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6 09:33:57

소비 부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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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의 제2비
소비 부여씨 | 小妃 扶餘氏
백제 성왕의 왕녀
출생 미상
백제
사망 미상
재위기간 신라 소비
553 10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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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B4B4><colcolor=#fbe673> 성씨 부여
부모 성왕
부군 진흥왕
봉작 소비(小妃) }}}}}}}}}
1. 개요2. 행적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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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공주이자 신라의 왕비. 성왕의 딸, 진흥왕 소비(小妃, 작은 왕비).

2. 행적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 하류를 빼앗긴 직후, 553년 10월, 백제 성왕은 딸(소비 부여씨)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고 진흥왕은 그녀를 소비(小妃)로 삼았다.[1] 이는 성왕이 한강 하류 영유권 문제를 문제삼지 않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표현이었지만, 백제의 군사 동맹이자 지원군을 파병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이미 553년부터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소비 부여씨는 전쟁을 준비할 약 1년간의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비정하게 이용된 것이다.

결국 소비 부여씨가 신라로 시집간지 약 1년이 지난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버지 성왕이 남편 진흥왕과의 전투 중 사망했고, 한때는 동맹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이 때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소비 부여씨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3. 여담

  • 한국사에서 소비(小妃)라는 칭호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다.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에 기록된 위덕왕의 누이 공주와 동일인인지는 불분명하다.
  • 견훤이 선조라고 주장했던 진흥왕의 아내 백숭부인(白𪀚夫人)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우선 백제 계승을 내세운 견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가장 좋은 인물이고, 더불어 신라의 정통성도 동시에 이어받은 셈이므로 삼한일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한편 한자를 살펴봐도 백(白)은 오방색에서 서쪽을 뜻하며 숭(𪀚)의 부수인 융(戎)은 서융으로서 서쪽 오랑캐를 뜻하므로, 관산성 전투로 백제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 측에서 백제를 그렇게 생각했던 입장을 담은 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시대의 경쟁자 왕건도 조상을 당나라 황제라고 남겼고 그것이 고려시대 당대에도 의심과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2] 후삼국 당대에는 조상을 유명인에 이어붙이는 윤색이 활발했기에 견훤도 그랬을 가능성은 물론 있으나, 견훤의 이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있다. 다름아닌 진흥왕의 선대왕 법흥왕 때 견훤과 아자개의 고향 상주와 문경 일대가 신라 왕실의 직접적인 투자를 받아 크게 발전했고 그 일대 지방세력가들의 부장품 또한 그 양과 질이 대폭 개선되는 게 고고학적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 법흥왕 이후부터 이 일대 호족들이 신라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을 개연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견훤과 아자개의 부계 선조가 진흥왕과 이 소비 부여씨 사이에서 나온 자손과 혼인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라는 모계 혈통이 너무나도 중요했기에 진골이라고 해도 6두품 이하 자손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절대로 진골이 될 수 없었고 당연히 왕위계승권도 없었다. 물론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있었다면 그 왕자녀는 진골 대우는 받았겠지만 다른 신라 진골들에겐 꽤 꺼려지는 결혼 상대였을테고[3], 그러면 상대는 6두품 이하 왕경인이나 왕실 직할령(문경, 상주, 영주 등이 포함된 죽령, 추풍령 일대)지방 유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

[1] 이미 진흥왕에게는 사도부인이 있었지만, 조선 태종 이전에는 왕비가 동시에 여러 명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후궁이 아니다. [2] 왕건의 주장도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다. 왕건 정권이 후당에 찔러준 정보를 바탕으로 후당의 2대 황제인 이사원이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했을 때, 왕건을 장회무족(長淮茂族)이라 하여 회이(淮夷)의 번성한 일족 출신이라고 추켜세워주었는데 이 회이라는 말은 지역적으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가 준독립세력인 평로치청번진을 세웠을 정도로 고구려 유민이 대단히 많았던 회하 유역에서 산둥성 동남부에 걸쳤던 지역을 말한다(주로 현 장쑤성 양저우시 일대). 또한 무려 최소한 한사군 낙랑군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시대를 거치며 융성했던 고구려 계열 성씨가 다름 아닌 '왕씨'였던 것도 강렬한 시사점이 있다. [3] 심지어는 신라와 대단히 관계가 돈독한 가야 금관국 왕족 출신의 신 김씨들도 문무왕의 시대가 되기 전까진 적어도 진골 상대 결혼 후보자로는 꺼려질 정도였다. [4] 견훤의 족보들 중 백숭 부인이 등장하지 않고 아예 부여융을 선조로 하여 세대수가 납득이 가게 작성된 족보가 있는데, 해당 족보는 그 시기의 정확성 탓에 오히려 진실성이 의심된다. 어느 누가 봐도 뭔가 어설픈 부분이 있고 세대수도 분명 좀 엉터리인 백숭부인판 족보가 적어도 진실성이나 신뢰도는 높은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