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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르망 24시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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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55 르망 24 참사.jpg
1955 Le Mans disaster

1. 개요2. 상세
2.1. 사고 당시 상황2.2. 사고 원인
3. 사고 이후4. 기타5. 유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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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5년 6월 11일 열린 르망 24시에서 발생한 희대의 대참사. 메르세데스-벤츠의 차량 300 SLR이 관중석을 덮쳐 쓸고 지나가며 드라이버는 물론이고 수많은 관중들이 사망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80여 명이 사망하고, 12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가장 많은 사상자를 주장하는 자료에서는 84명 사망에 178명 중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더욱 많을 수 있다고 한다.

본 문서의 제목은 '1955년 르망 24시 참사'이나, 대외적으로는 그냥 르망 참사라는 용어로 더 널리 통할 정도로 르망 24시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분류되며, 르망 24시를 넘어 모터스포츠 경기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고다. 당시든 지금이든 단일 레이스 대회로서는 세계 최고의 규모와 명성을 가진 대회인 르망 24시에서 발생한 사고이고, 이에 더불어 드라이버, 엔지니어, 관객, 마셜 등을 불문하고, 그리고 기술적 문제와 인식에 관한 문제를 불문하고 모터스포츠가 안전에 관해서는 모든 방면에서 열악했던 시절에 발생한 대형 참사인 만큼, 모터스포츠의 안전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2. 상세

르망 24시는 1923년부터 지금까지 프랑스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리는 유서 깊은 대회다.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양산 스포츠카를 개조한 레이스카부터, 제조사 차원에서 레이스 하나만을 보고 제작한 본격적인 레이스카들[1]까지 다양한 차량들이 초고속 서킷인 라 사르트 서킷의 직선 주로를 최고속으로 시원하게 24시간 동안 논스탑으로 내달리는, 내구 레이스의 끝판왕 같은 명망을 가진 대회이다.

당시까지의 기준으로 역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1950년대 르망 24시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대회 중 하나였던 1955년의 르망 24시에는 재규어 포르쉐, 페라리, 애스턴 마틴, 마세라티, 메르세데스-벤츠 등의 수많은 네임드급 차량 회사들과 60명의 선수들이 참여해 누가 이길지 추측할 수 없는 긴박한 레이스가 예고됐었다. 1951, 1953년 우승 제조사였던 재규어와 디펜딩 챔피언 페라리 두 제조사가 전통 강호로 평가받으며 우승을 놓고 싸우는 구도였고, 애스턴 마틴과 포르쉐 또한 경쟁력이 높은 다크호스로 점쳐졌다.

그러나 1955년에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3년 전의 우승자 메르세데스-벤츠였다. 포뮬러 1에 집중하기 위해 내구 레이스를 잠시 떠났다가, F1 레이스카의 설계를 토대로 마그네슘을 이용한 초경량 차체 설계를 적용하여 최신 기술과 노하우들로 무장한 '300 SLR'[2]로 야심차게 복귀하는 주요 무대가 바로 1955 르망 24시였기 때문. 심지어 드라이버 라인업으로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 스털링 모스, 카를 클링 등이 섭외된 한편 재규어의 마이크 호손과 아이버 뷰업, 페라리의 에우제니오 카스텔로티까지 전설적인 드라이버들이 총동원되어, 그야말로 '챔피언들의 전쟁터'가 될 곳이 바로 1955년의 르망 24시였다.

메르세데스-벤츠 소속으로는 피에르 르벡(Pierre Levegh, 1905~1955)[3] 후안 마누엘 판지오 등이 참여했었다. 당시 피에르는 가장 인기있던 선수 중 한명으로, 르망 24시 1인 주행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울 뻔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4][5]

2.1. 사고 당시 상황

경주가 시작된지 약 2시간 20분 후, 메르세데스의 판지오와 모스 조, 재규어의 호손과 뷰업 조가 선두를 놓고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재규어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호손이 리드를 차지한 뒤 르벡을 한 바퀴 따라잡아 백마커로 만들고, 메인 스트레이트에 돌입하기 직전 구간에서 오른쪽으로 호손을 비켜 준 오스틴 힐리 소속의 랜스 매클린(Lance Macklin, 1919~2002)을 한 바퀴 따라잡은 직후, 피트로 들어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이미 오른쪽으로 비켜 줘서 호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호손의 왼쪽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수밖에 없던 매클린은 호손을 피하려 급제동을 걸면서 핸들을 왼쪽으로 급하게 돌렸고, 이 과정에서 매클린의 오스틴 힐리가 통제 불능에 빠져 뒤에 따라오던 르벡의 진로를 막아 버렸다.

르벡은 급히 뒤에 오던 판지오에게 신호를 보내 판지오에게 충돌을 경고하고, 약 220 km/h의 속력으로 힐리와 충돌하며 힐리를 타고 올라 공중으로 뒤집힌 채 떠올랐다. 300 SLR은 그대로 관중석으로 날아갔고 르벡은 자동차에서 튕겨져 나와 머리를 부딪혀 즉사했다.[6]

그리고 자동차는 그대로 관중들을 초고속으로 쓸고 지나갔다. SLR은 관중석에서 폭발하며 나뒹굴었고, 관중들에게 엔진과 타이어를 비롯한 수많은 자동차 부품들이 잔뜩 쏟아져 관중 8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1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르벡의 뒤에서 달려오던 판지오는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던 오스틴 힐리와의 충돌을 정말 간신히 피했다. 르벡으로부터 후방에서 강한 물리적 충격을 당한 매클린은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는데, 이때 판지오와 충돌할 뻔함은 물론 피트에서 주유 중이던 또 다른 메르세데스와 재규어를 가격할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2차 사고는 면했다.

[사고 당시 사진(시신 사진 포함, 충격주의)]
|| 파일:1955 르망 24시 사고.jpg ||
사고로 전복된 차량과 피에르 르벡의 시신
파일:1955 르망 24시 사고 직후.jpg
사고 직후의 메인 스트레이트

당시 사고는 방송에 생중계됐다.

이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지만 경기 운영진들은 중단을 하면 관중들이 혼란을 일으키면서 구급차의 진입을 방해할수 있다면서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7][8] 경기가 중단되지 않아 경기장 정 반대편의 사람들은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사고가 발생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주행하던 선수들의 대부분도 당시 사고가 났단 사실만 알았고, 사고의 규모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몰랐다. 남은 메르세데스-벤츠 차량은 일단 레이스를 계속해서 이어갔으나, 사고의 세부적인 소식을 전해 들은 뒤 사고의 규모에 충격을 받은 드라이버 존 피치[9]와 메르세데스-벤츠 팀의 레이싱 매니저 알프레트 노이바우어[10]는 레이스의 결과와 상관없이 메르세데스-벤츠의 명성에 있어서 큰 손실이 되리라고 짐작했고, 이에 경기 기권을 주장한 결과 밤에 이르러 결국 메르세데스 팀은 경기를 기권하게 된다.

관중석에선 수많은 시신들과 부상자들이 나뒹굴었고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차량이 관중들을 위협했다. 의료진들이 급히 달려갔으나, 의료진 25명으로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300 SLR의 차체는 불이 꺼지기 전까지 불똥을 튀면서 주변을 위협하다 겨우 불이 사그라들었다.

한편 마이크 호손과 아이버 뷰업 조는 307랩을 소화하며 1위로 피니시. 영국 차량과 영국 팀, 영국 드라이버의 조합으로서 값진 우승을 이룩해냈다. 이에 기뻐한 호손은 포디움에서 샴페인으로 축배를 벌이기도 했는데, 프랑스 언론은 이를 돌려까기도 했다.

2.2. 사고 원인

우선 사고 자체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마이크 호손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경합하던 도중 일어난 호손과 랜스 매클린 사이의 소통 미스였다. 사고에 휘말린 네 대의 자동차는 사고 직전의 시점에서 서로 매우 근접해 있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판지오에게 신경을 집중하던 호손이 피트인을 시도하면서 차량을 급격히 제동시켰고, 호손이 자신을 추월한 직후 급제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맥클린이 호손을 피하느라 통제 불능에 빠질 정도로 또 한 번 급격하게 움직이면서 뒤따르던 르벡과 판지오의 메르세데스들이 제대로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인식의 부재에서 오는 인프라적 문제에 악운까지 겹친 명백한 인재이다. 우선, 메르세데스-벤츠가 야심차게 개발한 300 SLR의 마그네슘 차체가 문제였다. 카본 파이버 등의 신소재가 개발되기 한참 전이었던 1950년대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경량 소재가 드물었는데, 얼마 없던 초경량 소재 중 하나가 마그네슘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마그네슘은 굉장히 가벼워 경량화 소재로서의 가치가 높지만, 한 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11] 그래서 현재는 자동차 차체에 마그네슘을 그냥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300 SLR은 차체에 덕지덕지 발라져 버렸으니... 심지어 불도 서서히 붙은 게 아니라 바닥에 충돌하며 연료 탱크가 깨져 한순간에 폭발하면서 붙은 것이어서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빠르게 진화되었을 불이 소화기를 들이부어도 꺼지지 않았고 한참을 타닥거리며 폭발하듯이 불타다가 겨우 꺼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서킷의 설계 그 자체이다. 맨 위에서 설명했듯이 르망 24시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대회여서 서킷도 그 시기에 생겨났는데, 차량들의 평균 속력이 100 km/h를 겨우 넘던 1920년대에 비해 평균 속력은 200 km/h, 최고 속력은 300 km/h를 바라보던 1950년대의 매우 빨라진 차량들에 비해, 서킷의 안전 분야에서는 1920년대 시절에서 거의 하나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서킷의 관중석 위치는 1920년대의 느린 차량들에 맞추어 설계되어 있었고, 당연히 본래 갖추어야 할 수준보다 서킷 트랙과 관중석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트랙과 관중석 사이에는 간단한 펜스조차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관중이 넘쳐나는 사르트 서킷에서도 그 관객들의 대다수가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메인 스트레이트 구간이기에[12] 안전에 특히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 여기에 심지어 메인 스트레이트 직전에 우측으로 꺾이는 킹크[13]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쪽에서 차가 날아가기라도 하면 관중석에 꽂히기 딱 좋은 구조였고, 실제로 이 킹크에서 메인 스트레이트로 진입하는 구간 즈음에서 사고가 발생하면서 진짜로 차량이 관중석으로 날아가 관중들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피트 또한 상당히 원시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서킷들이 피트와 트랙 사이에 방벽을 세워 두고 피트로 향하는 별도의 진입구 및 합류 지점을 만들어 놓는 것에 반해, 사르트 서킷의 피트와 트랙 사이에는 경계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까 '피트 레인'이라는 것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피트 자체가 레이스 구간의 일부분이었던 것. 그러니 피트에 들어가려면 그냥 메인 스트레이트 한복판에서 차를 오른쪽으로 꺾어서 피트로 진입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설계대로라면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오고, 최근에는 어디까지 얼마나 속도를 줄이고 어디부터 가속할 수 있는지까지 다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어 있지만 클래식 르망식 피트 구조로는 이런 게 하나도 없어 드라이버로서는 내 앞의 차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

이러한 피트 구조를 유지한 이유는 르망 24시는 '르망 스타트'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경기 스타트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드라이버가 차에 탄 채로 시작하는 게 아닌 차량의 맞은편에 서서 대기하다가 준비 땅 하면 차량으로 우다다 뛰어가서 탑승한 다음에 시동 걸고 출발하는(...) 방식이었다.[14] 이것은 르망 24시만의 독창적인 아이덴티티 중 하나였고 일종의 헤리티지로 자리잡았으나, 어쨌든 피트 구역이 도로와 딱 붙어 있으니 위험한 구조임엔 틀림이 없었다. 물론 이런 위험한 구조를 직접 경험해야 하는 드라이버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후방을 잘 살핀 다음에 수신호를 주기도 하면서 서서히 핸들을 틀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겠지만, 사고 배경은 호손이 피트로 급하게 진입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피트 구조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정리하자면 직접적인 원인은 드라이버간의 불협화음과 메르세데스-벤츠의 차량 소재 선택에 있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서킷의 안전 구조가 시대의 발전을 전혀 쫓아가지 못했던 것에 있다. 이전부터 이러한 결함을 우려하여 목소리를 내던 관계자들이 있었음에도 안일하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3. 사고 이후

다행히도 사고 이후 사르트 서킷 자체의 대대적인 개수가 있었는데, 스트레이트 직전에 있는 킹크를 없애고 메인 스트레이트의 폭을 넓히는 등 메인 스트레이트 부근의 레이아웃을 더욱 안전하게 가다듬었다. 그러나 트랙과 분리되지 않은 피트는 유지되었고, 15년 정도가 지나서야 제대로 된 피트 레인이 생겼다.

기업으로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단연 메르세데스-벤츠였다. 메르세데스는 화재가 쉽게 꺼지지 않은 원인이 부정한 연료를 사용해서 그렇다는 의심도 받았으나 그것이 아니고 순전히 마그네슘 차체에 그 원인이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시즌의 남은 2개 경기에서 메르세데스-벤츠가 우승을 했지만, 이후 르망 24시에 참여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 모터스포츠 자체에 아예 참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5] 메르세데스는 30년이 지난 1985년이 되어서야 모터스포츠에 공식적으로 다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면서 이 30년은 메르세데스-벤츠 최대의 공백기가 되었다. 르망에는 1988년에 엔진 공급사로서 복귀했으며, 메르세데스-벤츠 워크스 팀은 1998년 CLK-LM으로 돌아왔다.[16]

그러나 1999년 새로 야심차게 개발한 CLR이 불안정한 설계로 말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사고를 세 번씩이나 겪음으로써 # 다시 한 번 모든 차량들이 기권한 뒤[17] 르망에서 전면 철수했다. 결국 메르세데스-AMG는 그 해를 끝으로 르망 24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GT3 클래스의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 출전이 허가되자 커스터머 팀들이 참전하는 식으로 르망의 땅을 다시금 밟아 볼 기회를 쥐게 되었지만 포드와 맥라렌에게 밀려 밟지 못하고 있다.[18]

한편 이후의 모터스포츠 전반적인 사정을 요약하자면, 이 사고 이후 얼마간 모터스포츠계가 전부 멈췄다고 말할 수 있다. 호손과 존 피치 등 사고 당시에 사고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았거나 짐작했던 현장의 이들 중에서는 거의 모두가 멘탈 붕괴 상태에 빠졌고, 사고에 충격을 받은 여러 관계자들이 르망에 다시 돌아오지 않거나 아예 은퇴해 버렸으며, 특히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당시 전후 모터스포츠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메르세데스-벤츠가 모터스포츠 활동을 갑작스럽게 전면 중지해 메르세데스라는 거물 제조사가 빠져 버리면서 약간의 전반적인 기술적 퇴보도 불러오게 되었다.

이러한 충격은 대중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모터스포츠의 안전 문제가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진지하고 거대한 화두로 떠올랐다. 물론 당시 사람들도 모터스포츠가 위험하다는 것쯤이야 알았고 안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대의 대중적인 인식은 가장 빠른 스포츠가 어찌 완전히 안전할 수가 있겠냐는 것이었기에 그동안은 잘 부각되지 않다가 이제는 정말로 안전에 큰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는 의견이 수면 위로 명확히 떠오르게 된 것이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스페인, 멕시코 등의 나라가 1955년에 잠정적으로 모터 레이싱을 전면 금지했고 이에 따라 WSC 등의 시리즈들과 몇몇 메이저 레이스들도 한동안 경기를 못 하게 되었다. 특히 스위스의 경우에는 여러 이유가 겹쳐 모터스포츠 금지령을 21세기에 와서까지 풀지 않고 2015년에 이르러서야 전기차 레이스인 포뮬러 E만 허용하는 식으로 정책을 일부 완화했다. 스위스의 드라이버와 경기 진행 실무진 등의 인사들은 대부분 인근의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지금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았던 1950년대임에도 이러한 여러 나라에서 이러한 조치를 즉시 취했다는 것이 이 사고의 영향력을 알려준다.

워낙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보니, 마이크 호손과 랜스 매클리 사이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의 원인에 대해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메르세데스와 재규어 측에서 사실상 기업 차원에서 공식적인 발언을 할 정도로 굉장한 설전이 있었다. 심지어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조사를 할 정도였다. 드라이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갈렸다고 전해진다. 메르세데스와 매클리는 호손이 급격한 기동을 보여 대처할 수 없게 했다고 지적했고, 이것이 거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어 호손이 욕을 많이 먹었으나 재규어 및 그 관계자 측은 오히려 호손의 기동에 대처하지 못한 매클리와 르벡의 드라이빙에 문제가 있었다며 과감히 반박하기도 했다.

호손 또한 1958년에 'Challenge Me The Race' 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내면서 사고에 자신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렸다.[19] 이에 매클린은 호손이 자기에게 대참사의 원인이 있다 말하는게 아니냐며 명예훼손죄로 고발했으나, 호손은 1959년 영국의 간선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고발된 사람이 사망했기에 재판은 이뤄지지 않았다. 후에 이뤄진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에게 전적인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 '레이싱 인시던트'[20]로서 분류되며, 이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떡밥으로 남아 있지만 여러 부분이 절묘하게 엇갈려서 생긴 불운의 사고라고 보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타당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누가 차를 잘못 몰았느냐가 아니기도 하니 말이다.

르벡의 동료 존 피치는 자신의 일생을 자동차 안전 강화에 헌신했다. 피치는 '피치 베리어(Fitch barrier)' #라는, 충격 흡수용 모래통을 개발했고, 이는 더 나아가 고속도로에서 자주 보이는 충돌 쿠션으로 발전했다. 또 트럭과 버스의 보조 브레이크, 자동차 무수 냉각 시스템, 셀프 리벨링 서스펜션 등을 개발했다.

사르트의 르망 24시 경기장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설치되어 있다. #

4. 기타


참사 당시의 상황을 다룬 짧은 애니메이션이 있다. 실제 사고는 해가 지지 않았을 때 일어났으나, 참상을 표현하기 위해 밤으로 바꾸었다. 주인공은 같은 차를 몰았던 존 피치이며, 해당 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다.

5. 유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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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차량들을 보통 '프로토타입'이라고 부른다. 21세기를 주름잡은 LMP 클래스 또한 '르망 프로토타입'의 이니셜. [2] 즉 300 SLR은 이름만 봐서는 300 SL의 레이싱 버전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300 SL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차량은 아니다. 흔히 알려진 300 SL이 1952년 우승 차량인 경주용 W194 300 SL를 양산화시킨 것이고 1955년의 300 SLR은 당시 F1 경주차량이었던 W196의 설계에 기반한, 겉모습만 비슷하고 전혀 다른 차량이었다. [3] 자신의 삼촌을 기리기 위한 가명으로, 본명은 피에르 뷜린(Pierre Bouillin)이다. 대개 모터스포츠 경기에는 가명으로도 참가할 수 있는데, 관련 절차가 더 널널했던 옛날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4] 1952년 대회 당시 23시간 째, 그러니까 경기를 한 시간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엔진 문제로 리타이어했는데, 리타이어 시점에서 순위는 1위였고 2위와 4바퀴 차이였다. 24시간을 통으로 혼자서 주행할 수 있는 체력과 깡을 가진 용자들이 많진 않았지만, 어쨌든 규정상으로 금지된 일이 아니었고 팀 단위의 엔트리가 아닌 개인 참가도 많았거니와 당시까지 드라이버들 사이에서 지금은 불법인 각성제가 상당히 흔했기에 가능했던 일. 덕분에 밀레 밀리아나 타르가 플로리오 같은 10시간 내구 레이스에서도 드라이버 교대 없이 혼자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드라이버의 안전을 생각하여 르망 24시를 비롯한 대부분의 24시 장거리 내구 레이스에서는 규정상 차 한 대 당 3인 체제와 1인당 최대 주행 시간을 강제함으로써 1인 주행은 절대로 불가능해졌다. [5] 여담으로 르망 24시를 완주한 사람은 단 한 명뿐으로, 1950년에 16년된 벤틀리로 236랩(약 2,000 mi, 약 3219 km)을 주파하여 전체 순위에서 8위를 기록한 에디 홀(Eddie Hall)이 유일하다. [6] 1960년대까지의 모터스포츠에는 규정상으로 안전벨트가 의무화되어 있지 않았다. 안전벨트가 있으면 화재가 발생했을 때 쉽게 빠져나갈 수 없고, 안전벨트 때문에 불타는 차 안에 갇힐 바에야 차라리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게 낫다는(...) 인식이 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는 주최 측이나 팀 측보다도 드라이버들이 주장한 내용인데, 정말로 벨트가 없는 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방염복은커녕 제대로 된 헬멧이 상용화된 지도 얼마 안 됐던 때라 드라이버들은 그냥 티 한 쪼가리나 입고 달렸거니와, 그 당시 차들은 내구성이 유리 수준이라 툭하면 불이 붙기도 했고 머리를 보호해 주는 롤 후프가 없어 가득이나 전복 사고에 머리가 취약한데, 안전벨트까지 있으면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져 목이 부러질 위험이 높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본격적인 롤 후프와 안전벨트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였고, 안전벨트가 의무화된 것은 1970년대였다. [7] 2000년대까지만 해도 F1에서조차 사고가 난 차가 있으면 트랙 런오프에 적당히 치워 놓고 그냥 경기를 속행했을 정도로 경기 중단 자체를 잘 안 하는 게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옛날임에도, 주최 측에서 경기를 중지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해명까지 할 정도로 사고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이다. 사고 차량들이 트랙을 전부 막아 버리거나 폭풍우가 쏟아지는 등의 '어떤 수를 써도 레이스를 정말로 더 못할 만한 상황'이 아니면 경기 중지는 거의 볼 수 없는 결정이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1970년대에 F1의 한 논챔피언십 레이스에서는 눈이 오는데도 레이스를 진행시켰던 적도 있다(...). [8] 실제로 혼란에 빠진 관중들이 구급차의 진입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으나, 또 다른 이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어른의 사정이기도 하다. 레이스 디렉터인 샤를 파루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레이스를 완전히 중지시킬 권한 자체가 없었다고 하며, 또 경기 중단 시의 금액 손실로 인해 참가자나 투자자들에게 고소당할 것을 우려해서어째 이쪽이 본론 같다 레이스를 중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더 본질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우왕좌왕하는 관객들 때문에 구급차 진입이 안 될 만큼 현장 통제가 잘 안 됐고 구급차와 소방차가 신속하게 들어갈 루트마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모터스포츠계가 소방팀의 긴급 출동을 위해 트랙 곳곳에 소방차를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관련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한 1970년대부터이다. [9] 당시 르벡과 함께 20번 차량의 운전을 담당했던 미국인 드라이버이다. [10] 사실상 1950년대 메르세데스의 현장 팀의 수장에 가까웠던 인물로, 1950년대 메르세데스의 짧은 전설의 역사를 주도한 매우 유능한 인재였다. 무전 교신이 활성화된 오늘날까지도 피트에서 드라이버에게 정보를 전달할 때 흔히 쓰이는 방식인 '피트 보드'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1] 마그네슘 문서에 나와 있듯이 무려 섬광탄 만들 때 쓰는 재질이 마그네슘이다. 그런 마그네슘 덩어리가 불에 제대로 노출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10여년 뒤인 1968년에도 혼다가 마그네슘 바디를 채용한 RA302 경주차를 선보였지만 메인 드라이버였던 존 서티스가 안전 우려를 이유로 출전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대타로 투입된 드라이버 조 슐레서는 한 경기 만에 화재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경기를 끝으로 혼다는 F1에서 철수. [12] 사르트 서킷은 공공도로와 상설 서킷을 혼합한 형식의 서킷인데, 서킷 길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쭉쭉 뻗은 직선 구간들은 모두 공도이고 그 후에 나오는 연속 코너들 및 메인 스트레이트 구간에 들어서야 상설 서킷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무가 무성한 왕복 2차선 도로와 면적의 여유가 넘치고 관람차, 놀이공원 등 관광 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레이스의 스타트와 피니시까지 볼 수 있는 상설 서킷 구역 중 어느 쪽에 관중석이 집중되어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부분. [13] 상당히 완만한 각도로 꺾이는, 본격적인 코너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스트레이트로 칠 수는 없는 코너를 의미한다. 사르트 서킷의 유명한 코너 중 하나인 '뮬산 킹크' 같은 곳들이 이에 해당된다. [14] 이 르망만의 스타트 방식은 영화 포드 V 페라리에 잘 구현되어 있다. [15]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메르세데스-벤츠가 모터스포츠 활동을 싹 다 접어 버린 것이 AMG가 생기고 몸집을 키워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계열사가 되는 동기가 되었다. [16] 메르세데스-벤츠 소속으로서의 공식적인 복귀는 1998년이지만, 1988년부터 1991년까지 그룹 C 클래스에 자우버라는 독립 팀이 메르세데스 엔진을 사용한 차량을 개발하여 출전했는데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자우버와 긴밀한 협업을 맺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사실상 메르세데스가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에 가깝다. 리버리도 은색 바탕에 메르세데스의 로고를 올린 실버 애로우 스타일. 이 시기의 최대 전적은 1989 르망 24시 우승이다. 그러나 이 우승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우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우버의 우승으로 처리되어 있다. [17] 이는 도의적 측면이라기보단 차량에 설계상으로 치명적인 결함이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차량들의 추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리타이어시킨 것이다. [18] AMG 차량을 사용하면서 르망에 관심이 있던 팀이 있었으나 시드 우선권 확보를 위해 렉서스로 차량을 바꿨다. [19] 아이러니하게도 호손은 사고 당시 피트에서 내리자 자신이 이 사단을 냈다며 죄책감에 시달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20] 드라이버간의 잘잘못을 엄격히 가릴 수 없는 사고를 보통 레이싱 인시던트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레이스 중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일이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