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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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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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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니시가키 토쿠오 (1950~1953) |
2대 후지타 소이치 (1954~1955) |
3대 우노 미츠오 (1956~1960) |
4대 스나오시 쿠니노부 (1961~1962) |
5대 하마자키 신지 (1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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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하야시 기이치 (1964~1965) |
7대 이이다 토쿠지 (1966~1967) |
8대 벳쇼 타케히코 (1968~1970) |
9대 미하라 오사무 (1971~1973) |
10대 아라카와 히로시 (1974~1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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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히로오카 타츠로 (1976~1979) ★ |
12대 타케가미 시로 (1980~1984) |
13대 도바시 마사유키 (1984~1986) |
14대 세키네 쥰조 (1987~1989) |
15대 노무라 카츠야 (1990~1998)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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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와카마츠 츠토무 (1999~2005) ★ |
17대 후루타 아츠야 (2006~2007) |
18대 타카다 시게루 (2008~2010) |
19대 오가와 준지 (2011~2014) |
20대 마나카 미츠루 (2015~20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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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오가와 준지 (2018~2019) |
22대 타카츠 신고 (202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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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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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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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 2대 | 3대 | 4대 | 5대 |
미야자키 (1950) |
미하라 (1951~1959) ★ ★ ★ ★ |
카와사키 (1960~1961) |
나카니시 (1962~1969) ★ |
이나오 (1970~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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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
에토 (1975) |
듀로셔 (1976) |
키토 (1976~1977) |
네모토
(1978~1981) |
히로오카 (1982~1985)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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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
모리 (1986~1994) ★ ★ ★ ★ ★ ★ ★ ★ |
히가시오 (1995~2001) ★ ★ |
이하라 (2002~2003) ★ |
이토 (2004~2007) ★ |
와타나베 (2008~2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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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6대 | 17대 | 18대 | 19대 | ||
이하라 (2014) |
타나베 (2014~2016) |
츠지 (2017~2022) ★ ★ |
마츠이 (2023~2024) |
감독 대행 와타나베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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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0대 | 21대 | 22대 | 23대 | 24대 | |
니시구치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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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시리즈 우승 / ★: 퍼시픽리그 우승 |
성명 | 히로오카 타츠로(広岡 達朗) |
생년월일 | 1932년 2월 9일 ([age(1932-02-09)]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일본 제국 히로시마 현 구레 시 |
학력 | 히로시마 현립 구레 미츠다 고등학교 - 와세다대학 |
신체 | 180cm, 70kg |
포지션 | 유격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4~1966) |
지도자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 (1961~1966) 히로시마 도요 카프 내야수비 코치 (1970~1971) 야쿠르트 스왈로즈 수비코치 (1974~1975) 야쿠르트 스왈로즈 수석코치 (1976[1])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1977~1979[2])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1982~1985) |
프런트 경력 | 치바 롯데 마린즈 GM (1995~1996[3])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스왈로즈]] 역대 감독 | ||||
아라카와 히로시 (1974~1976.5)[4] |
→ |
히로오카 타츠로 (1976.5~1979.8)[5] |
→ |
사토 다카오(대행) (1979.8~시즌종료)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 ||||
네모토 리쿠오 (1978~1981) |
→ |
히로오카 타츠로 (1982~1985) |
→ |
모리 마사아키 (1986~1994) |
1. 개요
전 NPB 야구선수, 지도자, GM. 야구평론가/해설가. 애칭은 ‘히로 상’(ヒロさん), 혹은 ‘히로’(ヒロ). 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그런 거 없고, 지나치게 꼰대, 시대착오스러운 의견으로 인하여 노해(老害)로 까인다.[6]선수시절엔 교진군에서 유격수를 맡아 명수비로 활약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감독으로썬 관리야구 로 대표되는, 선수들의 투구수, 사인 등과 사생활까지 하나하나 세세히 관리하는 스타일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세이부 라이온즈를 우승으로 이끈 명장이었다. 에비사와 야스히사라는 소설가가 그의 스왈로즈 감독시절을 모티브로 한 나는 감독이다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명선수, 명감독이라 해도 자동으로 훌륭한 프런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사례도 보여준 인물이다.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이전
히로시마 현 구레 시에서 구축함대 기관장 출신의 前 해군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래서 본인도 종전이 조금 늦어지면 군인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될 생각이었다고.형인 히로오카 토미오도 야구선수였는데, 무려 공무원을 하다가 프로에 입단한(!) 이색적인 경력과 더불어 (구) 히로시마 시민구장[7]의 제 1호 홈런을 쏜 선수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엔 별다른 활약을 못 보이고 1959년 은퇴했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하기 시작했으며[8] 히로시마 현립 구레 미츠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주전선수로 활약하면서 1949년 하계 코시엔 지방예선 때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으나, 야나이 고교와의 결승전에서 본인의 악송구로 인해 팀이 패배하면서 한신 고시엔 구장의 그라운드를 밟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야구를 그만두고 히로시마대학이나 야마구치대학에 입학할 까 고민했지만 주변의 권유로 와세다대학 교육학부에 진학, 아라카와 히로시[9], 누마사와 고이치로, 고모리 미쓰오 등과 함께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하면서 "6대학의 귀공자" 라 불리었다. 대학 시절 성적은 82경기 출장, 315타수 68안타, 2홈런, 52타점, 타율 .216
3. 현역 시절
1954년,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지휘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현역 생활을 시작했다.[10][11] 첫 시즌인 1954년부터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히라이 사부로로부터 주전 자리를 빼앗아 활약. 112시합에 출장해 107안타, 타율 .314, 15홈런, 67타점, 9도루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이후 오사카 타이거스의 요시다 요시오와 함께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유격수로 활약하며, 특히 수비의 견실함과 화려함을 무기로 요시다와 서로 경쟁했다. 타격면에서는 프로 1년차 외에는 낮은 타율을 기록하는 시즌이 많았는데 반면 통산 117홈런을 기록함과 동시에 1958년에는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2개월간 결장했지만 복귀 이후에는 18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의 펀치력도 있었다.
1961년,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히로오카는 플레잉 코치로 발탁되었으나, 선수 때부터 수비 문제로 서로 다퉜던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1964년 8월 6일에 열린 고쿠테츠 스왈로즈와의 경기는 시한폭탄 같았던 이들의 관계에 결정타를 먹인 계기가 되었다. 0:2로 뒤진 7회초 1사 3루 상황에서 히로오카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3루에 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독단적으로 홈스틸을 강행했다가 아웃당했는데, 이해하기 힘든 본헤드 플레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더그아웃에서는 딱히 별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히로오카는 벤치가 자신을 허수아비 취급해서 홈스틸을 지시한 것이라 지레짐작했고, 격분한 나머지 배트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나의 배팅을 그렇게 못 믿는 겁니까!”라고 외친 뒤 그대로 구장을 떠나버렸다. 같은 해 카와카미는 시즌 종료 후 히로오카의 트레이드 형태의 방출을 획책했지만[12] 히로오카는 차라리 은퇴를 하겠다는 각오로 구단주인 쇼리키 마츠타로에게 직접 “트레이드되느니 요미우리의 히로오카로서 끝내게 해달라”고 말한다. 결국 쇼리키의 지시로 요미우리 잔류가 결정되었지만(카와카미는 스포츠 매체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했다) 다음 시즌부터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줄어드는 등 악재가 겹쳤다. 카와카미는 히로오카의 재능만큼은 높이 평가했으나, 1966년 히로오카가 주간 베이스볼에 의견기사를 기고하면서 "선수의 본분을 알지 못하겠다"라며 카와카미를 비난했고, 대소동 끝에 196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 시점에서 카와카미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3시즌간의 통산 성적은 1327시합 출장 1081안타 117홈런 465타점 115도루 타율 .240
은퇴 후 라디오 간토, 산케이 스포츠 등에서 평론가로 활동했고 현역 은퇴 직후인 1967년 2월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프링 캠프의 시찰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도 했다. 이때 플로리다에 있는 요미우리의 스프링 캠프도 방문했지만 카와카미는 히로오카의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고, 선수들에게도 “히로오카의 말을 듣지 말아라”라고 지시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히로오카의 숙박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카와카미의 처사에 대해 히로오카는 격노하면서 문자 그대로 살의를 품을 정도의 격한 분노를 느꼈다고 후에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 마사히코(후의 모리 마사아키)만이 히로오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가 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를 위로했고 히로오카는 모리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이후 지도자 시절 모리와 행동을 함께하게 된다.
4.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 시절
1970년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요청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내야 수비 코치로 취임하면서 타격 코치인 세키네 준조와 함께 야마모토 코지, 기누가사 사치오, 미무라 토시유키, 미즈타니 지쓰오 등을 길러 후의 70년대 후반~90년대 중반 히로시마의 황금 시대의 초석을 닦았다. 또, 네모토로부터 외야수였던 소노다 도시히코를 내야수에 변환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소노다는 능숙함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엄격한 지도로 인해 스트레스와 원형 탈모증에 걸리는 등으로 인해 히로오카도 한 번은 전향을 체념하기 시작했으나 끈기있는 지도를 계속한 결과 내야수로서 잘 활약할 수 있게 되어 그 이후 소노다는 히로시마의 내야 수비 요원으로서 활약했다. 이 소노다의 내야수 변환은 히로오카에게 있어서 지도자로서의 명활약을 펼치는 큰 재산이 되었고, 이것에 대해 히로오카는 “프로에 들어오는 선수는 누구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대답을 흙투성이가 되어서 선수와 함께 찾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선수와 지도자에게 의지만 있으면 선수는 반드시 대답을 찾아내 능숙해진다. 지도자로서의 자신이 있는 것은 소노다의 덕분” 이라고 말했다. 정작 소노다는 백업으로 선수생활을 마쳤지만 명스카우터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현재는 친정팀 스카우트 총괄이사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스타선수를 발굴하는 명스카우터를 키운 셈이다.
1971년을 끝으로 히로오카는 코치직에서 물러났고, 그 후 야구 해설가와 프로 골프 코치로 활동했다. 카와카미와도 갈등이 풀리면서 카와카미를 직접 찾아가 히로시마에서의 코치 활동 경험을 말하는 등 요미우리의 2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5. 야쿠르트 스왈로즈 코치/감독 시절
1974년에 야쿠르트 스왈로즈로부터 미하라 오사무의 후임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당시 야쿠르트에는 와세다대학 선배였던 아라카와 히로시가 타격 코치로 있었기 때문에 감독직을 고사하면서 아라카와가 감독으로 취임하고 자신은 수비 코치로 야쿠르트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야쿠르트 코칭스태프 중 아라카와 감독과 히로오카, 코모리 미쓰오, 누마사와 고이치로 코치까지 총 4명이 전부 와세다대학 출신이어서 일명 와세다대학 카르텔 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6년 수석 코치로 승격했으나 1976년 시즌 도중이었던 5월 13일, 아라카와가 성적 부진으로 휴양을 선언(사실상의 해임)하면서 감독대행을 맡아 잔여시즌에서 101시합 42승 53패 6무 승률 .442로 감독대행 치곤 나름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고(팀 성적은 5위) 시즌 종료 후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의 야쿠르트는 마쓰조노 히사미 구단주의 방침으로 가족주의적이었고 이것이 팀의 특성이었지만, 히로오카는 이에 반발해 프로로서 산만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시즌에 들어가면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히로오카는 히로시마 코치 시절 네모토 감독이 선수들의 식생활을 관리하는 법을 터득하여 이것을 야쿠르트 선수들에게 그대로 실행에 옮기면서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한 후인 1977년 스프링 캠프에서 마작, 화투, 골프 금지와 음주, 흡연 제한 등 선수들의 생활 태도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밝혔다. 또한 스프링 캠프에서는 수비와 주루를 철저하게 중시하는 연습과 경기 방침을 내세웠다. 초기에는 선수들이 거세게 반발을 했지만 히로오카의 방침은 멋지게 성공하면서 그 해 팀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시즌 2위로 끌어 올리기도 했다.
이듬해인 1978년은 모리 마사히코를 작전 코치로 초빙했고 모리는 히로오카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선수들의 사생활을 세세하게 관리했다. 또 모리가 수집한 데이터를 근거로 요미우리에 대해 특단의 대책을 강화하였고, 팀이 쾌진격을 이어나가면서 결국 이 해 구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78년 일본시리즈에서는 4연패를 노리는 한큐 브레이브스와 격돌. 야구계 일각에서는 “한큐 우승” 이라는 평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야쿠르트는 한큐를 4승 3패로 누르고 우에다 토시하루 당시 한큐 감독이 사임하는 후폭풍까지 일으키며 창단 이후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홈구장인 메이지진구 야구장을 당시 도쿄 6대학 리그 경기 때문에 쓰지 못해 고라쿠엔 구장에서 홈 경기를 치른 게 흠이라면 흠.(참고로 우승 결정전인 7차전이 고라쿠엔 구장에서 개최되었다)
히로오카는 이때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시점에서 야쿠르트를 떠나는 걸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단의 만류로 3년 계약을 맺었고 팀 강화를 위해서 몇 차례의 트레이드를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13][14] 이듬해인 1979년,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개막 8연패 등과 더불어 성적이 침체되었고, 이에 구단은 선수들로부터 평판이 나빴던 모리를 코치직에서 해임시키고 우에무라 요시노부 투수 코치를 2군 코치로 격하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이에 대해 격렬히 반발하면서 구단의 인사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8월 17일에 사임을 신청. 감독직을 사임하고 모리, 우에무라와 함께 야쿠르트를 떠났다.(잔여시즌은 사토 타카오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진행)
결국 이 해 야쿠르트는 일본시리즈 우승 다음해 리그 꼴찌란 치욕적인 기록을 쓰며[15] 리그 최하위를 기록. 이후 1980년의 2위를 제외하곤 80년대 내내 B클래스(4~6위)를 기록하며 노무라 카츠야의 부임 전까지 암흑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닛폰 테레비의 야구 해설위원으로서 평론 활동을 재개했고 독설적인 해설로 인기를 얻었다. 이때 긴테츠 버팔로즈와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6.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시절
1982년, 히로오카는 프런트로 전임한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후임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히로오카는 세이부에서도 야쿠르트에 있을 때와 똑같이 엄격한 생활 관리와 디펜스 중시의 야구를 실행했다. 취임 1년차인 1982년,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플레이오프에서[16] 후기리그 우승팀 닛폰햄 파이터즈를 3승 1패로 누르고 19년 만의 퍼시픽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 2패로 격파, 24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세이부의 황금 시대를 열게 된다.
이듬해인 1983년엔 2위 한큐 브레이브스와 무려 17경기차라는 말도 안되는 독주를 펼치며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시리즈 상대는 현역 시절 친정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였는데, 당시 후지타 모토시 감독과는 한 때 팀메이트였기 때문에 이 해 일본시리즈는 “야구계의 맹주 자리를 건 싸움” 으로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시리즈는 7차전까지 이어지면서 혈투가 계속되었지만 결국 4승 3패로 세이부가 승리해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17] 이 우승으로 히로오카는 명감독으로써 평가를 받게 된다.
시즌 종료 후엔 닛폰햄 파이터즈로부터 에나츠 유타카가 트레이드로 입단했고 에나쓰의 영입을 위해 중간 계투였던 기무라 히로시, 시바타 야스미츠를 방출, 고바야시 세이지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트레이드로 이적하는 등(근데 고바야시는 원래 히로시마 출신이었다) 3명의 중간 계투 투수가 단번에 퇴단했다. 그러나 이 트레이드는 히로오카의 의향에 반했던 거라 히로오카는 구단 프런트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고, 또 에나츠는 독불 장군적인 성격, 히로오카는 엄격한 선수 관리로 유명했는지라 언론에서는 두 사람간의 갈등을 이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1984년에는 팀의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타부치 코이치, 야마자키 히로유키, 오타 다쿠지 등의 주력 선수들이 연달아 부진을 겪으면서 팀은 우승권에 멀어지면서 페넌트 레이스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 해 5월부터 히로오카는 방침을 전환해 젊은 선수들을 다수 기용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고 이에 베테랑이었던 타부치와 야마자키는 현역 은퇴를 결심했고 에나츠도 8월 이후에 2군으로 강등되면서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결국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에나츠는 히로오카에 대해 “나의 생활권을 빼앗은 남자” 라고 비난했고 결국 이 해엔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어 주고 3위로 시즌을 마쳤다.(2위는 롯데 오리온즈)
이 해 시즌 종료 후 타부치가 은퇴하면서 히로오카는 거포 타자의 보강을 위해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하고 있던 돈 베일러를 영입해 달라고 구단 프런트에게 요청했지만 구단은 타자가 아닌 대만 야구계의 에이스였던 궈타이위안을 영입했다. 당시 외국인 선수의 등록범위는 2명으로, 외야수 제리 화이트가 방출되어 비어있던 외국인 슬롯을 야수가 아닌 투수에게 배분한 것. 1군 등록은 ' 내야수인 스티브 온티베로스와 투수 궈타이위안' 이 되었다. 이로 인해 히로오카는 구단 프런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18]
1985년에는 리더로 부상한 이시게 히로미치, 아키야마 코지, 츠지 하츠히코,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이토 쓰토무 등의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또다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시즌 후반에 지병인 요산성 관절염으로 인해 휴양 생활을 했고 팀의 리그 우승이 결정될 당시에는 현장에 없었다. 그 후 일본 시리즈에선 현역 시절 라이벌 요시다 요시오가 이끌던 한신 타이거스에게 2승 4패로 패하면서 한신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제물이 되었고, 히로오카는 이 해를 끝으로 모리 마사아키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퇴임했다.
퇴임 후 히로오카는 또 다시 야구 평론가/해설가로 활약했다.
7. 치바 롯데 마린즈 GM 시절
1995년, 시게미츠 아키오 구단주 대행의 요청으로 히로오카는 3년 계약을 맺고 치바 롯데 마린즈의 GM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롯데에서 연이은 실정을 저지르면서 그동안 쌓아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먹고 말았다.
우선 히로오카는 취임하자마자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을 맡았던 바비 발렌타인을 감독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발렌타인 감독과 히로오카는 야구관의 차이로 인해 수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히로오카는 2군 수석 코치였던 에지리 아키라를[20] 1군 수석 코치로 승격시켰고 경기가 없는 날에는 선수들에게 연습을 부과하는 등 밸런타인과의 의향과는 맞지 않는 일을 수차례 하였고 팀은 후반부터 기세를 올려 최종적으로 1985년 이후 10년 만에 A클래스(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시즌 종료 후 밸런타인을 해임시킨 뒤 후임에 수석 코치인 에지리를 임명했다. 밸런타인은 귀국 후 “GM은 선수를 모아오는 것이 일인데도 히로오카는 그것을 하지 않고 현장에 참견할 뿐이었다” 라고 비판했고 이것에 대해 히로오카는 “감독은 현장에서 흙투성인 채로 선수를 가르치는 것이 일일 테인데도 밸런타인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 라고 반론했다. 돌이켜 보면 발렌타인과 히로오카 개인의 퍼스널리티가 강했던 것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프론트와 현장과의 관계나 훈련 방식 등에 대한 일본과 미국 사이의 야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21]
그러나 에지리가 감독을 맡은 이듬해 1996년은 시즌 5위로 끝났으며, 선수들과도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면서 결국 히로오카는 3년 계약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2년만에 에지리와 함께 해임당하고 말았다.[22]
8. GM 해임 후, 현재
후에는 다시 야구 평론가/해설가를 맡았다가 현재는 고령으로 쉬는 중이다. 2004년부터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사실상의 요미우리 OB 회장을 맡았다가 열도의 갓동님인 나카하타 키요시에게 넘겼다.
[1]
5월 13일부턴 감독 대행도 겸임.
[2]
시즌 도중 사임.
[3]
3년 계약이었으나 2년만에 해임당했다.
[4]
시즌 도중 사임.
[5]
1976 시즌은 감독 대행.
[6]
정작 히로오카는 2018년 슈칸베이스볼에
언제부터 일본인은 노해라는 품위없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나라는 칼럼을 썼는데, 일본 인터넷상에서는 그 칼럼을 쓴 거 자체로 노해라고 불러도 싸다고 깠다.
[7]
지금의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가 아닌, 2010년에 폐장된 옛날의
히로시마 시민구장이다.
[8]
여담으로 그가 쓰던
글러브는 다름아닌 그의 죽은 형(토미오가 아닌 다른 형)이 쓰던 거였다고 한다. 참고로 형은
전쟁 때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전사했다고.
[9]
왕정치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정치 이전에는
에노모토 키하치를 키워낸 명 타격코치다.
[10]
당시
긴테츠 펄스,
니시테츠 라이온즈,
오사카 타이거스,
난카이 호크스,
마이니치 오리온즈의 수많은 구단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결국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11]
히로오카는 “나의 야구의 원점은 교진군의 야구이다. 내가 프로의 엄격함을, 아니라고 하는 만큼 생각해서 알게 된 입단 당시 교진군의 야구이다” 라고 후에 말했다.
[12]
카와카미는
라이벌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트레이드로
교진군에서 방출시킨 바가 있었다.
[13]
이때 트레이드로 보낸 선수 중 하나가 바로
찰리 매뉴얼이다.
[14]
히로오카는 후에 트레이드에 대해 “트레이드로 예정하고 있던 선수가 잔류를 호소했기 때문에” 라고 말했다.
[15]
이러한 사례는 NPB 사상 총 4번인데, 1961년의
다이요 훼일즈, 1978년의
야쿠르트 스왈로즈, 2011년의
치바 롯데 마린즈, 2014년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예가 있다.
[16]
이 해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2004년 지금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비슷한 제도로(다만 리그 우승팀에게
부전승을 주는 규칙은 후에 추가) 부활.
[17]
후지타는 이 해를 끝으로 사임했다가 1989년 다시 복귀, 1992년까지 교진의 지휘를 맡았다.
[18]
다만 결과적으로 프론트의 판단은 정확했던 게, 궈타이위안은 10년 가까이 세이부의 우완 에이스로 맹활약하며 황금기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돈 베일러는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긴 했으나, 1986년까지는 그런대로 메이저리그 주전으로 활약한 터라 세이부가 영입을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
유니폼이 지금과 많이 다른데, 1992~1994년 입은 초창기 유니폼이기 때문이다. 발렌타인이 정식으로 취임한 1995년부터 '메이저리그 스타일'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고,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
참고로 에지리는 히로오카의 대학 후배였다.
[21]
재밌는 것은 발렌타인 감독은 이후에 지바롯데 마린즈 감독을 다시 맡았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일본스타일처럼 하려다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단에 엄청단 반감을 사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해당 시즌을 말아먹고 쫓겨났다. 선수들이 단체로 태업을 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있었을정도. 발렌타인 감독도 미국인이지만 다른 미국 감독처럼 수평적인 스타일의 지도를 했던 감독은 아니었다. 한국처럼 감독에게 권한과 권위를 많이 주는 일본에서조차 발렌타인은 독재자 스타일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22]
발렌타인은 이후 2004년 치바 롯데로 복귀하며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이번에도 세토야마 구단 사장을 비롯한 프론트와 대립하다가 2009년 시즌 종료 후 해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