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84년 10월 27일 |
함경남도 홍원현 학천면 풍산리[1] | |
사망 | 1949년 6월 |
러시아 콜호즈 | |
묘소 | 카자흐스탄 침켄트주 제트사이스키주 인터네셔널 콜호즈 근방 |
이명 | 강우건(姜宇鍵), 강석여(姜錫呂), 강건(姜健) |
본관 | 진주 강씨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연상은 1884년 10월 27일 함경남도 홍원현 학천면 풍산리에서 부친 강신포와 모친 장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살때 모친이 사망했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할머니에게 보내져 할머니와 형수의 품에서 성장했다. 8살 때부터 13살 때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살 부터는 야학에 다니면서 공부하여 지식을 습득한 뒤 홍원사립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했다. 21살 때는 홍원의 차상리에 서당을 차리고 70여 명의 학생들에게 한문을 강의했으며, 6개월간 측량강습소를 이수하기도 했다.이후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천도교 지방 전교사, 교구 임원, 순회 강사 등으로 몇 해 동안 활동했다. 특히 1915년부터 1919년 2월까지 천도교 상임임원과 공선선원으로 활동하면서 농민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3월 16일 홍원군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그해 여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홍원군 인사들을 후원하기 위해 동지 박주섭과 함께 서울에서 활동했다.
1919년 8월 당국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망명한 강연상은 9월 10일 봉천성 장백현에 도착한 뒤 이곳에서 홍원 시위운동을 주도한 윤덕보(尹德甫)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조직하였으며, 중앙집행부 재무부 주임을 맡았다. 이후 대한독립군비단이 1921년 10월 흥업단(興業團) 등 주변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을 때 남부부장으로 부임했다. 1922년 8월경 장백현에서 군비단, 흥업단, 태극단 등이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으로 통합되었을 때 부단장으로 일했다.
1924년 11월, 광정단은 대한통의부를 비롯한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함께 길림에서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결의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 이후 정의부에서 강연상을 선전부장에 임명했지만, 그는 취임하지 않고 군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윤덕보, 김용대 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 후 러시아 농촌 콜호즈에서 일했으며, 1931년 이후 콜호즈 검사 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다가 1949년 6월경에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카자흐스탄 침켄트주 제트사이스키주 인터네셔널 콜호즈 근방에 있으며, 그의 며느리인 황율라는 현재 카자흐스탄 침켄트시에 생존해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연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