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타노 시레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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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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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타르델리 (1984~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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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타노 시레아 (1985~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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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카브리니 (1986~1987) |
유벤투스 FC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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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푸리노 (1976~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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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타노 시레아 (1984~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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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카브리니 (1988~1989) |
가에타노 시레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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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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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of the Year 1982 | ||
수상 파올로 로시 |
2위 가에타노 시레아 |
3위 카를하인츠 푀르스터 호베르투 파우캉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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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가에타노 시레아 Gaetano Sci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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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3년 5월 25일 |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밀라노 | ||
사망 | 1989년 9월 3일 (향년 36세) | |
폴란드 인민공화국 우치주 밥스크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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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8cmㅣ 체중 75kg | |
직업 |
축구 선수 (
스위퍼 / 은퇴) 축구 코치 (은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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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아탈란타 BC (1970~1972 / 유스) 아탈란타 BC (1972~1974) 유벤투스 FC (1974~1988) |
기타 | 유벤투스 FC (1988~1989 / 수석 코치) | |
국가대표 | 78경기 2골 ( 이탈리아 / 1975~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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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현역 시절에 유벤투스에서 활약하며, 세리에 A 7회와 유러피언컵 1회 등 수많은 우승을 이끌었고,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44년 만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아탈란타 유스 팀에서 1군 팀으로 승격하며 프로에 데뷔하였다. 팀의 핵심 선수였지만 세리에 B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유벤투스가 시레아를 영입한다. 시레아는 안토넬로 쿠쿠레두, 클라우디오 젠틸레, 안토니오 카브리니와 함께 포백을 이루며 세리에 A 7회 우승과 UEFA컵 및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한다. 특히 1984-85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승리하여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1] 이후 1987-88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시레아는 유벤투스에서 총 552경기에 출전하여 통산 출전 3위[2]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75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시레아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4위에 그쳤고, UEFA 유로 1980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4위에 그쳤다.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우승에 공헌했는데, 이때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최후방부터 드리블을 몰고 가서 원투 패스로 독일 진영을 완전히 유린하고 마르코 타르델리의 득점을 도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고,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이탈리아식 리베로의 상징. 보다 공격적이고 과시적인 성향이 강했던 독일식 리베로와는 다르게 안정성을 우선한 경기 운영을 꾀했으며, 침착성에서 비롯된 리딩 능력이 뛰어났다. 상당히 지능적인 선수로, 상대의 패스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여 차단하는 인터셉팅 능력, 수비 조율, 커버 플레이, 안정적인 클리어링, 정교한 태클 등, 커맨더형 수비수의 진가를 보여주었다.시대를 풍미한 리베로답게 그의 공격력 또한 짚어보자면, 중앙에서 뿌려주는 정확한 중장거리 패스로 팀 빌드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가 하면, 타이밍을 빼앗아 한 번에 수비 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드리블링이나 스피드가 뛰어났다기보다 볼을 운반할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잡았던 탓이 크다. 공격 전개 시 자칫 실수로 팀을 위기에 빠뜨리는 모험적인 플레이를 극도로 기피했으며 철저하게 계산된 플레이 내에서 적재적소에 공격 가담을 하는 확고한 플레이 스타일을 지니고 있던 선수로 회자된다.
4. 은퇴 이후
이후 1988년까지 유벤투스에서 활약하고 은퇴를 했고 그해 유벤투스의 수석 코치로 임명됐으나 1년 3개월 뒤 1989년 9월 3일에 유벤투스와 구르니크 자브제의 UEFA컵 경기 해설을 위해 폴란드 자브제로 이동하던 중 밥스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향년 36세.그 후 1990년 신축된 스타디오 델레 알피에는 '쿠르바 가에타노 시레아'라는 이름의 서포터석이 설치되었고, 유벤투스 측은 매년 시레아를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유벤투스 FC (1974~1988)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82
5.2. 개인 수상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0
- 구에린 스포르티보 베스트 XI: 1982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2011
- 유벤투스 올타임 XI: 2017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B 10위)
- IFFHS 올타임 이탈리아 드림팀: 2021
5.3. 시레아에 대한 헌사
세계 최고? 수비에서라면 그건 시레아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다. 모든 수비수들은 시레아의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 디에고 마라도나
- 디에고 마라도나
상대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공을 걷어내던 우아함...
- 프랑코 바레시
- 프랑코 바레시
가에타노는 확실한 스타일과 함께 모든 면에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 디노 조프
- 디노 조프
충실하고 영리하다. 상대했던 몇몇 선수들과 함께 '가치있음'의 예시.
- 주세페 베르고미
- 주세페 베르고미
베켄바워를 제외하면 우리 팀 리베로들이 최고였다. 원래 리베로들은 극도로 수비 지향적이지만, 그들은 모두 진화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기를 조절하는 선수들이 되었다. 가에타노 시레아가 그 첫 번째 진화를 거친 선수였는데, 그는 항상 공이 있는 곳에서 경기했다.
- 안토니오 카브리니
- 안토니오 카브리니
베켄바워와 시레아 모두 미드필더 출신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리베로의 전형을 만들었다. 공을 가지고 전진하거나 필드 전방위에 걸쳐 플레이를 진행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본보기였다.
- 레나토 자카렐리
- 레나토 자카렐리
가에타노 시레아는 언제나 나의 캄피오네였다.
-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모든 이의 모범. 가에타노는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 세르지오 브리오
- 세르지오 브리오
6. 기타
- 그의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실하고 과묵한 리더의 표상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말수가 적고, 몸소 행동을 실천하는 타의 귀감이 되는 선수였다고. 안드레아 피를로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시레아의 리더십에 관해 두 페이지 정도를 할애하여 언급한 바 있다.
- 그의 성격이 차갑고 말이 없었던 것은 맞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순식간에 팀을 휘어 잡는 카리스마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굉장히 깔끔하고 우아한 수비를 즐겼는데, 수비수임에도 16년 경력에서 퇴장이 단 한 차례도 없는 그라운드 위의 신사였다.
- 커리어 내내 한 번도 주전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을 정도로 기복 없는 선수였고, 15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보유한 철강왕이기도 했다.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수비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1]
하지만 이날은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다.
[2]
1위는 705경기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2위는 689경기의
잔루이지 부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