전 WBO 헤비급 챔피언이자 서울 올림픽 헤비급 금메달리스트였던 레이 머서[11]와의 논 타이틀전에서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타이슨과의 대결을 기약했다.
타이슨은 다음 경기에서 브루스 셀던이 가지고 있던 WBA 타이틀까지 차지했지만, 루이스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르지 않아 WBC 타이틀을 박탈당했다.[12] 이후 공석이 된 WBC 타이틀을 걸고 루이스는 3년만에 다시 만난 올리버 맥콜을 5회 KO로 물리치고 챔피언 벨트를 되찾는다.[13]
챔피언 벨트를 되찾은 후 앤드류 골로타, 섀넌 브릭스같은 강호들을 꺾으며 1999년 3월 WBA 및 IBF 챔피언이었던 에반더 홀리필드와 통합 타이틀전을 치렀는데, 레녹스 루이스가 시종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무승부 판정이 나와서 많은 논란을 빚었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에 벌어진 홀리필드와의 리매치[14]에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홀리필드가 가지고 있던 WBA 및 IBF 타이틀까지 차지하였다. 이후 WBA는 루이스의 첫 번째 방어전 상대로 당시 WBA 헤비급 랭킹 1위였던 존 루이스를 지명했는데, 루이스는 마이클 그랜트를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른 뒤 존과 경기를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존의 프로모터였던 돈 킹은 이 결정에 불만을 품으며 법원에 항의를 하였고, 나중에 루이스와 홀리필드의 경기 계약서에 승자가 존을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조항이 발견되어 루이스는 결국 WBA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만다.[15]
루이스는 이후 그랜트를 2라운드 만에 KO시켰고, 프랑소와 보타를 상대로도 2라운드 TKO승을 거두었으며, 사모아 출신의 하드펀처이자 극강의 내구력 소유자인 데이비드 투아를 상대로도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200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벌어진 하심 라만과의 경기에서는 예상 외로 5회 KO로 패했다. 당시 하심 라만은 크게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경기 결과는 큰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경기 당일 컨디션이 극히 나빴던 루이스[16]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무기력한 경기로 일관했으며 결국 5회에 결정타를 맞고 무너졌다. 이 때 루이스는 이미 36살의 노장이었기 때문에 노쇠화로 경기력에 한계가 온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 7개월 후 미국 네바다에서 벌어진 하심과의 리벤지 매치에서 하심을 시종일관 몰아붙이다가 4회 실신 KO로 깨끗하게 박살내고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하심에게 복수를 성공한 이듬해 그간 떡밥으로 계속 회자되었던 마이크 타이슨과의 경기가 드디어 성사되었다. 헤비급의 두 전설이 전성기를 한참 지나 은퇴를 발표하기 가까워진 시점이 돼서야 경기가 성사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가상 대결이라는 떡밥만 남길뻔 했던 두 사람이 뒤늦게나마 직접 경기를 치른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 경기를 치르기로 합의한 직후부터 양쪽의 신경전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경기 당일 1라운드 공이 울리기 직전까지도 대규모의 경찰병력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링 주변을 지키고 있을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하자 1라운드부터 일방적으로 루이스의 분위기로 흘러갔으며 결국 루이스가 8회 KO로 승리했다.
타이슨을 꺾은 이듬해인 2003년에 당시 떠오르는 동구권 강자였던 비탈리 클리츠코와 맞붙었다. 루이스는 클리츠코의 강한 저항에 밀려서 고전했으나 클리츠코의 안면부 출혈이 심해지는 바람에 결국 루이스가 6라운드 종료 TKO로 이겼다. 클리츠코 측에서는 재대결을 원했지만 38살이었던 루이스는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3. 파이팅 스타일
196cm의 큰 키[17]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체격의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민첩하고 유연한 몸놀림을 갖고 있었으며 펀치력도 강했다. WBC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는 100키로가 안될 정도로 체구가 날씬했는데 이 시절에는 거의 라이트급이나 웰터급 수준의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공격력 측면에서는 현존했던 헤비급 선수 중 역대급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특히 213cm의 긴 리치에서 나오는 스트레이트의 위력은 비교할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이었다.다만 특급 선수 치고는 턱이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선수 시절에 당한 2패는 모두 자신보다 한수 아래의 상대에게 불의의 일격을 맞고 무너진 케이스이며 승리한 경기에서도 상대의 어퍼컷 등에 고생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처럼 맷집이 약하다는 점 때문에 헤비급 최강의 복서를 논할 때 항상 거론이 되면서도 다른 레전드급 선수들에 비해서는 박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긴 리치를 이용한 잽과 스트레이트가 너무 강해서 상대가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스타일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턱에 주먹을 제대로 날린 선수는 몇 되지 않는다. 화면으로 보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잽인데 실제로는 빠르면서도 굉장히 강력해서 이 잽에도 상대선수가 픽픽 쓰러졌다는점.(...)
루이스의 또다른 대단한 점은 어퍼의 허용횟수가 프로무대에서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적다는 것이다. 비록 지긴 했지만 올림픽 결승에서 어퍼를 꽂아 넣은 선수가 리딕 보우였고, 에반더 홀리필드 역시 1차전과 2차전에서 루이스의 턱에 펀치를 넣어 주춤거리게 한 클린히트를 박은 적이 있으며, 기량이 한참 퇴보한 끝물 마이크 타이슨도 초반에 근접거리로 위협적이게 파고들었다. 이는 데이비드 투아나 토미 모리슨같은 A급 인파이터 선수들이 최고 기량을 뽐낼 때도 전혀 시도하지 못했던 것으로 턱이 약한 루이스가 프로 데뷔를 빨리하여 다른 선수들의 기량 하락이 더뎠다면 정말 어떤 양상이 전개됐을지 모른다.
4. 평가
실력에 비해 인기가 없는 편이었는데, 기본적으로 펀치교환이 적은 아웃복싱 스타일인데다 말수가 적고 사생활도 너무 깨끗(?)해서 경기 외적인 이슈가 별로 없었던 탓이다.[18] 그리고 아마추어 시절 캐나다 국가대표로서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던 과거 때문에 영국에서 동시대의 프랭크 브루노나 현재의 앤서니 조슈아만큼의 인기가 없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또 불행인지 다행인지 레녹스 루이스가 헤비급을 평정했던 시절에는 그에게 상대가 될만한 선수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팬들의 기억에 각인될만한 빅매치를 별로 치르지 못한 점도 있다. 루이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빅 흥행카드였던 타이슨은 감옥에 있었고 그나마 빅매치 카드였던 리딕 보우는 계속 루이스를 피해다녔고, 타이슨과의 2연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스타의 반열에 올랐던 홀리필드는 루이스와의 대결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로 전성기가 지난 시기였다. 강자로 평가되었던 앤드류 골로타 역시 시합 직전 진통제를 맞고난 후 부작용으로 시야결손이 일어나서 소송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기대를 받았던 마이클 그랜트, 헨리 아킨완데[19], 섀넌 브릭스[20] 등의 신예들은 전혀 루이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커리어 말미에 마침내 타이슨과 경기를 하긴 했지만, 두 선수 모두 전성기가 한참 지나서 만났다는 게 문제였다.
한편으로 레녹스 루이스가 헤비급을 평정한 이후 헤비급 복싱에서 루이스처럼 압도적인 하드웨어를 내세운 거인 복서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2000년대 이후 헤비급의 몰락을 가져온 노잼복싱의 원조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나마 헤비급 기준에서 평범한 체격조건을 갖고 있었음에도 체급 정상권에 있었던 홀리필드를 루이스가 꺾은 이후부터는 기량과 파이팅으로 승부하는 선수들이 사실상 씨가 말라 버렸고 대신 큰 키와 긴 리치를 활용한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빅맨들이 헤비급을 장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압도적인 체격조건을 내세워 헤비급을 평정했던 비탈리 클리츠코, 블라디미르 클리츠코형제의 노잼 복싱이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루이스 때문에 헤비급이 재미없어졌다는 주장은 좀 과도한 측면이 있다. 프로 경력 초기의 루이스는 결코 밖으로 돌면서 잽을 날리는 성향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파이터에 가까운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1991년 타이렐 빅스와 치렀던 경기를 보면 빅스의 견제를 뚫고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올리버 맥콜에게 불의의 일격을 맞고 패한 후 좋게 말하면 신중한 스타일, 나쁘게 말하면 지루한 스타일로 성향이 바뀌었다. 맥콜에게 패한 후 재기전으로 치러졌던 라이오넬 버틀러와의 경기와 앞서 빅스와의 경기를 비교해 보면 이런 스타일의 변화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커리어 후기에 아웃복싱 스타일이 강해지기는 했어도 블라디미르 클리츠코처럼 극단적인 니가와 전술을 구사한 것은 결코 아니며, 2000년대 이후의 아웃복서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선제공격의 빈도가 훨씬 높은 편이었다.
다만 자신과 상성이 맞지 않는 선수를 만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는 종종 명성에 걸맞지 않는 무기력하고 재미없는 경기를 펼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레이 머서와의 경기가 좋은 예시다. 10라운드로 치러진 이 경기에서 2:0 판정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탓에 상당한 비난을 받았으며 판정논란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커리어 중반기부터 까다로워했던 크리스 버드와는 아예 경기 자체를 회피했으며, 결국 리딕보우가 자신을 피했던 것처럼 IBF 세계타이틀을 버리면서까지 버드와의 경기는 끝내 거부했다.
5. 여담
- 1999년 11월 13일, 에반더 홀리필드와의 헤비급 통합 타이틀전에서 승리하며 언디스퓨티드 챔피언이 되었고, 이후 무려 25년 동안이나 '최후의 언디스퓨티드 헤비급 챔피언'으로 불리고 있었다.
- 자신과 비슷한 신체와 스타일 성향을 가졌으며 다음 헤비급 세대를 지배했던 비탈리 클리츠코가 은퇴하고 나서 비탈리의 복귀를 항상 추천해왔는데 비탈리는 "네가 복귀하면 내가 복귀한다"는 식으로 항상 차갑게 얘기해왔다.
- 2017년 8월 21일, 메이웨더 vs 맥그리거전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복싱 경기 한 게임도 안치른 맥그리거를 메이웨더가 이긴다 한들 50전 전승으로 인정한다는거 자체가 넌센스이며 자신은 이 경기를 굳이 비행기 타고 경기장에서 티켓 사가면서 보고 싶진 않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 2024년 5월 18일, 타이슨 퓨리와 올렉산드르 우식의 메이저 4대 기구(WBA, WBC, IBF, WBO) 헤비급 통합 타이틀전[21]이 드디어 성사되었고, 최후의 언디스퓨티드 챔피언 딱지를 뗄 수 있게 되었다.[22]
- 루이스는 홀리필드와 함께 경기장소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도착하여 두 선수의 경기를 직접 보았고, 아들이 촬영한 9라운드 퓨리의 스탠딩 다운 장면의 리액션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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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식이 스플릿 판정승을 거두며 25년 만의 새로운 언디스퓨티드 챔피언이 되자 자신의 트위터에 그를 축하하는 트윗을 올렸다.
[1]
캐나다 훈장, 멤버(Member)
[2]
왼손이 앞을 향하고있는 오른손잡이 스타일
[3]
KO로 이기지 않은 9승 가운데 판정으로 이긴 경기는 7경기이며 나머지 두 경기는 상대의 반칙플레이로 실격승을 거두었다.
[4]
이후 빅스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5]
refree stop contest, 즉 TKO
[6]
타이슨과 2번 만나서 모두 패하긴 했지만 경기 내용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꽤 기대를 받고 있던 선수였다. 타이슨과 1차전에서는 7회 TKO로 졌는데 심판이 너무 일찍 경기를 끝내버렸다는 논란이 있었으며, 2차전에서도 타이슨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경기로 판정까지 갔다.
[7]
올림픽에서 패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보우는 이후에도 루이스와의 경기를 계속 거부했고 결국 둘은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8]
맥콜이 펀치를 휘두르는 과정에서 눈을 감긴 했지만 타이밍 자체는 완벽한 노리고 친 카운터였으며, 전설이 된 트레이너 엠마뉴엘 스튜어트는 맥콜과 루이스의 경기 비디오를 함께 보며 루이스가 오른손 펀치를 날릴때 가끔 밸런스가 무너지는 나쁜 습관을 철저히 연구해서 만들어낸 카운터라고 훗날 밝혔다.
[9]
이전보다 더 균형 잡힌 자세를 유지하고, 크로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대신에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잽을 사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10]
이때 브루노는 이미 타이슨과 루이스에게 TKO패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경기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하였다.
[11]
루이스는 슈퍼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고 머서는 한체급 아래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참고로 머서의 결승전 상대는 한국의 백현만이었다.
[12]
타이슨은 루이스와 경기를 치르는 대신에
에반더 홀리필드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르지만, 이 경기에서
버스터 더글러스에게 패배한 지 6년 만에 프로 경력 두 번째 패배를 당하였다.
[13]
이 때 경기할 의사가 없이 계속 뒤돌아서면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다가 갑자기 엉엉 울어제끼면서 경기를 포기하는 올리버 맥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화제가 되었다. 당시 맥콜이 약물 중독의 후유증때문에 이런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 한참 후에 알려졌다. 그리고 이미 2년전에 마약 소지죄로 체포되고 이 경기후 한달뒤 집안에서 난동을 피우다가 아내의 신고로 정신병원에 강제 구금되기도 했다. 맥콜은 루이스보다 무려 15년을 권투선수로서 가늘고 길게 커리어를 더 이어가다 2018년에 은퇴하였다.
[14]
당시 공석이었던 IBO 헤비급 타이틀이 걸린 시합이기도 했다.
[15]
2000년 8월 12일,
존 루이스는 당시 WBA 헤비급 랭킹 2위였던
에반더 홀리필드와 공석이 된 WBA 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서 홀리필드는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헤비급 챔피언 4차례 등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6]
영화
오션스 일레븐촬영을 하는 등 당시 복싱보다는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17]
하지만 인터뷰에서는 본인이 헤비급에서 그리 큰 덩치는 아니라고 말했다. 헤비급에서도 195cm의 키는 큰 키는 맞지만 2000년대 이후 헤비급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보이는 선수들은 대부분이 190cm 이상의 키를 가지고 있다. 경쟁력 있는 선수끼리는 딱히 압도적 신체조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18]
다만
하심 라만과 1차전에서 패하고 리벤지 매치가 성사된 후 TV 생방송에 라만과 같이 출연했다가 분위기가 격해지자 주먹싸움을 벌여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평소에 조용한 루이스의 성격에 비춰 봤을 때 의외의 모습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19]
특히 아킨완데는 루이스가 두려운 나머지 아예 공격을 포기하고 무조건 루이스를 끌어안기만 해서 결국 5회에 실격패했다. 역대 챔프 도전자 가운데 가장 비겁한 도전자로 거론될 정도이며, 아킨완데는 이후에도 나름 승수를 쌓았지만 다시는 빅매치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
이들 중 섀넌 브릭스는 그나마 분발해서 나중에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루이스와의 경기는 애초에 미스매치라는 평가를 받았고 결국 5회 TKO로 패하기는 했지만 1회에 클린 히트를 적중시켜서 루이스를 그로기로 몰아넣고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인파이팅을 펼쳐서 상당히 잘 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21]
우식이 가지고 있던 IBO, The Ring 헤비급 타이틀도 걸려 있었다.
[22]
승부예측에서 루이스는 퓨리의 승리를 예측했고 홀리필드는 누가 승자가 될 것인지 따로 예측하지는 않았지만 경기 시작 전 우식의 탈의실로 찾아가 격려를 하는 등 우식을 응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