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건경(建卿)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894년 2월 7일[2] |
경상도 영해도호부 읍내면 괴시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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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년 5월 10일[4] |
영덕경찰서 유치장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1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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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남응하와 남효직은 그의 5촌 당숙(堂叔)이다.
2. 생애
남진두는 1894년 2월 7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읍내면 괴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해촌(海村) 남극만(南極萬)의 5대손인 아버지 남효백(南孝栢)과 어머니 영해 신씨 신홍집(申弘輯)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그는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 參尉) 권태원 등이 주동한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남효직, 남여명, 정규하 등과 함께 3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해 그들도 부르게 했다.
이후 장터로 가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후 주재소로 다시 향했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격분한 남진두는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군중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남진두는 군중과 함께 그들을 포위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 여관에 감금했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에도 지속되다가 오후 5시경 대구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해 헌병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이 실시되자 몸을 피한 뒤 2차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지만 4월 20일에 영덕경찰서에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같은 해 5월 10일 영덕경찰서 유치장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남진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18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