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3년 3월 2일에 함경북도 화성군 화룡리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았고, 이후 농사를 짓다가 외국 무선전문학교에서 고학하였다. 이후 철도 노동자가 되어 1943년 5월부터 나남역에서 일하였으며 해방 이후 1945년 8월, 나남철도로동조합을 결성, 북조선공산당 나남시당부 및 나남시 소비조합 부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10월, 조쏘문화협회 나남시위원장에 임명되었다.1948년 1월, 나남시 인민위원회 선전과장에 임명, 서기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52년 2월, 함경북도 명천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화대군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1953년 11월, 당중앙위원회에 배치, 1959년 12월부터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담당하여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1965년 5월, 조선적십자회 국제부장이 되었으며 1969년 5월,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적인 위치'에 올랐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확인하기로는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위원장 자리이다.
1973년 3월,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74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 1979년 9월 교포사업총국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다. 1981년 4월,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김주영이 있긴 한데 조선대백과사전은 그가 8기 최고인민회의부터 대의원이었다고 적고 있다. 7기 대의원인 김주영이 동명이인일수도 있지만 조선대백과사전에도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확실친 않지만 일단은 조선대백과사전의 서술을 따르도록 한다.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1990년 12월, 해외동포영접부 고문으로 은퇴하였다. 1991년 2월 12일 3시에 68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김주영동지는 당과 수령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사회주의건설과 조국통일위업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동지는 다년간 당과 정권기관의 중요한 초소들에서 사업하면서 주체적혁명력량을 강화하며 각계층 해외동포들을 애국사업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