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11:21:11

레꽝빈

여광영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3. 최후4. 평가

1. 개요

여광영([ruby(黎光榮,ruby=Lê Quang Vinh)]) 또는 삼절(𠀧𡭕, Ba Cụt)은 베트남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벌 지도자였다.

2. 생애

1923년 베트남 남서부 메콩강 삼각주 일대의 롱쑤옌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마을의 농부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그의 양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논밭을 지역 지주에게 강탈당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평생에 걸쳐서 지주층을 증오하게 된다.[1]

젊은 시절에 그는 검지손가락을 스스로 잘라버렸는데,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를 물리치겠다는 맹세로써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이야기는 허구고, 농사일 대신 화호불교 운동에만 시간을 쏟는 그에게 양아버지가 농사 좀 도우라고 잔소리하자 농사일을 안 하고 화호불교에만 투신하겠다는 맹세로 (농삿일에 필수적인) 검지를 잘라버렸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이건, 그가 엄청난 독종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화호불교의 군대에 입대해서 베트민이나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다. 베트민은 한때는 화호불교를 포함한 남베트남의 주요 독립운동 세력, 즉 비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해서 프랑스를 적대하였으나, 1947년부터는 본색을 드러내서 동맹을 배신하고 다른 세력들의 수장들을 납치, 암살하려고 시도했다. 호아하오교의 지도자였던 황부초([ruby(黃,ruby=Huỳnh)][ruby(富,ruby=Phú)][ruby(楚,ruby=Sổ)]) 역시 베트민에게 납치당해 곧 옥사하게 되고, 호아하오교는 당연히 교주의 복수를 다짐하며 베트민을 적대하게 된다.

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죽자, 강화된 반공성향과는 별개로 화호불교의 군대는 4개의 분파로 분열되었고, 레꽝빈은 그 중 하나의 지도자가 되었다. 비록 규모가 상당히 작은 1000명 정도에 불과했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후인푸소가 죽은 47년에 그의 나이는 고작 고작 만 24세에 불과했다. 소대장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대대장이 된 셈이니. 그의 분파는 다른 화호불교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베트민에 대한 적대감으로 프랑스군과 협력관계를 맺긴 했지만, 유난히 프랑스군과도 치고받기를 반복했으며, 베트민 뿐 아니라 다른 호아하오교 분파랑 까오다이교와도 종종 교전할 정도로 반골 기질이 강했다.

응오딘지엠이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집권하자 종교파들은 응오딘지엠의 친지 위주 내각을 비판하고 그와 협력하길 거부한 연합전선, 그리고 응오딘지엠과 협조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도 관철시키기를 추구했던 혁명위원회로 갈라졌다. 레꽝빈은 반골 기질답게 당연히 연합전선 쪽으로 갔고, 곧 응오딘지엠과 혁명위의 토벌 대상이 된다.

55년 초, 레꽝빈의 군대는 찐민테의 부대와 교전하였으나, 패배하고 레꽝빈 스스로도 가슴에 총을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그를 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공군의 헬기였다. 그는 프랑스인들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와의 갈등관계가 해소되진 않았다.

3. 최후

1955년 5월 사이공 전투로 빙쑤옌이 토벌당한 뒤, 응오딘지엠은 총구를 연합전선 쪽 화호불교 군벌들에게로 돌린다. 사실 베트남군은 이때도 그렇게 잘 싸우는 군대라고는 볼 수 없었으나[2]숫적으로 화호불교 군대보다 훨씬 우세했기 때문에 결국 화호군은 정착지에서 후퇴해서 정글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진문수([ruby(陳文帥,ruby=Trần Văn Soái)]) 등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초기에 항복했다. 레꽝빈은 그답게 56년까지 항전했으나, 역시나 승산은 없었고, 마찬가지로 항복했지만 그의 항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단두대로 처형당한다.

4. 평가

그의 일생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반골' 이라고 할 수 있다.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같은 화호불교 분파, 까오다이교, 베트민, 프랑스군, 그리고 남베트남 정규군까지 당시 베트남에서 그의 세력과 교전하지 않은 주요 세력이 없다(...).

장군으로써는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군벌 분파 하나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카리스마 하나는 대단했던 인물로 추측되지만, 그 외에는 좀 미묘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그의 군대가 잔혹함과 무자비함으로 유명했고, 자기 병력들과 마을 처녀들 간 "임시 결혼"을 조장하기도 하고, 지역의 수적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대신 지주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려 군자금을 충당했고, 잡은 수적들의 목을 잘라 걸어놓는 등 그의 군대가 저지른 온갖 잔혹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가 주적으로 삼았던 베트민이 결국 베트남 전역을 장악하게 되므로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으나, 남베트남 지지 성향의 미국 역사학자였던 버나드 폴 같은 사람도 그가 매우 잔혹했다고 묘사하는 걸 보면 과연 폭력적인 인물은 맞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Nu-Ahn Tran 교수에 따르면 그가 죽자 화호불교도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고 하니, 자기 종교 안에서만큼은 인기가 많았던 모양.

또한, 연합전선의 일원으로써 그 역시 연합전선의 분열상과 막장성에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연합전선은 비록 종교파와 기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매우 다원적이고 포용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긴 했지만, 정작 하나의 통합된 지도체계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으며, 연합전선의 행보는 콩가루 그 자체였다. 연합전선의 일원이었던 빙쑤옌의 막장행각을 제어하거나 내부적으로 견제하는 데도 실패했고, 그렇다고 사이공 전투에서 빙쑤옌이 토벌당할 때 도움을 주지도 않는 등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혁명위도 독재자로 각성한 응오딘지엠에게 숙청당한다는 점에서 계속 응오딘지엠을 적대하던 연합전선과 레꽝빈이 혁명위보다 더 그의 본질을 잘 꿰뚫어보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이쪽도 여러 분열상으로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별로 나을 건 없는 셈이다. 최소한 혁명위는 미국과의 관계 구축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혁명위의 중진이었던 찐민테는 에드워드 랜스데일과도 접촉/협력한 전적이 있었다. 찐민테가 남베트남의 대안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하면 쓸데없이 적만 많이 만들고 호전적이었던 레꽝빈은 미국 입장에선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로 그의 부하들 상당수는 베트콩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의 대부분이 베트콩의 전신인 베트민을 상대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1] 그리고 이 지주의 아들이 베트남국의 관료이자 베트남 공화국의 초기 주요 정치인 중 하나였던 완옥서(阮玉書)다. 레꽝빈이 반정부 성향을 강하게 보였던 이유가 응오딘지엠이 이런 인물을 기용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2] 55년 사이공 전투 영문 위키에 따르면, 빙쑤옌은 물론 베트남 국가군도 제대로 된 전술도 없이 무식하게 싸웠다는 증언이 많다고 한다. 아무리 베트남 국가군이 불과 2년 전만 해도 프랑스의 괴뢰군이나 다름없었다곤 해도, 그래도 한 나라의 정규군이 조폭 기반 군벌과 도찐개찐으로 취급받았으니 할 말 다 한 셈. 그래도 숫적 우위를 활용할 줄은 알았으니 60년대보다는 잘 싸우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