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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20> 1000~1200년 | 보노만 | |||||||||||
1200~1482년 | 다그본 왕국 | 보노만 | |||||||||||
1482~1500년 | 보노만 | 포르투갈령 골드코스트 | |||||||||||
1500~1620년 | 보노만 | 아고나 왕국 | |||||||||||
1620~1637년 | 덴키라 왕국 | ||||||||||||
1637~1650년 |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 | ||||||||||||
1650~1670년 | 덴키라 왕국 | ||||||||||||
1670~1701년 | 아샨티 왕국 | 덴키라 왕국 | |||||||||||
1701~1750년 | 아샨티 제국 | ||||||||||||
1750~1821년 | 아샨티 제국 | ||||||||||||
1821~1872년 | 아샨티 제국 | 영국령 식민지 | |||||||||||
1872~1877년 | 영국령 골드코스트 | ||||||||||||
1877~1901년 | 아샨티 제국 | 영국령 골드코스트 | |||||||||||
1901~1957년 | 영국령 골드코스트 | ||||||||||||
1957~1960년 | 가나 자치령 | ||||||||||||
1960~1966년 | 가나 제1공화국 | }}}}}}}}} |
1. 개요
구전 전통과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다그본 왕국는 빠르면 11세기에 오늘날의 가나에서 등장한 최초의 왕국이었고, 16세기 말에 확립되었다. 다그본 통치자들은 보통 무슬림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무슬림을 서기관과 의료인으로 데려오거나 환영했다. 그들의 존재의 결과로, 이슬람은 북부에 영향을 미쳤고 무슬림의 영향은 상인과 성직자들의 활동에 의해 퍼졌다.
무슬림의 영향을 받은 다그본 주의 북쪽 경계와 모시 왕국[1]의 최남단 전초 기지 사이의 울퉁불퉁한 나라의 넓은 벨트에는 다그본 실체에 통합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카세나 농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위 세분화된 사회에서 살았고, 친족 관계로 묶여 있었고, 그들의 씨족의 우두머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2. 역사
2.1. 건국
다그본 왕국은 다곰바[2] 사람들의 고향이며, 서기 1480년에 건국되었다. 왕국의 기원, 통치자 및 정복 전쟁에 대한 설명은 드럼 역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역사는 툰가를 떠난 "붉은 사냥꾼" 토하지에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차드 호수 동쪽, 작은 기병 무리와 함께 말리로 이동하기 전에 오늘날의 나이지리아 잠파라로 향한다. 토하지에는 말리 제국의 왕 페그 와비가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크포기누곰보를 낳았다.
말리에서 잠시 복무한 후, 크포기누곰보와 그의 추종자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떠오르는 송가이 제국과 충돌했고, 송가이 제국의 보복 공격은 크포기누곰보와 그의 추종자들을 남쪽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간 크포기누곰보는 권력을 장악하고 걸마의 비운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나 가바와[3]는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와 함께 비운을 떠나 가나의 북동쪽 구석에 있는 푸시가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는 장님이 될 때까지 통치했다.
크포기누곰보의 무덤은 현재 북동쪽 지역의 푸시가에 있다. 나 가바와의 아들 지릴리가 그를 계승했지만, 지릴리의 세 명의 남동생인 토하구, 시토부, 그리고 그만탐보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은 그들을 각각 밖으로 여정을 떠나게 만들었고 그렇게 다그본 왕국의 국경을 확장했다.
나 가바와는 다그본 왕국과 맘프루그 왕국과 나눔바 왕국의 역사 기록에도 남아 있으며, 다그본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그의 아들들을 통해 통치 왕조를 설립했다.
2.2. 전성기
그의 아들 시토부가 이끄는 나 가바와의 아이들은 그가 다그본 주를 설립한 카라가 근처의 남부루구루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감바와 마을에 잠시 정착했다.
정착하면서 왕은 "힘의 왕"을 의미하는 와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시토부가 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텡다나 또는 틴다나의 사무실을 제외하고는 중앙집권화된 정치 구조가 없는 콘콤바, 나페바, 바사레, 참바와 같은 토착민 집단을 만났다.
지구 사제는 문자 그대로 "땅의 소유자"로 번역되었다. 텡다나는 의식 의식을 주재하고 사람들과 그 땅의 신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시토부의 아들 나 나가시[4]는 그를 계승하고 정복 전쟁에 착수하여 많은 텡다나를 죽이고 토착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 나가시는 타믈 근처의 다이얄리 지역에 위치한 야니 다바리에 수도를 설립했고, 그의 아들, 형제, 삼촌을 정복된 사람들의 통치자로 임명함으로써 안정적인 정치 조직을 발전시켰다. 살아남은 텡담바는 지구 사제로 계속 기능했고, 콘콤바의 일부 구성원은 군대에서 역할을 맡았다.
2.3. 무역의 중심지
1700년경, 수도는 곤자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야니 다바리에서 동쪽의 새로운 도시[5]로 이전되었다. 다보야에서의 주요 대결은 다곰바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나 투투구리 는 야니 다바리 근처에서 곤자를 물리치고 보복했으며, 그의 후계자인 나 루르도 후에 전투에서 곤자를 이겼지만 지속적인 전쟁을 견딜 수 없었고 수도를 옌디로 옮겼다.
나 자기나는 다그본의 첫 번째 무슬림 통치자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외교와 무역을 장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를 옌디로 이전하고 평화의 귀환과 함께, 옌디에 있는 야나의 궁전에 무슬림 공동체가 나타났다. 사바리 야르나가 이끄는 만데 출신의 다유라와 나 카마시가 이끄는 하우사족 무슬림은 왕국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사발리, 야르나, 그리고 나 카마시를 시작으로, 이 사람들은 야나의 보호 기도에 대한 책임이 되었다. 야나의 궁전에서, 무슬림 장로들이 정치 구조로 통합되었다는 표시인 무슬림 칭호에는 야나가 "코란을 마시다"는 것을 확실히 한 나 와르구가 포함되었다; 야나의 이맘인 나릴 니만과 이단 캄발리도 이맘으로 인정되었다.
다울라족, 그리고 하우사족과의 무역 확장은 다그본을 페잔, 이집트, 그리고 배넹과 같은 이웃 왕국과 연결시컸으며 이는 문화적으로 다른 사헬 왕국, 특히 모시 왕국,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하우사족에 더 가까웠으며, 다그본은 소금, 콜라 너트, 노예의 주요 무역 중심지었다.
2.4. 멸망과 근황
이후 18세기 중반, 다그본은 아샨티 제국에 종속국으로 흡수되었고, 그렇게 멸망했다.다만 아샨티 제국의 다그본 정복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반박되는데, 그중 학자 칼 J. 하스는 "식민지 이전 시대에 다그본에 대한 아산티 제국의 지배에 대한 주장은 크게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1960년 가나 독립 후로 다그본 왕은 아샨티 제국의 제후에서 가나의 비주권군주제로서 다시 독자적인 왕으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다그본 왕은 2019년에 재위한 가리바 2세(Gariba II)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