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8:46:05

강달모

<colbgcolor=#0047a0> 출생 1909년 4월 4일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동사리[1]
사망 1975년 9월 16일
전라남도 나주시
본관 진주 강씨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달모는 1909년 4월 4일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동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재학중이던 1927년 4월에 조선인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던 일본인 교유(敎諭) 강전(江田)을 타교로 몰아내는 데 참여했고, 1928년 3월에 선배들이 졸업한 뒤 뒤를 이어 교내학생 운동 간부로 선임되었다. 1929년 5월에는 장석천, 김기권, 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학생소비조합의 설치에 대하여 협의했다.

1929년 6월 도쿄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은 각 학교 학생 대표들을 소집해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했다. 이때 강달모는 윤창하(尹敞夏)와 함께 재정부위원으로 선임되어 동회의 회비 징수 및 회계 사무를 맡았다. 또한 독서회 중앙본부는 그 하부조직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강달모는 1929년 7월에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박노기, 송동식·이신형(李信珩)·김재용(金在瑢) 등과 모여 비밀결사의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다시 모여 광주사범학교독서회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했다. 이때 그는 재정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인쇄물을 인쇄물을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교부 받아 이를 각 독서회원에게 배포했다. 그러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언도받고 항소를 제기한 뒤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나주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며, 1975년 9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달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대교리·교촌리와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강유진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