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1:15:30

강장수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관제야당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역임했다.

2. 생애

1930년 8월 13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고면 동호동[1]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졸업 이후 철도부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였으며 이후 탄광에서 광부로도 일했다. 해방 이후에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 중학교 및 청진사범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1956년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하여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천도교청우당 부위원장으로 발탁, 남북회담 문제로 1972년 8월, 조평통 위원 및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자격으로 방북한 김준엽 교수를 만났다. 이때 김준엽 교수가 무령왕릉과 문무왕릉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큰 관심을 보였으며, 한반도에 과연 구석기 유물이 있었는지에 대해 북한에서 연구 중이라고 하였는데, 김준엽 교수가 이미 남한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자 무릎을 치면서 반색했다고 한다. 이후 남한에도 다녀갔으며 다른 북측 대표단원들이 유물들을 보고 이조 봉건왕조가 인민의 고혈을 착취한 잔재 운운하면서 비난을 해대는 반면에 강장수 혼자서 눈을 반짝이면서 열심히 유물을 관람하였고 남북한이 학술 교류 활성화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였으며, 남한엔 조선시대 유물이 많지만, 북한엔 고구려 유물이 많다는 자랑도 하였다.

1973년 5월에 남북적십자회담 6차 회담에 참석했다. 1973년 7월에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1977년 6월 15일, 병환으로 인해 불과 4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로동신문은 "선생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를 높이 받들어 각계각층 군중을 위대한 수령님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며 새 조국 건설과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촉진하기 위한 투쟁에 헌신적으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이 밝혀주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과 재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사회장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명색이 우당 위원장이라서 그런지 사회장인데도 장의위원 명단이 공개되는 등 괜찮은 대접을 받았으며 이후 조선대백과사전에도 등재되었다. 후임 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는 정신혁이 선출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강량욱 김만금 지재룡
양형섭 홍기문 장윤필
정준기 한석진 강점숙
황장엽 김성률 강희원
허정숙 김철민
김려중 김봉주

4.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 1권.

[1]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