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한때 로틀란 부족은 아이오니아 동쪽의 쾰린이라는 섬에서 살았다. 신비로운 고대의 숲 경계에서는 풍부한 마력이 공기 중에 가득했으며, 시간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곳에 사는 바스타야 종족에게 마력이 없는 필멸 세계는 황량한 사막과도 같았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그 사막은 바스타야 종족의 영역을 침범하며 조금씩 세를 넓히고 있었다. 부족의 힘이 쇠퇴하던 시기에 태어난 라칸이었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라칸은 동족들과 함께 인간들이 위험천만한 아이오니아의 자연 마법을 차단하며 정착지를 넓혀 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여러 바스타야 부족들은 생존에 필요한 마력을 지키기 위해 사절을 보내 인간들과 조약을 맺었지만, 인간들은 계속해서 약속을 어겼다. 이에 환멸을 느낀 대부분의 바스타야는 남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고립주의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혈기 왕성했던 라칸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자연의 마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으면 인간들 역시 마력의 흐름을 막지 않을 테니, 자기가 직접 마법의 진가를 보여 주겠다고 공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라칸은 인간에게 부역하는 반역자라는 의미의 '무타클'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라칸은 로틀란 부족을 떠났다. 아이오니아 전역에 부족의 노래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술집이나 마을 축제에 갈 때마다 사람들은 라칸을 반기고 공연을 즐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한계를 느꼈다. 다양한 가무를 선보이며 수많은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라칸은 술꾼들의 오락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목적의식을 잃고 불안해하던 라칸은 블롱코의 수확제에서 같은 로틀란 부족 출신의 자야를 만났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자야를 보았을 때, 라칸은 옛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을 주민 전체가 라칸의 호화찬란한 깃털에 넋을 빼앗겼다. 하지만 숱한 인간과 바스타야 여자들의 마음을 훔쳤던 라칸의 매력에, 그 '보랏빛 까마귀' 자야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공연을 보고도 나한테 홀딱 반하지 않다니? 대체 저 여잔 뭐지?' 라칸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라칸은 자야에게 접근해 부족의 소식을 물었다. 하지만 로틀란 부족이 마지막 남은 땅마저 잃고 말았다는 자야의 대답에 라칸은 분노에 사로잡혀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반한 그녀는 자신이 바스타야 부족 전체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반란을 계획하고 있으니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했다. 라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부족에게 속죄하고 싶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반란에 동참하고 싶다는 라칸의 간청에 자야는 그가 제 몫을 다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야는 라칸의 춤이 무대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로틀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장의 춤꾼으로 소개하는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라칸이 곡예를 펼치며 적들의 혼을 빼놓으면, 자야가 날카로운 깃털로 마무리했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둘은 묘한 호흡을 자랑하며 적들과 맞서 싸웠다. 함께 여행하면서 라칸은 자야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늘 산만하고 나긋나긋하며 경박했던 라칸과 달리 자야는 준비성이 철저했고 무심했으며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자야가 심혈을 기울여 작전을 준비해도 라칸은 잊어버리기 일쑤였으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과 매력을 활용해 난관을 극복했다.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어렵고 중요한 임무를 달성해 갔다. 곧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발전했고, 요란한 싸움이 벌어지는 술집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하지만 라칸과 자야는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봤다. 이분법적 논리에 따라 인간들을 무조건 적으로 생각했던 자야와 달리 인간에게 연민을 느낀 라칸은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비록 관점은 달랐지만, 라칸은 서로를 향한 사랑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칸은 자야를 통해 삶의 목적을 찾았다.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헌신하는 그 모습에 감명받은 라칸은 자야와 함께 최초의 땅을 바스타야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로 맹세했다. |
2. 대롱활이 좋을까, 활대롱이 좋을까
"이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수도원 요새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어.” 자야가 말을 시작했다. 나는 자야의 시선을 따라 산꼭대기에 솟은 사원에서 뻗어져나와 산 아래 농가들로 이어지는 황금빛 층계 두 줄기를 바라보았다. 저 나무로 지은 농가 하나하나에는 인간 가족들이 살고 있겠지. 그 필멸의 존재들은 저 안에서 태어나서 죽고, 또 무엇보다 새로운 노래를 자꾸자꾸 만들 거야. 노래를 만들 때는 아마 하프와 북을 쓰겠지? 어쩌면 피리도… 나도 나중에 갈대 줄기로 피리를 하나 만들어 봐야겠어. 아니, 일단 내 깃털부터 다듬어야 하는데. 오늘 깃털 손질을 했던가? 저 산 아래 마을에 가면 여관도 있겠지. 지금 포도주 한 병만 있으면 딱 좋겠는데. “라칸…” 자야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쿠. 자야가 나한테 탈출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나는 다시 자야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삐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햇살이 자야의 눈에 반사되었다. 저 사랑스러운 속눈썹. 당장에라도— “방금 내가 설명한 거 다시 말해봐.” 그러니까… 수도원에 뭔가가 있다고 했고… 자야가… 어… “그러니까 내가 자기랑 만나야 하는데, 그게 어디냐면…” 하지만 더 이상 말할 거리가 없었다. 나는 무안해서 머리 깃털을 하나 잡아당겼다. 이러면 생각이 날지도 몰라. 자야의 보들보들한 아랫입술이 윤기를 띠었다. 오늘은 입술이 보라색인가? 어제는 자줏빛이었는데. “저들은 날 붙잡으면 죽여버릴 거야.” 자야가 말했다. 자야가 죽는다니! 나는 충격을 받아 숨을 훅 들이켰다. 얼굴이 뒤틀리며 목소리도 으르렁거리듯이 나왔다. “뭐? 감히 누가!” “경비들 말이야. 항상 경비가 문제지.” “그럼 내가 그것들 주의를 끌게! 언제 하면 돼?” 자야는 하늘을 가리켰다. “해가 지기 전에 초록색 빛을 찾아. 빛이 보이면 경비들을 꼬여내서 서쪽 성벽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그럼 내가 성벽을 따라 감옥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해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공연을 할 거야. 그럼 우린 어디에서 만날까?” “성문에서 봐. 내가 하늘로 이 황금빛 검을 던질게. 열 번 숨을 쉬는 동안 와야 해.” 자야는 손을 뻗어 내 망토에서 깃털을 하나 뽑았다. “열 숨은 무슨. 자기가 검을 던지자마자 바로 성문으로 갈 거야.” 그렇다. 자야의 말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삶에 없다. “그래, 자기를 믿어.” 자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장 안전한 길이 어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야는 이것저것 계획을 짜는 일에 능했다. 그러니 무슨 상황이 닥쳐도 무사할 것이다. 우와, 저 하늘 좀 봐. 예쁘기도 하지. 저 구름은 꼭 가지처럼 생겼잖아. 가지라니까 생각났다. 전에 어떤 개를 봤는데… 이 층계는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진짜 싫다. 이 돌을 덮고 있는 황금빛 나뭇잎은 내 깃털하고 색이 거의 똑같잖아. 이렇게 짜증 날 수가. 층계 색조를 바꿔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려면 마법을 써야 했다. 자야가 내 능력을 필요로 할 때가 다가오는데 힘을 빼선 안 돼. 자야가 나더러 이 층계로 가라고 한 건 내 깃털 색이 층계에 섞여들어가리라고 판단해서겠지. 이런 색깔 층계에서는 빨간색으로 치장해 줘야 하는데 말이야. 아니면 진청색? 자, 이 모퉁이를 돌아가면 뭐가 나올까? 또 계단이네. 이렇게 아름다운 산을 깎아서 이따위 재미없는 계단을 만들다니! 인간들이란 정말… 나라면 절벽을 훌훌 올라가도 되는데. 하지만 자야가 계단을 올라가라고 했으니 그대로 해야지. 나는 계단을 올라가며 조약돌 몇 개를 집어 저글링을 했다. 문득 저 북쪽에서 마법이 꿈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르하디 숲의 뒤엉킨 나무뿌리에 깃들어 있는 마법이었다. 숲의 마법이 자아내는 노래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고, 나는 그 가락을 입으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출입구까지 왔구나! 인간 경비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시커먼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구냐?” 남자가 물었다. “내 이름은 라칸이거든!” 세상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다니! “누구?” 저 인간 마음에 안 드는군. 이 계단보다 더 마음에 안 들어. “라칸이라니까! 로틀란 부족 제일가는 전장의 춤꾼 말이야. 아침의 노래 그 자체이고, 자정의 달빛을 받아 춤추지. 나는 매혹 그 자체이자—” “저 녀석, 바스타야 방랑춤꾼이잖아.” 다른 경비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작자도 따분하게시리 시커먼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이었다. 첫 번째 경비는 가슴팍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부적을 걸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부적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야!” “이게 뭐야?”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게 뭐든 간에, 그 작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경비는 부적을 뺏으려고 덤벼들었지만, 나는 한 손으로 부적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넘겨주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 조약돌 저글링을 하면서. “이리 내놔!” 나는 조약돌 하나를 그자의 얼굴로 튕겼다. “싫은데.” 그런 다음 최대한 순진한 표정과 어조로 물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경비는 갈고리처럼 생긴 검 한 쌍을 뽑았다. 나는 그자가 검을 치켜들기도 전에 검 하나를 낚아챘다. “문을 열어. 그럼 뭔진 모르겠지만 이거 돌려줄게.” 나는 손안에서 부적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팔 쪽으로 튕겼다. 그런데 이 무례한 작자는 나한테 덤벼들었다! 나는 몸을 휙 돌려 공격을 피한 다음 그자의 뒤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자는 다시 검으로 나를 베려 했다. 나는 검 밑으로 몸을 숙였다가 다리를 걸어 그자를 넘어뜨렸다. 남자는 비명 소리와 함께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두 번째 경비는 친구가 떨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내 얼굴을 보고도 나를 모를 수가 있냐고?” 그러자 이자는 나를 창으로 찌르려 들었다. 나는 몸을 살짝 틀어 피한 다음 내 깃털 망토로 그자를 덮어 버렸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졌다. 남자는 자기 방패 위로 엎어졌고, 그대로 퉁! 퉁! 퉁! 퉁! 소리를 내며 계단을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잠시 후 먼저 도착해 있던 첫 번째 경비의 몸뚱이와 충돌했다. 그 바람에 둘은 네 활개를 벌리고 나자빠졌다.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제 이 계단은 내가 접수했어. “너희들 춤은 참 형편없군.” 나는 망토에 먼지가 묻지 않았나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계단 아래에서 두 사람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둘 다 괜찮아?” 나는 나를 즐겁게 해준 고마움을 담아 물었다. 두 사람은 고함을 지르며 층계를 달려 올라왔다. 이렇게 걱정해 주는데 감사해 할 줄도 모르다니, 배은망덕하기도 하지. 나는 살짝 뛰어 놈들의 공격을 피하고는 물었다. “당신들, 파티하고 싸움의 차이가 뭔지 혹시 알아?” 놈들은 계속해서 나를 자기들 무기로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파티는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놈들을 다시 계단 아래로 보내버렸다. “싸움은 금방 끝나지.” 뒤쪽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부터 진짜 재미있는 시간이야. “당신들 참, 실력이 이것밖에 안 돼?” 나는 쫓아오는 경비들을 피해 달아나며 그렇게 약을 올렸다. 하지만 탈출할 길을 빨리 찾아야 했다. 경비는 이제 스무 명쯤으로 늘어나 있었다. 아니, 서른 명인가? 아무튼 엄청 많았다. 도망치다가 이자들이 잠을 자는 방으로 뛰어들어간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신기한 무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경비들 몇 명이 괴상하게 생긴 석궁을 갖고 있었다. 굵직한 대롱에 불을 붙여서 쏘는 무기였다. 이자들이 부르는 이름이 있겠지만, 나는 대롱활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방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그 대롱활에서 발사된 것들이 내 주변에서 폭발하며 벽에 구멍이 뽕뽕 뚫렸다. 나는 방랑춤꾼답게 우아하게 회전하며 안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출입구가 열려 있었다. 그 문으로 나가면 달아날 수 있겠지만, 자야가 내게 맡긴 임무가 있다. 벽에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에 숨어 있던 경비가 커다란 대롱활을 내게 겨누었다. 흠, 대롱활 말고 활대롱이라고 부를까? 경비가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훌쩍 뛰어 그자에게 달려들었다. “대롱활하고 운이 맞는 낱말이 뭐가 있을까?” 큰 소리로 물으면서. 나는 경비를 발로 차서 공중에 띄운 다음, 그자가 땅에 떨어지자 한 바퀴 빙글 돌고는 내 손을 그자의 뺨에 대주었다. 그자가 쏜 무기보다 더 큰 소리가 나게. “아, 명중!” 나는 그자의 뺨에서 나는 소리보다 더 크게 말했다. 경비는 몸을 굴려 일어나더니 짤막한 칼을 뽑아 들었다. “대체 왜 내 의도를 몰라주는 거야?!” 빨리 주방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주방에는 초콜릿이 있을 테니까. 하늘 빛깔이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공중으로 도약하며 해가 어디쯤 있는지 다시 살폈다. 해는 언덕 너머로 사라졌고, 그 언덕 위에는 초록색 빛을 내는 보주가 하나 떠 있었다. “파티 시간이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젠 요새 안의 모든 경비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빨리 항복해라!” 금속 모자를 쓴 경비 하나가 외쳤다. “싫은데! 너네들 주의를 끄는 게 내가 할 일이거든!” 내가 대꾸하자, 그자는 어리둥절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저자는 다음번에 때려줘야겠군. 반대편 성벽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나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화살 소낙비 속을 누볐다. 화살깃이 내 곁을 스쳐 가며 내는 핑핑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내가 저 금속 모자를 쓰면 멋있어 보일까? 황금빛 검이 공중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자야가 탈출할 준비를 마쳤구나. 나는 첫 번째 숨을 들이켰다. 자야는 열 숨이라고 말했지만 네 번도 너무 많다. 자야가 안전한지 확인해야 하니까. “나랑 신나는 거 해볼래?” 나는 가장 가까이 다가온 인간에게 말했다. 남자는 별로 신나 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몸을 놀려 그 남자의 뒤편에 섰다. 남자는 휙 뒤돌아섰지만 내 깃털 망토 속으로 말려들어 버렸다. 나는 깃털로 남자를 힘껏 후려쳤고, 남자는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몇 바퀴나 돌까? 내 최고 기록은 열두 바퀴지만 그건 언덕에서였지. 두 번째 숨. 남자는 아홉 바퀴를 돌고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젠장. 한 번 더 해볼 시간은 없겠네. 세 번째 숨. 자야가 나더러 오라고 한 곳까지 빨리 가야 한다. 자야에게 돌아가야 한다. 나는 성곽으로 뛰어 올라가 지붕을 딛고 성문 쪽으로 도약했다. 공중에서 네 번째 숨이 지나갔다. 자야는 신기하게 생긴 줄로아흐들을 데리고 성문 쪽으로 달려왔다. 우리가 깃털이 나 있는 자리에 저들은 털이 나 있네. 보아하니 소드조코 부족 같은데. 너무 딱딱한 생김새라 아쉽지만, 그래도 저렇게 머리에 돋은 털을 이마 뒤쪽으로 넘겨서 찰랑찰랑 늘어뜨린 건 마음에 들어. 나도 내 깃털을 저런 모양으로 한 번 다듬어 봐야지. 그런데 저 중에서 제일 늙은 남자는 뭐 저런 형편없는 천을 허리에 둘렀담. “무사히 빠져나갈 순 없을 거야. 이자들은 소총을 갖고 있다고!” 늙은 남자가 소리쳤다. “대롱활 말인가요?” 내가 물었다. 늙은 남자는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이제 탄환이 없어요.” 내가 설명했다. “지니 장궁도 이제 화살이 없고요.” “뭐요?! 아니, 어떻게…?” “난 라칸이거든요.” 나는 참을성 있게 말해 주었다. 이것 참. 인간이라면 나를 모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종족이 내 능력을 의심하다니. “모두들 저기 보이는 숲으로 뛰어가세요.” 자야가 말했다. 위병소에서 밀가루와 초콜릿을 뒤집어쓴 남자 수십 명이 뛰쳐나왔다. 저기다 달걀물만 발라주면 인간들이 말하는 “빵”이 되겠는데. 그렇지만 파이가 더 맛있잖아… “빨리요!” 자야가 날카롭게 외쳤다. 아쿠니르라는 그 늙은 줄로아흐가 제대로 뛰지 못하길래, 나는 그를 잡아당겼다. 콜은 수행원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었다. 콜과 자야는 그의 영혼이 우리의 땅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의 뿔 하나가 부러졌고, 몸 주위의 풀잎에는 그의 피가 온통 묻어 있었다. 콜은 그의 시신에 박혀 있던 마지막 화살을 뽑아냈다. 그는 인간들이 쏜 화살을 무수히 맞으면서도 콜을 여기까지 안고 달렸다. 그는 죽으면 안 되었다. 그를 사랑하는 바스타야들이 있으니까. 그들은 그를 위한 노래를 부를 테지만, 그 노래에 화답하는 건 침묵뿐이리라. 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나직하게 그의 죽음과 그 가족의 슬픔을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다. 자야는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자야는 지금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이따가 밤이 찾아오고,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한 후에야 슬픔을 고통으로 절감하겠지. 그게 자야의 방식이니까. 그러면 나는 키스로 자야의 슬픔을 달래줘야지. 아쿠니르라는 그 늙은 영사는 젊었을 때는 나처럼 전장의 춤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쿠니르와 자야는 무슨 정치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콜은 수행원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자야보다도 더 강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콜은 남편 아쿠니르를 쏘아보았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쿠니르, 난 북쪽으로 돌아가겠어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에게 똑똑히 알릴 거예요.” 콜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양팔이 마치 고목의 가지처럼 단단하고 단호해 보였다. “콜, 이러지 말아요.” 아쿠니르가 말했다. “난 주렐브의 부족민들에게 주렐브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알려줄 거예요.” 아마 죽은 수행원의 이름인 듯했다.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이었겠지. 양쪽 입가에 웃음을 자주 지을 때 생기는 주름이 있었으니까. “그런 다음에는 무기를 모으고 부족민들을 훈련시켜 전쟁 준비를 할 거고요.” “그러면 안 돼요!” 영사가 외쳤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에게 한 언약을 저버릴 것이고, 당신이 내게 한 언약도 저버리겠어요.” 콜은 차갑게 말했다. 아쿠니르는 칼에 찔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아까 숲까지 뛰어오면서 못 느꼈단 말인가? 이 숲속에 들어와서라도? 하다못해 저 수행원이 죽을 때에도 못 느꼈단 말야? 콜은 홧김에 저러는 게 아니라고. 이전부터 생각했던 거야. 최소한 몇 달 전부터. “콜… 제발…” “됐어요.” 콜이 말했다. 아쿠니르는 콜을 붙잡으려고 움직였지만, 내가 막아섰다. “아내하고 말 좀 하게 해주게.” 아쿠니르가 말했다. 그의 숨결이 내 뺨에 와 닿았다. 냄새가… 굴루 과일을 먹었나 본데. 내 코가 거의 그의 이마에 닿을 지경이었다. 아쿠니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젓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침묵이 더 나은 법이다. 아쿠니르 쪽에 남기로 한 수행원 둘이 바짝 긴장했다. 나하고 춤을 추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절로 되겠지. 난 라칸이니까. 저들은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눈이 깃털검을 쥐고 있는 자야를 불안하게 흘끔거렸다. 저들은 자야의 이름도 물론 알고 있겠지. “고마워요, 자야.” 콜은 그 말만 하고는 다리를 절며 가버렸다. 아쿠니르와 수행원 둘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자야에게 다가갔다. 주렐브, 콜, 아쿠니르를 향한 자야의 슬픔이 느껴졌다. 오늘 밤은 포도주를 마셔야지. 그런 다음 저속한 노래를 불러서 자야를 웃게 해줘야지. “우리 사이에는 저런 일이 절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 자기.” 자야가 말했다. “우린 저들과 달라, 자기. 우린 저들하곤 완전 다르다고.” 나는 그렇게 대답해줬다. 자야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보다 훨씬 똑똑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가끔 바보가 된다. “이젠 어디로 갈까, 자야?” “일단… 여기 조금만 더 있자.” 나는 깃털로 자야를 덮어주고 팔로 그녀를 안았다. 지금은 자야를 간지럽히는 장난은 안 치는 게 좋겠어. 나중에 밤이 되면 해야지. 둘이 같이 시끄럽게 웃고 술을 마시고, 자야는 또 뭔가 계획을 짜고 나는 노래를 부르겠지. 자야의 뺨이 내 가슴에 닿아 있었다. 자야가 지금 나를 원하고 있는 게 기쁘다. “아까 한 말 다시 말해봐.” 자야가 말했다. “우린 저들과 달라.” 나는 다시 말했다. “우린 저들과 다르고말고.” |
3. 간단한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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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하고 변덕스러우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매혹을 발산하는 라칸은 악명 높은 바스타야 말썽꾼이자 로틀란 부족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전장의 춤꾼이다. 아이오니아 고원 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라칸이라는 이름은 꽤 오래 전부터 시끌벅적한 축제, 흥이 넘치는 파티, 기존의 규칙을 거부하는 음악과 동일시되고 있다. 하지만 타고난 춤꾼이자 활력 넘치는 방랑자인 라칸이 저항 운동을 하는 자야와 동반자 관계가 되었으며, 자야의 대의에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라칸은 바스타야 종족 중 로틀란 부족의 최후 생존자로, 아이오니아 깊숙한 내륙 지대 울창한 숲이 경계를 이루는 고대의 신비스러운 지역에 살고 있다. 마법이 공기처럼 예사로이 호흡 속에 섞여 있으며 시간은 큰 의미가 없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바스타야 종족에게 필멸자 인간이 사는 영역은 마법이라는 오아시스가 없어 생존이 불가능한 사막에 가깝다. 인간은 슬금슬금 바스타야 종족의 땅을 침범해 들어오고 있지만, 바스타야들은 좀처럼 자기가 살던 땅을 벗어나 멀리까지 여행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라칸은 위험한 길을 택했다. 라칸은 마법이 자연스러운 물결처럼 흐르는 지역의 경계 부분을 따라 방랑하며 탐험가이자, 외교 사절이자, 노래 수집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원래 라칸은 마을과 마을을 다니며 여관이나 축제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사람들의 환호와 찬사를 받는 떠돌이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블롱코라는 마을의 수확제에서 우연히 자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자야를 보았을 때, 라칸은 옛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을 주민 전체가 라칸의 호화찬란한 깃털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숱한 인간과 바스타야 여자들의 마음을 훔쳤던 라칸의 매력에, 그 “보랏빛 갈가마귀” 자야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아예 라칸의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했다. 내 공연을 보고도 나한테 홀딱 반하지 않다니? 대체 저 여잔 뭐지? 라칸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라칸은 자야를 졸졸 따라다니기로 결심했고, 얼마 안 가 자야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마음을 빼앗겼다. 라칸이 모르는 것을 자야는 항상 알고 있었고, 라칸이 나긋나긋 붙임성 있게 구는 대상에 자야는 냉담하고 초연했으며, 라칸이 부산을 떨 때에도 자야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둘은 불가사의하게도 일심동체의 조화를 이루며 싸울 수 있었다. 곧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연인으로 지낸 지 몇 달 지났을 무렵, 라칸은 자야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자야가 오직 한 가지 목표에만 헌신하는 것에 감명을 받은 그는 기꺼이 자야와 함께 바스타야의 힘을 되돌리고 바스타야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라칸은 자야를 통해 삶의 목적을 얻었고, 또 사랑에 빠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