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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공수도/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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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분파 일람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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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진공수도 최영의 총재 생전에도 이견차로 독립해서 나간 단체들이 생각보다 많았으며, 대도숙 공도, 사도관 가라데, 아시하라 회관, 월드 오야마 가라테 등이 독립 이후 유명해진 단체들이다. 직접 독립하진 않았으나 정도회관과 원심회관 같은 경우도 원래 극진에서 유명하던 사범과 선수들이 구성원의 주축을 이룬다.

1990년대 총재 사후부턴 '극진'의 이름을 달고 분파가 되기 시작한 것이 특징. 사실 이 분파 문제는 각 단체 지도부들이 양보없이 맹렬히 대립하고 법정까지 간 문제라, 각 단체의 사범과 수련생들도 언급이 조심스러울수밖에 없어 언급이 꺼려지는 문제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1. 최영의 총재 사후 유언장에 따라 극진회관 2대 관장으로서 문장규[1]가 선출되었으나, 유언장만으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주장과 함께 일부는 마쓰이 쇼케이 관장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며[2] 분열.

2. 국제공수도연맹(IKO) 상표권과 '관장' 직함 사용 등으로 법정 공방이 생김. 신극진회, 극진회관, 극진회관 테츠카그룹, 극진 종가회, 극진 장학회, 극진관, 극진연합, 기타 그룹 등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 결국 쌍방향으로 다수의 법적 공방이 시작됨.

3. 2007년에 최종적으로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짐. '극진회관'의 2대 관장으로서 마쓰이 쇼케이의 관장 직위는 인정되나, 극진공수도를 만드는데 다른 사람들 역시 공헌을 했기에 그 사람들이 상표권이나 명칭을 사용하는데 방해를 하면 안됨(타 단체를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되기에). 현 극진회관은 분열로 인해 최영의 총재 생전과 같은 단체라는 의미로 보기 힘들고, '관장'이란 명칭이 한 단체 수장임을 과시하는 명칭으로 쓰일 수 있기에 이 명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다른 단체를 이단처럼 보이게 하지는 않음.

그리하여 다들 분리가 되고, 각 단체의 수장이 자신들 단체의 관장직을 주장할 수 있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주요 단체들을 살펴보면,

1. 최영의 총재가 만든 단체는 '극진회관', 해당 이름을 쓰는 단체는 3~4 단체이다. 극진회관 IKO1, 극진회관 전극진 .극진회관 테츠카그룹, 극진연합, 극진회관 마쓰시마 등이 있다.

2. 세계대회와 전일본대회 등을 최영의 총재 시절로부터 이어서 개최 중. 다른 단체들은 전부 새로운 대회를 개최한다.[3] 현재까지 세계대회, 전일본대회를 꾸준히 하고 있는 단체는 IKO1, 신극진회, 극진관, 극진연합이 있다.

3. 최영의 총재 시절에 이미 7~8단을 받은 고단자들 대부분이 마쓰이 쇼케이 관장을 지지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고다 사범(본부 고문), 이소베 사범(브라질 지부장), 피터 쳉(싱가폴 지부장), 바비 로우(하와이 지부장이자 최영의 총재 최초의 내제자. 2011년 연말에 사망.), 하워드 콜린스(유럽 지부장), 케니 우이텐 보가트(아프리카 지부장)

그러나 2010년 기준으로 일부 고단자들이 마쓰이 쇼케이 지지 철회 및 탈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워드 콜린스 사범이 신극진회로 이적, 2016년에는 오사카의 세계대회 2연패 거성 나카무라 마코토 탈퇴, 2018년에는 피터 쳉까지 탈퇴하였다.

4. 2018년 기준으로 일본 내 많은 IKO1 도장들의 탈퇴로 일본 내 도장 수는 신극진회에 밀려 2위가 되었다. 그래서 2018년 기준 도장 수로 1위는 신극진회, 2위 IKO1이다.

현재 각 유파의 수련생들은 당연히 자신을 정통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므로, 괜히 타 유파에게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 또한 유파가 다르다고 해도 어쨌든 같은 극진의 뿌리에서 나온 단체이기 때문에, 사이비 단체가 아닌 이상 수련 내용이나 대련 규칙에 큰 차이는 없다.[4] 자신이 어떤 신념이나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굳이 멀리서 찾지 말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장을 찾아 배워도 상관없다.

2. 분파 일람

  • 극진관(極真館, IKO5): 당초 문장규 관장 밑에서 극진회관의 최고고문, 주석사범을 맡고 있던 로야마 하쓰오(盧山初雄)[7]가 독립하여 관장을 맡고 있다. 극진회관의 재단화와 극진 장학회의 부활을 추진했으나, 마쓰이 쇼케이 관장과 의견 마찰을 빚어 이탈했다. 이쪽은 로야마가 부활시킨 극진 장학회가 중심이 되어 있으며, 연합회와 마찬가지로 연합체 체계이다. 기존의 극진룰과는 별도로, 글러브를 착용하고 안면타격을 허용하는 극진관 진검승부 룰을 도입했다. 부관장으로 있던 히로시게 사범이 극진권무회로 분파하면서 60% 극진관도장들이 분파해 기세가 많이 위축된 상황. 2019년 전일본대회에는 일본 선수가 4명 밖에 나오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극진관 극진관 한국 본부
  • 신극진회(新極真会, WKO) : 극진회관 지부장 협의회파(極真会館支部長協議会派)란 명칭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유키오 니시다, 산페이 게이지를 거쳐 현재의 미도리 겐지 대표과 함께 신극진회란 명칭으로 독립한다. 이후 1995년, 산페이 케이지를 중심으로 일본 국내 지부장 48명 중 35명이 이탈하여[8] 구성되었다. 일시적으로 최영의 총재의 아내 오야마 치야코(大山智弥子)를 대표로 앉혀 유족파와 협력했으나, 유족파가 '종가'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결별했다. 현재 IKO1과 함께 극진공수도를 양분하고 있는 단체이며, 대회의 TV 중계나 극진공수도의 올림픽 유치 시도 등을 통해 매체 및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신극진회 신극진회 한국연맹 홈페이지
  • 극진회관 세계총극진(極真会館 世界総極真) : 전일본 2회 챔피언 출신이고 최영의 총재 1대 제자인 하세가와 가즈유키(長谷川一幸)가 대표로 있다가 이후 오이시 다이고로 변경되었다. 협의회파가 신극진으로 이름을 바꾸자 하세가와 사범을 중심으로 거대조직이 신극진회에서 분파한다. 일본 내 300개가 넘는 도장이 이적했으니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일본 총본부
  • 극진회관 테츠카그룹(極真会館・手塚グループ): 대표는 테츠카 토루(手塚 暢). 마쓰이 관장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마쓰이 관장은 13년간 당시 지바도장의 테츠카 사범 밑에서 사사했다. 최영의 총재 사후 원로 사범위원회에서 테츠카 사범을 극진회관의 대표로 선출한다. 이즈음 건강상의 이유로 18개월간 요양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대표임을 천명한 3인에 의해 IKO1,2,3으로 분파되고 대표의 자리를 잃게 된다. 시끄러운 소란보다는 조용한 해결을 선택하고 2000년 극진회관 테츠카 그룹을 출범해 관장이 아닌 회장으로 취임한다. 17년 1월 테츠카 사범이 운명을 달리하고 그 뒤를 센다이의 모리 사범이 회장으로 취임하여 테츠카 사범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극진회관 테츠카 대표도장 대구
  • 극진회관 전일본극진연합회(全日本極真連合会): 통칭 극진연합. 대표는 고이 요시카즈(小井 義和). 주식회사 체계인 극진회관과는 달리 정회원 만장일치제에 의한 사단법인 체계이다. 체계의 모습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분열 과정에서 독자 노선을 걸은 사범들이 세운 독립 도장들의 연합체에 가깝다. 세계총극진 대규모 분파 이후 소규모 단체로 분류되는 실정.
    극진연합.
  • 국제공수도연맹 월드극진회관(国際空手道連盟ワールド極真会館): 전 IKO1 출신 타케 유코, 아시아 지부장 피터 쳉 등이 분파하여 세운 단체.
  • 극진권무회(極真拳武會): 극진관 출신의 히로시게 츠요시 회장이 세운 단체.

3. 관련 문서



[1] 제4회 극진 세계대회, 체급제 대회 우승자이자 100인 조수 달성자로 재일교포다. 일본명은 마쓰이 쇼케이. [2] 당시 문장규 관장은 30대로 젊었기에 그보다 경력있고 명망있는 사범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생겼다. [3] 그러나 신극진회 역시 전일본대회, 세계대회를 꾸준히 이어서 하고 있고 분파 이전 기록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신극진회의 역대 세계대회 우승자 목록을 보면 분파 이전의 5회까지는 IKO1과 동일하다. [4] 단, 극진관처럼 안면 타격을 허용하는 예외의 경우는 존재한다. [5]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로 한국 이름은 문장규(文章圭)이며, 마쓰이 쇼케이는 일본 내 통명이다. [6] 모두 총본부 인가를 받은 정식 지부이나 두 지부간에는 교류 없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7]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명 '노초웅(盧初雄)'. 1982년에 일본으로 귀화. [8] 그러나 9명은 극진회관으로 돌아가고, 1명(후쿠시마 지부)은 또 이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