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00:04:04

드미트리 셀리바노프

1. 개요2. 생애 및 활동3. 자살 및 그 이후4. 여담

1. 개요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셀리바노프(Дмитрий Aлексеевич Селиванов)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에서 활동하던 포스트 펑크 및 인더스트리얼 락 뮤지션이었다. "칼리노프 다리"(Калинов мост), "푸티"(Путти), "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등 여러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으며, "건축 예술"(Промышл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의 창시자이자 리더였다. 1989년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2. 생애 및 활동

1964년 03월 25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1살 때부터 기타를 연습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9년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반 "존재"(Присутствие)라는 밴드에서 활동하였으며, 1984년 드미트리 레뱌킨(Ревякин)과 함께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건강"(Здоровье)이라는 밴드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나 1년밖에 가지 않았다. 이후 레뱌킨은 "분점"(Равноденствие)[1]이라는 밴드를 설립해 활동하였고 셀리바노프 또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으나, 의견 불일치로 인해 셀리바노프는 밴드에서 탈퇴하였다. 이후에도 밴드 "푸티"(Путти)에서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는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다.

1980년대 중반에는 프로젝트 밴드 "디마코크"(Димакок)에서 활동하며 트럼펫, 바이올린, 백보컬 등을 맡았다. 디마코크 활동 당시 셀리바노프의 활동 목표는 "평범한 소비에트 인민의 정통적(orthodox) 사고를 보여주는 것과 이 모든 케케묵은 생각들을 일정 수준의 부조리함으로 이끌어 내는 것, 즉 다시 말해 아주 끔찍하고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ортодоксальное мышление среднего советского человека и довести все эти заплесневелые идеи до некой степени абсурда — то есть играть совершенно страшную, монотонную музыку)"이었다.[2]

이후 1988년 4월 셀리바노프는 예고르 레토프, 올렉 "매니저" 수다코프, 콘스탄틴 "백치 쿠자" 랴비노프가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 "공산주의"(Коммунизм)에 참여하게 되고[3], 같은 해 6월에 자신의 밴드 "건축 예술"(Промышл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을 결성하게 된다. 당시 밴드 멤버로는 셀리바노프(보컬, 기타, 작사, 작곡), 올렉 체호프스키(Олег Чеховский, 베이스), 예브게니 스쿠코프스키(Евгений Скуковский, 키보드), 레나트 바히도프(Ренат Вахидов, 드럼), 이고리 이바노비치 슈킨(Игорь Иванович Щукин, 드럼 머신)이 있었다.

3. 자살 및 그 이후

Ну ладно, у меня тут ещё делo в конце коридора. (아니 괜찮아, 저기 복도 끝에서 아직 할 게 있어서 말이야.)
셀리바노프의 유언
1989년 04월 22일 저녁 셀리바노프는 노보시비르스크 전기공학 대학(НЭТИ)[4] 2호 건물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던 로컬 락밴드 "암베"(А’МБЕ)를 방문하였다. 이후 19시경, 셀리바노프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카프를 챙겨 복도로 나갔다. 이후 그는 복도 천장의 파이프에 스카프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자살 원인으로 우울증 등이 꼽히긴 하나,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4월 말 노보시비르스크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06월 03일 치칼로프 문화궁전(ДК Чкалов)에서 셀리바노프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여기에는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얀카 댜길레바 등이 참여하였다.

셀리바노프의 사망 이후 "건축 예술" 밴드는 "남자의 춤"(Мужской Танец)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활동하였으나[5], 디스코 등 완전히 다른 장르로 활동하였다. "건축 예술"의 유일한 앨범 "사랑과 기술"(Любовь и Технология)은 몇 차례 비공식적으로 발매되다 2001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이후 라이브 실황을 담은 앨범 "Live Architecture"도 발매되었다.
Любовь и Технология (1988/2021) Live Architecture (1988/2021)

4. 여담

  • 예고르 레토프와 친한 관계였으며, 사망 당일에도 셀리바노프는 약속을 잡아 레토프를 위시한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멤버들과 만남을 가졌다. 레토프는 셀리바노프를 만난 뒤 잠시 다른 곳에 갔다 다시 돌아왔는데, 그 사이 셀리바노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 레토프의 곡 중 " 로보토미"(Лоботомия)는 셀리바노프에게 헌정하는 곡이며, 같은 앨범에 실린 곡 "줄기와 뿌리"(Вершки и корешки) 가사에는 "음악가 셀리바노프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Музыкант Селиванов удавился шарфом)라는 구절이 있다. 이 외 동료 밴드였던 초르니 루키치(Черный Лукич)의 곡 "하얀 얼룩의 비밀"(Тайна белого пятна) 또한 셀리바노프에게 바치는 곡이다.
  • 영국의 음악가 이안 커티스와 겹치는 점이 많다. 포스트 펑크 장르로 활동했다는 점,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했다는 점, 자살 이후 밴드 멤버들이 밴드 명칭을 바꾸고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는 점 등등.


[1] 分點/equinox. 주야평분시라고도 부르며,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을 말한다. 이 밴드는 1986년 "칼리노프 다리"(Калинов мост)로 밴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대표적인 예시가 디마코크 프로젝트 시절 곡 "헌법"(Конституция)으로, 곡 중간 중간 셀리바노프가 통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 서류상으로는 존재하나 실질적으로는 지켜지지 않던 규정을 읽으며 당시 체제와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3] 코무니즘의 1990년 앨범 "급강하 폭격기의 연대기"(Хроника пикирующего бомбардировщика)에 실린 "the Birds of Paradise"(낙원의 새들)은 셀리바노프가 녹음한 곡이다. 원곡은 스위스의 민요로, 영어로 편곡된 버전이다. [4] 당시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공식적으로 스튜디오 임대 등이 힘들었으므로 이런 열악한 곳에서 공연을 하거나 앨범을 녹음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얀카 댜길레바가 앨범을 녹음한 곳이기도 하다. [5] 초르니 루키치의 리더이자 동료 음악가였던 바딤 쿠지민이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