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몇몇 연구자들은 이 소설이 친청파[1]와 반청파의 대립 속에서, 반청파의 속하는 작가가 집필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척화파의 절의에 대한 찬양이 주를 이루고 여성들이 전란 속에서 적에게 죽은 것이 아닌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는 발화에 근거한 주장이다. 또한 여성들의 이러한 죽음을 두 번의 전쟁으로 땅에 떨어진 유교 윤리를 다시 세우려고 하는 양반 사족들의 복고 운동 가운데 하나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전란 가운데 자신의 의지가 아닌 자살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어 정절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해석도 있다.[2]
창작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3] 그렇게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달천몽유록>, <피생몽유록> 등과 같이 전란을 다룬 몽유록이며, 지식인의 현실 모순 인식에 근거하여 창작된 몽유록의 특성상 현재 집권 세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에서 나오는 원귀들의 발화와 유사하다. 이 몽유록을 필두로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몽유록이 상당히 통속화되고 허구적이게 되었다는 점에서, 몽유록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때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
단 여기서의 친청은 박지원, 박제가로 대표되는 북학파와는 다르다.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라고 봐야 할 것이다.
[2]
전자는 박성순, 장경남이 주장하였고, 후자는 조혜란이 주장하였다.
[3]
1640년대 설과 1670년대 이후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