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1:51:17

각원대사

覺遠大師

1. 개요2. 상세3. 행적

1. 개요

< 신조협려>, < 의천도룡기>의 등장인물. 장군보의 스승이다.

2. 상세

신조협려 말엽에 쉰 살 정도 되는 노승으로, 평생 소림사 장경각을 관리하면서 30여 년간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서책에만 매달려 온 학구파이다. 선종의 가르침을 깊이 깨우친 고승이지만, 절간에 틀어박혀 살다 보니 세속 일에 대해서는 깜깜하고, 선량함과 고지식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물정 모르는 답답한 사람처럼 보일 때도 많다.

신조협려 마지막 부분에서 장경각에서 능가경의 귀중한 판본을 훔쳐 달아난 소상자 윤극서를 쫓아 화산까지 오면서 양과 등 당대 무림의 고수들과 마주치게 된다. 두 사람은 능가경의 행간에 쓰여진 구양진경을 탐내 책을 도둑질한 것이지만, 각원은 '능가경이 읽고 싶으신 것이라면 여기 다른 번역본이 있습니다' 같은 소리를 하면서 도둑맞은 능가경을 돌려받는 대신 내어줄 새 능가경까지 챙겨서 쫓아왔다(...). 구양진경 때문에 일부러 훔쳐갔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하고, 고지식하게 이 능가경이 번역이 제일 명쾌하게 잘 되어 있다고 소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답답의 극치.

무공의 초식은 하나도 모르지만, 당대 어떤 고수 못지 않은 심오한 내공의 소유자이다. 그 사연도 기가 막힌 것이, 장경각에 있는 책은 모조리 읽어보다가 능가경 원본도 읽어보게 되었고, 그 행간에 쓰여진 구양진경도 달달 외우다시피 읽으면서 단련법을 따라했다고 한다. 즉 30여 년 동안 천하에 보기 드문 상승 내공을 수련하는 세월을 보낸 것. 본인은 정작 무공과 담을 쌓고 살아온지라, 구양진경이 몸을 단련하여 건강하게 하는 좋은 비결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종의 가르침에 통달한 나머지 '신체를 단련하는 비법인 구양진경도 좋지만, 어차피 신체는 먼지로 돌아갈 헛된 것이니 구양진경이 능가경 원본만큼 귀하지는 않다' 라고 이 천하에 보기 드문 절세 신공을 간단하게 폄하하는 모습마저 보일 정도. 윤극서와 소상자가 구양진경을 노렸을 거라는 발상 자체를 안 한 것도 상기한 본인의 기준을 이 둘에게 적용시켜서 '에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걸 노렸을 리가 있겠냐'고 생각했기 때문. 어떤 의미로는 불도를 제대로 따라가는 불제자라고 하겠으나 무협 세계관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이단아처럼 보인다는 점이 깨알 같은 웃음 포인트이다(...). 심성이 순박하고 불가의 가르침을 중시한다는 점은 천룡팔부의 허죽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3. 행적

3.1. < 신조협려>에서

소상자 윤극서가 훔쳐간 능가경을 되찾기 위해 장군보를 데리고 화산까지 쫓아왔다가 양과, 주백통 등과 만난다. 무공은 모르는 몸이었지만 이미 절정의 내공을 지닌 몸이라, 소림파 고수들과 연분이 있는 양과가 '이 사람들이 왜 이런 고수가 절 내에 있다는 사실을 일언반구도 안 했지?' 라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소상자와 윤극서가 능가경을 내어놓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가운데, 화산에 모여든 고수들이 그냥 두들겨 패고 뒤져보시죠라고 권하는데도 도리상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로 설득하려고 애쓴다(...). 심지어 제자 장군보가 양과의 도움을 받아 윤극서를 제압하려 애쓸 때도 '싸움은 나쁘다'라면서 장군보를 뜯어말리는데, 이 때 제자가 밀리자 또 구양진경의 이치를 바탕으로 즉석에서 해법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적이라면 적인 윤극서가 쩔쩔매자 구양진경의 내용으로 윤극서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제압당한 윤극서와 소상자의 몸에서 능가경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별 도리없이 빈 손으로 소림사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의천도룡기 초반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무공 초식을 모른다지만 이 시점에서 내력만큼은 양과, 일등대사, 곽정처럼 당대 제일가는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고, 구양진경의 이치를 깊이 깨우쳤기에 무학의 근본이치에도 식견이 대단하다. 양과 같은 정상급 고수조차 막연히 깨달은 던 이치인 '상대의 출수 방향을 알 수 없을 때는 늦게 출수해서 제압하면 된다.' 같은 것을 명쾌하게 한 마디로 자기 제자랑 싸우는 윤극서에게 조언할 정도(...). 아이러니하게도 윤극서는 천하오절급 경지에 한참 못 미치는 범재인지라 자기가 들은 충고의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마지막에 각원대사가 소상자의 장력을 맨몸으로 받았는데도 오히려 소상자가 반탄력에 밀려 윤극서 이상 가는 중상을 입고 리타이어했는데, 이런 위업은 양과, 일등대사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묘사가 후일 의천도룡기에 나온다.[1]

3.2. < 의천도룡기>에서

결국 능가경을 찾지 못하고 소림사로 돌아갔기 때문에, 장경각 관리를 태만히 한 죄로 쇠사슬에 묶여 묵언수행을 하면서 물을 긷는 벌을 받게 되었다. 몇 해 뒤 곽양이 소림사를 찾아오는 시점까지 이 벌을 받고 있었는데, 곽양이 물어도 말을 할 수 없어서 해명을 못 한 나머지(...) 곽양이 각원을 위한답시고 소림사 승려들과 시비가 붙어 사건이 커지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소림사 승려라면 계율을 어기면 다 법도대로 벌을 받는 것이고, 말 안 하고 물동이를 나르는 일이 수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곽양이 괜히 건드려 일을 키워놓은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곤륜삼성 하족도의 왕림으로 인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애초에 하족도는 윤극서의 유언을 각원에게 전해 주기 위해 소림사를 찾았다가 여러 우여곡절로 인해 소림사 측과 무공을 겨루게 되었다. 각원이 그 자리에 불려나오기에 앞서 하족도는 굳건한 청석판 포석 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로 금을 쫙쫙 그어서 바둑판을 만드는 신기로 좌중을 압도해 놓았는데, 뒤늦게 자리에 나온 각원은 하족도가 무공을 과시 중이라는 것을 알고 하족도가 그린 바둑판을 발로 밟아서 지워버린다.[2] 직후 하족도가 내공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됨을 인정하고 검법으로 겨루기를 청하지만, 각원은 무공을 전혀 몰라 정중히 거절한다. 하지만 그런 신공을 보고도 하족도가 각원의 말을 믿어줄 리 없어서 결국 대결이 펼쳐지고, 물지게를 짊어진 채로 휘청거리는 각원이 하족도의 검술을 모조리 물통으로 막아 버린다. 사실 진짜로 무공을 전혀 모르는 각원이긴 하지만, 구양진경을 깊이 수련하여 마음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경지에 있었기에 허둥대면서도 하족도의 초식을 자신도 모르게 막아낼 수 있었던 것. 물론 큼직한 물통 두 개의 사이즈로 이득을 본 측면도 있지만, 달리 보면 무공도 모르는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당대의 고수인 하족도의 공세를 막아낸 것이다.

하족도는 결국 도중에 끼어든 장군보와의 승부에서 본인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물러가게 되지만, 이제 소림사의 원로들이 장군보의 무공 내력을 추궁하면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소림사의 엄한 법도에 따르면 스승을 정식으로 두지 않고 혼자 무공을 훔쳐 배워서는 안 되는데, 장군보는 하필 곽양이 남겨준 철나한을 보고 나한권을 배운지라 이 금기를 위반하게 된 것. 이에 각원은 제자가 중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그 자리에 있던 곽양, 장군보를 떠메고 달아난다. 나한당 제자들의 포위망을 위압해 탈출한데다 두 사람을 물지게에 짊어지고 추격하던 승려들조차 따돌릴 만큼 빠르게 달아나는 신기를 선보였지만, 낮부터 하족도와 겨루고 또 무리해서 달아난지라 기력이 크게 쇠하게 되어 이윽고 원적하게 된다. 이 때 죽음을 앞두고 밤새도록 암송한 구양진경의 구결들을 장군보, 곽양, 그리고 몰래 뒤따라온 무색선사가 듣게 되어 후대의 무림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3]

의천도룡기 본편 시점에서는 대우가 약간 미묘한데, 무당파에서는 당연히 태사부 장삼봉의 스승인만큼 사조(師祖) 격의 배분이며, 본편에서는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장삼봉이 소림사에 방문할 적에 각원대사의 화제가 나오자마자 극히 공경하는 태도로 '선사의 은혜를 잊어본 적이 없다'라고 공경하기도 하는 등 일반적으로는 높은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림파 측에서는 허가도 받지 않고 본문을 떠나 버린 반역도 취급이라 대사는커녕 '각원'이라고만 부르고, 정식 출가는 안 했지만 각원이 기르던 제자인 장삼봉 역시 소림사 탈주범 신분으로 대우한다. 당연히 무림의 태산북두인 장삼봉에게까지 막 대하는 것은 아니나, 어디까지나 법도를 따지면 소림사 탈주 제자이기에 계율상 장삼봉을 본 사찰까지 불러들여 환영하지 못하고 산중턱의 암자에서 대접할 정도. 이러한 대우에는 소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 정파로 발돋움한 무당에 대한 시기와 견제가 한 몫을 차지하기도 한다.[4]


[1] 양과나 일등대사가 소상자를 해치고자 했으면 절정에 달한 무공으로 매우 손쉽게 할 수 있었겠지만, 각원처럼 무방비로 맞아 주고 자멸하게 만들기란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다. 구양진경의 사기성을 드러내기 위한 떡밥. 게다가 양과라면 목을 매는 곽양이 이렇게 생각했으므로 진위 여부는 확실하다고 하겠다. [2] 물론 짊어진 물통의 수백 근 무게로 덕을 좀 보기도 했고, 신발바닥이 아니라 몸에 묶인 사슬을 발로 딛고 밀어서 지워버린 것이긴 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지나다녀도 별로 닳지도 않은 돌판에 반 치 이상의 족적을 새기는 것은 절세 신공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위업이다. 하족도 역시 각원이 바둑판을 반도 채 지우기 전에 GG를 선언했다(...). [3] 그 자리에서 곽양이 가장 박식했기 때문에 후에 곽양에 의해 창시되는 아미파의 구양공은 박학함을 얻었고, 장군보는 각원대사를 가장 오래 모셨기 때문에 장군보(장삼봉)가 창시한 무당파의 구양공은 가장 정순하였으며, 무공이 가장 높았던 무색선사의 소림구양공은 가장 고강하게 되었다. [4] 문파 대 문파의 입장에서 보면 장삼봉이 소림사에 적을 두고 있다가 도망쳤다고 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이, 구양진경은 장경각에 보관된 능가경 원본으로부터 비롯해서 소림 승려 각원을 통해 장군보에게 전해진 것이고, 장군보가 익힌 소림 나한권도 소림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무당이 백여 년에 걸쳐 소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까지 성장했으니, 옹졸한 관점에서 보면 소림 출신 반역도가 소림에서 훔쳐 배운 무공을 변형시켜 대성했다고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의천도룡기 초, 중반까지 몇 차례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