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자력 사고 4~7등급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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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9151e> 4등급 | 셀라필드 원자력 단지 (1955~1979) |
생로랑 원자력 발전소 사고 (1980) | ||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1999) | ||
5등급 | 퍼스트 초크 강 사고 (1952) | |
윈드스케일 화재 (1957) |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1979) | ||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 (1987) | ||
6등급 | 키시팀 사고 (1957) | |
7등급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1986) |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2011) |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ruby(東海村JCO臨界事故, ruby=とうかいむらジェー・シー・オーりんかいじこ)] Tokaimura nuclear accident in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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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사고 요약도 | |
<colbgcolor=#f5f5f5,#2d2f34> 사고 레벨 | 4등급 - 시설 내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 |
사고 일자 |
1999년
9월 30일 10시 35분경(UTC+9) 사고 D[dday(1999-09-30)]일 |
사고 유형 | 임계사고 |
사고 지점 | 일본 이바라키현 나카군 도카이무라 |
피폭자 | 667명 |
사망자 |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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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는 1999년 9월 30일 오전 10시 35분에 일본 이바라키현 나카군 도카이 촌에서 발생한 레벨 4 원자력 사고다. 핵연료 재처리 회사 JCO의 안전 불감증과 기업범죄로 인해 일어난 명백한 산업재해이다. 한국에서는 도카이 촌(東海村)을 일본식으로 읽은 도카이무라 방사능 사고라고 많이들 일컫는다.[1]2. 상세
사고는 핵연료 재처리 회사인 JCO[2]가 도카이 촌에 세운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작업 중이었던 오우치 히사시(大内久, 1964~1999, 당시 35세)가 18그레이, 시노하라 마사토(篠原理人, 1959~2000, 당시 39세)[3]가 10그레이, 이 둘을 지휘하던 상사 요코카와 유타카(横川豊, 당시 54세)가 1~4그레이 가량 피폭됐다.[4] 1그레이/시버트는 과거의 렘/라드 단위의 100배로, 6그레이 이상 피폭되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의 피폭자 데바이르 페헤이라[5]를 제외하면 없다. 오우치는 83일 만에, 시노하라는 211일 만에 사망했다. 사망자를 포함한 총 피폭자 수는 667명에 달한다. 사망자가 2명에 그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18시버트가 얼마나 큰 양인지 체감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정확히는 1년간 허용되는 인공방사선 피폭량이 1밀리시버트이다. 1년간 자연방사선 피폭량은 전세계 평균 2.4밀리시버트, 한국은 평균 3.08밀리시버트이므로 일반인 기준에서 18시버트면 약 4~5천년 동안 받을 방사선을 한순간에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자면, 목성에서 불과 22만 km 떨어진 위성 테베에서 시간 당 피폭량이 약 7.5시버트이다.[6]
예전에도 단시간에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피폭된 사람들의 사진이 돌아다니는 건 이 사고가 제일 유명하다. 일단 당시 이슈화가 빠르게 됐었고, 한국에도 여러 언론 보도와 관련 논문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리고 JCO 임계사고 때는 인터넷이 있어 사건 이후 여러 경로로 유출된 사진들이 일본 웹을 통해 유통되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데몬 코어 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마야크 재처리 공장이나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도 유명하기는 하다. 그러나 고이아니아 사건과 데몬 코어 사고들[7]은 피부 질환이 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들이 사망해 남은 사진이 충격적이지는 않고, 체르노빌과 마야크 재처리 공장은 실제 피해자들의 급성 방사선 피폭의 시각적 자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8]
그 외에도 방사선 의료/검사기기나 원자력 전지 관련 사고가 있었지만, 피부질환은 국부에만 나타나서 시각적 충격이 적거나, 뉴스나 책으로 나와 대중에게 잘 알려지는 일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사건의 전개에 앞서 참고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도카이 촌 방사능 피폭자의 경과 사진의 인물은 시노하라 마사토로, 피폭 전의 사진과 악화 과정의 얼굴 사진이 같이 찍혀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유의][10] 입원일이자 피폭 당일인 1999년 9월 30일부터 상당히 악화된 상태이자 피폭 95일째인 2000년 1월 4일까지 나열되어 있는데, 점차 녹아내리듯 썩어가는 얼굴을 1달마다 찍은 사진을 게시했으며, 피폭 15일째에서 주름으로 꽉 차 있는 그나마 양호한 상태의 모습부터 피폭 65일째에서 주름은 하나도 없고 핏물로 가득차 기능을 상실한 큰창자와 작은창자의 내시경 컬러사진도 게시되어 있다.
이와모토 히로시가 이끄는 NHK 특별취재반이 1999년 이바라키현 도카이촌에서 벌어진 임계사고를 취재해 NHK 스페셜 <피폭 치료 83일 동안의 기록>을 만들었고, 이를 책으로 다시 엮어 83일이라는 책을 냈다.
검사를 받는 사람이 오우치를 이송시키던 직원이다. |
구급차 안에서 앉아있는 모습이 찍혔다. |
그리고 도카이촌 하면 유명한 오우치라 불리는 이 사진은 2020년 11월 전까지만 해도 오우치가 아니라 신원불명인 사람이었다. 3명 중 하나라고 주장했지만 얼굴 옆면이 찍히면서 오우치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 사진에서 오우치의 오른팔을 자세히 보면 빨갛게 부어오른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절대 기분 탓이나 사진이 잘못 찍힌 것이 아니다.
NHK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어나더 스토리 운명의 분기점(アナザーストーリーズ 運命の分岐点)>에서 이 사건을 다룬 바 있다.
3. 스페셜 크루
1996년에 발족한 JCO 내의 5인조 그룹으로, 구성원은 오우치 히사시(32), 시노하라 마사토(36), 요코가와 유타카(51), 와타나베(43)[11], 용액 제조 경험이 있던 베테랑인 하세[12]다. 하세는 지병으로 스페셜 크루를 떠났고, 이는 후일 생길 임계사고를 초래한다.4. 경과
앵커: 오늘
일본
도쿄 교외의 한
우라늄 가공 공장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서 작업원들이 피폭되고 공장 주변 주민들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도쿄의 김청원
특파원입니다.
기자: 방사능이 누출된 곳은 도쿄 북동쪽 100여 km 떨어진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 JCO라는 민간 우라늄 가공 공장입니다.
오늘 오전 10시 반쯤 천연우라늄을 용해시켜 핵연료 분말로 만드는 작업동에서 갑자기 방사능이 누출됐습니다.
당시 근무중이던 70~80여 명의 직원들은 긴급히 대피했으나, 3명이 방사능에 피폭해 쓰러져 헬기로 후송됐으며 이 가운데 한 명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 사고로 공장 주변의 방사능 양이 평상시보다 최고 1만 6,000배에 이르는 등 누출량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1999년 9월 30일 KBS 뉴스 9 보도 中
기자: 방사능이 누출된 곳은 도쿄 북동쪽 100여 km 떨어진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 JCO라는 민간 우라늄 가공 공장입니다.
오늘 오전 10시 반쯤 천연우라늄을 용해시켜 핵연료 분말로 만드는 작업동에서 갑자기 방사능이 누출됐습니다.
당시 근무중이던 70~80여 명의 직원들은 긴급히 대피했으나, 3명이 방사능에 피폭해 쓰러져 헬기로 후송됐으며 이 가운데 한 명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 사고로 공장 주변의 방사능 양이 평상시보다 최고 1만 6,000배에 이르는 등 누출량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1999년 9월 30일 KBS 뉴스 9 보도 中
앵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원자력 연료공장에서 방사능 누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도쿄에서
박광온 특파원[13]이 전해왔습니다.
기자: 오늘 오전 방사능 누출사고가 일어난 일본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 핵연료 제조공장입니다.
오늘 사고로 작업인부 3명이 피폭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 가운데 1명은 설사와 구토를 하는 등 중증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공장 주변의 방사선 양이 한때 통상의 4,000배에서 만 6,000배에 이르렀습니다.
때문에 공장 주변 도로가 폐쇄되고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주민들은 긴급 대피했습니다.
1999년 9월 30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中[14]
기자: 오늘 오전 방사능 누출사고가 일어난 일본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 핵연료 제조공장입니다.
오늘 사고로 작업인부 3명이 피폭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 가운데 1명은 설사와 구토를 하는 등 중증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공장 주변의 방사선 양이 한때 통상의 4,000배에서 만 6,000배에 이르렀습니다.
때문에 공장 주변 도로가 폐쇄되고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주민들은 긴급 대피했습니다.
1999년 9월 30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中[14]
문제의 작업은 핵연료사이클개발기구의 고속실험로 ' 조요(常陽)'에서 쓸 우라늄 연료를 가공하는 일이다. 농축도가 높은 이 연료는 일반 원자력발전소용 연료 가공 시설과는 다른 '전환시험동'이라는 건물에서 만들었다.
원자력발전의 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먼저 농축시설에서 핵분열을 일으키기 쉬운 우라늄-235의 비율을 높이는 농축 과정을 거치고, JCO 같은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연료로 쓰일 수 있도록 가공된다. 문제의 사건에서 주문은 연료를 57kg의 '질산우라닐'이라는 우라늄 용액 상태로 가공하여 납품하는 것이었다. 작업자들은 3명 모두 경력 10년 이상의 베테랑이었으며 5% 미만의 저농축된 재료를 처리한 경험은 많았지만, 이날 다룰 농축도 18.8%의 고농축 재료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그렇다보니 이해도 없었다. 애초에 JCO의 본업은 경수로용 원자력발전을 사용하는 연료를 만드는 일로, 이 경우 사용되는 우라늄의 농축도는 3~4%이다. 전환시험동은 JCO의 본래의 업무와는 다른 것으로, 핵연료 사이클개발기구로부터 위탁받아 한 일이기 때문. 오우치 같은 경우, 전환시험동에서 작업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임계에 이를 가능성을 전혀 듣지 못했다.
3년 만에 처음 핵물질을 처리하는데도, 회사는 작업자들의 자격요건과 훈련을 제대로 확립하지 않은 채 정규 과정을 무시하고 작업을 진행하였다. 9월 10일부터 작업이 시작되어 20일째 되던 날이며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참이었다.
3명의 작업자들이 작업하는 모습.[15] 오른손으로 우라늄 깔때기를 잡고 있는 인물은 오우치 히사시, 침전조에 붓고 있는 인물은 시노하라 마사토, 다른 방에서 지켜보고 있는[16] 인물은 요코카와 유타카다. |
일단 양동이에서 사고가 나진 않았다. JCO에서 규정한 우라늄 임계제한량은 2.4kg이고 양동이에 들어가는 우라늄의 질량은 2.3kg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업자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작업했고, 10시 35분 침전조 안에 들어간 우라늄의 양이 16kg(일곱 양동이)에 달했을 때 임계질량을 돌파했다. 본디 순수한 우라늄-235라면 임계질량은 약 22.8kg 정도이지만 수용액 상태였기 때문에 임계질량보다 적은 질량에서도 핵분열이 가능했던 것이다. 감속재 항목에서 보듯이, 우라늄235로 인한 핵분열은 저속 중성자에 더 잘 반응하는데, 경ㆍ중수로발전소에서 물이 감속재 역할을 하듯, 이 경우에도 분열된 중성자의 방출속도가 수용액의 물 분자에 포함된 수소에 의해 줄어들어 연쇄반응 확률을 높이면서 임계질량의 한도가 낮아졌다.
그 다음은 임계사고라고 부르는 제어하지 않은 핵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갑자기 노심이 활짝 노출된 원자로가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농축도 18% 내외였기 때문에 폭발적 반응으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작업장 전체가 그야말로 방사선 전자레인지가 되어버렸다. 비록 조용하지만, 일반인이라도 위험 상황이 발생했음을 즉각 인지할 수 있는 폭발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고 치명적인 일이 일어났다. 초보적인 더러운 폭탄이나 다름없는 사태였다.
사고 발생 1분 후인 10시 36분경, 현장에서부터 서쪽으로 1.7km 떨어진 원자력연구소 나카연구소에서 시간당 6.3μSv/h (마이크로시버트)의 중성자선량이 기록되었다.
4.1. 원인
당시 사고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임계사고였으며, '어둠의 매뉴얼'이라 불리는 위법 작업공정을 관리자들이 임의로 더 축소해서 빚어진 철저한 인재였다. 그리고 그 피해는 오우치를 비롯해서 해당 공정의 소름끼치는 위험을 알지 못했던 작업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 83일> P. 221
이 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다.[17] 안 그래도 위법한 작업 공정을 관리자들이 임의로 더 축소해서 빚어진 철저한 인재였다. 그리고 그 결과, 해당 공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못했던 인부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뒤집어쓰고 죽어나가야 했다.< 83일> P. 221
원래는 이산화우라늄 분말을 질산에 녹여 임계에 이르지 않도록 고안된 형상[18]의 용기인 '용해탑'에서 잘 섞은 후 조금씩 침전조에 집어넣어야 하지만, 용해 작업에서는 용액이 남아있으면 우라늄-235가 축적되어 농도가 달라질 우려가 있어서 매번 용기를 세정해야 하는데, JCO는 1993년 1월부터 세정이 간단하고 작업시간도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스테인리스 양동이를 쓰게 했던 것이다.
정상적인 제조과정과 사고 발생 당시의 제조과정을 비교한 자료.[출처]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학 물질을 제조하는 순서(용해조→저장조→침전조로 이어지는 과정)를 완벽히 무시하고, 침전조에 직접적으로 질산우라늄 용액을 주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침전조 주입구로부터 가장 가까운 신체 부위부터 방사능 피폭의 영향이 나타났다. 시노하라 마사토는 얼굴이, 오우치 히사시는 깔때기를 잡고 있던 오른쪽 팔부터 망가져 갔다. |
다 만들어진 제품의 균일화 공정에서도, 임계를 피하기 위해 제품을 조금씩 나누어 처리해야 하는 원칙을 깨고 저탑이라는 가늘고 긴 용기에 넣어 혼합한 다음 휘저어 섞게 했다. 이유는 품을 덜 들이기 위해. 작업 현장에서 위법행위들이 시작되었어도 회사가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막았어야 했는데, JCO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1995년 7월부터 이런 방법을 승인했다. 일명 '어둠의 매뉴얼'이다.
게다가 이 사고에서는 무려 이 '어둠의 매뉴얼'조차 무시되었다. 가공 공정을 관리하는 JCO 도카이 사무소 주임[20]이, 저탑조차 쓰지 않고 더 낮아서 작업하기 쉽다는 이유로 구형에 가까운 침전조를 이용하는 방법을 승인했던 것이다. 위 사진에서 나오듯이, 용해조와 저장조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침전조에 화학 물질(질산우라늄 용액)을 주입했다. 당장 질산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물질은 부식성과 발열성이 있어서, 자칫 잘못 다루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때문에 제조 과정에서 조심히 다룰 필요가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회사 간부들은 이런 유해한 물질들을 별도의 안전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양동이 채로 집어넣는 방식을 택했다.
경찰은 'JCO는 임계 위험성을 작업자들에게 지도하지 않은 채 양동이로 우라늄 용액을 다루는 위법행위를 계속하게 하는 등,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은 허술한 작업을 거듭했다. 게다가 6명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수행해야 할 안전교육과 감독을 소홀히 한 탓에 임계사고가 발생하고, 그 결과 오우치와 시노하라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결론냈다.
사고 직후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는 "꼼꼼함을 근본으로 하는 일본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꼼꼼한 관리와 안전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산업 현장에서는 그런 인식이 무색할 정도로 안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4.2. 늑장 대응
체렌코프 현상으로 푸른 섬광이 발생했다. 작업자들은 이를 목격함과 동시에 바로 피폭당했고, 공장에는 감마선 경보가 울렸다. 비록 폭발은 없었으나, 핵분열 부산물이 건물 내로 퍼져나갔다.경보음이 울리자마자 다른 방에 있던 요코카와가 "도망쳐라!"라고 외치자 다들 즉시 방사선 관리구역 바깥까지 도망쳤다.[21] 하지만 불행하게도 직원들은 즉각적으로 급성 방사선 피폭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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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 모습. 오우치는 피폭 직후 탈의실에서 기절했고, 나머지 2명과 밖에 있던 타게무라 켄지가 응급조치를 했다. |
10시 43분 JCO로부터 토카이무라 소방본부에 출동을 요청했고, 쓰러진 작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소방관들이 출동했다. 3분 만인 10시 46분 시설에 구급차가 도착해 작업원 3명을 이송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방사선 피폭 사태를 악화시켰다. 신고자가 '임계사고 같은 게 우리 시설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소방관들에게 방사능 누출에 관해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사능 대비를 하지 않고 뛰어든 소방관 3명은 당연히 피폭되었고(피폭량 30밀리시버트), 사고가 발생한 지 10분이나 지나서인 이때 '작업자들이 푸른 섬광을 봤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그제서야 방사능 사고임을 파악했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공장이 있는 이바라키현에 사고를 보고한 것은 사고발생 1시간이나 지난 후인 11시 34분이었다. 곧바로(11시 35분) 연원자력안전대책과에 연락이 갔고, 12시 30분이 되어서야 토카이무라는 방재무선방송으로 '가공공장에서 사고, 방사성물질의 유출, 통상의 10배 정도이다.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사실을 알리고 시설 200m이내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게다가 이로부터 2시간 반 이상이나 더 꾸물거린 뒤인 15시가 되어서야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350m권내 주민에 대한 피난 요청, 주변도로 교통규제등, 3km 이내는 접근금지. 사고 4시간 30분 후였다. 16시경 핵연료 사이클개발기구가 중성자선량율 측정을 개시한 뒤 나카마치혼베이자키지구에 피난요청을 한 것이 16시 40분이었고, 22시 30분이 되어서야 이바라키현은 반경 10km 이내 거주하는 주민[24]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고 실내에 머물 것을 권고했다.[25] 사고가 난 곳에서 반경 350m 이내에는 주민 40세대가, 500m 이내에는 100세대가 거주하였으며, 그 주변 도로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음을 생각하면, 공장과 현 공무원 책임자들이 사고에 전혀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4.3. 상황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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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1일 새벽에 찍은 사진으로, 방호복을 입고 있는 일본 경찰관의 모습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날 도카이무라에 진입 및 관통하는 차량은 경찰차 말고는 없었으며, 도카이무라 전철역은 (당일 날에 한해) 운영을 중단하였으며, 열차는 아예 무정차 통과했으며, 도카이무라에 입점한 점포들은 편의점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문을 닫았다. 오전 1시경 문부성은 10km 이내의 유치원, 초ㆍ중ㆍ고등학교 휴교를 지시했다. |
사고 1시간여 뒤인 11시 19분, 과기청에 JCO로부터 제1가 들어온다. '사고발생, 임계가능성'.
12시 41분, 오부치 수상이 최초 보고를 받는다.
14시 30분, 사고에 대해 과기청에서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보고한다. 과기청은 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한다.
15시경, 일본 정부는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한다. 과기청은 현지대책본부를 설치한다.
23시 15분, 제2회 사고대책본부 회의에서, 침전조의 주위에 냉각장치로부터 흘러나온 냉각수처리에 대한 대책을 토론한다.
날짜가 바뀌는 이 무렵까지도 문제의 연쇄반응은 계속되었다. 임계에 최초로 도달했을 때의 순간적인 정점이 지난 후에도 임계가 멈추질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측정된, 전환시험동 시설의 서남방 경계선 지역의 공기중 방사선량률은 시간당 0.84mSv(밀리시버트). 곳곳에 설치된 방사선 모니터는 통상의 20~30배 정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10월 1일 새벽 1시 40분, 첫 현지 본부 대책회의 끝에 작업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투입되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결사대를 조직한 JCO 사원들 16명으로, 연쇄반응을 멈추게 하려면 침전조의 냉각수를 빼야 하므로 작업자들은 우선 냉각수 밸브부터 손대었으나, 방사선이 너무 강력했기에 안전을 위해 작업시간은 몇 분 정도로 제한되었다. 방호복을 입었어도 몇 분 이상 노출되면 위험하므로, 잠시 동안만 일하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교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결국 최대 120밀리시버트에 달하는 피폭을 입었다. 50밀리시버트를 넘는 사람이 6명이나 된다. 참고로 방사선을 다루는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1년 최대 한도가 바로 50밀리시버트인데, 이걸 반나절 만에 받은 것이다. (이 숫자는 가슴에 달고 있는 방사선량계측계에 의한 것이다.)
그래도 피폭을 불사하고 꾸준히 작업한 끝에, 망치를 동원하여 파이프를 부수고 침전조에 가스를 주입, 냉각수를 모두 빼냈다(+사진 촬영). 이게 오전 5시 무렵이었다. 그 후 붕산수(중성자 흡수재)를 침전조에 주입하여 사고 발발 19시간 40분 만인 10월 1일 아침 6시 15분에 겨우 사태는 막을 내렸다.
15시가 되자 10km권내 실내 피난 해제는 문제없다고 정부 견해를 발표했고, 과기성은 사고를 레벨4로 평가한다. 이날 16시 40분 10km 이내 범위의 실내 피난이 해제되었다.
10월 2일 18시 30분 토카이무라의 350m 이내 피난요청도 해제되고, 일본 정부는 "농축수산물에 대한 영향은 없다"고 발표한다.
10월 4일, 토양 및 식물에서 요오드 131이 검출된다. (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 코이데 교수)
10월 11일 배기계를 정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된다. 미량의 누출은 계속되었다.
조사 결과, 주민 중 가장 많이 피폭당한 사람은 25밀리시버트였다. 방사선 일과 관련없는 보통 사람의 1년 피폭 한계 기준치는 고작 1밀리시버트인데, 이를 초과한 사람이 112명이나 된다.
5. 사고 이후
사건 1년여 후인 2000년 10월 11일, JCO 소장을 비롯한 관련자 6명이 체포되었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일본 최초로 원자력 시설에서 일어난 사고로 사람을 체포한 사례였다. 2003년 3월 3일 이들은 집행유예를 포함해 금고 2년에서 3년형을 받고, 이 관련자 중에는 첫 작업자 3명 중 하나였고, 오우치와 시노하라에겐 상사인 요코카와도 포함됐다. 그는 피폭량이 치명수치는 아니라서 치료 끝에 살아남았고 이후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오우치와 시노하라를 이끌고 문제의 작업을 총괄하는 담당자라는 입장상 책임을 추궁받았다.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이 상급자에게 있는데, 그의 관리부실로 사람 2명이 죽었고 목숨은 건졌어도 피해를 입은 사람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본인이 같이 죽지 않은 이상 처벌을 면할 수는 없었다. 요코카와는 "임계를 방지하는 교육은 받지 않았다. 다량의 우라늄 용액을 한꺼번에 탱크에 넣어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해, 회사의 안전교육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어쨌든 본인도 책임을 인정했고,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사고는 무지의 산물이었다."며 스스로를 크게 책망하기도 했다.
JCO에는 벌금 100만 엔(약 1천만 원)이 선고되고 회사는 문을 닫았다. 물론 단번에 닫은 것은 아니다. 2003년 4월 18일, 우선은 우라늄 연료 가공사업 재개를 단념하겠다고 발표하고, 사업소에 보관하고 있는 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관리하고 임계사고로 피해를 입은 기업과 주민에 대한 보상을 담당하는 회사로 남았다. 그후 현장의 설비를 철거하기로 했는데, 도카이무라 마을 측에서 "사고의 교훈으로서 보존을 검토해야 한다"고 반발하였다. 이 분규는 1년이 넘게 갔고, 최종적으로 도카이무라가 철거 방침을 받아들였고, 사고 6년째인 2005년 6월 6일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고를 일으킨 침전조는 이때까지도 미량의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어 작업은 신중히 이루어졌다. 이것의 레플리카는 2006년 4월부터 도카이무라 원자력과학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사건만을 보고 재처리 공장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재처리 공장은 사용이 끝난 핵연료 속에서 아직 사용되지 않은 우라늄이나 거기서 발생한 플루토늄을 꺼내 핵연료로 재가공하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친환경(?)적인 것이다. 다만 여타 방사능 관련한 것들이 그렇듯, 사고가 나면 큰일나는 것일 뿐.
6. 피해자
자세한 내용은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피해자 문서 참고하십시오.7. 사건 이후
사망 이후 오우치 히사시와 시노하라 마사토의 시신은 이미 그 자체로 방사성 물질이 되어버린 탓에, 차폐 차원에서 콘크리트 몇 겹으로 된 석관에 두꺼운 납으로 된 완전 밀봉한 관을 넣어 매장하였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희생자들인 '바실리 이그나텐코' &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를 포함한 수많은 피폭 사망자들, 고이아니아 방사능 유출사고의 사망자들, 방사능 물질의 일종인 라듐으로 만든 약인 라디톨을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 의사로부터 처방받아 3년을 마셔대다 심각한 내부피폭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에벤 바이어스 역시 똑같은 처리를 거쳤다고 한다.한편, 일반 대중들은 의료진을 크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심각한 방사능 피폭을 당한 사람들이 결국 똑같이 고통과 끔찍한 몰골로 변해가다 사망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치료한답시고 오우치와 시노하라에게 죽는 순간까지 격심한 고통을 겪게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방사능 대량 피폭은 사고로부터 [age(1999-09-3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도 고칠 방법이 없고[26], 이렇게 염색체가 부서져 나간 순간 세포분열 자체를 더 이상 못하게 되어 산 송장이 되기 때문이다. 위의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한 치료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으나, 결국 중성자선에 의한 몸 속의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몸에선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세포를 이식해 봤자 방사선에 의해 다시 손상되므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고 시도를 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하는 의견이 없지 않지만, 문제는 그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체내의 방사능 물질을 제거하는 치료는 2020년대인 현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방사능 홍차로 인해서 체내 피폭을 치료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연구자료 수집을 위해 오우치와 시노하라에게 그런 격심한 고통을 겪게 한 거 아니냐는 의견. 비슷하게 대량 피폭사고를 겪은 루이스 슬로틴과 해리 K. 더그힐란 2세에게, 의료진들이 고통을 줄여주는 방법으로 임종을 맞이하게 했던 사례와 비교된다는 것.
하지만 안락사 제도는 그 자체로 상당한 논란거리이며,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확률이 0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과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도적으로 목숨을 끊어주는 것' 중 어느쪽이 의사가 취해야 할 옳은 행동인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릴 수 없는 문제이다. 당장 < 83일>만 읽어봐도 의료진 본인들 또한 완치 가능성이 없는 치료행위에 대해 "단순한 고통의 연장일 뿐, 의미가 없는 건 아닌가?"라고 크게 고뇌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오우치와 시노하라가 몸과 마음이 처참하게 무너져가며 죽는 걸 이들은 옆에서 그다지 효과도 없는 치료와 처치를 해가며 생전 처음 목격하는 그 모든 증상들을 일일이 두 눈으로 목도해야 했으니,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니고서야 정신적 고통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오우치를 돌보던 한 의료진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임계 사고가 발생하고 자신도 그 증상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밀려드는 환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심정지가 발생했을 때, '이제는 오우치 씨가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의료진도 있었다.
의료진들은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스스로가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자 회의 때마다 어떻게든 가능성이 희박한 대책[27]이라도 거론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마저도 빈도가 낮아지는 가운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냐는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진들은 결코 환자들을 실험 및 관찰 대상 따위로 보지 않고 항상 위로와 격려를 해주며 환자들의 정신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주요 피폭자이자 사망자들의 상관인 요코카와 유타카는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 직장에 복귀했고, 2004년에 정년 퇴직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본인 또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으며, 스스로도 잘못이 있다고 반성하였다.
피폭환자들의 치료와 연구에 깊이 관여했던 히라이 히사마루는 정교수를 갖 단 2003년 53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물론 방사선 피폭과는 전혀 무관하고 급성 심근경색이 발생하여 사망했다. 50대를 넘기고 나서야 겨우 정교수가 되었는데 1년도 못 가고 죽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들만큼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일.
주치의 중 필두였던 마에카와 카즈히코는 2001년 3월 정년을 맞이해 도쿄대학병원을 떠났고, 이후 피폭 의료 전문가가 되었다. 12년 후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에도 활동하며 언론 인터뷰를 여러 번 한다. 사고로부터 22년이 지난 2021년에도 그는 의료계에서 활발히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2021년 11월에는 이 사고와 관련된 논문[28]에 공동 저자(정확하게는 제2저자)로 등재되기도 했다.
8. 가짜 사진의 범람
유명한 사건이지만, 잘못 알려진 사진들이 많다. 자극적인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해 이름만 도카이 촌 임계사고라고 적어놓고 상관없는 사진을 올린 것이다. 이런 사진들이 옛날 사건이라 교차검증하기 힘들기 때문에 해당 사건의 사진이라고 널리 퍼지고 있다.8.1. 확실히 도카이 촌 사진이 맞는 것들
오우치의 피폭 이후 악화된 얼굴 모습[29]은 인터넷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피폭 후 오우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오직 입원 직후 사진[30], 부풀어오른 침샘[31], 오우치의 악화되어 떨어져 나가며 검게 괴사되어 가는 피부 사진과[32] 4주 후 전신 모습[33], 그리고 오른팔 사진[34]과 왼팔 사진[35], 등과 엉덩이 일부 사진[36], 큰창자, 작은창자의 내시경 컬러사진[37]과 부검시의 왼쪽 가슴 상단[38]과 창자 사진뿐이다.그리고 시노하라 마사토의 경우는 이송 중의 모습[39], 의과학 연구소 입원 직후 변색된 입술, 10월 4일 입원 후 삭발하고 오른손에 두꺼운 붕대를 감은 사진, 변화되어 가는 얼굴 사진들[40], 손이 변화하는 모습들[41], 피부 손상이 진행된 이후 좌측에서 찍은 얼굴 사진, 입술 주변과 구강 내부 사진, 검게 변한 몸통 좌측 사진[42], 4월 4일에 찍힌 무릎 피부 사진[43] 부검 중 찍은 가슴 사진[44]이 전부이다.
이 외에도 추가 사진이 있을 수 있지만, 유실되었거나 병원 내부 비공개 자료들만 있을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 개인정보 문제로 공개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8.2. 해당 피해자 여부가 불분명한 사진
안면 사진[사진]-
눈이 감겨 있고[46] 피부의 겉인 표피가 벗겨져 진피층이 노출된 주름 없는 피투성이 얼굴로 일반적인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거의 잃은 2장의 끔찍한 몰골의 사진이다. 일단 각각 촬영 일자로 보이는 숫자가 3과 6으로 있어 x월 3일과 x월 6일에 촬영된 사진으로는 알 수 있으나, 몇 월에 촬영한 것인가는 전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사진이 오우치의 말기[47] 또는 시노하라 마사토의[48] 사진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49] 시노하라일 수도 있다는 근거로는 오우치는 입원 당시부터
인공호흡기를 달았지만 해당 사진에는 인공호흡기가 없다는 점,[50] 그리고 후술되어 있듯이 오우치는 눈을 절대 감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이 사진의 날짜는 사진속에 나와있다고 말했다. 또한 의료일지를 보면 1월 12일과 18일에 시노하라가 눈을 뜨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51]
- 그러나 시노하라나 오우치의 사진이 둘 다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오우치가 저 상태라면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어야 하고,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지 않다면 죽음 이후이므로 사망 직후나 부검밖에 없다. 자발호흡이 일시적으로 돌아와서 제거했을 가능성이 제로라곤 할 수 없겠지만 증세가 악화일로를 지나는 중에 가능성이 낮다. 다른 증거로 그 때의 오우치는 피부가 심하게 착색된 상태[52]였으므로 오우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한 시노하라 역시 시노하라의 얼굴 컬러 사진들을 보면 목에도 피부 손상이 있는 것이 보이지만 해당 사진은 목과 그 아래로는 피부가 기관절개 흔적을 제외하고는 멀쩡하다. 시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얼굴의 상피가 사라질 정도로 손상된 상황에서 목의 피부만 방사선 피해 없이 멀쩡하게 남았을 리는 없다.
- 실제로 시노하라의 치료 진행 상황을 보여주는 흑백 사진은 해당 사진과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주변 피부가 너무 깨끗하게 나와있고, 피부 톤도 부종이 있는것마냥 팽팽하므로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53] 또한 외국 커뮤니티의 의견 중 인공호흡기의 문제제기도 3일 사진은 드레싱이 되어있어서 잘 안보이지만 tracheostomy[54]가 위치할만한 곳에 혈성 삼출물이 보이므로, 그 날짜 가까이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 및 봉합을 한 것으로 보이며, 6일 사진의 경우 명확히 tracheostomy가 봉합되어 있는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 사진의 환자도 3일 촬영 직전까지 인공호흡기를 달았던 흔적 자체는 있어서 뭐라 말 하기는 어렵다.[55] 더군다나 시노하라 마사토는 인공호흡치료를 3월 2일부터 한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전인 1월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엔 기관절개 흔적이 없어야 정상적이다.
- 다만 아래의 가짜로 밝혀진 다른 사진처럼 명확한 근거나 다른 출처의 사진인 것으로 밝혀지지 못했고, 이 사진만큼은 원출처가 완전히 불분명하다. 책이나 온라인에서 남아있는 의료 기록과 대조해서 의아한 부분들을 추정한 정도이기에, 진위를 추정하는데 참고한 의료기록들조차도 일부 공식 자료나 확실한 출처도 있긴 하나 공식이 아닌 자료도 많아 진위 판별에 있어 무조건 정확하지는 못하다. 사진이 무조건 도카이 촌 피해자 사진이 아니다, 무조건 맞다 할 수준은 아니며 추후 정확한 이 사진의 정확한 출처가 나오기 전에는 무엇이다 확언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8.3. 잘못 알려진 사진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진들이다.사진 1[사진1]
- 피부가 까맣게 된 사람 사진은 대부분 사람들이 시노하라라 주장했지만, 실제로 시노하라는 아니고 극심한 항생제 알레르기로 인해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3명이다.[57] 피부가 벗겨지는 증상과 항생제 알레르기라는 설명이 맞다면, 스티븐스-존슨 증후군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진 2[사진2]
- 흔히 '체르노빌 소방관'으로도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오우치라고 주장했던 온몸이 전부 박피되어(붉은) 손가락과 다리가 천장 방향으로 견인 고정되어있는 전신 누드 사진. 이 인물은 오우치가 아닌 미국의 전신 화상 환자 치료 과정의 사진이다.[59] 우선 해당 사진의 병실은 오우치가 쓰던 병실과 다를 뿐더러,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사진의 인물과는 달리 오우치는 사건 전,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하반신 절단을 행한 적이 없다.[60] 오우치는 어느 정도 살집이 있는 체형이지만 해당 사진의 환자는 체형이 전혀 다르다. 오우치는 인공호흡기와 함께 특수한 침대[61] 등이 있었지만 해당 사진에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링크(글에는 검열된 링크가 있지만 댓글엔 무수정 사진 링크 있으니 주의). 또한 4chan에서 해당 환자를 치료하는 다른 각도의 사진[62]을 발굴한 적 있다. 무엇보다 해당 환자는 치료 후 생존했다. 텍사스에서 전기공학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사진 3[사진3]
- 엎드려 있는 피투성이 사진의 정체나 출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기는 하지만 여러 의학저널에 나온 오우치 히사시나 시노하라 마사토의 묘사[64]나 일부 사진의 모습과는 다르므로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악화가 더 진행됐다면 이 사진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크게 이상한 수준은 아니긴 하지만 둘 다 신체 뒷면의 피부가 심하게 손상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Reddit 등지에서는 보스니아 내전 피해자의 사진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외
또 초기의 오우치라고 오인되는 사람의 사진도 있다. 이 사람의 첫 번째 사진에선 비강 캐뉼라를 꽂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수염이 나 있지만, 2번째 사진에선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사라진 모습이다. 손의 사진도 있는데 손의 상피가 건조하게 변하면서 떨어져나가고 있다.[65] 이 남성도 오우치나 시노하라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우치의 경우, 체모 손실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캐뉼라 정도가 아니라 인공호흡기를 쓰고 있었다. 일부 논문에 초기 오우치의 턱 사진이 있는데, 수염의 색과 패턴이 이 남성과는 다르다. 시노하라의 경우, 피부손실 이전에 물집이 생기는 등의 전조증상이 있었고 피부가 건조해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얼굴의 모습이 해당 남성과는 다르다.
9. 유사 사건
1997년 3월 11일 도카이촌 JCO전원 원자로 및 핵연료 개발 공사(PNC, 動力炉·核燃料開発事業団)에서 폭발로 방사능이 누출된 사고가 있었는데 총 37명이 피폭되었다. 이 사고는 도넨 공장에서 발생하여 '도넨 사고'라 하는데, 대중에 잘 알려지진 못했다. JCO는 화재와 폭발을 일으킨 작업자의 부적절한 취급 절차와 표준 이하의 교육을 시정하지 못해서 몰매를 맞았다.2013년 5월 23일에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의 원자력 연구개발기구 가속기 실험시설에서, 방사능이 관리구역 밖으로 유출되고 연구원 4명이 피폭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사에 의하면 늑장 보고를 했다고 한다.
10. 관련 링크
-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구글 번역판
- 오우치 히사시, 시노하라 마사토, 요코카와 유타카 치료 일지 영문 번역본(사진 없음)
[1]
국립국어원의 공식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도카이 촌이 맞다.
[2]
일본핵연료 컨버션의 약자로,
스미토모 중공업 자회사다. 1980년에 스미토모 금속광산핵연료사업부 도카이 공장이 독립하여 스미토모 금속광산이 100% 출자한 자회사로 설립되었다.
[3]
생일이 늦었기 때문에 피폭될 당시에는 만 39세였으며, 피폭으로 투병 중에 40번째 생일을 맞이한 이후 사망했다.
[4]
깔때기를 잡고 오우치와 교대하고 난 뒤. 이때 요코카와는 마침 다른 방에 있었다고 한다.
[5]
7그레이에 피폭된 이후 7년간 생존하였다.
[6]
Entering Space by Robert Zubrin (1999), Table 8.5 on page 167.
[7]
최초의 임계사고였기에 급성 방사성 피폭의 많은 점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러기에 피부 질환이 제대로 발현되기도 전에 피해자들이 사망하였다.
[8]
체르노빌은 피부손상이 심한 피해자들의 사진과 영상이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화질이 심각하게 좋지 않다. 피해자들의 이름도 추측만 가능한 수준이고, 그나마도 구글 검색에서 각종 기형아 사진과 HBO 드라마작
체르노빌의 사진 등에 섞여 나와 찾기 힘들다. 고화질 사진과 구체적인 피해 명단은 러시아 정부 직속 데이터 센터에서 보관하고 있고 일부는 소련 해체 후 공개되기도 하였지만, 아직 많은 자료들이 데이터 센터에 잠들어 있다.
[유의]
구글,
네이버,
다음 등에서 검색 시 끔찍한 사진들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으며,
유튜브의 경우
수상한생선,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등 '방사능 피폭' 관련 영상에 피폭 경과 사진(특히 얼굴)을 썸네일 화면으로 활용한 사례가 있으니 이 점 주의해야 한다. 정말로 해당 사건의 전말이 궁금하다면 본 문서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당시
KBS,
MBC에서 보도한 뉴스 자료를 통해 간략하게 파악하는 걸 권장한다. 본 문서와 같은 활자 자료라도 사람이 물리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므로 열람 시 유의가 필요하다.
[10]
참고로
절검단 위키에서는 해당 사건의 위험도 수준을 위험도 4(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니 검색하지 않는 것을 권장함)로 책정해놨다.
심지어 일본어로 '東海村'만 검색해도 썸네일에 피폭 피해자(시노하라 마사토)의 얼굴 변화 사진이 등장하니 이 점 주의하라고 당부할 정도다.
[11]
[12]
1956년생, JCO에서 20년간 일했으며 오우치 시노하라 작업원과 작업을 하다가 지병으로 사고 몆 개월전에 퇴사했었다. 2000년 인터뷰에서 이 위법작업이 전환시험동에서 시작되기 이전인 1974년에 "제 1 가공작업동"에서 이미 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었다. 양동이에 녹여 탱크에 넣다가 용액이 넘처흘려서 바닥에 쏟아진 적이 있지만, 윗사람이 약간의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고 했다. 하세는 오우치 시노하라가 대충 작업을 한 것은 나쁘지만 둘 다 죽어서 억울하다고 했고, 간부들의 구속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요코가와는 하세가 있으니 괜찮다고 말할 정도였다.
[13]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당시
MBC 기자로, 도쿄특파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4]
MBC는 이후 오우치 히사시가 사망했을 때 유일하게 그 다음 날 메인뉴스에 사망 소식을 전했다. 참고로 당시 뉴스데스크 여자 앵커는
김은혜 현 대통령실 홍보수석이다.
[15]
시노하라 마사토와 요코가와 유타카가 인터뷰해서 알아낸 것.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고 했다.
[16]
일과가 모두 끝난 오우치와 교대하고 투입한 우라늄의 양을 계산하고 있었다.
[17]
요코가와는 20년 이상, 시노하라는 15년 이상, 오우치는 11년 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다.
[18]
아래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길쭉한 모양으로 제작되어 상당히 많은 용액을 용해탑에 투입해도 임계가 일어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출처]
1999년 10월 2일 조선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
타게무라 켄지(1969년생)
[21]
방사선의 강도는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한다. 대규모
원자력 사고가 반경 수십~수백 km까지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방사선이 아니라
방사성 물질이 바람에 날려서 퍼졌고 그 물질들이 각 위치에서 방사선을 뿜어댔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임계사고가 발생했다면 해당 지점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루이스 슬로틴만 봐도, 본인은 초근거리에서 방사선을 받았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사고지점에서 몇 미터라도 멀리 떨어진 직원들은 비교적 영향을 덜 받았다.
[22]
상사인 요코카와와 교대해
우라늄 깔때기를 잡고 있었다. 약간의 엇갈린 타이밍으로 요코카와와 오우치의 생과 사가 갈려버린 것.
[23]
이러한 구토, 메스꺼움 또는 입 안에서 금속 맛을 느낌, 실신 등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방사능에 피폭되면서 뇌의 화학수용체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잠시 후면 괜찮아지지만, 치사량의 방사선을 피폭했다면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며칠 후부터 지옥이 시작되는 것이다.
[24]
31만 명에 달했다.
[25]
원자력 자료정보실 편, '공포의 임계사고' 참조
[26]
2022년 기준으로 관련 기술이 존재하긴 하지만, 피폭 전 유전자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소모되기에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까지도 실험실에서 세포 하나 정도를 복구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27]
임계사고의 선례 자체가 얼마 안 되는데다, 대부분의 사례가 당시 기준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치료법은 어떤 서적에도 거의 실려있지 않았다. 주치의 마에카와 왈 '해도(海圖) 없는 항해'. 실제로 치료를 진행해보니 '교과서'와는 퍽 다른 증상들이 여럿 나타나는지라, 의료진들은 당혹해하며 논의를 거듭했다.
[28]
Medical management of heavily exposed victims: an experience at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29]
NHK 다큐멘터리에서 옆으로 고개를 돌린 장면이 나오긴 했다. 그러나 얼굴 전체가 드러난 적은 없었다.
[30]
다큐멘터리와 당시 그들의 이송 모습을 찍은 방송들에 나온다.
[31]
Initial symptoms of acute radiation syndrome in the JCO criticality accident in Tokai-mura
[32]
의료 저널들에 비교적 자주 나오는 사진들이므로 정확도 높음.
[33]
6.1.3 문단에 묘사 나옴. 여기에도 얼굴은 화질과 구도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34]
책
83일
[35]
NHK 다큐멘터리
[36]
NHK 다큐멘터리
[37]
책
83일, Pathological Changes in the Gastrointestinal Tract of a Heavily Radiation-exposed Worker at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38]
The pathology of multi-organ involvement: two autopsy cases from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39]
각종 다큐멘터리와 방송
[40]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흑백 버전과 찾기 매우 힘든 컬러 버전이 있다. 둘 다 출처는 제3회 일본임석구급의료학회(日本??救急医療学会)에서의 공표.
[41]
Multi-organ involvement: lessons from the experience of one victim of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2005, s asano)
[42]
출처 불명. 부검 사진과 상처 모습이 유사함. 정부 조사원이 찍은 사진이라는 추측이 있다.
[43]
한국 논문 '토카이무라 임계사고에 대한 전신방사선 피폭과 그 임상'
[44]
The pathology of multi-organ involvement: two autopsy cases from the Tokai-mura criticality accident
[사진]
사진(상처가 매우 심해 잔인하거나 혐오감이 들 수 있는 사진이므로 클릭시 주의. 내용 참고)
[46]
눈썹까지 없어 알아보기 힘들다.
[47]
특히 얼굴형이나 이목구비 위치가 비슷하여 그렇게 추정이 많이 된 편이다.
[48]
12월 20일에 팔 전반부 피부이식을 했지만, 안면 피부 이식일자는 알기 힘들다. 그리고 의료일지에 1월 18일 안면에 피부가 생착되지 않았다고 나온다.
[49]
시노하라 마사토의 1월 4일 사진과 비교한다면 이목구비만 봤을 땐 각도 문제와 눈이 달라 보이는 이유로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3일 사진의 경우 무언가가 이마와 볼에 남아있는데, 1월 4일 사진도 이마 부위에 뭔가가 붙어있는 흔적이 보인다. 모종의 이유로 남겨둔 특수한 재질의 드레싱일 가능성도 있지만 비교적 가능성이 낮으며, 아니면 표피 부분이 일부만 남아있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얼굴에 전반적으로 진물과 혈성 삼출물이 나오고 있는게 이미 다른 부분은 각질층 쪽의 상피세포가 죄다 벗겨져서로 보이기 때문. 그리고 6일 사진에는 이마와 볼에 붙어있던 것이 둘 다 없는데, 시계열상으로 볼-이마 순으로 하나하나 탈락되거나 제거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50]
단, 후술할 내용에 있지만 사진3에도
인공호흡기를 착용했다가 뺀 흔적은 목에 있다.
[51]
문서 하단에 링크가 있는 해당 의료일지는 어떤 증세가 있다고 그게 생기는 시점부터 설명하지는 않았고, 늦게 설명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서술상태로 보아 그 이전부터 이미 눈을 뜨지 못했을 수도 있다.
[52]
부검 사진과 NHK 다큐멘터리에 나옴
[53]
다만 흑백 사진은 화질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54]
기관절개술. 기관과 그 위의 살갗을 절개한 다음 절개된 구멍으로 인공호흡기를 연결하기 위해 시행한다.
[55]
오우치가 인공호흡기를 단 것도 입원하자마자는 아니고 11일부터다. 다만 용태가 계속 나빠진 걸 고려하면 그 후에 모종의 이유로 일시적이나마 인공호흡기를 빼도 괜찮을 컨디션이 됐을지는 의문이고, 의료일지에도 그런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1]
사진(시신이며 상처가 심해 혐오감이 들 수 있으므로 클릭 주의. 내용 참고)
[57]
Imgur에 옆으로 누운 다른 구도의 사진도 있다.
[사진2]
사진(상처가 매우 심해 잔인하거나 혐오감이 들 수 있는 사진이므로 클릭시 주의. 내용 참고)
[59]
슈라이너스 번스 병원라는 곳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Principles And Practices Of Burn Surgery'라는 책에 나옴.
[60]
러시아 의료진이 오른쪽 팔을 절단할 것을 권하기는 했지만 실행은 하지 않았고, 논의되던 부위도 피폭이 가장 심했던 팔이었지 다리가 아니었다.
[61]
롤링베드라 불리는 중환자용 침대다. 전기를 동력으로 삼아 조금씩 움직이며 좌우 55도까지 기울일 수 있다. 욕창 등을 막기 위한 것이다. 환자가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몸 각 부위를 고정시켜주는 두터운 패드가 달려 있다.
[62]
일본인이 아닌 백인 의료진이 치료하고 있다.
[사진3]
사진(상처가 심해 혐오감이 들 수 있으므로 클릭 주의. 내용 참고)
[64]
NHK 다큐멘터리에 오우치의 엉덩이와 등 하부의 모습이 나온 적이 있는데, 색소문제로 검기는 했지만 피부 탈락은 없었다.
[65]
심하게 진행된 방사성 화상보다는 겨울에 건조한 피부가 떨어져나가는 것과 비슷하고, 진피가 보이거나 피가 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