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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타카마츠 쿄린(高松亨林) |
본관 | 개성 고씨[1] # |
출생 | 1907년 8월 25일 |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승동 (현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우감리 승동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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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5년 10월 5일[2] |
경상북도 예천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29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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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형림은 1907년 8월 25일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승동(현 예천군 개포면 우감리 승동마을)에서 아버지 고영주(高永周)[3]와 어머니 안동 권씨 권재전(權在銓)[4]의 딸 사이의 4남 5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노현, 오사카시, 나고야시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사진기술을 익히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잠시 예천농회(醴泉農會) 지도원으로 있다가 생활고로 인해 1938년 8월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만주국 안동성(安東省) 봉성현(鳳城縣) 임가대(林家臺)[5]에서 처음 사진관을 개업했다가 이후 중화민국 산시성 임분을 거쳐 1940년 8월 하남성 수무현(修武縣) 초작(焦作)[6]으로 이전했다.
그곳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던 중 1941년 8월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서 파견된 조씨(趙氏) 성을 가진 요원을 만났다. 그는 조 요원과 협의한 끝에 나월환 광복군 제5지대장과 그 대원들의 연락장소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기로 했으며, 강소성 소주에서 2명, 베이징에서 2명, 산시성 택주현(澤州縣)[7]에서 2명 등 광복군 입대 희망자들이 연이어 도착하자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1943년 광복군의 국내 기반 조성을 위해 예천으로 돌아온 그는, 겉으로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광복군 대원을 모집하다가 경찰에 탐지되어 그해 3월 1일 체포되었다. 이후 1943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출옥했다.
이후 예천군에서 평범하게 지내다가 1975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고형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 16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