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1 22:03:50

선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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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 宣祖
파일:선조.jpg
선조 추정 어진[1][2][3]
출생 1552년 12월 6일[4]
(음력 명종 7년 11월 11일)
한성부 인달방 덕흥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5]
즉위 1567년 8월 17일[A] (14세)
(음력 명종 22년 7월 3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7]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608년 3월 16일 (향년 55세)
(음력 선조 41년 2월 1일)
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숙릉(肅陵) → 목릉(穆陵)[8]
재위기간 조선 제14대 국왕
1567년 8월 17일[A] ~ 1608년 3월 16일
(음력 선조 즉위년 7월 3일 ~ 선조 41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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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균(鈞) → 연(昖)[10]
부모 친부 덕흥대원군
친모 하동부대부인
양부 명종
양모 인순왕후
형제자매 3남 2녀 중 3남
왕비 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후궁
13명 [ 펼치기 · 접기 ]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순빈 김씨, 정빈 민씨, 정빈 홍씨, 온빈 한씨, 귀인 정씨, 숙의 정씨, 숙의 김씨, 숙의 한씨, 폐소원 윤씨, 상궁 김개시, 상궁 박씨
자녀 14남 11녀 (15남 14녀)
종교 유교 ( 성리학)
봉호 하성군(河城君)[11]
전호 영모전(永慕殿)
묘호 선종(宣宗) → 선조(宣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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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
계통광헌응도융조이모수유광휴연경
(啓統光憲凝道隆祚貽謀垂裕廣休延慶)
경명신력홍공융업
(景命神曆弘功隆業)
시호 조선: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 소경(昭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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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929163306.254.0.jpg
선조 한글 어필[12]
1. 개요2. 생애
2.1. 하성군 시절2.2. 즉위2.3. 목릉성세(穆陵盛世)2.4. 종계변무와 기축옥사2.5. 임진왜란 시기2.6. 후계 문제2.7.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2.8. 목릉
3. 평가4. 가족관계
4.1. 친가(전주 이씨)4.2. 배우자/자녀
5. 기타6. 대중매체
6.1. 소설6.2. 만화6.3. 게임6.4. 영화6.5. 드라마6.6. 교양ㆍ다큐멘터리
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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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4대 국왕. 묘호 선조(宣祖), 시호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는 연(昖).

조선 왕조 최초로 적통 출신이 아닌 후궁 소생 국왕이다. 원래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던 순회세자가 갑자기 이른 나이에 요절하면서 명종의 뒤를 이을 친자식이 없자, 왕실 종친 가운데 후사(後嗣)를 정하도록 하였고, 덕흥군 제삼자(德興君第參子) 즉 어린 하성군이 선택되어 명종과 인순왕후 양자로 들어가 명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초창기에는 숙모이자 법적으로 어머니인 인순왕후 수렴청정을 했지만 곧 철렴하고 1년만에 친정을 하게 된다.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으로, 왕위 계승도를 보면 선조 시기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계보도가 나눠지며, 이후 조선 임금들은 모두 선조의 직계 후손들이 된다.[13]

2. 생애

2.1. 하성군 시절

1552년(명종 7) 11월 11일에 한성의 인달방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3남으로 태어난다. 하동군부대부인은 집현전의 학사로 일하다가 세조 치세에 영의정으로 등극한 정인지의 증손녀이고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로 하성군은 중종의 서손자이다. 선조의 본명은 이균으로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하동군에서 이름을 따와 하성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성군이 태어난 잠저, 도정궁은 덕흥대원군이 어린 시절에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인데 터가 안 좋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끝나가던 즈음에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을 바꿔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우물이 아주 잘 나오는데 별 말을 다한다며 무시하고 집을 마저 지었다. 나쁜 터인 줄 알았더니 미래의 왕이 태어난 것이다.[14]

덕흥대원군은 하성군이 8살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하성군은 숙부인 명종의 지시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명종은 사망한 덕흥대원군을 대신하여 조카들에게 많은 정을 주었는데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자주 궁궐로 불렀는데 특히 하성군을 총애하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명종은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궁궐로 불러서는 익선관을 벗고 조카들에게 써보라고 말한다. 하원군과 하릉군은 명종의 말대로 써보았는데 하성군만 극구 사양하였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하였다. 감동한 명종은 하성군에게 "이 관은 네 것이니라."고 대답하였다.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의심받기도 하나 일단 이 일화는 광해군일기의 선조 행장 #에 기록되어 있다.[15]

1565년 9월 15일에 명종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신하들은 후계자 지명을 서둘렀다. 의식이 없어서 대화가 불가한 명종 앞에 신하들이 모여들었고 영의정인 이준경이 말을 꺼내는데 명종은 의식이 없어서 당연히 대답이 없었다. 2일이 지난 17일에도 명종이 일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와 후계자 문제를 논의한다. 인순왕후는 평소에 명종이 총애하던 하성군에게 간호를 맡긴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세자의 업무이기에 하성군의 간호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은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는 수면 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자로 논한 신하들을 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에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뻔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택하는 것은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처벌이 내려지는 중범죄이다. 이준경의 건의를 책망하지 않고 넘어간 점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인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을 감안하면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히지만 명종이 진심으로 하성군을 후계자로 인정하였는데 공개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인지 하성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만 아직 자신의 나이가 많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서 중전에게 아들을 얻으면 세자로 지명하고 실패하면 하성군에게 물려주자는 차선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에 병이 깊어진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명종실록에 없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온 것이다. 후대의 추정으로는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짓는 행위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만 동의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명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사실을 후손들은 알지만 당시에는 모르는 일이다. 하성군을 후계자로 선포하고 명종이 아들을 낳으면 후계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지는데 당시 명종은 30대이므로 자식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30대는 현대의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후계자를 얻어야 하는 왕임을 감안하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년 후인 1567년 6월 28일에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내정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덕흥대원군의 삼남인 하성군으로 결정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을축년의 일은 하성군이 명종을 간호한 일을 의미한다. 인순왕후도 당시의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도 인순왕후의 선언을 수용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성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이미 고인이고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도 하성군이 즉위하기 1달 전에 사망한다. 게다가 하동부대부인의 친정 역시 권세가 큰 가문이 아니고 아직 하성군도 혼인하지 않은 몸이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척신들이 발호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적었다. 그리고 하성군은 복성군의 형식적인 양자이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과 명종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의 양자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복성군의 아내도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땅한 선택지도 없었다. 중종의 손자 중에서 적자는 덕흥대원군이 낳은 3형제와 덕양군의 아들인 풍산군이 전부이다. 가장 많은 아들을 둔 해안군은 적자가 없고 서자만 두는 바람에 덕흥대원군은 하원군만 남겨두고 하릉군과 하성군을 이복형들의 양자로 보냈다. 이걸로도 모자라 금원군 슬하의 왕자인 영양군과 봉성군은 3촌 조카가 아닌 5촌 종질들 중에서 양자를 들였다. 하원군은 덕흥대원군의 장남이고 풍산군은 덕양군의 장남이므로 양자로 데려올 수 없으므로 남은 후보군은 하릉군과 하성군이고 심지어 하릉군은 이 당시에 작위조차 하릉군이 아니었다. # 하성군을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대원군의 막내아들로만 인식하면 하성군이 엄청난 방법을 통해서 범접하지 못하는 자리에 올라온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적었고 조선의 종법을 감안하면 하성군에게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로 즉위하기에 차라리 어린 후계자를 옹립해서 성년이 되기 전까지 군주의 역량을 기르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으니 선호되는 측면도 있었다. 세자로 책봉된 막내아들인 의안대군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도 하성군과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왕으로 즉위하여 선조가 된다. 즉위가 끝나고 선조의 즉위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이준경이 이미 대행대왕[16]께서 정한 일인데 무슨 공이냐고 반문하면서 투서를 모두 모아서 불태웠다. 동시에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된다. 선조의 치세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70년을 방치되었다가 고종의 치세에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각계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한다. 정작 고종 본인이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켰음을 선포한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선조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서자 출신의 방계 인사로 적자가 낳은 대군이 아니다. 그동안 장남은 아니어도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가 후계자로 올랐다. 성종은 삼촌인 예종보다 먼저 후계자로 지명된 의경세자의 아들이라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오른 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삼촌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3살이라 너무 어려서 왕위는 성종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적통 문제를 따지면 성종에게 위험이 될 소지가 있어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인수대비 안순왕후보다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계유정난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세조와 중종도 과거 대군이었다. 적장자 출신인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전부고 그마저도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한 기간이 10년 미만이다. 물론 선조도 서자는 아니고 엄연히 덕흥대원군의 적자이니 서자 출신인 왕은 영조가 최초이다. 잠시 왕비에 올랐다가 후궁으로 격하된 희빈 장씨를 숙종의 첩으로 간주한다면 경종이 최초가 된다.

2.2. 즉위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 중종의 9남, 그것도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선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조선 역사상 없었다. 성종의 경우 선대 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예종의 형이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올랐을 뿐이다.[17]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양모이자 법적으로 모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 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 할 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잡는 한편 명종 대에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광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 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을 위해 민생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선조 2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大院君)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 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 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는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8]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이젠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한낱 절을 할 수도 없었다.[19]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생부에 대한 추숭 떡밥이 여럿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왕위 계승자로서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은 분명 있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 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대비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1575년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2.3. 목릉성세(穆陵盛世)

즉위 직후 율곡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20]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사림 붕당이 크게 대두되면서 파당(동인VS서인) 갈등 문제도 새롭게 수면 위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대에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5남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부산 다대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시기의 치세는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 목릉성세(穆陵盛世)"[21]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실 " 목릉성세(穆陵盛世)"는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22]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전 시기에 비해서 민생이 확실히 나아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23] 무엇보다도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에[24]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 성격의 선조 대에 성리학 발전은 정부주도 성격의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 그 주체부터 다르다고 하겠다.

2.4. 종계변무와 기축옥사

1588년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를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록을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25]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성리학 유학계의 너무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26]라고 한다. 다만 학계에서 내리는 평가는 의외로 거의 평일색에 가까운데[27][28] 별 실리 없는 명분에 집착한 것에 불과했다는 대중적 평가와 의외로 통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심지어는 한 술 더 떠서 여건이 어떻든 간에 결국 <조훈조장(祖訓條章)>의 기사 그 자체는 손도 못댔으니까 아예 실패했다는 견해까지도 있는 판국이다.[29][30] 자세한 내용은 종계변무/평가 문서를 참고하라.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서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이 악용된 것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할 권신이나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망칠 간신으로 생각하여 죽이거나 쫓아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며 친국을 자주 실시하며 옥사를 즐기는 등의 가학적이고 잔악한 모습을 보이며[31]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 증폭시킨[32] 공안 사건이었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이러한 방식은 생산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권 그 자체의 획득이 목적인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33]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은 본인이 “권신이나 간신이 아니며 차라리 조정에서 들어와 관리를 생활한 다음 감옥에 가두는 것이 낫다”고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 숙종 때 반대파 서인 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 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34] 이 옥사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수백명 가량으로 가히 조선 역사상 최대규모의 옥사라 할만했으며 정확히 백명이 죽었던 그 악명 높은 갑자사화의 몇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35]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건저 문제)과 관련해 류성룡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가 정철만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자신이 조정에서 관리로 추천받지 않으면서 권간이라는 이유로 옥사 당시에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2.5. 임진왜란 시기

많은 유림들이 억울히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인해 더 서인 동인 사이에서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진행되던 1592년에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그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36]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 쫓아내주리라 기대하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37]로 인해 참패. 수도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평안도 영변부에서 광해군에게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고 왕권의 일부 권한을 일부 위임하여 조정의 절반인 분조(分朝)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듯 넘겨줬다.

이때 실록은 선조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회의 중에 혼자 사라져서는 점을 치고 있었던 정황이라든가, 한양에서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 몇 시간 후에 도주를 한다든가, # 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자기를 따라오며 고생하던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 하는 내용들이 마치 슬랩스틱을 곁들인 블랙코미디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개성부 평양부를 거쳐 영변을 거쳐 의주목으로 급하게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하며 결국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군 현종과 달리 선조의 파천은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욕을 대차게 먹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의 국토와 만백성을 버리고 자기 안위만 챙기고자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린다면 관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것이고 스스로 일어난 의병도 와해될 공산이 크다. 물론 왕이 잡히면 패전은 기정사일이지만 문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망가고자 했다는 것.

한양을 떠난 선조는 급기야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는데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갑자기 왕은 전쟁이 터지면 군대를 모아 반격을 해야하며 왕이 요동으로 떠나지 않으면 신하들이 따를것이라고 선조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조선을 지킬것을 주장하는 기록을 보아 이미 한양을 떠난 직후나 혹은 한양을 떠나기 전부터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을 지난 후에 영변에서는 선조가 대놓고 요동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명에 망명한다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명은 조선군을 지휘하는 선조가 타국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 때문에 혹시 조선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가경의 의심을[38] 하게 되고, 이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39]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완강히 표했다. 거기에다 신하들의 눈물 머금은 반대[40]에 결국 의주목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일단락되듯 무산되었다. 특히 영변대도호부에서 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였던 아들 광해군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일신에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크게 받게 되었다.[41] 특히, 그냥 내준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헌인 징비록에 따르면 ' 남대문 안 창고'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 순화군은 왕족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각지에서 온갖 횡포와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잡어들어다가 바쳤을 정도.[42]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밑바닥까지 실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선조 자신도 당연히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내심 우려했다.[43] 임란 말기에 우려한 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 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 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 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병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각종 고문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전쟁이 한참인 시기임에도 이순신을 가차없이 숙청한 점이다.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하던 시기에는 숙청하지 않았고 한신이나 게오르기 주코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들은 더 중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선발한 원균의 무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점은 선조의 큰 실책이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다. 이 부분은 선조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하였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 사실 이건 선조만의 잘못은 아닌데 원균이 자기합리화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 선조는 물론이고 많은 신하들도 원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흉이 선조이다. 막바지에야 상황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출진하지 않으려 버티던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죽일 듯한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44]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 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 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 나도 공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2.6. 후계 문제

임진왜란 발발 후 평안북도 의주까지 몽진하는 와중에 광해군 영변부에서 임시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分朝)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왕위 계승에서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싸이코패스적 기질의 광패한 망나니인지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아들 광해군을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보았고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생전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왕권강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452)[45] 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46]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세자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한층 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중에서도 류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충분히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20살 이상)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47]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만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에 이미 사대부 사이에서도 적자가 태어나 양자를 파양하고자 하는 소송은 기각하는 판례가 형성되었고[48] 왕가의 법도대로 광해군이 서자이건 차자이건 정식 세자로 옹립된 이상 군신명분이 세워져서 영창대군은 태어난 순간 신하가 되기 때문에 한번 세워진 명분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게 그 당시 성리학 종법 제도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졌기 때문이다. 설사 아무리 정통성이 있다고 한들 군국 대사를 처리해야 할 군주 2살짜리를 옹립하는것은 선조나 인목왕후는 물론 류영경의 소북에서도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49]

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류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를 의도적으로 돌려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 등에 등장한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당시 어의자 국왕 주치의였던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그야말로 "찹살 떡밥거리" 정도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 세자로 바꿔볼까 잠깐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장성한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류영경에게 건넸으나, 류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결국 사사된 이후 대역죄로 부관참시에 처해진다.

2.7.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족)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의 대표적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함경북도 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尼湯介)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개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국경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납치해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기습적으로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수급(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녹둔도 침공에 대한 당시 선조의 대응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조선은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방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에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50]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선조 31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선조 32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선조 33년) 4월 14일에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51]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 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 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야산)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쌍그리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壯快)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투항하고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년)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년)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여진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후금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藩胡)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8.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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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목릉 선조릉.jpg
목릉 전경
1608년, 재위 42년째 되는 해에 선조는 5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마친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 곳으로 이장[52]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포은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 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는데,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완전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였다.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는데 목릉이 조성된 인조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끝내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53]

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54]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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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보인 처참한 행적 덕분에 대중적으로 큰 증오를 받는 왕이다. 사실 임란 때의 실책만으로 욕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괴상한 행적이 워낙 임팩트가 크기에 오히려 후술할 평시의 통치 태도가 가려지는 면도 있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56] 보신적인 행태로[57][58][59][60][61]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62][63]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때 드러난 국가 지도자로서의 결격 사유 때문에 전반적인 여론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니까 파천으로 대표되는 무책임한 면모와 이순신 해임 등 전시의 무능 때문에 대중적 이미지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다.[64]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 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도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사주인(私主人)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65][66][67]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였다는 것이다.[68] 감시강화[69] 처벌강화[70] 이따위의 것들이나 대책이랍시고 내놓기나 하면서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걸었는데[71][72]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73][74][75][76][77][78][79][80]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81][82][83][84] 하기는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선조가 전란 전에 묻어간 것이 치세(治世)라고 알려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이름의 전란 전에 치세(治世)라는 것은 명종 대에 퇴계 같은 천재철학자들이 갑자기 등장해 이미 절정에 다다른[85] 민간의 문화융성이 그대로 선조 대에 이어진 것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이 민생경제 차원의 태평성대라고 개념이 전도되어 오인된 것에 불과하다. 여전히 조선 전기부터 누적된 구조적 모순은 계속 심화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해서 선조는 군주로서 거의 전적으로 문제해결력이 없다시피한 극도로 무능한 모습을 드러냈고[86] 그냥 단지 무능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붕당이라는 자신의 재위기에 새로 발생한 문제는 증폭시키며[87] 문제해결을 방해했다.[88]

일부 선조 옹호론자들은 끈질기게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만 이어졌다면 명군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만약이고 자시고 간에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25년이라는 기나긴 집권 기간도 반영되어 내려진 것이다. 애초에 이상의 선조 관련 평가는 어디 어중이떠중이 재야학자들도 아닌 주류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내려 왔던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조가 명군감이라는 괴상한 미화가 나오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정작 그 전란 전에 25년 동안에도 국가의 발전에 선조가 제대로 기여한 것이 있었는지는 그리고 내세울 만한 업적이 무엇이라도 있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89][90]

일각에서는 "선조는 성리학 카르텔의 수장이었으므로 좋은 기록을 받았다"거나 "전시 대비에 무능하고 게을렀다"는 식으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선조를 옹호하고 미화하는 무리들에게는 매우 좋은 빌미를 제공한다. 오히려 선조는 대의명분이나 유교적인 절차를 허례허식 따위로 치부하며 제멋대로 정치를 했다. 이러한 성향이 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냈더라면 파격적이고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선조의 방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가히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91] 임진왜란 중에 보인 해괴하고 황당한 파천 계획만 보더라도 선조는 대의명분보다 일신의 이득만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행태는 국가적인 위기 중에도 사회 전반의 안녕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손익 계산에 혈안인 현대의 부패 정치인에 가깝지 전제군주제 시대의 왕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치 태도이다.

심지어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오로지 자신 한 몸의 안위만을 위해 아예 요동으로 들어가서 국가와 백성들을 완전히 포기할 의사를 내비치는 추태를 보여 민심을 잃고 왕권에 먹칠까지 하는 등 선조의 인간적인 하자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선조가 임란 동안 저질러 댔던 얼빠진 짓거리들을 보며 질린 나머지 나중에는 대놓고 왕의 면전에다 필부[92]라는 멸칭을 사용했으랴. 전근대 사회에서 왕에게 이런 멸칭이 공공연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의 권위에 심각하게 금이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대에 와서도 딱 그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전쟁 중의 선조의 평가는 군주로서 결격 수준이며 가히 최악이다. 선조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쉬지 않고 북으로 몽진했고 의주에 이르르자 아예 타국으로 도주하면서 어린 아들에게 선위할 것처럼 분위기를 짜 놓았다. 여차하면 자기 국가를 버리고 요동에서 새로운 정권을 만든 후 전란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통치하겠다는, 왕으로서는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죄악인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실행에까지 옮겼다가 이 따위 작자를 왕으로 모셨던 조선은 물론 입경을 사실상 거부한 명나라와 함께 심지어 적국인 왜까지 삼국 모두를 당혹시켰다. 이렇듯 선조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일신의 안위와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실로 평범한 백성보다도 못한 행동거지였다.

이처럼 아무런 생산적인 기여는 못하면서 명신들과 명장들이 세력을 키운다 싶으면 여지없이 숙청해 버렸으며 전쟁이 끝나자 돌아와서 실권을 잡은 후에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선위 쇼 같은 얕은 술수 따위나 쓰면서 지대추구를 꾀했을 정도로 간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으니까 조선 최악의 암군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것은 전혀 억울할 것이 없는 것이다. 선조가 분명 인재를 보는 눈이 조금 있었다는 것까지는 주류 사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점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선조는 그 인재를 선발한 후에는 국가와 민족에 이롭게 사용할 지혜는 전혀 갖추지 못했고 그 인재로 국가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다스리는 방법은 전혀 몰랐던 어리석은 임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한낱 양아치에나 어울리지 한 국가를 다스릴 그릇이 안 되는 자가 전근대 사회의 한계로 인해 왕손이라는 이유로 왕 자리를 차치해서 생긴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총평을 하자면 일부 인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지도자로서 필요한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 됨됨이가 극히 졸렬하고 천박한데다 기본적인 도덕관념조차 결여되었고 무엇보다도 최고정책결정권자로서 정작 필요한 정책적 혜안이 탁월한 것도 아니라서[93] 별다른 성과조차 거두지 못하고 시간만 죽이다 전란이라는 비상상황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아예 국가를 나락에 빠뜨리기까지 해버린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일국을 다스려야 할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신과 권력욕 충족 외에는 별다른 성실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거시적 비전도 없고[94] 일관된 원칙도 없는[95] 방만한 국정 운영으로 제대로 된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96]

설상가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결여되고 이기주의적인 지도자들이 대개 그렇듯 자기가 그나마 지니고 있었던 몇 안 되는 장점조차도 자식들에게 제대로 계승해 주지 못했다. 선조는 조선 왕조 역사를 통틀어 자식농사까지 최악으로 지어 후대에 민폐를 무진장 끼친 것으로 유명한데 왕자들이 하나같이 개차반이 된 이유도 남탓할 것 없이 결국 선조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다.[97] 이처럼 인간으로서는 됨됨이가 저열했고 국가지도자로서도 성과가 형편없었으니까 악인인 주제에 암군이기까지 하다는 박한 평가를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4. 가족관계

4.1. 친가(전주 이씨)

4.2. 배우자/자녀

선조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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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순번 작호 생몰기간 모후 비고
<colcolor=#ffd400> 1남 <colcolor=#b82647,#d94767><colbgcolor=#fff> 임해군
臨海君
<colbgcolor=#fff><colcolor=#000> 진
<colbgcolor=#fff><colcolor=#000> 1572년 ~ 1609년 <colbgcolor=#fff><colcolor=#000> 공빈 김씨 <colbgcolor=#fff>
2남 광해군
光海君

1575년 ~ 1641년 15대 국왕
3남 의안군
義安君

1577년 ~ 1588년 인빈 김씨
4남 신성군
信城君

1578년 ~ 1592년
5남 정원군
定遠君

1580년 ~ 1619년 추존 국왕
- 왕자 ~ 1603년
6남 순화군
順和君

𤣰
1580년 ~ 1607년 순빈 김씨
7남 인성군
仁城君

1588년 ~ 1628년 정빈 민씨
8남 의창군
義昌君

1589년 ~ 1645년 인빈 김씨
9남 경창군
慶昌君

1596년 ~ 1644년 정빈 홍씨
10남 흥안군
興安君

1598년 ~ 1624년 온빈 한씨
11남 경평군
慶平君

1600년 ~ 1673년
12남 인흥군
仁興君

1604년 ~ 1651년 정빈 민씨
13남 영창대군
永昌大君

1606년 ~ 1614년 인목왕후
14남 영성군
寧城君

1606년 ~ 1649년 온빈 한씨 }}}}}}}}}

자식이 10명을 넘겼던 왕 중 하나로 이후에는 인조(6남 1녀), 효종(3남 8녀)[108], 현종(1남 3녀), 숙종(6남 2녀)[109]을 거쳐[110] 영조 때가 되어서야 2남 12녀로 10명 이상의 자녀를 둔 왕이 나온다.[111]

5. 기타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朝報)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112]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와 같은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인쇄가 아니라 필사를 시켜 한성부윤(정 2품의 고위직, 현재의 서울시장) 이상 고위 관리 몇몇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해 배포하였는바 금지한 것.
  •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류성룡에게 베타테스트를 권하기도 했다.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부사수가 돌려가며 장전한다는 언급으로는 리볼버 개틀링의 원리로 작동하는 공용화기로 추측된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데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류성룡도 세트로 깠다. 전쟁 발발 전에도 국방 강화에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군과 국방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듯 보인다.
  • 선조는 인물 욕심이 많았다. 과거 시험이 아니라 추천이나 평판 등을 누군가에게 듣고서 꼭 곁으로 불러 관직을 줬다. 중종- 인종- 명종 대를 지나면서 훈구파가 퇴조하고 사림파가 득세를 하게 됐는데, 선조는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은 선비들을 죄다 사면하고 그 후손들 중 뽑을 만한 자를 가렸다.[113] 덕분에 선조 대와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현재도 많이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에 은둔해서 도를 닦는 사람들(산림 세력)까지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서 현감직이라도 꼭 내렸다고. 반면 비리를 저질러 탄핵된 인사들은 여지없이 끝까지 쫓아내 벌을 줬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처럼 끊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돌아가며 등용하고 갈아치워 권력이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을 막았다고 평가했다.
  • 조선시대 대부분의 왕이 그랬지만 선조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피로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애초에 태어날때부터 몸이 허약했다고 하니... 실제로 왜란 전에도 이명, 소화불량, 심질[114]에 시달린다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을 지경. 특히 왜란 이후에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크게 받아 온갖 병이 도져 도저히 못하겠다며 광해군에게 계속 양위하려 하였다. 물론 이를 당대나 지금이나 왕권강화를 위한 선위파동 쇼라고 보기도 하나 극심한 정신병으로 실제로 양위하려 했던 걸로 보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115] 그의 아들들이 대부분 성격이 거칠고 모난지라 특유의 기질이 유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임해군도 난폭함과 더불어 우울증이 있었다고 한다.
파일:선조.jpg *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첫째아들 임해군을 수행해 피난했던 윤탁연의 후손들이 이것을 선조의 어진이라 주장했는데, 후손들은 이 어진을 윤탁연의 『중호관북일기』와 함께 대대로 보존해 왔다고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자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 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이 그림이 진짜 선조의 어진이라면 광해군의 얼굴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파일:1610636a2e221d3ed.jpg *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이베이에 떴었다. 현재는 판매된 상태이고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이 없어 진짜 선조의 모습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은 낮다.
파일:external/img.khan.co.kr/6i30k11b.jpg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60929163306.254.0.jpg * 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언문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다. 전문 현대어 해석은 조선 왕실의 한글 편지를 참조.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서예)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한석봉이는 액자(額字)가 비록 훌륭하지만 초서와 해서는 부족하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121]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122]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 은근히 삼국지연의에 관심이 많았다. 즉위 초 삼국지 내용을 언급하다가 기대승에게 까인 것은 유명한 일화인데 주변에서 들었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잠저가 되었든 궁중이 되었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연의의 내용을 어린시절부터 접한 것은 확실하기에 한국 최초의 삼국지덕후들 중의 한 명으로 추정된다. # 그 외 선조 38년인 1605년엔 선조가 향시 과거에 ' 제갈량 관우를 구하지 않았다'는 주제를 냈는데 '제갈량이 관우를 죽이려고 일부러 그랬다'라고 쓴 합격자를 보고 '이건 무슨 개소리냐?'라고 합격을 취소시키기도 했다. # 자치통감강목(제왕교육)을 공부하면서 왠만한 촉빠들도 실드치기 어려운 유비 유장 통수를 가지고도 "유비는 호걸일 뿐 아니라 사실 인자한 사람이었다. 유장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의 선(善)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작은 악이라 하여 행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 하여 행하지 아니하지 말라.'는 말은 삼대(三代) 이후에 없었던 말이다.","'사자(嗣子)가 하잘것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차지하라.'하였으니, 이 어찌 천하를 공공물로 여기는 마음이 아니겠으며 제갈량이 아니면 어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 사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다지만 임진왜란 때 관우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왕이기도 했고 왜란 직후 나온 소설 임진록에서는 장비의 환생 취급을 받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삼국지와 촉한과는 인연이 많은 왕이긴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사실 진성 촉빠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123]
  •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모진 풍파를 겪은 임금이다.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등 반란이 계속 일어난 데다가 조선 역사상 최고로 큰 전쟁인 임진왜란까지 겪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보면 왜 하필 나냐고!라며 고함을 지를만할 정도로 고생을 엄청나게 했다. 충분히 정신병이 걸리고도 남을 상황이긴 하다. 이 풍파는 선조가 죽어서까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6. 대중매체

6.1. 소설

  • 이우혁의 소설 < 왜란종결자>에서는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에 대해 선조의 몸에 마수가 깃들었지만[124] 그걸 제외해도 원래부터 암군에 인성 자체가 구제불능이라고 묘사했다.[125] 같은 케이스로 설정된 원균[126]과 비교해도 그 패악성과 인간성이 심각하게 묘사되어 주인공인 은동 입으로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인간 쓰레기라 평가되었고[127] 이순신의 경우 다시 지휘관에 부임했다가 은동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은 뒤로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연승하여 이 인간을 부들거리게 만들겠다는 증오심으로 싸움에 임했다.
  • 김성한의 소설 < 7년전쟁>에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 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 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 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진왜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김훈의 소설 <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6.2.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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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리 콤판의 만화 < YI SOON SHIN>에서는 무능하고 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선조가 뚱뚱했다는 기록은 없다.[128] 사실 비만보다 더 문제는 서구권 폭군 클리셰대로 만화고기를 손으로 들고 뜯어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연산군 같은 폭군이라도 명색이 예법에 엄격했던 조선의 왕이 이런 창피한 짓을 신하들 보는 앞에서 할 리는 없으므로 한국인이 보기엔 심히 어색한 장면.
  • 웹툰 <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시대가 명나라인 점이 크다. 선조 이후의 중국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 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 인물이며 시대도 임진왜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 웹툰 < 오성X한음>에서 등장해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정철을 배후에서 조정해 기축옥사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성과 한음에게 울면서 살려달라 통곡하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만화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자신의 손자와 더불어 박시백 작가가 제일 비판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조에 비해선 평가가 좀 낫긴한데 그래봤자 도찐개찐
  • 만화 <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에서 등장한다.

6.3. 게임

  • < 임진록 2> 오리지날 캠페인에서 유일한 캠페인 전용 등장 인물로 등장한다. 완전한 픽션을 다룬 확장팩과 달리 그나마 현실의 임진왜란 사건을 어느 정도 재현한 <임진록 2>의 캠페인에서 등장하는 빈도가 높은 편이며 전용 초상화도 있지만 이순신이나 권율처럼 자신이 직접 싸우는 장수 유닛이 아닌 '선조의 어가'라는 이동 밖에 할 수 없는 유닛으로 딱 1번 등장한다. 확장팩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 < 토탈 워: 쇼군2>의 임진왜란 모드인 Morning Sun에서 조선 국왕으로 등장하며 후계자로 광해군을 두고 있다. 전투에서 장군 호위대와 함께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고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따라 능력 6성에 명예수치 만땅을 찍는 명군이 될 수도 있다.

6.4. 영화

6.5. 드라마

  • 1999년 MBC 드라마 《 허준》에서는 배우 박찬환[130]이 연기했다.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131]불멸의 이순신과 교차해서 보면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게 된다. 주인공 허준 편에 서서 허준을 지원해주고 임진왜란 때는 분조를 이끄던 광해군을 걱정하는 인자한 성군으로 그려졌다. 다만 광해군과의 사이가 돈독하게 나온 것은 아니고 광해군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역사나 이후 다른 사극에 등장하는 선조에 비하면 부자지간이 나쁘지 않게 나온다. 인기있던 드라마라 선조의 이미지 재고에 도움이 될 법도했지만 대중들이 여기서 나온 왕이 선조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극 중에서는 다른 사극에서 흔히 보이던 인물 이름을 알리는 자막이 1번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선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극 중에서 허준이 존재했던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오로지 1부에 등장한 '선조 1년'이라는 자막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임진왜란뿐이다.
  • 2000년 KBS 드라마 《 천둥소리》에서는 배우 이호재[132]가 연기했다. 기존의 선조에서 다르지는 않지만 조선군을 매우 나약하게 여긴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과대하게 부풀린 장계라고 여기는가 하면 서산대사가 행재소에 찾아와 "5천 승병이 일어났다"고 하자 서산대사가 떠난 이후 "파리 때만 모인다"고 비난하는 등 오로지 명나라 군대만 찾는다. 특이점이라고 하자면 호통칠 때 벼락치는 듯이 우렁차다는 게 특징이며 다른 임진왜란 배경 드라마와는 다르게도 신하들에게 하대한다.[133]
  • 2003년 SBS 드라마 《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위엄은 전혀 없는 선조인데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내심 고마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드라마 내내 임해군과 충돌하며 광해군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곽정욱(아역), 최철호(성인)[134]가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왕권에 집착하는 왕으로 묘사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몽진을 하던 도중 이순신의 첫 승전보에 감격하며 이순신을 매우 중용하는 듯 보였으나 민중들이 이순신을 추앙하는 모습과 류성룡을 시기하는 윤두수와 이순신의 공적을 시기하는 원균의 보고가 겹치면서 점차 이순신을 위험시하기 시작하며 점차 암군의 면모를 보인다. 마지막까지도 명나라 유정의 말을 듣고 선전관을 보내 노량 해전을 준비하는 이순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칙사를 가두고 출전했다"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6.6. 교양ㆍ다큐멘터리

1994년 KBS 교양 프로그램 《역사의 라이벌》 〈이순신과 원균〉 편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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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시기 어진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시기 윤탁연이, 평소 어진을 그리는 것을 꺼리던 선조의 초상화를 발견하여 보관했고, 그가 입수한 어진은 후손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1974년 이은상이 윤탁연의 후손을 찾아내면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해당 어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조의 어진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설령 선조가 아니라 해도 다른 어진 중 하나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가슴의 흉배에 용이 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은 흉배가 아니라 원형의 보를 사용하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을 네모나다는 당시의 우주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의 흉배만으로 이것이 어진이라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어진은 정면상 혹은 좌안 8분면상인데, 이 그림은 반측면상이라는 점, 어진에서는 없는 지물(持物, 지닌 물건)을 보이고 있다는 점, 어진은 한번도 사복(私服)본이 그려진 점이 없다는 점 등을 볼 때도 해당 그림은 공식적인 어진으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그림은 최치원, 남이, 경순왕 등 민간이나 불교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보이는 무속화의 양식을 더 많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사찰이나 당집, 개인이 사사롭게 모시던 그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링크에서는 해당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반우향(半右向)으로 호피가 깔린 이동 좌식 교의(交椅)에 앉아 왼손은 팔걸이를 잡고 오른손은 홀(혹은 부채)을 팔걸이에 세운 채 붉은색 차양 밑의 갓끈 달린 갓을 쓰고 있는데, 화려한 운보문(雲寶紋) 녹포 단령 안에는 붉은 용포를 껴 입었고, 흉배의 용문과 풍만한 얼굴의 기품은 사대부의 그것과는 또 다른 고귀한 신분의 풍모로써, 앞을 응시하는 맑은 눈에는 여유 있는 만기친람(萬機親覽, 임금이 온갖 정사를 일일이 몸소 다스림.)의 기품이 넘쳐 흐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상황이 급박하여 세자 광해군과 분조(分朝)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서로 달리 갈 때, 맏아들 임해군에게 본 어진을 주었던바, 임해군은 곧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임해군을 배종하던 본도 도순찰사 윤탁연(尹卓然, 1538-1594)에게 이 어진을 잘 보관토록 맡겨 지금까지 전해 온 것이라 한다. [3] 아들인 정원군의 어진이 현존한다. [4] 율리우스력 11월 26일. [5]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덕흥군 사저)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내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A] 율리우스력 8월 7일. [7] 선조 재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전란 중 경복궁이 불타버리면서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 [8] 선조 시기 신하들 중 유명하거나 뛰어난 인물, 재상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이 시기의 왕인 선조의 무덤, 목릉을 따와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부른다. [A] [10]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니 이름이 부()였던 형 순회세자의 이름을 따라 '날 일(日) 변'의 한자로 바꿔야 한다는 건의로 바꾼 것이다. [11] 봉호는 경상도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 [12] (네가 쓴) 편지 보았고, ( 정안옹주의 얼굴에) 돋은 것은 그 방이 어둡고[너 역질 앓던 방\] 날씨도 흐리니 햇빛이 (그 방에) 돌아서 들거든 내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과 의녀를 그 방에 들여 명령을 기다리게 하려 한다. 염려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력 31년 계묘 ( 1603년) 복월(11월) 19일(9일) 사시(오전9~11시) [13] 선조의 손자인 인조 역시 조선 역사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이며 인조 또한 본인 다음 왕들이 모두 본인의 직계후손들이므로 인조 역시 선조처럼 조선왕조의 중시조이다. [14] 덕흥대원군의 저택 공사에 당시 중종실록의 기사에서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덕흥 대원군 뿐만 아니라 당시 중종 서왕자들의 저택 공사가 폐단이 많아 대간들이 상소로 여러 번 지적할 정도였다. [15] 하지만 이 일화가 기록된 광해군 일기의 선조 행장은 선조 이후의 기록이라 선조 아들인 광해군과 그 신하들을 비롯한 선조 진영에서 서술된 기록물이기에 선조의 겸손과 능력을 과대 포장하려 주관적인 의도로 서술되어 객관성이 떨어질수밖에 없고 명종실록에도 이 일화가 수록되지 않은 정황을 고려하면 선조측의 주관적인 과장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16] 사망한 후 아직 묘호를 올리지 않은 전대의 왕을 대행왕이라고 부른다. 즉 여기서는 명종. [17] 사실 위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덕종)의 장남 형 월산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 권세에 힘입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18]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종친부 군 작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 시절 봉사손이었던 이하전의 경우 안동 김씨 세도의 경계를 사서 사사되기도 했다. [19]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人情)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 심의겸 인순왕후작은 아버지 [21] 또는 "목릉지치(穆陵之治)" [22] 2) 사림파의 한문학 (1) 목릉성세와 성정미학 士林派는 勳舊士人에 대항하여 등장한 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주자학을 이념으로 지닌 士人들이다. 당시 중국의 학계에 비하여 그들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능가하는 존재로 확신했다. 사림파가 활동하던 穆陵盛世423)423)(金台俊,≪朝鮮漢文學史≫(朝鮮語文學會, 1931), 133쪽에서 선조대를 ‘穆陵盛世’라고 칭했다.)의 조선학계는 세계 최고의 학문수준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학문적 수준을 지녔다는 우월감은 寒岡 鄭逑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확인된다. 지역에는 遠近이 없고 道에는 內外(中國·朝鮮;필자)가 없다. 退陶선생은 평생동안 우리 朱夫子의 학문에 潛心하여, 그를 흠모한 吟詠의 작품이 많은 터에 오히려 元·明의 諸子의 반열에 들지 못한 사실은 잘못이다(鄭逑,≪寒岡先生文集≫권 10, 武夷志跋). 정구의 이 주장은 武夷櫂歌 和韻을 두고 한 것이긴 하나, 문맥 속에는 원·명의 지식인들보다 앞서 있다는 자긍이 담겨 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2) 사림파의 한문학) [23] 사림세력의 집권 이후 조정은 이전보다 덜 부패했을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및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더 향상되거나 효율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동서분당’은 그러한 비효율이 표현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 [24] 이황은 주희 철학의 계승자이다. 리학 발전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이황이 주희의 어떤 사상을 다시 서술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희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이황은 주희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였으며, 주희의 철학이 지닌 어떠한 모순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인식하였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주희의 철학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논리적 연결 고리를 드러내 주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관점에서 볼 때, 주자학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 있었다. 명대 중기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생명력 있는 주자학자를 다시는 배출해 내지 못했다. 주자학이 명대 중기에서 청대까지 여전히 정통 철학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이 당시 주자학은 중국에서 날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철학이었다. '심학'의 성행에 때맞춰, 가정嘉靖 연간 이후의 주자학은 진일보하여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활력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퇴계 철학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의 완전한 성숙을 표명해 주는 것임과 함께 주자학의 중심이 이미 조선으로 옮겨져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 뒤 동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이미 마련하고 있었음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송명성리학>, 475) [25]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과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정말 나빴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유야무야 흘리듯 넘겨 버렸었다. [26] 명나라 기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권력을 휘어잡은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걸 무려 200여 년 뒤에야 이자춘의 아들이라고 바로잡은 일이다. 그러므로 이를 왕실의 종(宗)사와 계(系)통에 대한 무(誣)함을 변(辨)호했다는 의미로 '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선조 사후, 광해군은 종계변무를 명분 삼아 부왕의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로 지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선조의 신위는 5대가 지나더라도 종묘 정전에 자리를 영원히 보존하는 세실(世室)이 되었다. 사실 즉위 기간이 짧거나 반정으로 쫓겨난 왕이 아닌 이상, 조선조 임금의 웬만한 신위는 거의 다 세실로 지정되어 있긴 하다. [27]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성규의 다음 지적은 조선 전기의 종계변무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긴 하지만 대표적 견해라 할 수 있다.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며 중국을 공식 비공식으로 설득하여 대체로 만족할 만한 반응을 얻으면 조선은 ‘전례 없는 대경사’를 강조하며, 중국에 다시 감사의 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대대적인 자축행사를 갖는 것이 관례였다. (...) 물론 필자 역시 ‘낭비’가 당시의 정치적 안정 또는 체제 이념의 강화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략’ 또는 ‘이념’의 문제였지 실제 정치가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정력을 조선의 군신들이 정치가 아닌 ‘정치놀음’에 소모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혹평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정치놀음’은 정작 진정한 ‘경세제민’을 통한 정치와 체제의 안정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004[135] 이성규는 역사변무를 일종의 정치놀음으로 보았다. 선조는 변무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수정된 내용이 찍힌 『대명회전』을 입수한 다음, 조선이 부모도 군왕도 모르는 짐승과 오랑캐의 나라에서 인륜이 행해지는 예의의 나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음에 감격했다. 이성규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곧 왕조 존립의 명분 확보로 생각하였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하면서,005[136] 역사변무를 통치를 위한 ‘명분확보’ 용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공허한 정치의 낭비’ 또는 ‘정치놀음’으로 귀결시켰다. 변무의 의미를 ‘왕조의 명분 확보를 위한 정치놀음’으로 본 이성규의 의견에 대해 아직 본격적인 재론이 없는 듯하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52) [28] 조선은 많은 물력을 동원하여 힘겹게 종계변무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말하며 명나라의 은혜에 거듭 감격했지만, 명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조선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적어도 역사변무 노력의 결과로 조선의 국가 이미지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역사변무가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60) [29] 여하간, 처음부터 <祖訓條章>(皇明祖訓)은 改正될 수 없는 것이었고, <대명회전> 또한 조선측의 요구로 改修된 것이 아니라 명측의 필요에 의해 改撰된 것이었다. 다만 조선에서 요구한 사항을 附記하는데 그쳤다. 결국 사실상 조선측의 수십 차례 180여 년간의 종계 변무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계 문제로, 조선전기의 조.명 관계는, 명측이 처음부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조선이 명측에 끌려가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5) [30] V. <大明會典> 頒賜 이후의 종계 문제 萬曆 15년(1587년)의 <大明會典>도 문제의 <祖訓條章>의 기사는 그대로 두고 상술한 말미에 附記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조선의 일방적인 요청을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97)[137] 그러므로 180여 년에 걸친 조선의 변무 노력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6)...하지만 조선으로서는 명측의 이러한 종계에 대한 곡해가 너무나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개정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단순한 한 문장을 고치는 것을 떠나 왕조자체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은 자기 조상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불효를 범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國祖인 이성계는 고려의 4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叛逆兒로서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忠을 요구할 수도 없다는 것으로, 이것은 조선왕실의 名分論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명측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측에 주도권을 빼았겼다. 그래서 다른 시기와는 달리 전쟁으로 인해 맺어진 외교 관계가 아니면서도 조선은 명측에 저자세의 굴종적인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명측의 이러한 고자세에서 나타난 役史曲解는 <明史> <朝鮮傳>에서 뿐만 아니라, 私撰 野乘 또는 稗官小說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전기 조.명 관계에서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종계 문제는 미해결된 채 끝나버린 외교문제였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9-220) [31] 옥사가 일어나던 처음에는 상이 수십일 간을 친국(親鞫)하였고 그후에는 혹 정국(廷鞫)하면서 대신이 아울러 참여하였으며, 최후에는 삼성 교좌(三省交坐)로 추국하면서 한 대신이 감국(監鞫)하였다. 경인년039)(註 039)(경인년 : 1590 선조 23년.) 5월 이전에는 정철(鄭澈)이 감국하였고 그 후에는 유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元) 등이 대신하였다. 이 해에는 이발 형제 외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기축년040)(註 040)(기축년 : 1589 선조 22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 【이발·이길·백유양(白惟讓)·유덕수(柳德粹)·조대중(曺大中)·유몽정(柳夢井)·김빙(金憑)은 장(杖)형으로 죽었고, 윤기신(尹起莘)·정개청(鄭介淸)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길에서 죽었으며, 최영경(崔永慶)은 옥사하였다.】 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몇백 명이었는데 조신 가운데 귀양간 자로는 정언신(鄭彦信)·김우옹(金宇顒)·홍종록(洪宗祿) 등이었으며, 파출(罷黜)된 자도 수십 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옥사가 일어난 초기에 결정된 자들이다. (선조수정 선조 24년 5월 1일) [32] 이 시기 조정의 특징은 대신권이 대단히 약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앞 시대가 정치적으로 파행적인 훈척의 시대였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조정에 있었던 누구도 안정적인 리더쉽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에 대한 대응은 대개 집단적이었고, 문제는 해결되기 보다는 증폭되었다. 이 점에서 당시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선조였지만, 그는 정치행위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림들 개인 간의 사소한 갈등들이 서로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점차 정치적 갈등으로 증폭되었다. <선조대 ‘동서분당’ 전개의 초기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 [33]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34]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까지도 있는 호남 혐오에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35] 옥사가 일어나던 처음에는 상이 수십일 간을 친국(親鞫)하였고 그후에는 혹 정국(廷鞫)하면서 대신이 아울러 참여하였으며, 최후에는 삼성 교좌(三省交坐)로 추국하면서 한 대신이 감국(監鞫)하였다. 경인년039)(註 039)(경인년 : 1590 선조 23년.) 5월 이전에는 정철(鄭澈)이 감국하였고 그 후에는 유성룡(柳成龍)·이양원(李陽元) 등이 대신하였다. 이 해에는 이발 형제 외에는 갇힌 사람이 없었으며, 기축년040)(註 040)(기축년 : 1589 선조 22년.) 10월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20개월 사이에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조신(朝臣)·명관(名官) 중에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으며 【이발·이길·백유양(白惟讓)·유덕수(柳德粹)·조대중(曺大中)·유몽정(柳夢井)·김빙(金憑)은 장(杖)형으로 죽었고, 윤기신(尹起莘)·정개청(鄭介淸)은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길에서 죽었으며, 최영경(崔永慶)은 옥사하였다.】 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몇백 명이었는데 조신 가운데 귀양간 자로는 정언신(鄭彦信)·김우옹(金宇顒)·홍종록(洪宗祿) 등이었으며, 파출(罷黜)된 자도 수십 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옥사가 일어난 초기에 결정된 자들이다. (선조수정 선조 24년 5월 1일) [36]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격렬한 반대로 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2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 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하다. [37] 신립이 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 풍신수길의 전략과 당시 조선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조총의 위력을 전혀 무시한 채로 과거의 경우처럼 평지에서 싸울 수 있다고 오만했다. 그리하여 신립은 오만한 자신감에 고무되어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지금의 문경새재)을 버리고 사방 뻥뚫려 있는 충청도 충주 탄금대 평야지대에서 기마 전술로 펼치다가 왜군의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의한 조총 전술로 거의 전멸당한다. 그러고 탄금대 절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 [38] 명나라 입장으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수차례 자신들은 명을 치는 길을 빌려주고 지원하라고 압박을 해왔었다. 수나라, 당나라, 거란, 여진, 몽골의 외침에 맞서 선전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 신라, 고려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조선에 대해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조선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에 경계해왔다. 이러니 강군의 조선이 일본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명나라는 당연히 믿지 않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근데 이전 왕조인 고구려는 국력이 강해지기 전 관구검이 이끄는 고작 1만병력에게 수도까지 털린 적이 있고, 고려 역시 카다안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여요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잃어버린 상태로 쿠빌라이 칸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느냐?"는 식으로 디스 당한 적이 있으며, 조선 당시 명나라 또한 영락제이후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가정제 만력제등 막장황제들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본인들 역시 만만히 보던 왜구에게 남부지역을 유린당한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심은 합리적인 의심이 아닌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명나라 조정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39]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 [40] 이때만큼은 동인이든 서인이든 간에 모두 한목소리로 '요동으로 가면 안 된다'며 명을 거두어 달라고 흰 소복차림으로 머리 풀고 정말로 결사 반대했다. [41] 이때 정철과 류성룡은 심지어 진지하게 선조에게 명나라로 도망갈 거면 선위하라며 하야요구를 하려하였는데 이 둘다 선조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지라 선조에게 별 말 못하고 '신들이 못나서 나라가 이꼴입니다.'라고 사죄하고 도망치며 조선 역사상 최초의 신하에 의한 하야요구는 없던 일로 돌아갔다. [42]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변절(순왜)을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43]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변방의 장수 이성계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 [44] 물론 선조 입장에서는 빡칠만 했다. 애초에 원균이 먼저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부산에 있는 왜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근자감 넘치는 장계를 올렸다. 막상 그렇게 통제사가 되고 한다는 소리가 '왜군의 수가 엄청 많아서 전투를 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 육군의 지원이 필요하다' 등이니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45] (註 452)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 본래는 임금이 조회 때에 서 있는 곳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46]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멸망시키고 갑자기 왕 그만하겠다는데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근데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 [47] 이런 일을 억지로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비슷한 시기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이 여실히 보여준다. 권위가 흔들리던 선조와 달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권위와 실권 모두 꽉 잡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지만, 결국 이 참사로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어린 후계자는 조처를 하지 못해 외부의 적에게 기회를 주었다. [48] 서강대학교 계승범 역사학 교수 [49] 그러니 이후 문제삼은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자 숙명이다. [50]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51]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백의종군 했다. 효종의 북벌을 상징하는 무인 이완의 부친. [52] 동원이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53] 조선인민군이 선조에게 얼마나 악감정을 가졌는지 알 만한 대목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선조는 악질적인 반동 전제군주이기 때문이다. [54] 선조왕릉의 카카오맵 별점은 왜 1.4인가 (이명지의 IT뷰어) [55]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138]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 [56]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57]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 [58] 다시 대사간으로 이이를 부르자 이이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신이 쓸 만한가의 여부를 아시고 싶으시다면 마땅히 시사(時事)에 대하여 물어 보소서. 그리하여 신의 말이 쓸 수가 없다면 다시 부르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사직 상소를 보았다. 간장(諫長)006)(註 006)(간장(諫長) : 대사간.) 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어서 이에 본직을 체직한다. 그대에게 좋은 의견이 있으면 사실대로 봉서하여 아뢰라." 하자, 이이가 드디어 상소하기를, "성비(聖批)에 ‘그대에게 좋은 의견이 있으면 사실대로 봉서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받들어 보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신은 성은을 받고 감격하여 순국(徇國)할 뜻을 갖고 있었으므로 보잘것없는 저의 충심을 다 바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어떠한 형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신은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성상께서 넓으신 도량으로 후하게 용서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말을 올리게 하시는 데이겠습니까. 신은 이제 간담에 쌓인 회포를 모두 짜내어 성상의 뜻에 저촉된다 하더라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도(道)에서 찾아보소서....그리고 연산군이 정했던 공안(貢案)같은 것은 바로 임사홍(任士洪)이 설치한 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임사홍같은 무리가 만들어 놓은 폐법(弊法)을 반드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가령 오늘날 이 잘못된 전례를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성주(聖主)가 위에서 걱정하고 훌륭한 정승이 아래에서 몸이 지치도록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못살게 되는 폐해를 구제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는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를 일반 가정에 비유해 보건대, 그 자손이 선인(先人)이 물려준 큰 집을 지키면서 오래도록 중수하지 않아서 들보와 기둥이 썩고 기와와 벽돌이 깨져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그 형세가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면, 어찌 팔짱을 끼고 앉아서 그 쓰러져 가는 현상을 보고만 있는 자를 계술을 잘한다고 하고 반대로 깨진 기와를 바꿔 끼우고 썩은 기둥과 들보를 갈아내는 자를 잘 유지하여 지키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신이 이미 성상의 물음을 받들었으므로 감히 의견을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었고 충정에 복받쳐 말을 억제할 줄 몰랐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랑을 내리시어 살펴 받아주소서." 하였다. 상이 충성된 바른 말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고 답하였으나, 별로 채택하여 사용한 실상은 없었다. 정원이 다시 거두어 등용하기를 청하니, 상이 불렀다. 그러자 이이가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얼마 후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간관이 자주 갈린 것을 또한 볼 수 있다.】 상이 소명(召命)을 사양하는 이이의 상소를 보고 즉시 이이를 대사간에서 체직하라고 명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이이가 전 날의 소명만을 사양하였고, 아직 새로 제수한 간관은 사직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스스로 처치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체직시켜야 합니다." 하고, 간원과 홍문관이 모두 차자를 올려 논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이 한 사람을 위하여 오래도록 간관의 직책을 비워놓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것은 상이 이이가 교격(矯激)하여 사직하고 물러간 것을 혐의롭게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뒤 수일 만에 다시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이이는 또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성혼이 그 상소를 읽어보고 ‘참으로 이른바 곧은 말로 극진히 간한 경국 제세의 글이다.’ 하였다.】 (선조수정 11년 5월 1일) [59]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었다....형세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비록 어진 수령(守令)이라도 감히 급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생(民生)은 날로 곤경에 빠지고 요역(徭役)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해결해 주지 않고서 오직 급재를 하지 않는 것만이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라 한다면 적자(赤子)들이 더욱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인인(仁人)·군자(君子)로서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전역(田役)으로 하여금 10분의 7∼8 정도를 절감받게 한 후에 경우에 따라 가세(加稅)할 것은 가세하도록 하여 국용에 여유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끝내 공사간에 풍족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선조 16년 2월 15일) [60] 이이를 인견했을 때 아뢴 일이 무엇이었는지 정원(政院)이 취품(取稟)하니, 답하였다. "변장(邊將)의 식량에 대하여 의정(議定)하였고, 목장의 말들을 관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되 우선 한 곳을 선정하여 시험해 보도록 비변사에서 논의하여 아뢰게 하자는 것, 의서 강이(醫書講肄)와 천문 습독(天文習讀)을 태거(汰去)하는 건은 해조(該曹)에서 승전(承傳)을 받아 처리할 것, 공안(貢案) 태거 논의와 설국(設局)의 개정 건은 정2품 이상이 헌의(獻議)하여 결정할 것, 군적(軍籍)의 고헐(苦歇)을 균등하게 정하는 일을 기관을 설치하고 전임하여 처리하도록 할 것, 승전을 받들어 군현(郡縣)을 합병(合倂)할 것 등이었는데, 가볍게 처리할 것들이 아니어서 내가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선조 16년 윤2월 24일) [61] 이이(李珥)가 시폐(時弊)를 들어 상소하니, 답하였다. "내가 우연히 경이 몇 해 전에 올린 상소문을 보던 중 마침 경의 상소문이 올라왔는데 예나 이제나 정성스럽도다. 이 못난 임금을 잊지 않고 있는 경의 고충(孤忠)에 대하여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나라 일은 어진 대신(大臣)이 당연히 맡아 해야 할 것이고, 남행(南行)이 대간(臺諫)이 되는 일에 있어서는 기왕의 후회스러움은 어차피 뒤쫓아갈 수 없는 일이지만 한 번도 너무 후회스러운데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야 있겠는가. 내 이미 뜻을 결정하였다. 공안(貢案) 건은 조정과 논의하면 논의가 합일되지 못할 것이라 가볍게 고치지 못하고 있는 일이지만, 설사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다사(多事)한 때에 한꺼번에 거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군적(軍籍) 건은 본조(本曹)가 이미 명령을 받들었으니 나머지는 경이 설시(設施)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주현(州縣)을 합병(合幷)하는 건은 그것이 과연 과매(寡昧)하고 경천(輕淺)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다른 폐단을 남길까 염려스러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경이 권하고 청하여 마지않으니 한번 시험해보겠다. 감사(監司)를 구임(久任)하는 건은 그 제도를 창설하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던 것이나 지금 마땅히 경의 의견을 따라 우선 양남(兩南)에서 시험해볼 것이고, 서얼(庶孽)과 천인(賤人)을 허통(許通)하는 건은 지난 사변 때 경의 헌책(獻策)에 따라 즉시 시행을 명하였던 것인데 그때 그것을 논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다시 비변사에 물어 헤아려본 후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선조 16년 4월 14일) [62]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 [63]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 [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유능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상당히 뛰어났으며 실제로 그 인재들은 이순신 외에도 다방면에서 많은 공로를 남겼다.[139][140] 군사와 첩보에서도 많은 인재들을 긁어모아서 후대인 광해군 인조 때까지도 그나마 쓸만한 실무자들은 선조가 직접 발탁해둔 케이스일 정도로 인재의 등용과 배치에 있어서 유능했다. 그 유명한 이순신을 중령급에서 중장급으로 파격적인 인사이동을 시킨 인물이다. 물론 원균이 말아먹고 복귀시켰을때 소장급으로 원복시킨 찌질한 면도 있다. 권율 또한 선조의 파격적인 발탁이 있었기에 활약할 수 있었다.[141] [65] 헌부가 아뢰기를, "공판(公辦)에 관한 일은, 그 폐해를 논한다면 반드시 개혁해야 할 것인데 고루한 소견에 견제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옹원(司饔院)·예빈시(禮賓寺)·풍저창(豊儲倉)이 궐내(闕內)·궐외(闕外)에서 공궤하는 식례(式例)와 횡간(橫看)132)[142] 및 《대전(大典)》133)(註 133)(《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약칭.) 의 본의를 살펴보니, 사옹원 옹인(饔人)의 일은 궐내의 공궤를 맡는 것이고 예빈시의 직무는 빈객(賓客)의 연향(宴享)에 대한 공궤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이밖에 크게는 육조(六曹)부터 작게는 소각사(小各司)의 당상(堂上)과 참상(參上)·참하(參下)에게 지공(支供)하는 미태(米太)·염장(鹽醬)·어염(魚鹽) 따위는 나누어 주는 데 정수가 있고 차등이 있으나 본아문(本衙門)이 익혀 장만하여 공궤한다는 글이 따로 없으니, 법을 세운 당초에는 필시 중국에서 월봉(月俸)으로 주는 것을 본떠서 각각 스스로 공궤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공판의 창설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백성을 해롭게 하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첫째, 폐해가 백성의 목숨에 미치는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음식을 전복(典僕)에게 장만하도록 책임지우는데 주인이 항상 먹는 음식물을 바치는 이외에 유연(遊宴)에 드는 것과 영전(迎餞)에 드는 것을 제멋대로 외람되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전복이 파산하여 떠돌게 되고 사주인(私主人)이 멋대로 탐학을 부리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공판을 없앤다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어찌 넓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이조(吏曹)가 생각을 국가에 두지 않고 사람들의 청탁에 따라 구차하게 빈 벼슬자리에 채울 것만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논하고 인하여 그 사례(事例)를 거론한 다음 파면하기를 청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고 공판에 관한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조처하겠다고 하였다. (선조 6년 9월 26일) [66] 사헌부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공판(公辦) 1가지 일은 온갖 폐단의 근원이 되고 민생들의 모두(蟊蠧)155)(註 155)(모두(蟊蠧) : 해충.) 가 되는데, 우물쭈물하여 과감히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성명(聖明)의 때를 만나 예의(銳意) 경장(更張)해서 오래 되었던 큰 폐단이 하루아침에 통쾌하게 고쳐졌는데, 다만 자기만 편하려고 생각하는 인정이 마침내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시행한 지 한 해도 못되어 갑자기 혁파하려는 생각을 하여 세우자마자 곧 혁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정치하는 체통이겠습니까. 해조로서는 공판을 할 때에 비록 쌀을 주지 않더라도 본시 본사가 공급해 주는 것이 있으므로 전복(典僕) 및 사주인(私主人)156)(註 156)(사주인(私主人) : 지방에서 서울에 와 벼슬하는 사람들이 묵던 사삿집.) 에게 마련하도록 하면 되는데, 상례의 식사 이외에 놀이에 쓸 거리나 영접하고 전송할 때의 차림 따위를 멋대로 외람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의논에 흔들리지 말고, 국고(國庫)가 풍족하면 단지 조종조(祖宗朝)의 횡간 규정에 의하여 영구히 가공(家供)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가공에 관한 일은 공판을 개혁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새로운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러 차례 다시 의논하도록 명했지만 좋은 계책은 보지 못했다. 혹은 마땅히 도로 그만두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구차한 의논만 올리고 있으므로 내 마음이 자못 쾌하지 못하다. 지금 계사(啓辭)를 보건대 횡간대로만 하자고 했는데, 이는 역시 쉬운 일이다. 다만 앞서 호조가 아뢴 것처럼 거행하기 어려울까 두렵다. 그러나 마땅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선조 7년 10월 28일) [67] 특진관 신식(申湜)은 아뢰기를, "기강이 퇴폐하여 아랫사람들이 폐단을 부리고 있습니다.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소용되는 물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중간에서 폐단을 부리는 일이 끝이 없는 탓입니다. 본디 우리 나라는 부세는 가볍고 공물(貢物)은 많아 민력이 여기에서 손상됩니다. 각 고을의 공물은 각각 사주인(私主人)이 있어 자기네끼리 서로 나누어 점유하여 부자간에 계속 전하고 있는데 본색(本色)의 물건이 좋더라도 10배의 값을 내지 않으면 바칠 수가 없습니다. 을해년168)(註 168)(을해년 : 1575 선조 8년.) 과 병자년169)(註 169)(병자년 : 1576 선조 9년.) 사이에 조정에서 이런 일을 염려하여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두고 사주인을 모두 혁파하였더니, 저들이 그 명맥을 잃자 원망이 분분하였으므로 얼마 안 되어 다시 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의 작폐가 난후에 더욱 심하니 지금 공안(貢案)을 수정할 때에 중간에서 방해하는 일을 통렬히 혁파하여야 합니다. 근래 중국 사신이 또 나온다는데 국가에는 제반 물건이 모두 고갈되었습니다. 본색만 바치게 한다면 민생이 어찌 곤궁에 빠지기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선조 34년 10월 30일) [68] 여러 신하들이 다 아뢰고 나니, 상이 박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여러 신하가 아뢴 말 중에서 어떤 일이 시행할 만한가?" 하니, 순이 차례로 분석하여 아뢰기를, "경제사 설치 문제는 사유를 갖추어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상께서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시는데 마땅히 이이를 다시 불러 물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창졸간에 그에 대한 말을 자세하게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뜻을 다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갖가지로 폐단이 쌓여 군왕의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으니 반드시 시무(時務)에 마음을 둔 사람을 얻어 한 곳에 모여 서로 대책을 강구해서 시폐를 개혁하게 해야 합니다. 폐단만 다 개혁되면 또한 도로 관서를 혁파할 수도 있으며 관서를 설치하여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오활하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지난날 정공 도감(正供都監)도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폐단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였다. 박순이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을 각기 그 관사가 공궤하게 하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선조 14년 10월 16일) [69]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왔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에는 각 고을의 공물을 목면(木綿)으로 평균하여 사주인(私主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상납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전규(前規)에 의거하여 납부할 것을 독촉하고 있지만 목면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모든 계책을 다 써도 목면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그 물건 값을 계산하도록 신에게 계달하여 변통케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색(本色)으로 상납하게 할 수는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전복(典僕) 등이 상사(上司)에 납부할 때 인정(人情)404)(註 404)(인정(人情) : 뇌물.) 을 바치는 것을 고달파하여 이와 같이 남징(濫徵)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외간의 사사로운 의견은 본색(本色)을 그대로 바치게 하되 호조(戶曹)로 하여금 납부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여 사주인(私主人)이 방납(防納)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고, 작목(作木)은 법대로 상납시키는 것이 마땅하며 사주인에게 급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납의 폐단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우상(右相)의 의견은 별도로 차사원을 정하여 스스로 공물을 납부하게 하면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전에 들으니, 백인걸(白仁傑)이 【인걸은 선조(先祖) 대의 유직(遺直)으로 관직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 시탄 공물(柴炭貢物)을 자신이 직접 관할하여 납부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농간을 부릴 수 없었으므로 양주의 주민들이 공물이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차사원을 별도로 정하되, 이와 같이 한다면 폐단을 막을 수 있겠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인걸과 같은 명사(名士)라면 가능하겠지만 미관 말직에 있는 관리들이야 필시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노비 신공(奴婢身貢)의 경우에 있어서도 차사원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뇌물에 관한 일 때문에 감당해내지 못하였다고 하니, 매우 해괴합니다."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납부하는 자와 차사원을 일시에 상경(上京)시키되 만일 인정을 남징하는 자가 있거든 호조에 호소하게 하여 자연히 규찰(糾察)하도록 하고 법사(法司) 또한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내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이 올라올 때에는 호조의 당상과 상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별도로 상의하여 잘 처리할 방도를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대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정당한 공사(公事)로써 말한다면 본색(本色)을 가지고와서 납부하는 것이 일에 매우 온당합니다만 형편상 할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쪼록 편리한 방향으로 처리하도록 하라." 사신은 논한다. 국가의 기강이 느슨해지고, 나라의 법도 쓸어버린 듯 없어져 해관(該官)은 직무에 태만하고 하리(下吏)는 문서를 조작하며, 중간에서 사주인(私主人)이 일을 저지르는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뇌물을 핑계하고 크게 해독을 부려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수량이 본색(本色)보다도 더 많으니, 민생(民生)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익(元翼)은 전하가 마음을 비운 날을 당하여 지금까지 내려온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고 유신(維新)의 정사를 크게 베풀었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사세에 얽매여 누적된 폐단을 결연히 제거시키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선조 29년 10월 21일) [70] 간원이 아뢰기를, "공조 참판 허진(許晉)은 아무런 탈이 없이 집에 있었는데 예조가 망령되이 하리가 전하는 헛소문을 믿고서 죽었다는 공사(公事)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정원에 올리고 조보(朝報)에 싣기까지 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의 생사를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이처럼 전도되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토록 명하시고 색리(色吏)를 수금하고 치죄하소서. 공물을 방납(防納)하는 폐단이 날로 더욱 외람되어져 본토에서 생산되는 물건이라도 모리배가 먼저 자진 납부하여 본 고을에서 손을 쓸 수 없게 만듭니다. 행여 본색(本色)을 가지고와서 납부하는 자가 있으면 사주인(私主人)들이 백방으로 조종하여 그 물건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퇴짜를 놓게 하고 결국은 자기 물건을 납부하도록 도모하였으며, 값을 마구 올려 10배의 이익을 취하니 생민의 고혈(膏血)이 고갈되었습니다. 이익의 길이 한 번 열리자 소민(小民)만 다툴 뿐 아니라 세가(勢家), 귀족(貴族)도 공공연히 대납하는 것은 물론 간혹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장사꾼과 더불어 납부를 도모하고 이익을 나누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이미 고질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만약 법금을 거듭 밝혀 통렬히 개혁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지금 이후는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월령(月令)을 상고하여 시기에 임박하여 간품(看品)해서 각별히 선정하게 하고 차사원이 직접 받아오면 해관(該官)이 대감(臺監)과 함께 입회하여 거두어들이되, 그 사이에 간혹 방납했다가 탄로된 자가 있으면 조관(朝官)은 장오죄로 논하고 장사꾼은 법전에 따라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40년 10월 3일) [71]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143]의 정미년은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 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 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144]을 참고하라 [72]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145][146]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 [73] 우부승지 이이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에 관한 것과 재변을 없애고 덕을 진취시키는 것에 대한 설을 극진히 아뢰었다. 그 소에,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治績)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오늘 한 가지 계획을 진언하여 명목 없는 조세(租稅)를 없앨 것을 요청해 보아도 각 고을의 세금 징수는 여전하고, 다음날 한 가지 일을 건의하여 전호(田戶)의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을 요청해 보아도 호족(豪族)이 부역에서 빠지는 것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선상(選上)을 줄인 것은 공천(公賤)을 소복(蘇復)시키기 위한 것인데도 치우치게 고통을 받은 자들은 예나 다름없이 떠돌아다니고, 방납(防納)을 금한 것은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도 뇌물을 받으며 백성을 갈취하는 자들은 더 심하게 뛰고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관원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면 그 후임자가 반드시 앞 사람보다 훌륭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중하고 전송하는 폐나 끼치게 되고, 변장(邊將)을 가려 보낼 것을 청하면 인망(人望)이 두터운 자가 반드시 신진(新進)보다 우수하지도 않은데 도리어 방자하여 조심성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 밖에 훌륭한 명이 내려지고 아름다운 법이 반포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주현(州縣)에 그저 몇 줄의 문서 쪽지만 전달할 뿐, 시골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모릅니다....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는 그 요강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심을 열어 뭇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스런 풍조를 개혁하는 것이고, 넷째는 선상(選上)의 제도를 바꾸어 공천(公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고, 다섯째는 군정(軍政)을 개혁하여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이른바 ‘공안(貢案)을 개혁하여 심하게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앤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조종조에서는 쓰임새를 매우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도 매우 적었는데, 연산군(燕山君) 중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바람에 일상적인 공물로써는 그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으므로, 공물을 더 책정하여 그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신은 지난날에 노인들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듣고도 감히 그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호조의 공안을 가져다 보건대, 여러 가지 공물이 모두 홍치(弘治)010)(註 010)(홍치(弘治) :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011)(註 011)(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에 더 책정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 때였습니다. 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안을 덮고 탄식하기를, ‘이럴 수가 있는가. 홍치 신유년이라면 지금부터 74년 전이니, 그 간에 성군(聖君)이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법을 어찌하여 개혁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건대 그 70년 동안은 모두 권간(權奸)들이 국사를 장악한 때로서 두세 명의 군자가 간혹 조정에 있었다고는 하나 뜻을 펴보기도 전에 사화가 꼭 뒤따랐으니, 이에 대하여 논의할 겨를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그 일을 오늘날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물산(物産)은 수시로 변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전결(田結)도 수시로 증감하는 것인데, 공물을 나누어 책정한 것은 바로 국초(國初)의 일이었고 연산군 때에는 다만 거기에 더 늘려 책정한 것일 뿐이니, 역시 시대마다 적절히 헤아려 변통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는 각읍에다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고 배를 타고 물에서 짐승을 잡으려 하는 일이나 같게 되었으니, 다른 고을에서 사들이거나 또는 서울에 와서 사다가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의 비용은 백 배로 늘어나고 공용(公用)에는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민호(民戶)는 점점 줄어들고 전야(田野)는 갈수록 황폐해져서 몇 년 전에 백 명이 바치던 분량을 작년에는 열 명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작년에 열 명이 바치던 분량을 금년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지워 바치게 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간다면 반드시 그 한 사람마저 없어진 뒤에야 끝장이 날 형편입니다. 오늘날 공안을 개정하자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종의 법은 가벼이 고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곤 합니다. 그러나 조종의 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연산군 때의 법이 아닙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일을 파악할 만한 슬기가 있고, 장래의 일을 미루어 알 만한 심계(心計)가 있으며, 일을 잘 처리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공안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게 함으로써, 연산군 때에 더 책정한 분량을 모두 없애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읍의 물산 유무와 전결의 다소와 민호의 잔성(殘盛)을 조사하고 상호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사(各司)에 바치도록 하면, 방납(防納)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없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른바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에 와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공물을 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 소비하는 것을 조종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할 수 없게 되어 마치 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처럼 앞뒤가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성상의 마음 속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신 다음,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와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 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경장(更張)에 관계된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하고, 이 소를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는 한편, 또 소를 등서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당시 인심이 불안하던 차에 이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고서는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선조수정 7년 1월 1일) [74] 또 기록한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형벌이 맞지 않는 일이 드물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백성들의 부역(賦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는 본래 그전부터 행해져 내려온 것이지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전일에 올린 이이의 상소에 대해 상께서 답하신 말씀이 매우 권장하고 허여하신 것이므로, 각기 보고듣는 사람마다 모두 감격하였습니다. 소신도 역시 재질과 학식이 이 사람만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이 사람만 하다면 어찌 이처럼 권장받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이이의 상소로 인하여 공물(貢物)·선상(選上)013)[147] ·군정(軍政)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의 곤고함이 소복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추기(追記)한다. (선조 7년 1월 21일) [75] 또 ‘임금이 백성을 위해 평안하도록 도모하지 못함은 또한 도리어 백성을 학대하는 짓이다.’ 한 대문을 강하고 아뢰기를, "지금의 민생들 고통은 바로 공물(貢物) 및 신역(身役)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이(李珥)의 만언소(萬言疏)대로 변통(變通)하여 병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였다. (선조 7년 3월 6일) [76]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민생(民生)이 과거에 비해 어떠한가?" 하였다. 이이가 답하기를, "권간(權奸)이 국정을 담당할 때에 비교해 보면 가렴 주구(苛斂誅求)는 줄어든 듯하지만,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의 법이 매우 사리에 어긋나서 날로 잘못되어 백성이 그 폐해를 입고 있으니,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전교를 내려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8년 10월 24일) [77] 이때 가뭄이 대단히 심하여 농사가 또 장차 흉년이 들게 되었는데 평안·황해 두 도는 더욱 심하였다. 상이 경연에 나아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흉황(凶荒)이 이러한데 서도(西道)는 더욱 심하다. 기근이 계속된 데다가 병난마저 일어난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미리 재력을 축적하여 구제해야 합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만약 폐단이 되는 법을 변통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지 않고 다만 곡식을 옮겨 백성을 살리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이미 절핍되어 옮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위급하니 상께서도 마땅히 변통할 대책을 생각하셔야 하고 모든 경비도 또한 마땅히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쓰임새는 별로 늘린 것이 없이 단지 옛 규례만 따르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금의 수입이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세금의 수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는 그대로 구례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절핍되지 않겠습니까. 세금의 수입을 적절히 늘려 정해서 나라의 경비를 넉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지만 백성의 생계가 매우 곤궁하여 형편상 더 거둘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누적된 고통을 풀어 민심을 기쁘게 한 다음에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가(民家)의 빈부(貧富)와 전결(田結)의 다소(多少)를 헤아리지 않은 채 무원칙하게 나누어 배정하고 또 토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가 모리(牟利)를 할 수 있어 평민이 곤궁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 공안을 개정하되 민가와 전결을 헤아려 균등한 수량을 공평하게 배정하고 반드시 토산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의 쌓인 고통이 풀어질 것입니다." 하고,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형세로 보아 필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의 근면과 태만은 감사에게 달렸는데, 감사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누구나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는 마음을 두려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오가고 있으며, 그 중에 직책을 다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미쳐 시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큰 고을로 감영을 만들어 감사가 그 고을에 머물러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맡겨 공효를 독책(督責)하면서 그 직에 오랫동안 있게 하고는 조정의 신하 가운데 법도를 제정해서 다스릴 만한 재간이 있는 자를 특별히 가려서 제수한다면 반드시 그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맡기면 권세를 잡고 제멋대로 독단할 우려가 없겠는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는 사람을 가리기에 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찌 가려 보내는 데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매우 많이 수령을 정선할 수가 없다. 나는 병합하여 줄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신하가 다 대답하기를, "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합니다. 만약 극히 쇠잔한 고을을 병합하여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의 부역이 매우 수월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혁하는 일은 경솔히 시행하기 어렵다. 나는 고을의 이름은 없애지 않고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임해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변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 때 국고가 이미 바닥이 나서 이듬해에는 구황할 대책이 없었다. 이이가 그것을 깊이 염려한 나머지 동료와 상의하고 차자를 올려, 나쁜 법을 변통하고 공안을 개정하며 주현을 병합하여 줄이고 감사를 오랫동안 맡길 것을 청하고, 또 어진이를 써서 인재를 진작하게 하고 몸을 닦아 다스리는 근본을 맑게 하며 붕당을 없애 조정을 화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참으로 좋은 말이다. 옛법을 변경하는 일은 경솔히 하기 어려울 듯하다.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조치하겠다." 하였다. (선조 14년 5월 24일) [78]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서도(西道)가 더욱 극심하다. 기근이 겹친데다 병란이 일어난다면 어떠한 계책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미리 재력을 비축하여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는 아뢰기를, "폐법(弊法)을 변통시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지 않고 단지 곡식만을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곡식 또한 핍절되어 옮길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우니 상께서는 변통시키는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경비의 수요도 재량하여 감소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도는 별로 증가시킨 것이 없이 예전 규례대로 준행하였을 뿐인데도 부족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이 매우 많았지만 지금은 해마다 흉작이어서 세입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경비만은 예전 규례를 그대로 존속해 나가고 있으니 어떻게 궁핍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헤아려 세공(稅貢)을 더 배정해야 할 것 같지만 민생이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서 부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쌓인 고통을 해소시켜 민심을 기쁘게 해준 다음에야 조세(租稅)를 거두는 데 있어 적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공안(貢案)은 민호(民戶)의 성쇠와 전결(田結)의 다소를 고려하지 않고 난잡스럽게 분정하였는가 하면 바치는 물건도 모두가 토산물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방납(防納)하는 무리들만이 이익을 취득하므로 백성들만 곤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데 있어 민호와 전결을 참작하여 균등하고 공평하게 배정하고 토산물로만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쌓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일을 속히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무엇보다도 인재를 얻어야만 폐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민의 휴척(休戚)은 수령의 현부에 달려 있고 감사는 수령의 근만(勤慢)을 규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모두가 구차스럽게 세월만 보내면서 정사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는 자가 있기도 하나 그들 역시 어떠한 일을 시행하지는 못합니다. 큰 고을에 감영(監營)을 설치하고 감사로 하여금 그 고을 수령을 겸임하게 하되 가족을 데리고 가서 다스리게 하여 책임을 완성하도록 위임시키되 조정의 신하들 중에 백성을 거느려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거나 공보(公輔)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별도로 선발하여 제수하면 필시 공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임(久任)시키면 권세를 부리고 독단하는 폐단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점에 있어서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주현(州縣)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수령을 정하게 뽑을 수 없다. 나는 병합시켜 줄이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만일 몹시 잔폐된 고을을 병합시켜 다른 고을에 붙인다면 백성들의 부역이 어느 정도 완화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혁하는 데에는 폐단이 있게 마련인데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명칭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한 고을 수령이 두세 고을을 겸하여 다스리게 하고 싶은데 어떠할는지 모르겠다."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도 자주 개혁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이는 상의 뜻이 재변을 걱정하고 다스려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물러나와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폐법(弊法)을 변통시킬 것, 공안(貢案)을 개정할 것, 주현(州縣)을 병합시킬 것, 감사(監司)를 구임시킬 것 등을 청하고, 또 현자를 등용하여 인재를 진작시킬 것, 몸을 닦음으로써 치본(治本)을 맑게 할 것, 붕당을 제거시킴으로써 조정을 화합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았는데 참으로 가상하다. 구법(舊法)을 변통시키는 일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고, 소장은 정부에 내렸다. (선조수정 14년 5월 1일) [79] 이이를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하였다가 곧바로 숭정(崇政)의 품계로 올렸다. 이이가 세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바로 배명(拜命)하고 얼마 뒤에 봉사(封事)를 올려 시폐(時弊)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신은 듣건대, 상지(上智)의 사람은 미연에 환히 알고 있으므로 난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스리고 나라가 위태롭기 전에 미리 보전하며, 중지(中智)의 사람은 사태가 발생한 뒤에 깨닫게 되므로 난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게 된 다음에야 다스려 안정시킬 것을 도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이 닥쳤는데도 다스릴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태로움을 보고도 안정시킬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지(下智)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제거시켜야 할 누적된 폐단에 대해서는 지금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우나 어리석은 신이 늘 경연에서 아뢴 것은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수령을 줄이고 감사를 구임(久任)시키는 세 가지뿐이었습니다. 이른바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 고을의 토지와 인민의 많고 적은 것이 동일하지 않아 더러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도 공역(貢役)의 배정에 있어서는 그다지 차등이 없기 때문에 고달프고 수월한 것이 균등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대부분 토산품이 아닌 온갖 물건을 모두 마련하여 각 관사에 나누어 바치게 합니다. 따라서 농간을 부리는 폐해가 백성들에게 돌아가 서리(胥吏)들만 이익을 취하고 국가의 경비에는 조금도 보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래 조세(租稅)의 수입이 적은 것이 북쪽 오랑캐의 제도와 같아서 1년의 수입으로는 지출이 부족하여 늘 전에 저축한 것을 보충하여 쓰게 되므로 2백 년 동안 저축해 온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어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부세를 증가시키자니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고 전례를 그대로 지키자니 얼마 안가서 저축이 바닥날 것이니,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공안을 개정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규획(規畫)을 잘 하게 할 것은 물론, 단지 토산품으로만 균평하게 배정하고 한 고을에서 바치는 것이 두세 관사에 지나지 않도록 한다면 원액(元額)의 수입은 별로 감소되는 것이 없으면서 백성의 부담을 10분의 9쯤 줄일 듯싶습니다. 이렇게 민력이 여유를 갖게 해서 백성들의 심정을 위안시킨 다음 적당히 조세를 증가시킨다면 국가의 경비도 점차 충족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안을 개정하려는 것은 단지 백성을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경비를 위해서입니다....매양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영명하신 자질과 맑고 순수한 덕을 지니시고도 인(仁)한 마음을 미루어 넓혀 정사에 베풀지 못하기 때문에 옛날 황음 무도한 군주와 똑같이 위망의 전철을 밟으려 하니, 이에 대해 신은 밤낮으로 안타까와 하며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말을 망령되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깊이 생각하고 오래 강구한 다음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금이라도 채용해 주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한 소원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충성스러움을 잘 알았다. 나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몽매하고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생각해 보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더욱더 경계하여 살펴 유념하겠다." 하였다. 그뒤 며칠이 지나서 이이가 경연에 입시하여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를 진달하자, 상이 흔쾌히 수작하여 종일토록 토론하고서 파하였다. 이때부터 이이는 입시할 적마다 전설(前說)을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여 인재를 얻어 정사를 맡겨 기강을 바로잡고 오랜 폐단을 개혁시키는 데 있어 유속(流俗)이나 부의(浮議)에 저지되거나 동요되지 마소서.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를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그의 봉사(封事)를 입시한 신하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우찬성이 전부터 이런 논의를 해왔는데 나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모르겠다만 경장시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우 신하들이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령 홍가신(洪可臣)이 대답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이 궁전은 본시 조종이 창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질 형편이라면 조종이 창건한 집이라 하여 수리하여 고치지 않고 그저 앉아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필시 재목을 모으고 공장(工匠)을 불러들여 썩은 것은 갈아내고 허물어진 데는 보수한 뒤에야 산뜻하게 새로워지는 것인데 경장시키는 계책이 무엇이 이것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부제학 유성룡이 이 말을 듣고 이튿날 차자를 올려 이이의 논의가 시의(時宜)에 적합하지 않다고 극론하자, 그 의논이 끝내 중지되었다. 홍가신이 유성룡에게 가니 성룡이 그가 이이의 논의에 부회하였다고 힐책하였다. 가신이 말하기를, "공은 과연 경장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기는가?"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하였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스런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선조수정 15년 9월 1일) [80]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극진하게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흥망은 조짐이 있고 치란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닥치기 전에 말을 하면 흔히 신임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을 하면 구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폐정(弊政)을 혁신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이 전부터 간청한 바는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군적(軍籍)을 고치고, 주현(州縣)을 병합하고, 감사(監司)를 구임(久任)시키는 4조항이었을 뿐입니다. 군적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착수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의 당초 의도는, 군졸의 설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방어에 있는 만큼 군졸이 공물을 진상하는 역(役)을 감소시켜 전결(田結)에 이전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고 힘을 기르며 훈련에만 전념하여 위급함에 대비케 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고치지 말도록 명하셨으니,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계책은 반드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경장(更張)한다는 헛 소문만 있고 변통하는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옛날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가 없고 나라의 쓰임이 넉넉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변방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서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우선 시급한 것은 군사인데 식량이 모자랍니다. 그렇다고 부세를 더 징수하게 되면 백성이 더욱 곤궁해질 것이고 더 징수하지 않으면 국고(國庫)가 반드시 바닥날 것입니다. 더구나 군기(軍器)를 별도로 만들고 금군(禁軍)을 더 설치하는 등의 일 모두가 불가피한 것으로서 경비 이외에 조달할 곳이 매우 많은데, 어떤 특별한 계책을 내어 경비의 용도를 보충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현 병합 계획은 본래 성상께서 생각해내신 것으로서 시행하기도 어렵지 않고 이해관계도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연혁(沿革)이라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하십니다만, 옛날부터 연혁해 온 것도 꼭 대단하게 변통시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록에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소읍(小邑)의 쇠잔한 백성이 많은 역사(役事)에 시달리고 있는데, 만약 하루아침에 몇 고을을 병합하여 하나로 만들 경우 그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난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황주 판관(黃州判官)을 혁파하자 관리와 백성이 뛰고 춤추며 서로들 경하하였는데, 두 고을을 하나로 병합하는 일도 판관을 혁파할 때의 경우와 다름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백성들의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가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번 혜택을 베풀어 주려 하지 않으십니까....의논하는 사람들은 혹 소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근심하여 변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을 고치고 군적을 고치고 주현을 병합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조정에서 상의하여 결정하면 되는 일일뿐 백성에게는 한 되의 쌀이나 한 자의 베의 비용도 들지 않는데, 백성들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소요할 근심이 있단 말입니까. 양전(量田)027)(註 027)(양전(量田) : 농지 측량.) 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약간의 동요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안의 개정은 반드시 양전한 뒤에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로써 고르게 정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양전한다고 해서 전결의 증감이 어찌 크게 차이가 나기야 하겠습니까. 따라서 공안부터 먼저 고치고나서 뒤따라 양전한다 해도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결에 면적이 차고 모자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들 어찌 오늘날의 공안처럼 전결의 다과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기야 하겠습니까....아, 비도(匪徒)의 난리는 방비가 없는 데에서 일어나고 승패와 안위는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조용히 담소하며 서서히 옛 규정이나 상고할 뿐인데, 게다가 중론이 분분하게 일어나서 절충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린다면 변방의 성은 이미 함락 되고 말 것입니다. ‘모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謨夫孔多 是用不集)’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형편없고 어리석은 신이 성명(聖明)을 만나 은총을 믿고는 조금도 숨김없이 망령된 말을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계책이 소루하여 열에 하나도 시행되지 않으니, 외로운 처지에서 심정만 쓸쓸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머리털이 하얗게 되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지경인데도 수고롭기만 할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030)[148] 라고 하였으니, 의리상 물러나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나, 간담을 헤치고 심혈을 기울여 지금까지 슬피 부르짖으며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다 보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뭇더미에 불이 붙는 것을 환히 보면서 감히 제몸만 돌보는 생각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다시 말하지 않는다면 신에게 그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가엾게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가 우연히 연전에 경이 올린 상소를 보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올린 경의 상소가 마침 들어왔다. 전후에 걸쳐 정성스런 상소를 보건대 용렬한 임금을 잊지 않는 경의 고충(孤忠)이 정말 아름답게 여겨진다. 나라 일은 훌륭한 대신들에게 맡겨야 마땅하다. 남행(南行)을 대간(臺諫)으로 삼았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한 번 실수한 것도 이미 충분한데 어찌 차마 두 번씩이야 잘못할 수 있겠는가. 공안에 관한 일은, 조정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그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감히 다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설혹 고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아울러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군적에 관한 일은 본조에서 이미 명을 받았으니, 경이 어떻게 시행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주현을 병합하는 문제는 과연 나의 밝지 못하고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폐단을 끼치게 될까 하여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변경하지 못하였는데, 경이 지극히 청하여 마지 않으니 한 번 시험해 봐야 하겠다.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은 새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왔으나, 그것도 경의 계책을 따라 먼저 양남(兩南)에서 시험하도록 하겠다. 서얼과 공천·사천을 허통해 주는 일은, 처음 사변이 일어났을 적에 경의 헌책(獻策)으로 인하여 즉시 시행하도록 명했으나, 언관(言官)이 논박하고 있으니 다시 비변사에 물어서 상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세속에서 문·무과를 거치지 않고 입사(入仕)한 자를 남행(南行)이라고 한다. 이이(李珥) 등이 미출신인(未出身人)으로서 대간(臺諫)을 삼기로 청한 한수(韓修)·유몽학(柳夢鶴) 등이 이것이다. 성혼(成渾) 등은 일민(逸民)으로서 추천된 자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선조수정 16년 4월 1일) [81]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뒤로 공법(貢法)이 더욱 무너졌으므로 구안(舊案)을 감하여 한결같이 토산(土産)의 증감(增減)에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두었다. 공물(貢物)을 쌀로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선조수정 27년 1월 1일) [82] 영의정 유성룡이 차자를 올려 시무(時務)에 대해 진술하였다. 그 대략에, "‘깊은 근심 속에서 성명(聖明)한 지혜가 열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국가가 흥기된다.’ 하였습니다....신은 또 듣건대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을 되찾게 하는 방법이 충분한 식량과 군사에 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徭役)과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며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십일세(什一稅)008)[149] 보다 가벼워서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전세 이외의 공물 진상이나 각 절기 때마다 바치는 방물(方物) 등으로 인해 침해당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당초 공물을 마련할 때에 전결(田結)의 수로써 균일하게 배정하지 않고 크고 작은 고을마다 많고 적음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1결(結)당 공물값으로 혹 쌀 1, 2두(斗)를 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쌀 7, 8두를 내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10두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불공평하게 부과되어 있는데 게다가 도로를 왕래하는 비용까지 가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봉납(捧納)할 때는 또 간사한 아전들이 조종하고 농간을 부려 백 배나 비용이 더 들게 되는데, 공가(公家)로 들어가는 것은 겨우 10분의 2, 3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모두 사문(私門)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진상에 따른 폐단은 더욱 심하게 백성을 괴롭히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당초에 법을 마련할 때는 반드시 이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시한 지 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속임수가 만연하여 온갖 폐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곧바로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고 나라의 저축도 풍부히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건대 공물을 처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도내 공물의 원수(元數)가 얼마인지 총 계산하고 또 도내 전결의 수를 계산하여 자세히 참작해서 가지런하게 한 다음 많은 데는 감하고 적은 데는 더 보태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모두 한가지로 마련해야 되리라 여겨집니다. 이를테면 갑읍(甲邑)에서 1결당 1두를 낸다면 을읍·병읍에서도 1두를 내고, 2두를 낸다면 도내의 고을에서 모두 2두를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백성의 힘도 균등해지고 내는 것도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방물 값 또한 이에 의거해서 고루 배정하되 쌀이든 콩이든 그 1도에서 1년에 소출되는 방물의 수를 전결에 따라 고르게 납입토록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결마다 내는 것이 그저 몇 되 몇 홉 정도에 불과하여 백성들은 방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진상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모두 쌀이나 콩으로 값을 내게 해야 합니다. 이상 여러 조건으로 징수한 것들은, 전라도는 군산(群山)의 법성창(法聖倉)에, 충청도는 아산(牙山)과 가흥창(可興倉)에, 강원도는 흥원창(興元倉)에, 황해도는 금곡(金谷)의 조읍창(助邑倉)에 들이도록 하고, 경상도는 본도(本道)가 소복(蘇復)될 동안엔 본도에 납입하여 군량으로 하고, 함경도·평안도는 본도에 저장하고, 5개 도의 쌀과 콩은 모두 경창(京倉)으로 수송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관청에 공물과 방물을 진상할 때 물건을 따져서 값을 정하는 것은 마치 제용감(濟用監)에서 모시·베·가목(價木)을 진헌하던 전례와 같이 해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사서 쓰게 하고, 만약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서 별도로 조도(調度)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공물과 방물을 진상하는 수를 헤아려 재감(裁減)해야 합니다. 그러면 창고 안에 저장되어 있는 쌀과 콩을 번거롭게 환작(換作)하지 않고도 한량없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이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을 광록시(光祿寺)에 두었다가 진공할 물품을 모두 이것으로 사서 쓰고, 만약 별도로 쓸 일이 있을 경우에는 특명으로 감선(減膳)하여 그 가은(價銀)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 지방 백성들이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노고를 치르지 않는데도 사방의 공장(工匠)이 생산한 온갖 물품이 경도(京都)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어 마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것처럼 무엇이든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사(京師)는 날로 풍부해지고 농촌 백성들은 태평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업에 종사한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제도이니 우리 나라도 본받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면 일세의 유능하고 지혜있는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어 국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맡아 수행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 모두 채택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진관(鎭管)의 법은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는데도 끝내 시행되지 않았고, 공물 진상을 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의 뜻이 모두 강구하고 싶어하지 않아 거행되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선조수정 27년 4월 1일) [83]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늘의 위태로운 형세는 참으로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인데도 팔짱을 낀 채 아무런 계책도 세울 수 없는 것은 오직 군량 한 가지 문제일 뿐입니다. 서울에 비축해 놓은 것은 겨우 몇 달을 지탱할 정도며 외방의 창고도 한결같이 고갈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곡식이 익을 때인데도 공사(公私)의 형편이 이와 같으니 명년 곡식이 익기 전에는 다시 무슨 물건을 가져다가 이어 구제하겠습니까. 불행히도 적의 형세가 다시 치열해져 명군(明軍)이 들어온다면 우리 나라 신료들은 비록 군수물을 대지 못했다는 죄로써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일을 그르친 죄를 족히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는 은(銀)을 채굴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 하고 어떤 이는 포목을 방출하여 곡식을 사들이자고도 합니다. 대개 은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기는 하지만 그 산출되는 양이 많지 못하여 힘이 많이 드는 반면 소득은 적고, 포목을 가지고 곡식을 사들인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역시 소량이니 국가의 씀씀이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때문에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은 각도의 공물(貢物) 진상을 모두 쌀로 하게 하고 또 상번 군사(上番軍士)의 호봉족(戶奉足)과 각사 노비(各司奴婢)의 신공(身貢)을 전부 쌀로 마련케 하며, 아울러 바닷가 소금 굽는 곳에서 많은 양을 구워내어 산협(山峽)의 소금이 귀한 지역에 배로 운반하여 곡식으로 바꾸어들인다면 소득이 반드시 많을 터이니, 이것이 오늘날 재용을 늘리는 방법입니다. 이외에 또 둔전(屯田)이 있으니 마땅히 시기에 맞추어 강구하고 힘써 실행할 것을 호조로 하여금 마련해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7년 9월 20일) [84]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150]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151][152][153][154][155][156] 사기를 치려다[157]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 [85] 이황은 주희 철학의 계승자이다. 리학 발전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이황이 주희의 어떤 사상을 다시 서술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희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이황은 주희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였으며, 주희의 철학이 지닌 어떠한 모순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인식하였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함으로써, 주희의 철학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던 논리적 연결 고리를 드러내 주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관점에서 볼 때, 주자학의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 있었다. 명대 중기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생명력 있는 주자학자를 다시는 배출해 내지 못했다. 주자학이 명대 중기에서 청대까지 여전히 정통 철학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이 당시 주자학은 중국에서 날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철학이었다. '심학'의 성행에 때맞춰, 가정嘉靖 연간 이후의 주자학은 진일보하여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활력을 조선에서 얻게 되었다. 퇴계 철학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의 완전한 성숙을 표명해 주는 것임과 함께 주자학의 중심이 이미 조선으로 옮겨져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 뒤 동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이미 마련하고 있었음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송명성리학>, 475) [86]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 [87] 이 시기 조정의 특징은 대신권이 대단히 약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앞 시대가 정치적으로 파행적인 훈척의 시대였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조정에 있었던 누구도 안정적인 리더쉽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문제에 대한 대응은 대개 집단적이었고, 문제는 해결되기 보다는 증폭되었다. 이 점에서 당시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선조였지만, 그는 정치행위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림들 개인 간의 사소한 갈등들이 서로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점차 정치적 갈등으로 증폭되었다. <선조대 ‘동서분당’ 전개의 초기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 [88] 사림세력의 집권 이후 조정은 이전보다 덜 부패했을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및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더 향상되거나 효율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림의 집권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타난 ‘동서분당’은 그러한 비효율이 표현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이이를 중심으로> [89] 선조(조선)/평가/부정적 평가/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90] 성종25년 vs 선조25년 두개의 태평성대 [91] 전란 전에는 기축옥사 그리고 전란 후에는 칠천량 해전 등. [92] 匹夫; 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 남자. [93] 업적이 없는 것이야 관대하게 넘어가 줘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선 정부의 행정적인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의 가난만을, 그것도 심지어 수백 년 전의 고려와 비교하며 한탄하는 그 유명한 망언[158]을 보면[159][160][161][162][163][164] 도첩제 존폐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연산군만도[165] 머리는 좋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책적 성과를 내는 능력은 하다못해 중종[166]명종[167] 부자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고 출범 이후 아무런 일도 제대로 못해본 정공도감(正供都監)을 스스로 날려처먹은 것을 보면 이정청(釐整廳) 설치 그리고 이정절목(釐整節目) 도출까지는 어떻게 이뤄낸 철종만도 한참 못하다. 그나마도 앞서 언급한 왕들조차 전혀 명군 축에 못 드는 범부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머리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사람 자체가 왕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문제해결력이 없다시피 극도로 무능했는데 전제군주제 사회라서 자동으로 왕 자리를 처먹은 폐혜가 아닌지 의심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94] 그나마 왜란 종결 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를 내세워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 등을 행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발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현종 대에 숙종 대에 입안절수(立案折受) 규제강화[168][169][170][171][172][173][174][175][176]와 같은 선조 대에 규제완화[177][178][179][180][181][182][183][184][185]의 부작용[186][187]들을 수습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해야 했던만큼 세부계획에 있어서 치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거나 하는 대안을 선조 대에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에 실시된 대동법 같이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실시한 적은 선조 대에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이것을 원칙으로 간주하겠다고 승인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선조라는 왕이 집권한 동안에는 무엇인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개선책이 실시되고 성과를 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란 전에는 원칙이 없었고[188] 전란 후에는 그나마 여민휴식(與民休息) 같은 그것 자체로는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세부계획이 뻔하고 허술해서 민간의 자생능력에 대부분 의지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95]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96] 오히려 명군이라는 괴평가가 나오기도 하는 전란 전에 25년 동안 더 그러한 경향이 있다. 성종25년 vs 선조25년 두개의 태평성대 [97] 임해군 순화군만 보더라도 자식을 계도하고 꾸짖기는커녕 무턱대고 감싸고 돌기만 해서 결국 강간 살인을 밥 먹듯 저지르는 싸이코들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정식 후계자이자 그나마 왕자 노릇은 하고 있던 광해군을 자기 자식이면서도 시기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면서 후계 구도를 어그러트릴 뻔하는 등 후계를 굳건히 해야 하는 유교 사회에서의 임금이 해야 할 역할을 대놓고 방기하였다. 이 정도면 의도적으로 조선 종묘에 분탕을 치기 위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인가 싶을 지경이다. [B] 영창대군이 영성군보다 약 9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99] 장남 임해군은 자신의 개인 노비들을 무장시킨 뒤 여기저기 돌아다녀 사람들에게서 땅을 갈취했으며, 갑부 상인에게는 죄를 무함하여 때리고 매질하다가 뇌물을 주면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있구나' 라고 말하면서 석방했다. 게다가 수천마리의 거위 오리를 기르면서 매일 아침 이 거위와 오리들을 논 밭으로 내몰았는데 이 거위와 오리들은 논과 밭을 헤짚고 다니면서 먼지를 일으키고 쌀을 쪼아먹었는데 그 논의 농부들은 그 거위와 오리의 주인이 주인인지라 암소리 못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기에 불만을 내지 않았어도 되려 임해군이 불만을 드러내 그 농부를 벌했다. 또한 남의 아내 중 생긴 게 괜찮으면 그 아내의 남편을 장살로 죽인 뒤 그 아내를 자신의 노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게다가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승려들에게 노략질을 했으며 그리고 살인을 하면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내를 반드시 노비와 결혼시켜서 고발을 못하게 막았다. 선조 36년 8월, 임해군은 도승지 유희서를 자기 노비들로 강도를 시켜서 죽이고 그 아내를 강간한 후 강도인 김덕윤을 시켜 그 아내도 죽였다. 그런데 정작 심문을 하려고 김덕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김덕윤과 그 패거리들은 전부 죽었고 유희서의 아들 유일은 왕자 모독죄로 유배를 보냈으며 이 사건을 수사했던 사또 변양걸 역시 왕자 모독죄로 삭탈관직 후 감옥에 가뒀다. 선조가 붕어하고 그 후임 임금으로 동생인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은 임해군을 가택에 연금했으나 임해군은 여장을 하고 탈출하다가 잡혀서 도로 가택에 연금당했으며 이후 의문사당했다. [C] 정원군이 순화군보다 약 2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101] 술만 마시면 괜히 사람을 죽이고 그 재산을 강도했다. 정원군은 순화군보다 머리가 좋았는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여, 처남을 과거에 부정 합격시켜준 혐의로 사헌부에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며, 병역 회피자를 돈을 받고 자신의 집에 숨겨주는 등 자신이 왕자라는 것을 최대한 이용해서 전횡을 일삼았다. 정원군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던지, 정원군의 노비들이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양민들을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다닐 정도였다. 각 왕자들에게 할당된 마부들은 직무유기를 일삼았는데 정원군의 마부에게 마차를 요청하면 정원군은 그 요청한 근무원들을 모질게 구타했다. 10일 초저녁에 정원군의 노비 7명이 창기를 끼고 하원군의 집을 지나가다가 하원군의 노비들과 싸움이 일어났는데 정원군의 노비들이 하원군의 가택에 침입해 마구 때려부수고 귀부인을 끌어내 개끌듯 끌고갔는데... 그게 바로 하원군의 부인인 남양군부인 홍씨였다. 그러니까 정원군은 자기 큰어머니의 머리 끄댕이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갔던 것이다. 하원군은 선조의 큰 형으로 정원군에게는 큰아버지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정원군은 탄핵을 당했다. [C] 정원군이 순화군보다 약 2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103]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 임금의 명으로 의병을 모으라고 했지만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는 그러기는 커녕 백성들을 학대하고 백성들에게 저지르는 행패가 침략군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 따위 아득하게 능가할 정도로 잔악무도했다. 결국 백성들은 이 두 왕자들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줬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이 왕자들을 일본에 압송해서 이들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일본에 있다가 귀국했다. 순화군은 일본에 있으면서 더욱 극악무도해졌는데 순화군의 비교 대상은 저 연산군도 뛰어넘고 조선에는 이런 악인이 없으며 저기 해릉양왕 정도는 되어야 순화군과 비교대상이었다. 순화군은 어렸을 적부터 주변의 동물들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야만 직성이 풀렸으며, 매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등 그 악행은 끝이 없었다. 이후 순화군은 의인왕후의 장례식장에서 의인왕후의 시종 궁녀를 강간하는 짓을 저질렀다. 선조는 이 혐의로 순화군을 수원으로 유배보냈는데, 선조 34년 2월 9일 순화군은 술을 나르는 노비를 재미삼아 구타했고, 2월 12일에는 노비를 벌거벗기고 결박한 뒤 해가 뜰 때까지 옷을 입히지 않았다. 장석을시와 굿을 하는 무당을 잡아 묶어두고 고문한 뒤 밤새도록 매달아 놓았다. 이 과정에서 순화군은 장석을시의 이빨을 위 9개, 아래 9개를 강제로 발치했고 무당도 이빨을 위 1개, 아래 1개를 강제로 발치했다.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했는지 무당은 피가 목구멍을 막아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순화군의 악행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수원에 있는 모든 사또들이 전부 도망가서 수원의 통치가 마비될 정도였다. 백성들도 사또를 따라 죄다 도망쳐서 그 거대한 수원이 허허벌판으로 바뀌었다. 이에 선조는 순화군을 다시 압송해서 자신의 저택에 감금했는데 순화군은 살인을 못하는 충격으로 풍을 맞아 사망했다. [104] 과부들을 능욕하고 백성들에게서 땅과 금품을 마구 갈취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괄에 의해 임금으로 옹립되었다가 이괄이 무악재에서 패했는데 흥안군을 미처 챙겨가지 못한 채 달아났고 그렇게 흥안군은 관군에게 잡혔는데 국문도 없이 즉결처분 당했다. [105] 인조보다 5살 연하의 숙부이긴 한데 조카인 인조조차 경평군을 실성한 사람 취급을 했을 정도로 인간성이 글러먹었다. 사람을 가두고 패는 악취미가 있었고, 형 흥안군과 함께 사대부에게 트집을 잡아 그 사대부의 집을 습격해 완전히 철거 수준으로 때려부쉈으며 노비를 가둬서 장살해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귀중품을 몰래 숨긴 뒤 애꿎은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행패가 장난이 아니었다. [B] 영창대군이 영성군보다 약 9개월 정도 일찍 태어났다. [107] 송강 정철의 조카이다. [108] 이 중 두 아들과 한 딸은 일찍 죽었다. [109] 이 중에서 성인까지 성장한 건 세 명 뿐이다. [110] 경종은 아예 없어서 제외 [111] 이후 고종 때가 되어서야 또다시 자식이 10명이 넘는 왕이 나온다. [112] (유머) 조선의 신문.jpg [113] 윤흥신이 그 중 한 사람으로 훗날 다대포 전투에서 목숨걸고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114] 心疾, 발작이나 혼절을 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증세로 추정. 조현병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많다. [115] 다만 선조 말년에 정인홍이 이런행태에 열받아 진짜 양위하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자 선조가 격분한 걸 보면 정치적 쇼일 가능성이 더 높다 [116] 시기 상으로도 광해군 치세에 있었던 싸움은 1622년(광해군 14년)에 일어난 일인데 반해, 지봉유설은 그보다 8년 전에 쓰인 책이다. 그래서 지봉유설에서 언급하는 사건이 광해군 시기의 일이었을 리는 없다. 참고로 이 해전은 종전처럼 잉글랜드 해적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정체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에 관해서는 흥양 해전 문서를 참고할 것. [117] 칼레 해전의 주역인 그 드레이크다. 실제로 선조의 치세 기간에 드레이크의 사략함대가 태평양 아메리카에서부터 서쪽으로 횡단하여 세계일주 항해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중간에 일본이나 조선 앞바다를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다. [118] 선조실록》에서는 '마리이(魔離異)'라고 기록되어있다. 마링예이루는 본명이 아니고, 포르투갈어로 선원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119]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설은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사료나 유물 등이 전무하다. [120] 다만, 《선조실록》에는 이들 흑인들의 출신국이 프랑스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121] 한석봉은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데다가 선조 자신부터가 한석봉 팬이라 한석봉에게 가평군수에 앉혀준 적도 있었다. [122] 인조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23] 의외로 촉빠였던 사람 [124] 원균도 그렇고 원래 성격부터가 문제가 많았는데 마수들이 이성과 절제력을 없애자 숨겨왔던 본성이 튀어나와 부정적인 행동을 일삼았다고 묘사했다. [125] 한양을 등지고 피난하는 첫등장에서 흑호와 태을사자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태을사자도 저사람은 마수가 아니였어도 본래부터 의심이 많고 음험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흑호도 정말 저 인간이 싫다고 반응했다. [126] 원균의 경우 패전 후 도망치면서 마수가 떨어져나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이순신에게 용서를 빌면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선조는 그런 거 없다. [127] 은동은 이 인간의 패악질 때문에 천계에 부여받은 권능을 써서 죽여버리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고 태을사자조차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를 못할 지경이었다. 한 번은 선조가 이순신의 누명을 빌미로 그를 압송하여 국문 후 죽이려 했을 때 분개하여 선조를 염라대왕의 비술(주문은 "저승의 명령이다!" 이 한마디면 그 즉시 사람이건 동물이건 혼백이 달아나버릴 정도의 위력이라고 한다)로 사살하려고 하였으나 태을사자의 "지금 상감을 없앤다고 이 난리가 끝날 것 같으냐?" 라는 만류에 간신히 참았고, 한 번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려고 온 선조의 선전관을 두들겨 패 죽여버린 후 내친김에 선조를 다시 죽여버리려고 하였으나 은동 본인이 다시끔 간신히 참아넘겼다. [128] 오히려 기록을 통해서 실제로 비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으로는 세종 경종이 있다. [129] 2008년 SBS 드라마 < 일지매>에서는 인조 역. [130]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 [131]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32] 2006년 MBC 드라마 <>에서는 내관 역. [133] 선조보다 나이가 많은 신하도 예외는 없어서 하였소? 와 같은 체는 거의 보이지 않고 하였느냐? 하였는가? 라는 어체를 쓴다. 간혹 화를 낼 때 하였소? 라는 어투를 쓴다. [134] 당초 배우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을 빚고 심지어 무단으로 촬영을 펑크내자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 훗날 이 이야기는 조민기가 미투 운동에 엮이면서 재조명되었는데 당시 들리는 말로는 조민기가 <불멸의 이순신> 촬영장에서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으며 한번은 "어떻게 여자 한번 보기가 힘드냐? 내 평생 이렇게 여자없는 작품은 처음이다. 엑스트라 궁녀가 이뻐보일 지경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하며 궁녀 역할 엑스트라를 사진으로 찍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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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002 이성규, 「명청사서의 곡필과 조선의 변무」, 『오송이공범교수정년기념동양사논총』, 지식산업사, 1993; 한명기, 「17·8세기 韓中關係와 仁祖反正―조선 후기의 ‘仁祖反正 辨誣’ 문제」, 『한국사학보』 13, 고려사학회, 2002; 김경록, 「조선 초기 종계변무의 전개양상과 對明關係」, 『국사관논총』 108, 국사편찬위원회, 2006., 004 이성규, 앞의 글, 565~566쪽. [136] 002 이성규, 「명청사서의 곡필과 조선의 변무」, 『오송이공범교수정년기념동양사논총』, 지식산업사, 1993; 한명기, 「17·8세기 韓中關係와 仁祖反正―조선 후기의 ‘仁祖反正 辨誣’ 문제」, 『한국사학보』 13, 고려사학회, 2002; 김경록, 「조선 초기 종계변무의 전개양상과 對明關係」, 『국사관논총』 108, 국사편찬위원회, 2006., 005 위의 글, 507쪽. [137] 2) 末松保和, <麗末朝鮮初に於ける大明關係> '第12章 宗系弁誣の發端' <靑丘史草> 第一, 1939, pp.426~436. ; 李成珪, <明.淸 史書의 朝鮮 '曲筆'과 朝鮮의 '辨誣'> <五松 李公範停年紀念 東洋史論叢>, 知識産業社, 1993. ; 한명기, <17.8세기 韓中關係와 仁祖反正-조선후기 '仁祖反正 辨誣' 문제-> <한국사학보> 13, 고려대사학회, 2002., 97) 李成珪, 앞의 논문, p.507 참조. [138] (註 018) 정공 도감(正供都監) :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직.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정공 도감을 두었는데 이는 이준경(李浚慶) 등이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감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조정 선비로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낭관에 충차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139] 유교 사회에서 멸시받았던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허준 같은 인물을 지원해서 《 동의보감(東醫寶鑑)》[189]의 편찬을 명했다. [140] 그리고 이원익과 같이 선조 시절에 중용받은 신하들은 이후의 왕조를 그나마 유지시켜주었던 여러 개혁안에 대해 탐색했으며 이원익은 결국 광해군[190] 즉위 직후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191]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의 초안을 올림으로써 후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141] 이순신이야 본래 패기있는 젊은 무관이었다 쳐도 40이 넘어서 문과에 급제한 양반 자제를 무관으로 돌려 끝에는 도원수로 임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에서도 안 나올 기막힐 이야기다. 그러나 선조는 이걸 그대로 실행했고 권율은 선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142] (註 132) 횡간(橫看) : 보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줄줄이 내려 붙여 적지 않고 요즈음의 일람표처럼 항목에 따라 줄을 긋고 가로 벌여 적은 세출 예산표. [143]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 [144]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광해 9년 3월 8일) [145] 성종 본받겠답시고 《 동문선(東文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 속동문선(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각각각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192]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 [146] 이 시기에 평안도 양전이 1544년(중종 39년)에 이루어졌고[193] 이 시기에 강원도 양전이 1522년(중종 17년)에 이루어졌고[194] 이 시기에 전라도 양전이 1524년(중종 19년)에 이루어졌다.[195] [147] (註 013) 선상(選上) : 서울의 각 관사(官司)에서 부리기 위해 외방(外方)의 각 고을에 소속된 노비(奴婢) 등을 뽑아 올리는 것. [148] (註 030) ‘힘껏 직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이 없으면 그만둔다.’ : 이 말은 공자(孔子)가 옛날 주임(周任)의 말을 인용하여 염구(冉求)의 실책을 꾸짖은 말이다. 《논어(論語)》 계씨(季氏). [149] (註 008) 십일세(什一稅) : 당년 총 수확량의 10분의 1을 거두던 옛날의 세법.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십일세를 논한 것이 보인다. [150]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요역을 아울러 감하는 편이 마땅할 듯하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선조 27년 11월 16일) [151] 호조가 아뢰기를, "삼가 접반사의 장계를 살펴보고 또 형편을 헤아려 보건대, 명사가 경성에 머무르는 기간은 반드시 수 개월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 신들은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해사의 모든 물건은 한결같이 탕진되었고 이번에 접대 도감에서 마련한 것이 10일을 지공할 수 있는 것인데도 현물이 없어 부족한 물건이 또한 많습니다. 대체로 현재 군자감에 남아 있는 미곡과 두태는 모두 1만 4천여 석인데 1개월의 급료는 3천여 석 전후로서 수시로 달라져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명사가 와서 경비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더구나 양향청(糧餉廳)의 1개월간 잡비는 1천 4백여 석인데 저축한 것은 거의 동이 나서 며칠 못가 모두 없어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거느린 장관(將官)과 가정(家丁)·군병(軍兵)이 모두 5백여 명이고, 말이 5백여 필이며, 관전병(寬典兵)이 또 3백여 명이라고 하니, 1개월간 지공하는 데 드는 미곡과 두태는 대개 1천 6백여 석이 됩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당인(唐人)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아 짐작하여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각도의 전세(田稅)의 작미(作米)와 신공(身貢) 및 사신을 접대할 잡물을 서찰을 보내어 재촉하기도 하고 혹은 곧바로 이문(移文)을 발송한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마는,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전혀 상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해운 판관(海運判官) 조존성(趙存性)과 본조 정랑(本曹正郞) 최동망(崔東望)의 이문(移文)을 보니, 법성(法聖) 【포구(浦口) 이름이다. 】 에서 처음 운반한 미곡과 두태는 모두 1만 3천 7백여 석으로 이달 2일에 배를 띄웠고, 아산(牙山)에서 두 번째로 운반할 미곡과 두태는 모두 5천 8백여 석으로 23일 경에 나누어 싣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리를 조운하여 한강에 도착하는 숫자는 꼭 맞는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조치할 만한 일이 없으니 오늘의 급선무는 쓸데없는 관원을 줄여서 경비를 절약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계하(啓下)한 이후에도 해조가 아직까지 거행하지 아니하여 금군(禁軍) 중에는 재주 없고 용렬한 사람이 헛된 이름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가 평시보다 배나 되는데, 깨끗이 없애도록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액수(額數)를 정하지 아니하여 낭비가 여전합니다. 대체로 전혀 소관(所管)이 없는 부서가 늠료(廩料)만 허비하며, 비록 소관이 있는 부서라고 하더라도 사무는 한가한데 인원이 많아서 공론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동 포수(兒童砲手)는 미리 양성하는 것이 절실하기는 하나 현재 적을 방어하고 있는 군사가 아닌 듯하고, 출전한 장사(將士)의 처(妻)에 대한 급료도 장사를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좋은 뜻이기는 하나 군량을 잇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도 의논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환시(宦寺)의 숫자가 60명에 가까운데 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일은 한 사람이 10가지 일을 겸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적당하게 줄이어 군량을 이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아동 포수와 출전한 사람의 처에 대한 급료는 감할 수 없다." 하였다. (선조 28년 4월 19일) [152] 대저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군량이 우선이므로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저축된 군량이 없으면 이는 영토를 버리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군량이 떨어지면 영토를 보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란이 일어난 이후로 부고(府庫)는 잿더미로 화했고 전야는 쑥밭이 되어버려 한두 말의 식량도 마련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그 많은 군량을 무슨 수로 조치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정에서 처리하는 방법으로 하책(下策)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모속(募粟)을 권하는 문서가 열읍(列邑)에 빗발치고 독촉하는 사신이 제로(諸路)에 바쁘게 달리어 가난한 집도 빠뜨리지 않고 상공미(常貢米)를 내게 하고 권문 세가나 호족들에게도 대동미(大同米)로 군량을 징수하여 다방면으로 모집하고 아주 적은 것도 가리지 않았으니,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미진한 점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더러 사사로이 사자(使者)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하고 열읍의 백성들 사이에서 축이 났는데도, 호조에서는 군량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살피지 않고 방백은 군량이 많고 적음을 알지 못한 채, 멋대로 사용하고 되는 대로 낭비하여 나라의 용도로 쓰려고 보면 이미 하나도 없으니, 피폐된 집에서 강제로 징수하는 폐단은 많고 사가(私家)에 더해주는 폐해는 한이 없습니다. (선조 28년 7월 2일) [153] 1. 각읍의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민막(民瘼)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군량을 도우려는 것이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법을 시행하는 데는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태평 시대에는 혹 시행할 수 있으나 오늘날에는 시행할 수 없습니다. 대개 전지 1결(結)에 미곡 2두씩을 내게 하면 그 내는 것이 적어서 백성에게 편리한 듯합니다. 그러나 상란(喪亂) 이후로 전야(田野)가 버려지고 묵어서, 한 장정이 경작하는 바는 겨우 식구의 식량을 이을 수 있을 뿐이므로 공사(公私)의 빚, 호역(戶役)의 수용(需用), 전세(田稅)의 미곡을 마련해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또 이 때에 공물의 작미까지 아울러 징수하면 결코 소민(小民)이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부터 공물의 댓가를 모두 토산(土産) 잡물을 편의에 따라 마련하여 바치게 하였으니 그 사이에 비록 각사(各司)의 하인이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구례(舊例)가 이미 이루어지고 민정(民情)도 익숙하여졌으므로 지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정해진 2두 이외에 이관(吏官)의 농간질과 갯가로 가지고 가서 배로 운반하고 경창(京倉)에 납입하는 비용이 있으니, 소민이 내는 바가 어찌 2두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올해 수납해야 할 미곡이 5만여 석인데 현재 경창에 도착한 수효는 4천 석도 되지 않아 온갖 경용(經用)을 장차 이을 수가 없으니 앞으로 백관의 요미(料米)를 무엇으로 반급하고 중국군의 양식을 무엇으로 방출하며, 제색(諸色)의 군병을 무엇으로 먹이겠습니까. 이것이 절박한 근심입니다. 설사 5만 석의 미곡을 다 징수하여 경창으로 실어온다 하더라도 공물을 교역할 때 또한 불편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서울이 잔파(殘破)되어 여러 가게가 썰렁하고 물력이 탕진하여 각색의 공물을 사들이고자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또 물가의 경중이 무상하여 쌀값의 높낮이를 공평히 하기 어려우므로 해사(該司)는 억제하려 하지만 백성들은 비싼 값을 받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억제하면 소민이 이익을 중히 여겨 조금만 더 취해도 원망이 무더기로 일어나고, 비싼 값을 주고 구입하면 관용(官用)이 매우 급하여 그 값이 몇 갑절이 되어 경비를 대기 어려우니, 이 또한 심히 공평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밖으로는 소민의 불편함이 이와 같고 안으로는 시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이와 같아 당초 군량을 도우려던 계책마저 허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설령 외방의 백성에게 편리한 바가 있고 군병의 양식에 도움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사세가 이처럼 극심하다면 끝내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올해 수납할 작미(作米)의 원수(元數)를 얼음이 얼기 전에 각별히 납입하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경창에 실어들인 것이 비록 5만 석에 차지 않더라도 그 수량이 3∼4만 석에 이르면 그래도 용도에 충족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명년의 국계(國計)는 결코 지공할 방도가 없으니 일찍 계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훈련 도감에 소속된 군사는 당초 한때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절박한 요식(料食)을 위하여 지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약간 풍년이 들어 여염 사이에 곡식이 천한 듯하니 비록 유리(流離)하여 생업을 잃은 백성도 다 살아갈 방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감의 군사는 모두 날마다 분주하여 역(役)의 괴로움이 갑절이나 심한데도 요미(料米)의 박함은 전과 같으니 자신의 의식도 오히려 부족한데, 하물며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다 싫어하고 괴로와하는 마음을 품고 모두 도피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속오군(束伍軍)의 초병(哨兵) 중에도 이미 차츰 도망해 가는 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군사를 급한 때에 쓸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양료(糧料)를 더 지급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자니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 이어나갈 길이 없고 약속한 명령을 그대로 지켜 전처럼 부리자니 군인이 살아갈 수 없어 원망만 날로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먼저 호조(戶曹)로 하여금 올해 수납한 미곡(米穀)이 얼마인가를 조관(照管)하게 하여, 1년 경비를 덜어내고 그 나머지로 군량을 삼아 군량의 다소에 따라 군의 원액(元額)을 정하고, 무예가 성취되어 쓸 만한 자는 가려서 올려주고 무예가 용렬하여 쓸모없는 자는 살펴서 내리며, 내린 자의 요미(料米)를 올라간 자에게 더 주어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아내와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한다면 군정(軍情)의 원망이 반드시 오늘날처럼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 28년 9월 24일) [154]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임진년부터 외방의 공물을 작미(作米)로 정하니, 백성이 내는 미곡이 많아져서 1결(結)에 혹 7∼8두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뒤에 호조에서 작미(作米)를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2두씩을 내도록 하였으니, 민정(民情)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지경에 이름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해조(該曹)에서 처치한 곡절이 혹 미진한 바가 있고 또 중국 사신과 장수들의 지대(支待)가 번거로와 민간에 별복정(別卜定)305)[196] 함을 면할 수 없으며, 또 시장에서 무역하도록 독책(督責)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의논이 혹 그것을 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의심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차사(箚辭)도 앞으로 계속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것이니, 지금 곡식이 천할 때에 해사(該司)로 하여금 금년에 납입해야 할 작미(作米)의 원수량을 기한 안에 독납(督納)하도록 하고, 이미 거두어 들인 뒤에 계속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바야흐로 다시 의논하여 그 중에 변통할 것이 있으면 또한 뒤따라서 자세히 참작하여 구처해야 합니다. 훈련 도감에 소속되는 군사도 이미 액수(額數)를 정하였으니, 그 중에 금군(禁軍)으로 승진되어 금군의 요미(料米)로 6두를 받는 자는 더 지급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양곡이 넉넉하지 못하여 충급(充給)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인원을 감하여 양곡을 더 주자니 군인의 수효가 너무 적어 모양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호조와 협동해서 다시 상량(商量)하여 양곡을 계속 공급할 계책을 강구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무예는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으니 앞으로는 무사 및 포수·살수 등을 일체로 권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쪽 변경에 이미 근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니 우리의 비어하는 방도를 진실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호익(趙好益)은 비록 무장은 아니나 일찍이 사변의 초기에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으니 이는 이미 시험해 본 사람이므로 바꿀 필요가 없고, 정주(定州)의 전 목사 김수남(金壽男)은 이미 그대로 잉임(仍任)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밖에 요새를 지키고 형세를 이루는 등에 관한 일도 본도에 이문(移文)하여 거행하도록 신칙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관서에서 연습하는 군사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니 서울의 포수를 뽑아 보낼 필요가 없고, 해서에 정예군을 이미 뽑게 하였으니 행장을 꾸려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변경의 군량이 바닥이 났으므로 미리 첨방(添防)하기는 어렵습니다. 강화는 보장(保障)의 땅이어서 진실로 팔방을 공제(控制)하는 형세가 있으니 그 규모와 포치(布置)를 병조로 하여금 본사(本司)와 의논하여 사목(事目)을 마련해서 경기 관찰사에게 신칙하여 착실히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8년 9월 28일) [155] 신잡이 아뢰기를, "군사는 징발할 수 있으나 양식은 나올 곳이 없습니다. 만일 양식이 없으면 수만 명의 군사가 곧 흩어져 버릴 것이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본도에는 부민(富民)이 없고 다른 데에서는 얻을 만한 방법이 없습니다. 연전의 전세(田稅)는 콩이 1만여 석이고 쌀은 겨우 2천 석뿐이니, 이것으로는 중국군을 공궤하는 것도 부족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 작미(身貢作米) 및 내수사 노비의 신공을 모아서 쓸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삼번 군사(三番軍士)의 봉족(奉足)과 대량미(代糧米)를 각각 그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거두어들이게 하는데 거의 2만 2천여 석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각처에 저축해 두고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명년 봄에 무사하면 방수(防戍)하는 군인에게 보내줄 수 있으니 이것은 약간 넉넉합니다." 하고, (선조 28년 10월 17일) [156]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157] 공물을 일부도 대체가 불가능한 예산 규모인 1결당 2두를 책정해놓고 그마저도 군량미로 먼저 쓰려고 했었다.[197] 대국민사기극이 따로 없었다. [158]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조 38년 9월 28일) [159] 다만 조선이 고려보다 가난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실제로 조선초기 농업생산량 증가와 사회의 안정화로 인한 인구증가로 국가재정은 크게 증가했고 여러가지 폐단으로 골머리를 앓던 선조시기때도 혼란스러웠던 고려말기보다는 국가재정이 튼튼했다. [160] 출처 [161] 군사력역시 3~400명으로 조선군 1만을 대적할 수 있다는 전투종족여진족들이 만단위로 공격해온 니탕개의 난을 결과적으로 막아낼정도는 되었다. [162] 강대국 명나라가 건국 100년도 안되어서 토목의 변같은 굴욕을 겪은걸 생각하면 조선은 200년간 여러가지 폐단으로 군사력이 약해졌음에도 상당히 선전한것이다. [163] 즉 선조시기 조선은 국가의 잠재력은 우수하나 200년간 나라가 이어져오면서 발생한 폐단으로 조선 초기에 비해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던 상태였으나 니탕개의 난을 막아낸것에서 보이듯이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잠재력을 춘분히 발휘할 수 있었음에도 선조는 그러지 못했다. [164] 물론 병력이 장부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병력이 턱없이 부족한것등의 동시기 1억이 넘는 인구대국 명나라[198]도 마찬가지였던것에서 보이듯이 당시로서 단기간에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폐단들을 전부 해결하고 국가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건 불가능했겠지만 선조는 본인이 자신의 능력, 의지부족으로 자신의 국가 조선이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 못한것은 인정하지않은 주제에, 그저 자신의 나라 조선이 가난하고 약한 나라라고 투덜댄것이다. [165]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국가가 백성에게 중이 되는 것을 금하여, 그 도첩(度牒)이 없는 자는 모든 고을로 하여금 조사해 내서 공역(公役)에 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이 되는 것은 어찌 산간의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겨서이랴. 오로지 국가가 인정(人丁)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색하여 비록 한 집안에 서너명의 인정(人丁)이 있더라도 다 군적(軍籍)에 기록하므로 집안에는 남은 장정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생계의 이익이 적으므로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여름철에 더웁거나 비가 많이 와도 소민(小民)은 원망하고, 겨울철에 추워도 소민은 역시 원망하는 법이니, 백성을 다루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점을 미루어 평이한 길을 찾아내야 백성이 편안하다.’하였으니, 지금 백성으로 하여금 남은 장정을 가지고서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어 주자면 어떤 길이 있겠는가?" 하매, (연산 2년 1월 3일) [166]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199][200]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 [167] 선조(조선)/평가/부정적 평가/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168]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6백 결(結)로 하는 것은 너무 많다고 진달드렸는데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므로 삼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결수(結數)를 정하려고 하다가 못했는데,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와 민적이 모두 너무 많다고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한 뒤에 신들이 물러가 상의했었는데, 모두들 5백 결이라면 너무 많은 것은 아닌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에 하문하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 역시 대부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군(大君)과 공주는 5백 결로써 한도를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도를 정하되, 절수(折受)한 것 가운데 진결(陳結)이 있으면 모두 실결(實結)로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현종 3년 9월 5일) [169] 민적(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면세(免稅)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 진달한 바가 있었으나, 상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영원한 계책은 지속해 나갈 만한 방도를 생각해야 하니, 그 수치를 알맞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수치를 정하려 하였는데,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는 아뢰기를, "외방의 의논은 모두 5백 결은 많다고 합니다. 설령 4백 결로 제도를 정하더라도 직전(職田)보다 두 배나 되는 수치입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일이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백 결로 정해주더라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병판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하신 뒤 신들이 물러나와 상의하였는데, 모두 5백 결로 하면 그리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민적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다투는 것은 6백 결에 대해서이니, 5백으로 한정하면 그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겠습니다." 하였다. 정중과 만기(萬基)가 아뢰기를, "5백의 수치는 뭇 의논이 모두 많다고는 하지만 다투는 바가 그리 대단하지 않으니, 5백의 수치로 정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장령 송시철(宋時喆), 정언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신들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사의 뜻이 이러하니, 대군과 공주는 5백 결로 한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정하라. 그리고 떼어 준 것 가운데에 진결(陳結)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시기(時起)로 채워 주도록 하라." 하였다. (현종개수 3년 9월 5일) [170]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오늘 경연에서 신하들이 진달드린 것 가운데 긴요치 않은 말들이 많았습니다마는, 신은 그래도 다행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막힌 것이 없이 조용한 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참작해 정해야 한다는 논에 또한 일찍이 참여했었는데, 해가 넘도록 쟁집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고 있으니, 공의(公議)가 어디에 있고 여정(輿情)이 얼마나 격렬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통쾌하게 단안을 내려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제궁가가 5백 결(結)을 모두 소유할 수 없고, 또 만약 민전(民田)이 그 속에 섞여 들어가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간이 강력하게 쟁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처음에 6백 결로 한정했다가 지금 5백 결로 낮추어 정했는데, 그래도 외부의 의논이 많다고 하기 때문에, 다시 정하자는 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참작해서 한도를 정하는 것은 오직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는 4백 결로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정하라." 하였다. (현종 4년 4월 13일) [171]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여러 궁가의 면세를 다시 의논하여 참작해 정할 것과 여러 궁가와 각 아문 사대부들이 산전·해택에 주인이 없다고 일컬으며 전장(田庄)을 설치해서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들을 조사해 내어 혁파하자고 힘껏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궁가의 면세를 다시 참작해 정하는 일에 대해 신도 일찍이 의논에 참석하여 해가 지나도록 다투어 주장한 적이 있는데, 지리하기가 너무도 심했습니다. 만약 공론이 있는 바가 아니고 백성들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오늘 대신과 여러 재신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모두 들어왔으니, 결단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직전(職田)과 다른데 어떤 예에 따라 한계를 정한단 말인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당초 다시 정하자는 의논은 대체로 결수(結數)가 너무 많음으로 해서 나온 것이니, 지금 대신 및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해 개정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애초 면세전이 6백 결이던 것을 줄여 5백 결로 하였는데도 밖의 의논은 오히려 지나치게 많다고 합니다. 지금 참작하여 한계를 정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4백 30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30결은 그리 심하게 관계되지는 않으니 4백 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였고, 민적이 아뢰기를, "왕자와 옹주에게도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는 4백 결로,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헌부가 애초에는 궁가의 면세와 전장을 설치하는 두 가지 일을 혁파하자고 몇 달 동안 다투어 고집하다가, 면세를 참작해 정하자는 요청만 겨우 허락을 받고 다행으로 여겨 산전과 해택에 설치한 전장을 혁파하자는 의논까지 모두 정지했다. 헌납 송시철(宋時喆)이 앞서 올린 계사에서 어장(漁場)을 떼어 주는 폐단을 혁파하자는 일에 대해 거듭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단지 화전(火田)만 혁파하도록 하였다. (현종개수 4년 4월 13일) [172] 궁가(宮家) 면세전(免稅田)의 결수(結數)를 정하였다. 대군과 공주는 4백 결,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 만은 상이 특별히 명하여 수를 정하지 말고 옛날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현종 4년 9월 18일) [173] 궁가의 면세(免稅)에 있어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에 대한 결수(結數)를 이미 정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만은 종전대로 결수에 한정을 두지 말도록 특별히 명을 하였다. (현종개수 4년 9월 18일) [174] 여러 궁가(宮家)에서 민전을 침범하여 절수(折受)받는 폐단과 조신(朝臣)들이 장복(章服) 외에 입는 옷에 당물(唐物)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신명하였는데, 옥당의 상차를 따른 것이다. (현종 9년 4월 13일) [175]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쌀과 콩 각 1만 곡(斛)을 경기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휼하고, 남쪽에서 운반해 온 쌀 4천 곡으로 충청·황해 두 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구하며, 광주(廣州)는 수어사(守禦使) 김좌명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또 제궁가(諸宮家)가 절수(折受)받으면서 민전(民田)을 침범하는 폐단이 없도록 금하고, 조정 신하들의 장복(章服) 외에는 당물(唐物)을 쓰는 것을 금하도록 신명하였다. 이는 옥당의 차자 내용을 따른 것이다. (현종개수 9년 4월 13일) [176] 이달 13일 대신과 비국당상을 인견할 때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지난번 비국의 회계에 대해 재가내리신 것에 내용이 매우 준엄하여 그지 없이 송구하므로 차자를 올려 죄를 청하였는데 견책(譴責)은 입지 않고 아직도 직명(職名)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로 인하여 다시 중죄를 입더라도 구구한 생각을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재가내리신 내용을 보고, 또 경연(經筵)에서의 하교를 들은즉 성의(聖意)는 대체로 임자사목(壬子事目)은 오로지 궁관(宮官)의 지나침을 위한 것이요, 새로이 설치한 궁가(宮家)에 절수(折受)를 불허(不許)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하교하셨는데 이에는 임자년에 결정한 본 뜻을 모두 살피지 못하신 점이 있는 듯합니다. 대체로 조종조 이래, 본래 전토를 절수하는 일이 없었고 관전(官田) 및 몰수하여 속공(屬公)된 땅이 있는 경우에 내려주는 규정은 있었습니다. 선묘조의 임진란 뒤에 인민은 적어 땅이 거의 묵었고, 왕자·옹주는 계속하여 출합(出閤 : 분가 또는 출가)하였으나 내려줄만한 전토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 상신 한응인(韓應寅)이 당시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예빈시 소속 백관의 식사 및 왜인과 야인의 접대에 사용할 생선·소금·땔나무·탄 등의 물건이 나오는 땅을 나누어서 지급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변통을 잘 했다고 하였으나 뒤에는 절수가 그릇된 규례로 이루어 졌습니다. 현묘(顯廟) 초년에 이르러 5공주의 출합으로 절수가 점점 넓어지자 산골과 연해(沿海)의 백성은 생활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사(三司)에서 3년에 걸쳐 다투어 그 폐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당시 신도 삼사에 출입하면서 전하여 아뢰거나 입시하여 매번 상교(上敎)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절수가 비록 법제는 아니나 선조(先朝)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모두 혁파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다시 절수를 허용치 않는다면 근원(根源) 없는 폐단은 자연 단절이 될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전(大典)의 직전(職田)에 관한 법에 따라 그 결수(結數)를 추가하고 면세(免稅)의 한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널리 점유하는 폐단은 또다시 전과 같았습니다. 신해년(현종 12년 (1671)) 간에 8도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사망한 것이 마치 병화(兵火) 뒤와 같았으니 조정에서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간원(諫院)에서 절수에 대한 폐단을 역설하였고, 묘당에서 회계하여 8도에 물어본 뒤에 다시 복계하여 여러 궁가(宮家)에 내려 준 지 오래된 것 및 절수를 폐지하기 어려운 것은 헤아려서 그대로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시정하였습니다. 그 계사에 이르기를 '지금의 이 시정은 백성들의 병폐를 염려한데에서 나온 지극한 뜻이요, 전토도 잃고 백성도 잃어 유지하기 어려운 각 읍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폐지된 뒤에 다른 아문·여러 궁가 및 권세 있는 집에서 나누어 점유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시정한 본 뜻이 아닙니다. 금령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둔전(屯田)을 설치한다면 감사가 일일이 적발하여 안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폐지한 것은 본래 전토도 없고 백성도 없어 군·읍이 될 수 없음을 우려해서이며 또 계속 침범·점유하여 원망이 사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으니 어찌 미리 앞날의 새 궁가를 위하여 절수를 금하지 말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때의 문서가 아직도 있으니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정령(政令)이 결정된 뒤에 그대로 준수되지 못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임자년 이후 절수(折受)는 특히 궁가뿐이 아니라 각 아문도 많이 있습니다. 경신년(숙종 6년 (1680)) 환국(換局)註001)[201] 의 초두(初頭)에 물러났던 신하가 일시에 등용되었으므로 혁신될 회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대신이 첫째로 임자년(현종 13년 (1672)) 이후 절수한 것을 폐지하자 청하였고, 여러 도에 물어 묘당에서 아뢰어 청하여 모두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궁가의 경우는 대부분 특별 전교로 인하여 그대로 두었고 각 군문은 소임을 맡은 신하가 각자 그 의견을 고집하여 묘당의 논의도 성과가 없어 폐지된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 내지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각각 그 소임을 맡은 신하가 차례로 연석(筵席)에 드나들면서 모두 복구를 요청하므로 당초 묘당에서 조사하여 폐지한 것도 모두 헛일이 되었습니다. 조정의 명령이 일정하지 않아 나라 일이 정해지는 바가 없으니,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따르지 않음은 지금에 와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현재 인민의 번식은 임자년간에 비하여 또 여러 갑절이니 산골과 연해(沿海)의 자그마한 토지도 모두 개간하였으므로 실은 한 이랑도 비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임자사목(壬子事目)의 성교(聖敎)에 설령 '새 궁가에 절수를 금하지 말라'는 명문이 있다 하더라도 민전(民田)을 거저 빼앗는 외에는 결코 얻을 수 있는 땅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작년과 금년에 여러 도의 절수(折受)가 몇 곳이나 되는 지 알 수는 없으나 고을 백성의 격쟁(擊錚)과 도신의 장문(壯聞)과 대간의 논계로 말할 수 없이 시끄러웠습니다. 성명(聖明)도 백성들의 호소를 차마 어찌하지 못하여 모두 도로 지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갓 여러 도에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만을 빚었을 뿐, 궁가에도 이익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에게 하문하시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하늘이 종사(宗社)를 도와 왕손들에게 경사가 많아 본손·지손이 번창하여 새 궁가가 한 없이 생기는 경우, 조정에서 어느 곳의 어느 땅으로 무한한 전답의 절수를 할 수 있어서 민전이 빼앗기는 일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임자사목에 새 궁가에게 절수를 금하지 말라는 여부를 막론하고 결코 변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조종조의 직전(職田) 결수(結數)에 따라 그 조세로 내는 쌀을 법전에 실려 있는 바와 같이 나누어 지급해야 할 것이며 이를 시행하기 어렵다면 마땅히 선처할 방법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절수하는 규례에 있어서는 끝내 앞으로 계속 시행이 되어서는 불가합니다. 감히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번거롭게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후책(善後策)은 생각지 않고 절수하는 규정을 갑자기 폐지하면 새로이 설치한 궁가는 낭패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선처할 방법을 강구하게 한 뒤에 상의하여 품정(稟定)해서 변통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비변사등록 숙종 14년 1688년 04월 15일 (음)) [177] 간원이 아뢰기를, "충훈부의 어전(漁箭)과 염세(鹽稅)를 재생청(裁省廳)이 입계하여 감면토록 했는데, 이미 선유 어사(宣諭御史)가 지방으로 내려갈 때에 그 사실을 각도에 반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충훈부가 감히 자기들의 수요를 채우는 데 급급하여 다시 설치하기를 계청하자 정부가 그대로 따라 주었습니다. 이는 군국(軍國)에 관계되는 비용이 아닌데도, 성상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믿음을 잃게 하고 고질적인 폐단이 전일과 같게 하는 등 정령이 전도되었으니, 전에 계하한 대로 시행하소서. 그리고 궁가(宮家)와 권세가의 어염세(魚鹽稅)·해세(海稅)를 신설하기로 입안하여 백성에게 피해가 미치게 된 것도 제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염세는 무신년050)(註 050)(무신년 : 1608 광해군 즉위년.) 이후의 일이 아니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인조 1년 8월 10일) [178] 헌부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금법이 없이 백성들과 함께 이용하였으나, 근년 이래 내수사(內需司)와 여러 궁가(宮家) 및 사대부들이 서로 앞다투어 불법으로 점유하는가 하면, 심지어 주인이 있는 전지를 공공연히 빼앗기까지 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시장(柴場)·제언(堤堰)·해택(海澤)·어전(漁箭) 중 입안 절수(立案折受)하는 것은 일체 금단하여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을 개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산림과 천택을 백성과 함께 이용하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 시행해야 될 일이다. 그러나 선왕 때 내려준 곳만은 금혁(禁革)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인조 1년 윤10월 28일) [179] 상이 주강에 문정전에서 《대학》을 강하였다. 검토관 강석기(姜碩期)가 아뢰기를, "봉산(鳳山)·재령(載寧) 등의 지방에 경작할 만한 해택(海澤)이 있었으므로 선조(宣祖) 때에 둔전 판관(屯田判官)을 보내 제방을 쌓고 농사를 지어 군량에 보탬이 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군자감에 소속시켰다가 계사년081)(註 081)(계사년 : 1593 선조 26년.) 간에 훈련 도감으로 옮겼고 그 뒤에 영창 대군에게 사급(賜給)하였는데, 폐조 때에 빼앗아 김 상궁(金尙宮)에게 주었으므로 정몽필(鄭夢弼)·박응남(朴應男)의 무리가 오가며 폐단을 일으켜 하나의 범죄자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응남이 본도 기인(其人)의 가포(價布)를 방납(防納)한다는 이유로 온 도의 백성을 동원하여 널리 제방을 쌓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는 정상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반정 후에 감사 이명(李溟)이 백성들이 일제히 분노를 터뜨리며 정소(呈訴)하자 응남을 잡아 가두고 효시(梟示)하려 하였으나, 그 때에 이른바 종사청(從事廳)에서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서울에 올려 보내게 하는 바람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으므로 온 도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울분에 차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그 땅이 도로 관향사(管餉使)에게 소속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영창 대군이 사급 받은 곳은 대비전(大妃殿)에서 사람을 보내어 관장하게 하고 박응남이 제방을 쌓은 곳은 달성위(達城尉)가 강제로 점유하고 있다 하니, 궁방(宮房)에서 보낸 사람이 폐단을 일으켜 백성이 실망하는 것이 필시 다시 예전과 같게 될 것입니다. 지금 도로 관향사에게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니, 원하옵건대 상께서는 자전에게 진달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달성위가 점유한 것도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강석기가 아뢰기를, "이것은 입안(立案)082)(註 082)(입안(立案) : 관에서 인가한 문서.) 을 내세워 핑계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응남이 이미 백성의 힘을 사용하여 제방을 쌓았으니, 어찌 사가(私家)가 점유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인조 1년 12월 7일) [180]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각 아문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산택(山澤)의 이익을 독점하여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고 있으니, 통렬히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나라의 어염(魚塩) 생산은 세상 어느 나라도 미칠 수가 없는데 한 해에 거둬들이는 세금은 1백 곡(斛)도 안 되어 매일 상공(上供)하는 것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고 있으니, 감히 부강하게 될 밑천으로 취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지난번 탁지(度支)를 맡은 신하가 차자를 올린 것은, 경 아문(京衙門)과 여러 궁가와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 소속된 것들로 하여금 반드시 표(標)를 받아 해조에 납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폐단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할 만한 거조는 못된다 하더라도 약간 변통을 가하여 목전의 위급만이라도 풀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비(聖批)가 여러 궁가에 소속된 것은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하교하셨으니, 어찌 무사(無私)해야 되는 왕자(王者)의 도리를 손상시키는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절수(折受)를 한 것이 비록 한때의 사은(私恩)에 관계된 것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심한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조종조의 본뜻이라 하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내어 국가에 환속시킴으로써 나라를 경영하는 비용을 돕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궁가에 소속된 선척(船隻)이나 어염(魚塩)은 선조(先祖) 때에 하사한 것들이다. 어찌 지금에 와서 도로 빼앗을 수가 있겠는가. 논하는 것이 지나치다. 다시는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인조 3년 11월 24일) [181] 이에 앞서 양사(兩司)가 어염(魚鹽)의 일에 대해 극력 간쟁하였는데 해조(該曹)에 명하여 사처(査處)하게 하였다. 호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지금 양사가 논한 것은 폐단을 제거하여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대정(大政)인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척(船隻)·어전(漁箭)·염분(鹽盆)은 전부터 사여(賜與)한 잘못된 규례가 있었습니다만, 큰 바다를 왕래하는 어선(漁船)들은 정박하거나 출입하는 곳을 종잡을 수 없고 게다가 명호(名號)도 없는데, 어떻게 절급(折給)하고 입안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근래에 시작된 일로 그 유폐(流弊)가 심지어는 왕래하는 어선을 일일이 세어 모두 세금을 받기까지 합니다. 지금 이 폐단을 고치지 않으면 산림이나 천택에 고기잡고 나무할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지금 사처(査處)하라는 명을 받고 본조의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보았으나 특별히 해변의 염장(鹽場)을 절급한 치부(置簿)가 없었으므로 사출(査出)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에 소속된 선척·염분·어전은 아울러 전일에 계하한 단자(單子)와 사여한 공문(公文)에 의해 다시 명백하게 절급하여 세금을 받게 하소서. 그리고 대간의 계사에 이른바 명파 척로(溟波斥鹵)는 절급했다고도 하고 입안했다고도 하지만 아울러 혁파하고 수세(收稅)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명파 척로라도 선조(先朝) 때 사여한 곳이니 혁파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 4년 2월 11일) [182] 헌부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들이 외람된 짓을 하는 폐단을 아직 개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생에 해를 끼치고 국법을 어기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염(魚鹽)이 생산되는 명해 척로(溟海斥鹵)의 지역을 선조(先朝)에서 일시 사여(賜與)했다는 것으로 자기가 영원히 점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불가한 것이 명백합니다. 대간이 논계하고 해조가 사계(査啓)한 것은 당금의 폐단을 바로잡는 제일의 급무인 것인데 성비(聖批)에 사급(賜給)한 곳이니 혁파하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따라서 전일 사처(査處)하라는 명은 마침내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호령을 시행하는 데 있어 실상이 없으면 폐정(弊政)만 더해질 뿐입니다. 산림(山林)·천택(川澤)과 대야(大野)·장주(長洲)가 어찌 임금이 사사로이 사여할 수 있는 물건이고 또 어찌 궁가에서 검거할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이는 전사(前史)에도 없었던 일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해조의 공사(公事)대로 시행하고 혁파하지 말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세금을 면제하고 복호(復戶)시키는 일은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인데 말류(末流)에 와서 잘못되어 그 폐단이 만연되었습니다. 궁가에서 법에 어긋나게 점거하는 것이 이제 와서 극심하여지고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일일이 사핵(査覈)하여 법전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어염(魚鹽)에 대한 일을 간원이 또한 논하니, 답하기를, "여러 궁가에 소속된 어염과 해택(海澤)은 비록 외람되기는 하지만 선조(先朝) 때 사여한 땅이므로 이제 와서 환수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일이다. 전결(田結)에 대한 면세(免稅)도 선조 때의 일이라서 결코 사감(査減)하기가 어렵다. 아울러 다시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인조 4년 2월 13일) [183]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신들이 논한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의 해택(海澤)·어염(魚鹽)에 대한 면세(免稅) 등 건에 관하여 할 말을 다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막막하게 윤허를 하지 않으시니, 이는 신들의 성의가 부족한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이 일이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그만두어도 좋겠으나, 이 일에 인심의 이합(離合)이 달려 있고 국가의 안위가 관계되기 때문에, 또 한번 목소리를 같이 하여 호소함으로써 상의 일대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이라 하여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신하로서도 무작정 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조에서 혹시 일시적으로 누구에게 하사한 오은(誤恩)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그것이 비도(非道)임을 알면서 어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해택(海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땔나무를 하는 산림까지도 모두 입안(立案)하여 금하고 있어 백성들이 그 속에서는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칠 수 없게 하고 있는데, 이 폐단이 혁파되지 않는다면 후일에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어나게 되어 백성 모두 흩어져 결국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 산 속의 사원(寺院)들까지도 각 궁가의 원당(願堂)이라는 구실로 많은 위전(位田)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면세까지 받고 있고, 각 아문도 면세의 전답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야말로 매우 놀라운 일로서 단 하루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문제들입니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해택과 어세 그리고 전결(田結)에 대한 면세 규정을 일체 혁파하도록 명하시고, 아울러 땔나무를 하는 산림을 점거하고 있는 경우와 사원의 면세받고 있는 위전에 대하여도 해당 관아에서 철저히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의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므로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이미 남김없이 밝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만두지 않고 이렇게 집요하게 논하고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 같다." 하였다. 세 차례 아뢰자 각 아문의 면세전만을 조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인조 4년 3월 16일) [184]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집의 엄성(嚴惺), 장령 강대진(姜大進), 지평 윤전(尹烇)·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부의 하인이 공주의 집에 가서 소란을 피웠다는 하교를 보니 경악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근래 여러 궁가(宮家)와 사대부가에서 불법으로 시장(柴場)을 점거하고 입안(立案)한 것이라 칭하면서, 경성 수십 리에 꼴이나 나무를 하는 자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고질적인 폐단의 답습으로 민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지난번 본부에서는 여러 읍에 공문을 보내어 적발해서 보고하도록 했었습니다. 그 결과 경기의 읍에서 먼저 약간의 궁가에 입안된 곳이 있다는 보고를 해왔으므로, 보고를 받고서 그대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엊그제 모여앉아 궁가의 종을 불러다가 그 곡절을 물어보고 이어 속히 파하라는 뜻으로 약간 경계를 가했을 뿐입니다. 이는 법부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지만, 불러올 적에 거침없이 들어가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는지는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비록 소란을 피운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성상께서 하교하기까지 하셨는데, 이러한 실상을 신들에게 알렸다면 나졸 하나 징치하기가 무엇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잗다란 말을 어찌하여 구중에 계신 성상에게까지 아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궐의 위엄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이로부터 더욱 조장될까 걱정됩니다. 힘없는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의 폐단을 앞으로는 금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자신도 모르게 한심해집니다. 신들이 아랫사람을 제대로 검속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이 있게 하였으니, 파척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그리고 선조(先朝) 때 하사한 땅을 곡직을 구분치 않고 억지로 혁파하려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하였다. (인조 4년 12월 13일) [185] 제궁가(諸宮家)와 훈신의 사패지지(賜牌之地)를 면세하는 것과 절수(折受)를 입안하는 등의 일이 크게 불어나서, 간혹 백성의 전답을 광범하게 차지하고 죄를 짓고 도망한 자를 불러 모으는 일도 있으며 심지어는 노전(蘆田), 어전(魚箭), 염분(塩盆), 해택(海澤)의 이익까지도 함부로 점령하고 있어, 백성들이 손을 놀릴 곳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원망과 화를 불렀던 혼조(昏朝)의 일을 본받고 있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임금은 이미 감손(減損)한 바가 있는데, 훈척 대신들이 자청하여 공가(公家)에 보충하도록 건의한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임금의 뜻을 본받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각 아문의 저축이 걸핏하면 만으로 계산되는데 둔전, 어전, 염분을 강제로 점거한 폐단이 궁가와 똑같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스스로 사사로이 하여 무익한 소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계문하고 모두 혁파하여 그 수입으로 군수(軍需)를 보충케 하소서....답하기를, "제궁(諸宮)에 소속된 것인즉 선왕조(先王朝)에 하사하신 것이니, 차마 갑자기 관부(官府)에 떼어 붙일 수 없다. 내관과 나인은, 사령이 부족하기는 하나 헤아려 감손하겠다. 땔나무는, 대내(大內)의 아궁이 둘을 감하겠다." 하였다. 대신이 이어 각처에서 보내는 땔나무 값을 감하도록 주청하니, 감해진 무명이 9백 36 필이었다. (인조 14년 8월 1일) [186] 임진왜란 이후 절수 관행은 더욱 확대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의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왕자와 공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변통으로 떼 주었는데, 이를 절수로 표현하였다. 이후 이를 선례로 하여 왕실과 왕족에 대한 궁방전 절수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궁방전은 일명 궁장토(宮庄土)·사궁장토(司宮庄土)라고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후비·왕자대군·왕자군·공주·옹주 등의 궁방에서 소유하거나 또는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토지이다. 이는 궁방의 소요 경비와 그들이 죽은 뒤 제사를 받드는 명목으로 지급되었다. 절수(折受)/개설 [187] 임진왜란 이후 각 궁방은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주인 없는 진황지와 한광지를 입안절수(立案折受)의 방식으로 불하를 받아 개간하였다. 즉, 정부가 각 궁방의 청원을 받아들여 주인 없는 토지를 떼 주어 개간하여 소유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절수는 궁방에 토지소유권을 부여한 것이지만, 정부가 수조지(收租地)를 궁방에 할급하여 절수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정부가 가졌던 일반 민전의 수조권을 궁방에 양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조선후기의 궁방전이 이른바 무토면세전이었다. 궁방전 절수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민전 침탈 등 여러 문제점이 생겨났고, 정부 재정에도 점차 부담을 주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궁방전을 혁파하지는 못하고 더 이상 절수하지 않고 축소하는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그 결과가 『속대전』의 결수 제한으로 나타났다. 절수(折受)/내용 및 특징 [188]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