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의 도읍인 낙양의 궁전이다.
남궁은 광무제가 건무 원년에 낙양에 입성하여 도읍하기로 결정한 기록에서 이미 후한서에 명칭이 나타나있어서[1] 기존에 낙양의 어떤 건물을 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낙양 정도 이후 건무 14년에 전전(前殿)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후로도 계속 증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쪽으로 북궁(北宮)을 새롭게 수축하면서 가운데 복도를 설치하여 두 궁을 오갈 수 있도록 하여 양궁을 모두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임조칭제한 황태후와 황제가 양궁을 하나씩 점하여 따로 기거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어 권력 관계를 파악하는데 단서가 될 수 있다고도 보인다.
면적은 남북 약 1,300m, 동서 약 1,000m의 장방형의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략 중동문대가(中東門大街) 이남, 모문(秏門) - 광양문대가(廣陽門大街) 이북, 개양문대가(開陽門大街) 이서, 소원문대가(小苑門大街) 이서에 위치해 있다고 본다.
사료에 나타난 남궁의 전각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각비전(卻非殿) - 대대적인 정비 이전에 광무제가 정한 정전(正殿)이다.
숭덕전(崇德殿) - 각비전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궁의 정중앙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일종의 거중(居中)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남궁 중수 이후의 정전이다.
선실전(宣室殿)
가덕전(嘉德殿)
태극전(太極殿)
천추만세전(千秋萬歲殿)
장추화환전(長秋和歡殿)
옥당전(玉堂殿)
영대전(靈臺殿)
악성전(樂成殿)
양안전(楊安殿)
광덕전(廣德殿)
동관(東觀)
운대(雲臺)
평성문(平城門) - 낙양 12성문 중에 하나인데, 유일하게 평성문만이 위위 관할이고 나머지 11문은 성문교위 관할이었다. 이를 통해 평성문이 궁성의 일부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冬十月癸丑, 車駕入洛陽, 幸南宮卻非殿, 遂定都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