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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쇼나족 · 은데벨레족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대 짐바브웨 유적 |
영어 | Great Zimbabwe National Monument | |
프랑스어 | Monument national du Grand Zimbabwe | |
국가·위치 | 짐바브웨 마스빙고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6년 | |
등재기준 | (i)[1], (iii)[2], (vi)[3] | |
지정번호 | 364 |
Great Zimbab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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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바브웨 마스빙고 주에 위치한 석조 도시유적. 남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유적이지만 백인 우월주의적인 역사해석으로 엄청난 수난을 겪은 유적이기도 하다.
쇼나족의 언어로 짐바브웨라는 말은 '숭배받는 일가' 혹은 '석조 가옥'을 의미하는만큼 석조로 만들어진 가옥이나 성채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사실 짐바브웨 유적들은 현재의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까지 약 200여개가 존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짐바브웨 유적이 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인 것.
짐바브웨 유적들은 쇼나족의 도시들로 축조되었는데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번성한 쇼나족들은 농업, 목축업, 광산채굴업, 해외무역에 종사했으며 이를 통해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런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200여개의 도시를 건설할 정도의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해외무역은 쇼나족에게 큰 부를 안겨준 산업으로 오늘날의 모잠비크 해안에 위치한 스와힐리족의 항구들과 무역을 했다. 금, 상아, 구리를 수출하고 스와힐리족의 항구에서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서 들여온 값비싼 비단, 도자기, 유리구슬 등을 수입했다.
짐바브웨 유적들에선 중국제 도자기의 파편, 페르시아제 파이앙스 도자기의 파편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런 광범위한 국제교역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구리 덩이쇠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발견된 거푸집의 문양과 일치해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만들어진 구리 덩이쇠가 화폐로서 중국까지 흘러들어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2. 구조
돌로 축조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무려 9m에 달하는 높이에 5m 두께의 탄탄한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내부에는 진흙으로 만든 원형의 주거지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 거대한 돌 성벽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의 백미로 꼽히는데, 모르타르를 전혀 쓰지 않고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이어붙이는 식으로 지어져 아주 탄탄했다.대체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1세기에서 15세기까지 3단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 1단계로 힐 컴플렉스 지역은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단계의 그레이트 인클로저 지역은 13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3단계인 밸리 컴플렉스는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건축된 걸로 보인다. 이렇게 광범위한 건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진 것에 대해 학자들은 군주가 바뀌면 새 군주가 이전 군주의 거주지를 놔두고 새로운 거주지를 건설해서가 아닌가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짐바브웨 버드라 불리는 돌로 만든 새의 조각이 아주 유명한데 이 유적 자체가 짐바브웨 국가 전체와 거의 동일시 되다보니 이 새의 모습을 현재에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당장 로디지아 시절의 국기와 현재 짐바브웨의 국기에도 이 새가 그려져있다.
3. 기록
쇼나족은 문자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한 문자 기록은 유럽인들에게서 나타난다. 처음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안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으로 포르투갈인들은 모잠비크 해안의 항구에서 내륙의 쇼나족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1531년 소팔라에 주둔하고 있던 포르투갈군 사령관인 빈센테 피가도는 본국에 "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의 내륙 평원의 금광 근처에 요새가 있으며 22m가 넘는 큰 탑도 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심바오에라 부르는데 법정이라는 뜻이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외에도 포르투갈인 여럿이 짐바브웨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어떤 포르투갈인들은 이 유적이 "사탄에 의해 지어진 성이다"라고 쓰고 있기도 하다.포르투갈인들은 현지의 쇼나족이 이런 도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무어인( 아랍인)들이 금광을 방어하려고 만든 요새가 버려진 걸로 단정했다. 사실 이 시기쯤 되면 쇼나족은 정치적 중심지를 옮긴지라 이런 판단을 했을법도 하다.
4. 재발견과 수난
쇼나족은 15세기 이후 정치적 중심지를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잠베지강쪽으로 옮기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종교적 중심지로서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이렇게 유지되던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830년대 남아프리카의 줄루족이 팽창하면서 북쪽으로 밀리던 응구니족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거주하던 이들을 쫓아내버리면서 폐허가 되고 만다.폐허가 된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재발견된건 1867년으로 독일계 미국인인 아담 렌더가 사냥을 하러 이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 조사는 1871년의 독일 고고학자 칼 마우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칼 마우크의 조사는 엄격한 과학적 조사가 아닌 자신의 망상을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덧씌우는 수준이었다.
칼 마우크는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건설한 자들이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과 관련이 있을것이라고 보았다. 마우크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왕의 사절과 함께 자신의 왕국으로 귀국했고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시바여왕의 궁전의 복제품이라고까지 했다.
이후 이 지역에 백인 이주민들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레이트 짐바브웨도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백인 이주민들과 학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이 지역 원주민인 흑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칼 마우크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해서 이 유적이 시바여왕의 궁전이라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시바여왕의 궁전을 건설하면서 흑인들이 노예로 동원되었다는 주장까지 서슴치 않았다. 유적에 대한 과학적 발굴이나 조사보다는 이런 선입견과 편견이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지배했다.
그나마 학술적이라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도 이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 발굴을 진행한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이 시바여왕의 궁전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흑인들이 건설자라는 생각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부 발굴결과와 포르투갈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아랍 상인들이 이 유적을 건설했다고 판단했다. 세실 로즈의 지원을 받아 짐바브웨 일대를 탐험한 시어도어 벤트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이 도시를 건설했을 것이라 믿었다. 1905년에 랜달 매클버(Randall-MacIver)라는 고고학자가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주변의 유사한 짐바브웨 유적들에서 발견된 토기 유물과 쇼나족의 토기가 유사하고 유적의 건축 양식에서 아랍인들의 영향이 전혀 보이지 않음을 근거로 하여 쇼나족이 유적의 건설자라고 주장했으며 일부 고고학자들도 이에 동조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백인들은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대한 왜곡된 주장들은 로디지아의 건국과 국가 유지에 확고한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즉, 과거에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페니키아인, 아랍인, 시바여왕 등이 흑인들을 지배한 곳이라는 인식을 프로파간다로 활용하여 이주민이 원주민을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시도한 것이다.
한편으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솔로몬의 보물이나 아랍 상인의 금같은게 숨겨져 있을 것이라 믿은 이들이 유적을 마구 파헤쳐 금속품들을 가져갔으며 그 무게는 25kg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정교하게 쌓여진 탑들은 이과정에서 다수가 파괴되었으며 이 때문에 복원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등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한 조사결과 시바여왕설, 페니키아 상인설 등을 뒤집는 결과들이 나왔다. 대체로 유물들의 연대가 12세기에서 16세기의 것으로 나타났던 것. 로디지아 정부는 이런 조사결과를 부정하면서 탄압하려 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디지아 정부나 국립박물관 디렉터들로부터 흑인 건축을 뒷받침할 만한 학술조사 결과 발표를 하지 말 것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학술적 결과들은 흑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로디지아가 무너지고 흑인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국명을 세실 로즈의 이름에서 따온 로디지아에서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따온 "짐바브웨"로 바꾸게 되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레이트 짐바브웨가 겪은 이런 일련의 수난들 때문에 짐바브웨 (舊 로디지아) 내에서는 "외국인은 국적과 학력을 막론하고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정서가 형성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짐바브웨가 쇄국 정책에 착수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사실 現 짐바브웨 영토 내에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 외에도 연구할 것이 산처럼 쌓여있는 현실인데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수난을 계기로 짐바브웨 국가 전체가 쇄국 정책에 돌입하면서 결과적으로 세계 각지의 고고학자들 입장에서는 완벽한 소탐대실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