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6:23:31

그레이클리프호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그레이클리프 참사.jpg

1. 개요2. 사고 내용3. 사고 이후

1. 개요

The Greycliffe Disaster

1927년 11월 3일 호주 시드니 시드니항구에서 일어난 해상 충돌사고.

2. 사고 내용

그레이클리프는 133톤 규모의 증기선으로, 1911년 시드니 발메인에서 건조됐다. 원래는 왓슨스 베이(Watson's Bay)와 사우스 쇼어 페리(South Shore Ferry) 소유였으나 시드니 페리스 리미티드(Sydney Ferries Limited)로 소유권이 옮겨졌다. 주로 학생들의 등하교를 책임졌다.

오후 4시 14분, 그레이클리프호는 예정대로 항해을 시작했다. 배에는 120명이 탑승했었다. 당시 크리켓경기를 구경하고 오는 학생들, 인근 가든 섬의 해군 조선소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 관광객이 많았다. 12노트로 이동중이었는데, 속도제한이 8노트였으니 1.5배 속도로 가고 있었다.

오후 4시 30분, 그레이클리프호가 RMS 타히티(RMS Tahiti)의 진로 앞에 들어섰다. 타히티호는 뉴질랜드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그레이클리프와 마찬가지로 과속중이었다. 그레이클리프의 조타실은 배 뒤를 돌아보기 힘든 구조라 타히티 호를 보지 못했다. RMS 타히티호는 그레이클리프가 오는 걸 보고 기적을 울렸으나 이미 늦었다. 그레이클리프가 7585톤 규모의 RMS 타이히호와 부딪히면서 전복되고 두동강났다.

겁에 질린 승객들은 배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그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배안의 흡연실과 방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갇혀버렸다. 그나마 근처에 해경 경찰서가 있어 구조는 빨랐다. 인근 배에선 구명조끼와 튜브를 던져가며 사람들을 구조했다. 밤이 되어서도 구조활동은 계속됐다. 근처에 부표를 띄워 위치를 기억하기 쉽게 했고, 조명을 켜서 혹여나 사람이 있나 없나를 살폈다.

사고로 40명이 사망했고, 50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장 어린 사망자는 향년 2세, 가장 나이 많은 사망자는 향년 81세였다. 사망자 중 6명은 초등학생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호주 역사상 최초로 파일럿이된 여성 밀리센트 브라이언트(Millicent Bryant)도 있었다. 사고는 시드니 항구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 원인은 앞서 말했듯이 여러 이유가 얽혀 복잡했다. 두 배 모두 과속했고, 그레이클리프의 조타실 구조 상 뒤를 돌아보기 힘들었다. 법원에선 두 배 모두 책임이 있다 결론지었다.

3. 사고 이후

사고 이후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한 모금이 모였다.

1930년 8월 15일, 타히티호는 웰링턴과 쿡섬 사이를 지나다가 배에 구멍이 나 침몰했다. 사망자는 없었다.

1938년에 나온 엘리너 다크(Eleanor Dark)의 소설 물길(Waterways)와, 1963년에 나온 섬너 로키 엘리엇(Sumner Locke Elliott)의 소설 조심해? 그가 들을수 도 있어(Careful, He Might Hear You)는 해당 사고에서 영감을 받아 나왔다.

왓슨스 베이에는 그레이클리프 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