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남호완(南浩完) |
자 / 호 | 의지(義之) / 학포(學圃)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881년 2월 4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원구동 (現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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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년 7월 10일[3] |
경상북도 영덕군 | |
묘소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대리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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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호정은 1881년 2월 4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묘곡면 원구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광계공(光溪公) 남상소(南尙召)의 9대 종손인 아버지 남태진(南泰鎭, 1843 ~ 1895. 12. 26)과 어머니 안동 권씨(1847 ~ 1931. 1. 30) 권석룡(權錫龍)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21촌 지간의 족숙 남규진(南奎鎭)[4]에 입양되었다.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 등이 주도한 영해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2천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을 구타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 등을 훼손하는 한편, 주재소 건물과 일본인 가옥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그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여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지만,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0년 7월 10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남호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