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8 09:44:27

김도만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선전선동부장을 역임했으나 갑산파 사건에서 숙청당했다.

2. 생애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26년 9월 20일, 평안북도 용천군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1946년 평양 사범대학을 졸업, 조선민주청년동맹 도위원회에서 일하다가 1947년 소련 즈다노프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역사학부로 유학을 가서 1952년에 졸업했다. 덕분에 러시아어가 유창하여 소련 외교관들과 북한 간부들의 만남에서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1952년 당중앙위원회 사회과학부 철학 및 정치경제 분과장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56년 7월, 선전선동부 부부장 자격으로 김일성의 동유럽 순방을 수행하였다. 1957년 5월, 대외문화련락협회 부위원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1957년 10월, 소련에 정부 대표단으로 다녀왔으며, 1958년 10월 전원회의에서 교육문화상으로 조동된 전임 선전선동부장 리일경의 후임으로 선전선동부장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아마 동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대회 집행부로 선출되는 한편,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1월에 동독, 1963년 6월에 북베트남을 방문하였다. 1964년 11월, 소련 10월 혁명기념행사에 북한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1964년 8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원을 지냈다.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6명과 더불어 조직지도부장 김영주, 선전선동부장 김도만, 국제부장 박용국 등이 당시 조선로동당 정책결정을 담당하는 핵심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1967년 5월, 갑산파 사건에서 갑작스럽게 숙청당했다. 후임 선전선동부장에는 김국태가 임명되었다. 북한이 내세운 비난 레퍼토리를 보면 박금철의 주장에 부화뇌동해서 김일성 숭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숙청 원인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편찬한 위대한 한생을 보면 김도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난을 퍼붓고 있다.
김도만은 어느해 10월 당사상사업방향을 토의 하는 선전선동부 과장협의회에서 해방전의 로조,농조운동도 당의 혁명전통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력설했다. 신통히도 박금철이 황해남도 배천군 조옥희중학교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의 폭을 넓히고 <국내투쟁>도 그에 포함시키라고 줴친 소리와 꼭 같았다. 그러자 리효순이까지 한몫끼여들어 박금철이 <갑산전통>을 내세우는데 나도 <길주농조전통>을 내세워야겠다고 고아댔다.
(...)
김도만은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는 잠자리에서나 보기 좋은 간단한 옛말이라고 하면서 회상기를 찍을 자재로 왕청같은 <목민심서>를 수십만부나 찍어 온 나라에 퍼뜨렸다. 오죽했으면 수령님께서 당총회가 벌어지던 어느날 밤에 김도만을 전화로 불러 당신은 어째서 하라는 혁명전통교양은 하지 않고 <목민심서> 따위 책을 자꾸 찍어 내리먹이는짓을 했는가고 따져물으셨겠는가. 김도만은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 나라 미풍량속을 가르쳐주려고 한번 읽어보았는데 내용이 괜찮더라니 간부들이 모두 읽으라고 내리먹였습니다,괜히 싱거운짓을 한번 했습니다라고 얼버무리였다. 수령님께서는 다음날 당총회를 지도하시면서 이에 대해 말씀하시였다.
"나는 어제 저녁에 김도만이 하는 말을 듣고 너무 기가 막혀서 이런 사람이 중앙당 비서이고 선전부장이니 우리 당이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위대한 한생 3권, 48, 52쪽.

그런가 하면 김소월의 시 초혼을 낭송한 것도 김도만의 죄목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김일성 초상화를 가정마다 거는 방침에 대해서 반대하고,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을 '그쪽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반했다고 비난한다. 일단 여기까지는 북한 문헌에서 다루는 내용들이고, 소련 외교문서에서는 김도만을 노골적은 친중파로 평가하면서 그가 소련 유학파임에도 김창만과 함께 소련을 비방하고 있다고 불만을 품었다.

재수 좋으면 농민이나 노동자로 하방돼서 일생을 마쳤을 것이고 재수 없으면 다른 '종파분자'들이 다 그렇듯이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여담

황장엽은 김도만이 김영주의 측근이라고 증언했다. 소련 외교문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1966년 10월 25일 소련대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김영주와 친밀한 관계이다'라고 적혀 있다.

4. 참고문헌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북한관계사료집 75.
  • 북한관계사료집 76.
  • 北韓關係史料集 80.
  •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III(과천: 국사편찬위원회,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