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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7일, 한나라당 탈당 기자회견. 왼쪽부터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
1. 개요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지역주의 타파와 개혁을 내세우며 한나라당을 탈당해 우리당 창당에 참여한 국회의원 5인을 일컫는 은어다. 김영춘, 안영근,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국회의원이 멤버이며 이들은 탈당 후 통합연대를 결성해 독자 활동을 하다가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였다.2. 배경
이들 모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운동권 활동을 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우재는 김문수, 이재오와 함께 민중당에서 활동했고 김영춘은 운동권 활동 중 김영삼에게 직접 스카우트 되었다. 나머지 3명은 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지만,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한 뒤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그대로 통합민주당에 남았다. 그러다 1997년 11월,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3당 합당 이전부터 민주정의당이나 통일민주당에 소속되어 있는 정치인들과는 출신부터 이질적이었던 셈이다.이들 5명은 한나라당 활동 당시에도 개혁소장파 의원으로 불리며, 한나라당 내에서도 중도좌파 성향을 띄었다. 이들이 활동하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회창이 당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이회창은 총재가 된 뒤 민정계를 적극적으로 포섭해 세력을 키웠고 이로 인해 과거 신한국당 시절보다 당이 우경화되었다. 다만 이회창은 민정계와 협력 사이여도 엄연히 민주계와 개혁보수의 일원이었기에, 이회창이 총재였던 시절에는 민주계가 민정계보다 당내 권력이 훨씬 높았다. 이 때문에 5명도 이회창의 당권 아래 당내에서 소장파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 5명 모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을 지지했다. 안영근은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이부영은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는 등 5명이 전부 이회창 캠프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패배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이듬 해 최병렬이 대표로 취임했다.
최병렬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YS와 가깝긴 했지만 엄연히 5공의 핵심인 민정계 출신이었고, 이로 인해 민주계 소속 의원들의 입지는 약해지게 되었다. 특히 당 내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등 진보적인 공약들을 주도했던 이들은 더욱 우경화된 한나라당 내에서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2.1. 탈당
2003년 7월 7일, 5명은 한나라당 탈당 기자회견을 가지고 '통합연대' 를 결성했다. 초기 계획은 통합연대 구성 뒤 개혁주의 성향의 신당을 창당하는 것이었다. 2003년 8월 말 창당을 목표로 했지만, 그 무렵 새천년민주당 내 친노 세력이 기존 동교동계와 갈등을 빚으며 탈당했다. 노무현은 탈당한 의원들을 주축으로 기존의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보다 뚜렷한 개혁 색채를 띄는 신당 창당을 고려했고 통합연대에 가입한 이들 5명 역시 신당에 합류하게 된다.그렇게 열린우리당이 탄생하였다.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친노 세력, 한나라당을 탈당한 '통합연대' 소속 5명( 독수리 5형제), 개혁국민정당 세력( 유시민, 김원웅)이 합쳐서 탄생했다.[1]
2.2. 이 후의 정치적 행보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의 기자클럽 회견을 선거법 위반으로 문제삼아 탄핵 소추안을 발의하였다. 독수리 5형제와 기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마지막까지 육탄전을 벌이며 탄핵안 발의를 저지했지만, 결국 박관용 의장의 경호권 발동으로 모두 끌려나가버리고 탄핵안을 193:2로 가결된다.[2]그러나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탄핵안 발의는 곧 유권자들에게 거대한 역풍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52석이라는 희대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독수리 5형제 중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은 당선되었지만 이부영과 이우재는 낙선하고 말았다. 이우재가 가장 먼저 정계를 떠났고, 이부영은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하며 정치적 재기를 노렸지만 2007년 JU그룹으로부터 2억원을 불법 수수한 혐의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 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다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여기서도 낙선하며 정치 인생을 접게 된다.
17대 국회에 남은 3명은 이 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안영근은 열린우리당 내에서 실용주의 성향의 의원들을 주축으로 한 정치 모임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 를 만들어 의회 활동을 했는데, 당내에서 보수적인 색채를 띄며 급진개혁파와 당권 싸움을 벌였다. 열린우리당의 당론이 국가보안법 폐지였으며 노무현 대통령도 이를 적극 추진하려 했지만, 안개모의 반대에 막혀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김영춘은 다시 탈당, 창조한국당에 합류해 문국현 후보를 지지했다. 안영근은 고건 전 총리를 대권주자로 적극 밀었지만, 고건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붕 떠버려 결국 별 다른 역할을 맡지 못했다. 김부겸은 정동영, 김근태 등 비노 세력과 맞서 대선 경선을 이끌었지만 결국 정동영이 최종 후보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김영춘과 김부겸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사실상 정계에서 반 은퇴 상태가 되었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역시 김부겸과 김영춘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대선 캠프에 참여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김영춘과 김부겸은 각각 해양수산부장관, 국무총리로 발탁되어 공직에 등용되었다. 김영춘은 해수부 장관 퇴임 후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상대 후보인 박형준에게 큰 스코어 차이로 패배했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남아있던 두 사람 모두 정계를 은퇴했다. 이로써 독수리 5형제의 일원인 5명 모두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3. 정치적 이유
지금이야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오고가는 건 철새라고 불리며 정치적인 실패로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 사이의 이적은 흔한 편이었다. 2000년대 초반 무렵까지 한국 정치판은 삼김이 깔아놓은 인맥과 시스템으로 작동했던 시기였고, 인물과 지역과 성향에 따라 당을 정하는 경향이 컸고, 각 당의 이념적 차이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김영삼/ 이회창에게 발탁되면 한나라당, 김대중에게 발탁되면 새천년민주당, 김종필에게 발탁되면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는 형태였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에도 개혁파 성향의 정치인들이 있었고, 반대로 새천년민주당에는 과거 민정계나 공화계에서 활동했던 인물들도 더러 있는 편이었다.이 때문에 이 시기까지는 서로의 당을 옮겨다니는 일이 흔했다. 정치적인 성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인물에 따라 입당 및 이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발생한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 사태가 이러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김대중의 영입으로 민주당에 들어온 구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과 민정계 성향 인사들이 이들과 이념적으로 크게 이질적인 노무현을 대선 후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요구했으며, 이러한 명분으로 결국 집단으로 당을 탈당한 사건이다. 단일 후보가 노무현으로 결정된 뒤 상당수의 후단협 멤버들은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이 때 한나라나 자민련으로 이적한 인원들은 성향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뀐 게 아니라, 원래 성향은 우파에 가깝지만 그저 노무현이 싫어서 인물을 보고 이적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 정치판의 경향을 크게 바꿔놓은 것이 바로 열린우리당의 창당과 2004년 치러진 제17대 총선이었다. 3김 중 가장 마지막까지 정계에 남아 있던 김종필이 은퇴하고, 이념적으로 확연한 진보 성향을 띈 열린우리당이 원내 1당이 되었으며, 김근태가 판을 깔아놓은 범야권이란 개념이 결국 김대중, 노무현이 거리를 벌려놨던 운동권을 다시 민주당에 들러붙게 만들었고, 한나라당에도 새로운 계파의 수장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서 양당의 이념적 차이가 크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진보 성향의 정당에는 진보 성향의 인물이, 보수 성향의 정당에는 보수 성향의 인물이 완벽히 정착해 각 당의 정책에서도 이념적인 차이가 크게 도드라졌다. 상대 정당으로의 이적도 크게 줄어들어, 2007년 손학규의 한나라당 탈당을 끝으로 더 이상 이러한 정치적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3]
'독수리 5형제' 의원 5인방 역시 한나라당 내 민주계의 세력이 약해지자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개혁적인 성향의 주장을 하기 힘들어져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한 것이다. 즉, 정치적 성향이 변했다기보다는 당 내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고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한 것이다. 실제 이들은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띄었고, 유시민이나 천정배 등 개혁파 성향의 계파와 수시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다만 김영춘과 김부겸은 이후 정치 생활을 계속하며 조금 더 진보적인 성향으로 바뀌긴 했다.
2004년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판에서 진보 vs 보수의 이념적 구분이 확실히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독수리 5형제'나 이전의 사례처럼 상대당으로 적을 옮기는 일은 줄어들었다. 2016년 최순실 게이트 당시에도 새누리당 내 비박계 인사들이 더불어민주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른정당이라는 개혁보수 성향의 신당을 창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4]
4. 여담
-
김영춘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기 전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가 탈당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YS의 한나라당 내 영향력이 괜찮았던 시기라[5] 김영삼도 나름 당 내에서 세력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영춘이 탈당하겠다고 하자 YS는 "여기서 편하게 정치해라"라며 탈당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영춘은 "선생님도 자유당에서 탈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이 민주정의당처럼 변해가는데 제가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민주당으로 가서 청년 김영삼 정신으로 돌파해보겠습니다."라며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YS는 마지막까지 "여기서 대선 후보도 할 수 있는데... 나가면 떨어질 거다."라며 만류했다고... 그러나 탈당한 이후에도 김영삼과의 관계는 괜찮았고, 2015년 김영삼의 영결식 때도 직접 조문하고 상도동계 인사들과 함께 빈소를 지켰다.
- 이들과 함께 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에 들어왔던 멤버로는 이해식( 강동구 을) 의원과 조정식( 시흥시 을) 의원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두 명은 아직도 현역이다.
[1]
김원웅 역시
한나라당에 소속되어 있다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혁국민정당에 합류했다. 김원웅 역시 한나라당에서 소장파로 활동하며 중도개혁주의 성향을 띄었고, 이 때문에 강경보수 성향의 인물들과 여러차례 충돌하기도 했다.
[2]
이 때 반대표를 던진 의원 2명은
자민련의 김종호 의원과
새천년민주당의
이낙연 의원이었다.
[3]
다만 이후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새누리당으로,
새누리당
진영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적하는 일이 발생하기는 했다.
[4]
다만
박근혜 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맡았던 보수 정치인인
진영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계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산하에서
행정안전부장관을 지내며 정치인생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5]
당장 대표
최병렬부터가 YS와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