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5:47

노평구


파일:노평구.jpg
성명 노평구(盧平久)
이명 노평구(盧平歐, 盧平九)
생몰 1912년 1월 16일 ~ 2003년 9월 8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용강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무교회주의 신자. 1995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노평구는 1912년 1월 16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용강리에서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배제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지만 단호히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고취했다. 이후 경성군으로 돌아와 어랑공립보통학교(漁郞公立普通學校)에 재학하던 1930년 2월 1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기 위해 김승룡(金承龍)과 함께 약 2백 명의 학생을 규합하여 태극기와 <일본정부에 반대하라>, <일본 제국주의 타도>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일본 통치를 비난하는 선전문서 1천 매를 살포했다. 또한 "광주학생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를 고창하며 어랑면 하남동 강변에서 어랑면 용천동 수남시장과 봉강역을 거쳐 어랑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0년 6월 9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했지만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친구 두어명과 함께 토막촌(土幕村)[1]에 들어간 그는 한강변에서 땅굴을 파고 살던 빈민들의 자제들을 상대로 학교를 열어 오전반, 오후반, 야학반을 개설해 3백여 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중변소를 치우기도 했고, 빈민들이 조금이라도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개조를 갈구했다.

이때 무교회주의 신앙연구지 <성서조선>을 접한 그는 <성서조선> 간행자 김교신의 안내로 일본에 건너가 츠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와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로부터 무교회주의 신앙을 10여년간 공부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46년에 무교회주의 신앙잡지 <성서연구>를 창간하여 1999년 12월까지 500호를 간행했다. 잡지에 수록된 글은 후에 <노평구 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그는 서울 종로 YMCA에서 성서집회를 개최해 김교신의 뒤를 이어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를 이끌었다. 한편 노평구는 잡지 <권두문>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논평했다. 1965년 1월호에서는 베트남 파병에 대해 "국민의 생명을 돈과 바꾸려는 처참한 생각"이라고 비판하면서 "우리는 영원히 남의 눈치나 쳐다보는 사대적인 노예들일 뿐인가"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노평구는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2003년 9월 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2003년 9월 15일에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