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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이 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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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루이지애나 주지사
휴이 피어스 롱 주니어
Huey Pierce Long Jr.
파일:Huey Long official portrait.jpg
<colbgcolor=#00427c><colcolor=#ffffff> 출생 1893년 8월 30일
미국 루이지애나 주 윈필드
사망 1935년 9월 10일 (향년 42세)
미국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
재임기간 제40대 루이지애나 주지사
1928년 5월 21일 ~ 1932년 1월 25일
가족 아버지 휴이 피어스 롱 1세
형 6명
동생 얼 롱
배우자 로즈 매코널 롱(1913년 결혼)
아들 러셀 B. 롱
학력 오클라호마 침례대학교
오클라호마 대학교
툴레인 대학교
종교 개신교 ( 침례회)
최종 당적

서명 파일:휴이 롱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기념 홈페이지
파일:Huey Long gubernatorial portrait.jpg
루이지애나 주지사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암살
3. 평가4. 가족5. 매체에서6. 어록7.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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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very Man a King.
모든 사람이 왕이다.
제40대 루이지애나 주지사직을 지내고, 미합중국 연방 상원의원직을 역임한 바 있는 미국의 정치가이며 미국 정치사에서 매우 유명한 포퓰리즘 정치인 중 한 명이다.

2. 생애

파일:huey_child_lg.jpg
어릴 적의 휴이 롱과 남매들. 맨 왼쪽이 휴이이며, 맨 오른쪽은 동생인 얼 롱이다.

풀네임은 휴이 피어스 롱 쥬니어로 1893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윈필드에서 태어났다. 출신지는 비교적 빈곤한 지역이었으나 그는 비교적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는 홈스쿨링을 받다가 고등학교에서는 비상한 두뇌로 월반을 할 정도의 재능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교내 비밀결사에 가입한 후 이 머리를 일찌감치 학업보다는 대중을 선동하는데 써먹기 시작했고, 결국 교사들과 대립하다 퇴학까지 당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나와 세일즈맨을 하면서 돈을 모은 뒤 오클라호마 뱁티스트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변호사가 된 후 정치에 관심을 두고 스탠다드 오일을 포함한 대기업들을 공격해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24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낙선한뒤 4년 동안 열심히 표밭을 일구어서 1928년 선거에서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당당히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롱은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에 빠진 목화 농가를 구제하기 위해 '목화 휴일'이란 이름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산물 생산량을 조절했다. 또한 적극적인 실업자 구제를 위해 고속도로, 아스팔트 포장도로, 신규 교량 건설을 시행했다. 하지만 주의 적자가 10배나 불어났는데 이는 건설사업 과정에서 각종 뇌물수수 및 리베이트 등의 비용들까지 추가된 탓이었다.

자칫 주지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지만 롱은 주의회 의원들을 돈으로 구워삶아서 주의회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롱의 입김은 주지사가 관여하기 어려운 주 사법부나 교육기관에까지 미쳐서 루이지애나를 쥐고 흔들게 되었다.

1929년, 재정적자를 타개할 요량으로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에 중과세를 부과하려 했다. 주 하원이 이에 반발해서 롱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롱은 매수와 협박으로 이를 부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중앙 정계로 진출한 롱은 1932년, 자신의 수하인 오스카 K. 알렌을 루이지애나 주지사로 당선시키고 자신은 뒤에서 루이지애나를 계속 쥐고 흔들었다. 당초 롱은 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지지했지만 롱의 급진적인 정책을 내심 못마땅해한 루스벨트가 롱과 거리를 두려고 하자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1936년 대선에는 본인이 직접 출마하려고 구상했다. 전국적으로 750만명 이상이 그를 지지하는 모임에 가입하고, 매주 6만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루스벨트 대통령보다도 많은 수였다.

2.1. 암살


롱의 선거운동 곡인 'Every Man a King'에 추모하는 가사가 추가된 버전.
적이 많았던 롱은 항상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다니며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본거지인 루이지애나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

연방판사 벤자민 헨리 페이비(Benjamin Henry Pavy, 1874-1943)가 급부상하자 롱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주법을 개정했다. 그러자 페이비의 사위이자 의사인 칼 오스틴 와이스(Carl Austin Weiss 1906-1935)가 분개하여 1935년 9월 8일, 루이지애나 주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롱을 저격했다.[1] 칼 와이스는 현장에서 경호원들이 쏜 60발이 넘는 총알에 맞아 사살되었고 롱은 이틀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1935년 9월 10일 결국 사망했다. 롱의 장례식에는 무려 지지자 10만여 명이 몰려와 그를 애도했다고 한다.

칼 와이즈의 아내와 아들은 죽을 때까지 칼은 범인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휴이 롱을 쏴죽인 범인은 경호원들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도 헛소리로 매도당했다. 아내 이본 루이즈 와이스 (Yvonne Louise Pavy Weiss 1908-1963)나 아들 칼 와이스 주니어(1935-2019)는 죽을 때까지 와이즈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본은 1935년 당시 외아들인 주니어가 태어나서 기뻐했고 9월 8일 그날도 남편은 웃으며 출근했다. 태어난 지 석 달 된 아들과 아내를 놔두고 그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다.

주니어는 2019년 8월 1일, 84살로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까지도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무죄 주장에 대하여 이미 1991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는 56년 동안 묻혔던 칼 와이스의 시체를 꺼내 뼈를 자연사 박물관에게 조사를 맡겼다. 와이스의 뼈 곳곳에 총알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의 뼈나 당시 기록, 현장 그림, 총까지 모두 조사한 시체 법의학 과학자 제임스 얼 스타즈(James E. Starrs)는 당시 현장 그림을 봐도 휴이 롱 등 뒤에서 쏜 총알이 확실하고 등 뒤에 있던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고 더 확고해졌다고 발표했다.

이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된 주니어와 똑같이 현재도 의사로 일하는 손자 칼 와이스 3세는 반발했지만 시체 부검결과를 상세히 보여주자 한다는 소리가 다른 시체를 부검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지금도 이 주장을 손자 칼 와이스 3세가 계속 한다. 칼 와이스가 휴이 롱을 암살하자 오히려 페이비 판사는 정치적 입지까지 박살났다. 그래서 장인을 증오하여 정치적으로 매장하고자 휴이 롱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소리까지 나올 판국이다. 아무튼,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3. 평가

미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선명한 진보주의자로 꼽히는 롱의 모토는 "모든 사람이 "(Every Man a King)이었다. 대공황의 불황 가운데 롱은 모든 사람이 왕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주장했다. 물론 롱은 반공주의자였다. 롱의 주장은 생산수단의 공유화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정부가 나서서 부자들과 대기업의 부를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정책이었다.[2] 오히려 이런 부의 재분배야말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지자들은 '미국사상 주류 정계에 진출했던 최고의 거물급 진보주의자'라고 평가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국에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시키려고 했던 남자'라고 혹평한다. 또한 일부에선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재정건전성을 해친 측면은 있지만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이념적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내에서 정치 개혁과 복지 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롱 암살 후 정계와 학계에서 롱을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하고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일례로 사회당 소속으로 여섯 번 대선에 나섰고 롱과 토론까지 해본 노먼 토머스는 롱을 '미국의 탈을 쓴 파시스트'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카이저라이히 같은 대중매체로 롱이란 인물이 대중들에게 알려지자 재평가가 나왔다. 미국인들이 버니 샌더스 돌풍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를 시작으로 포퓰리즘을 과거와는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통치 스타일을 주로 비판한다. 롱은 친인척을 주요 자리에 앉히고 정적에게 협박과 매수를 일삼는 등 굉장히 부패하고 권력을 중요시하는 권위주의적 인물로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과도한 포퓰리즘 때문에 루이지애나의 부채는 크게 늘어났다.

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의 정책을 펼치려면 협박과 매수는 불가피했음을 강조한다. 롱이 등장하기 전 1920년대 초반까지 루이지애나주의 정치는 부패하고 보수적인 기득권층과 엘리트층이 장악하였다. 롱은 그들에 맞서 흑인을 포함한 루이지애나 빈민층의 구제를 위해 싸웠다. 롱의 정책 중 정치권의 반발이 제일 심했던 것은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시행했던 무상 초등 교과서 제도와 문맹자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늘리는 일이었는데, 문맹률을 낮아져 빈민들의 선거 참여가 가능해지면 제도권 정치인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즉, 롱의 반대파들은 롱의 정책들이 서민들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자신의 부를 늘리는 것에 방해가 될까봐 롱에 반대했지, 그의 통치방식이 비민주적이어서 반대하지 않았다. 롱이 시행한 정책들은 효과도 좋아서 문맹률은 크게 줄이고, 빈민층의 학교 입학 비율도 20%가량 늘렸다. 롱의 영향으로 다른 남부 주들과 달리, 롱 뒤에 취임한 루이지애나주의 주지사들은 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진보파들이었다.[3][4] 루스벨트 대통령도 롱의 주장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누진세, 사회보장제 등 그의 많은 주장들을 정권 후반부에 받아들였다.

롱이 만약 암살되지 않고 민주당 대선경선에 뛰어들었다면 어찌되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물론 루스벨트라는 산을 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롱이 암살된 데에는 다른 배후의 음모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롱이 유력한 대선주자였기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주장이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때문에 휴이 롱을 민주당 진보계파의 아버지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휴이 롱의 인지도와 달리 민주당의 역사에서 롱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기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현대 민주당 좌익 계파의 실질적인 시초는 조지 맥거번[5] 상원 의원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인터넷에서의 인식과 실제 휴이 롱이 민주당의 역사에서 차이하는 지분이 상당히 차이가 있는 편이다.

4. 가족

휴이 롱 사후 유족들은 루이지애나 정계를 주름잡는 거물 가문이 된다.

휴이 롱의 아내 로즈 맥코넬(Rose McConnell Long)은 휴이 롱의 사후 연방 상원의원 직을 다음 상원의원 선거까지 1년 대리하게 되는데, 미국 역사 상 두번째 여성 상원의원으로 이름을 남겼다.

휴이 롱의 동생 얼 롱(Earl Long)은 그라쿠스 형제마냥, 휴이 롱이 죽은 뒤 형에게 보내는 동정표로 정계에 진출했다. 1939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보궐선거, 1948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 1956년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다. 그리고 얼 롱은 보란듯이 휴이 롱보다 더 강경한 진보정책을 밀어 붙였다. 실제로 얼 롱이 활동하던 기간 동안 미국 정계는 이들을 '그라쿠스 형제의 미국판'이라고 불렀다. 1960년 얼 롱은 주지사직이 만료되자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1960년 9월 5일 선거 유세 도중에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65살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얼 롱이 죽었을 때 휴이 롱처럼 반대파에서 암살한 게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다[6].

휴이 롱의 아들 러셀 B. 롱 또한 1948년 처음으로 루이지애나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돼서 1987년까지 재임했다. 무려 6선 상원의원. 상원 원내총무까지 역임한 바 있다. 아버지랑은 달리 현실적인 자세로 친기업적, 외교 개입주의 성향을 보여주었다. 노조나 인종문제[7] 에 있어서도 중도적이었다.

사촌들인 길리스, 스피디는 루이지애나 주 연방하원의원을 역임한 바 있고, 이외에도 주의회 의원이나 기타 공직을 맡은 인물은 더 많다.

5. 매체에서

카이저라이히 시리즈에서는 롱이 암살되지 않고 1936년 대선에 출마한다. 다만 이쪽 세계에서는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재선에 반발해서 민주당을 탈당한 뒤 남부 중심의 극좌-극우 국민대중주의 정당인 미국제일당(AFP)을 창당한 상태.[8] 대선에서 휴이 롱이 낙선된 뒤 연방정부가 사회주의자와 연정을 맺거나[9] 롱과 리드 둘 중 하나가 당선되었다가 맥아더에게 쿠데타로 쫓겨날 경우 미국 남부 주들이 연합한 미연합국(AUS, American Union State)을 세우고 내전을 일으키게 된다.

위 해피 퓨는 현실 역사와 반대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암살당하고 휴이 롱이 당선된 세계관이다.

롱의 삶을 모티브로 한 모두가 왕의 부하들(All the King's Men)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는데 1949년 2006년에 영화화 되었다. 1949년 작은 1950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고, 2006년 작에서는 숀 펜이 롱을 모티브로 삼은 윌리 스타크 역으로 출연한다.

랜디 뉴먼이 휴이 롱의 입장에서 쓴 곡으로 Kingfish가 있다.

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도 외전에서 암살당하지 않고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같은 작가의 다른 소설인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대공황 이후의 혼란 상황에서 코카인을 밀수하는 KKK단과 연계하여 사병 육성에 이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맥아더와 루스벨트보다는 낫다는 이유[10]로 그의 비리는 존 에드거 후버에게 묻히게 되어 주방위군을 이끌고 맥아더와의 내전을 벌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소설 대영제국 함장이 되었다에서는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독일제국이 붕괴되지 않고 휴전협정을 맺은 세계관의 미국에서 후버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무리하게 캐나다 침공을 명령,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반발해 반전운동을 하다가 총에 맞지만 죽진 않고 살아남는다.

6. 어록

모든 사람이 이지만, 왕관을 쓰는 사람은 없다.
Every man a king. But no one wears a crown.
나는 미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진정한 독재자이다.
I'm the only authentic dictator left in the United States.
나는 노동자 계급의 절반을 끌어들여 나머지 절반을 죽일 수 있다.
I can hire one-half of the working class to kill the other half.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은 바로 미국 국민의 부를 위한 전쟁이다.
The biggest war in history is the war on the wealth of the American people.
국민으로부터 임무를 받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은 독재자가 아니다.
A man is not a dictator when he is given a commission from the people and carries it out.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서 금권 제국주의의 손길이 더 이상 미국 국민을 질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We shall have to say right here and now that the hand of imperial finance shall go no farther into its strangulation of the American people.
제가 발견한 민주당 정부와 공화당 정부 사이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발목부터 벗겨먹고, 다른 하나는 귀 아래부터 벗겨먹는다는 것입니다.
The only difference I’ve ever found between the Democratic leadership and the Republican leadership is that one of them is skinning you from the ankle up and the other from the ear down.
우리는 아프고 장애가 있는 퇴역군인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돌봐야 합니다. 이 나라의 제복을 입은 모든 사람은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습니다.
We ought to take care of every single one of the sick and disabled veterans…every man that wore the uniform of this country is entitled to be taken care of, and there is money enough to do it.
그들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대하고, 그들에게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흑인들은 일하고, 생활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Treat them just the same as anybody else, give them an opportunity to make a living. Negroes should have a chance to work and to make a living, and to get an education.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부자에게 누구도 '너무' 부유해질 수는 없다고만 하면 쉽게 해결될 일입니다.
All this can be done with ease only if we will say to the rich,“None shall be too rich!"
자유주의자들은 입을 열 때마다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뭔가를 할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very time a liberal opens his mouth, it's a lie. That's the only way he can get something done.
물론, 우리는 파시즘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빛의 천사와 같이 찾아올 것입니다!
Sure, we'll have fascism here, but it'll come as an angel of light!
저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저는 부의 재분배를 지지합니다.
I'm not for communism. I'm for the redistribution of wealth.
어떤 사람들은 저를 히틀러에 비유할 지 모르지만, 히틀러는 진짜 파시스트였고, 저는 미국식 파시스트입니다. 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Some people might compare me to Hitler, but Hitler was a true fascist. I'm an American fascist, and there's a big difference.
루이지애나에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없습니다. 저 휴이 롱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상대해야 할 가장 큰 적입니다.
We haven’t a Communist or Socialist in Louisiana. Huey P. Long is the greatest enemy that the Communists and Socialists have to deal with.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에 대한 어록 -
당신은 약자에게 먹을 비스킷을 던져주고, 그의 머리 위에 밀가루 한 통을 더 올려 운반하게 하고 있습니다.
You are giving a little man a biscuit to eat, and you put a barrel of flour more taxes on top of his head to carry.
루스벨트 공황은 후버 공황의 두 배이다.
The Roosevelt depression is just a double dose of the Hoover depression.
는 부의 재분배를 추진하겠다는 명목으로 대통령실에 입성했다. 그는 그곳에 간 이후로 그런 일을 한 적도 없고, 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He rode into the president’s office on the platform of redistributing wealth. He has done no such thing and has made no effort to do any such thing since he has been there.
루스벨트 씨와 후버 씨의 유일한 차이점은 후버 씨 밑에서보다 루스벨트 씨 밑에서 상황이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The only difference between Mr. Roosevelt and Mr. Hoover is that things are much worse in every degree under Mr. Roosevelt than ever under Mr. Hoover.


According to the tables which we have assembled,
저희가 만든 표에 따르면,

it is our estimate that 4 percent of the American people own 85 percent of the wealth of America,
4%의 미국인들은 85%나 되는 부를 소유하지만,

and that over 70 percent of the people of America don't own enough to pay for the debts that they owe.
70%가 넘는 미국인들은 자신이 진 빚을 갚을 만큼의 재산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How many men ever went to a barbecue and would let one man take off the table what's intended for 9/10th of the people to eat?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비큐를 먹을 때 한 사람이 90%를 가져가게 허락했을까요?

The only way to be able to feed the balance of the people is to make that man come back and bring back some of that grub that he ain't got no business with!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이 돌아와서 자신과 관계없는 음식을 되돌려주는 것뿐입니다!

Now, how are you going to feed the balance of the people?
자, 국민들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할까요?

What's Morgan and Baruch and Rockefeller and Mellon going to do with all that grub?
모건, 바루크, 록펠러, 그리고 멜론이 모든 음식을 가지고 뭘 할까요?

They can't eat it, they can't wear the clothes, they can't live in the house.
그들은 그것을 먹지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하고, 집 안에서 살 수도 없습니다.

Giv'em a yacht! Giv'em a Palace!
그들에게 요트를 줘야 합니다! 그들에게 대저택을 줘야 합니다!

Send'em to Reno and give them a new wife when they want it, if that's what they want.
만약 그들이 원하는 게 새 아내라면 리노[11]로 보내서 줘야겠군요.

But when they've got everything on God's loving earth that they can eat and they can wear and they can live in, and all that their children can live in and wear and eat, and all of their children's children can use,
그러나 그들이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살 수 있고, 그들의아이들이 살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다정한 땅에서 모든 것을 가져간다면,

then we've got to call Mr. Morgan and Mr. Mellon and Mr. Rockefeller back and say, come back here,
모건 씨, 멜론 씨, 그리고 록펠러 씨에게 여기로 돌아오라고 전화해서,

put that stuff back on this table here that you took away from here that you don't need.
가져가는 물건들 중 필요 없는 것들을 식탁 위에 올리라고 해야겠군요.

Leave something else for the American people to consume. And that's the program.
미국인들이 소비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남기십시오. 그게 프로그램입니다.

We're not going to destroy the Gulf Refining Company; we're not going to destroy the Standard Oil Company,
우리는 걸프 오일을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탠더드 오일을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but we're going to say that the limit of any one man's stock ownership in the Standard Oil Company is from 3-to-5 million dollars for that individual and the balance to the people of America who own the balance of what the Standard Oil Company is worth!
그러나 우리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한 사람의 주식 소유 한도는 3백만 달러에서 5백만 달러이며, 스탠더드 오일의 나머지를 갖고 있는 나머지 미국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All right
좋습니다.

Then, we start from the bottom.
그리고, 우리는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That the 25 or more million American families shall have a homestead.
2천 5백만 혹은 그 이상의 미국 가정들이 농장과 땅이 딸린 집을 가질 것입니다.

A home and the comforts of a home, including an automobile and a radio, the things is takes in that house to live on.
집 그리고 자동차와 라디오를 포함한 집의 편안함이 바로 그 살 집에서 얻을 것입니다.

We say to America, 125 million, none shall be too big, none shall be too poor, none shall work too much, none shall be idle.
우리는 1억 2천 5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누구나 너무 크거나, 가난하거나, 많이 일하거나, 게으르거나 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No luxurious mansions empty, none walking the streets, none impoverished, none in pestilence, none in want,
호화로운 대저택도 없고, 거리를 걷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고, 전염병이 없고, 원하는 것이 없지만,

but in the land blessed by the smile of the Creator with everything to be consumed, to be eaten, to be worn,
소비하고, 먹고, 입을 모든 것을 가진 창조주의 미소로 축복받은 땅에서,

that America will become a land, sharing the fruits of the land, not for the favored few, not to satisfy greed, but that all may live in the land in which the Lord has provided an abundance sufficient for the luxury and convenience of the people in general!
미국은 몇몇을 위하지 않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모든 백성들의 사치와 편의를 위해 넉넉히 제공하신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땅의 열매를 나누는 곳이 될 것입니다.

I thank you.
감사합니다.
1934년 12월 11일 워싱턴 D.C. 에서의 연설[12]
신이시여, 저를 죽게 두지 마십시오.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습니다.
God, Don’t let me die, I have got so much to do.
1935년 암살당할 당시 그의 마지막 말로 알려져 있다.

7.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28 미국 주지사 선거 루이지애나

92,941 (96.14%) 당선 (1위) 초선
193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0,536 (99.98%) 당선 (1위) 초선


[1] 참고로 이때 쓰인 총은 FN M1910. 바로 사라예보 사건의 그 총이다. 당연히 그 문제의 19074번은 아니다. 현재는 루이지애나의 주립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2] 롱의 정책이 일반적인 복지 정책과 다른 것은, 단지 정부가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부자들이 독점하는 부(자산) 그 자체를 국민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어찌보면 자본의 사적 소유를 적극 옹호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상한선을 넘어 독점하는 것을 반대했을 뿐이다. [3] 다만 1940년대 후반 아칸소주에선 시드 맥매스라는 젊은 진보 정치인이 주지사로 당선돼 롱과 비슷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4] 물론 휴이 롱 본인과 동생인 얼 롱 주지사 사후 그 영향력이 크게 줄어서 보수적인 주지사들도 자주 집권하기도 했다. 한편 뉴올리언스 시장을 역임한 쳅 모리슨이나 롱 가문을 이어 20세기 후반 루이지애나 공직을 다수 차지했던 랜드리우 가문같은 롱 계열이 아닌 루이지애나 진보 정치인들도 충분히 존재했다. [5] 그의 매우 급진적이었던 주장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노조와 농민 조직에 의존했던 민주당의 특징을 벗어나 대도시의 여성, 흑인, 대학생, 성소수자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선거운동이 민주당의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고 평가받는다. [6] 물론 당시 롱의 상태는 불륜으로 인한 이혼 위기, 정신병, 주지사 임기제한 철폐를 둔 주 대법원과의 갈등등으로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고, 65세 자체가 그리 젊은 나이가 아닌 만큼 사망한게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7] 초기에는 남부출신 의원으로 인종 분리주의 정책에 찬성하고 1964년 연방민권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유색인종들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8] Hearts of Iron 모드마다 묘사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개 극좌-극우 포괄정당이나 파시스트 정당에 소속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실제로 롱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였다지만 동시에 극우 성향의 종교인이자 정치인인 제럴드 L. K. 스미스와 협력하는 등 파시스트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 [9] 롱과 연정할 경우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킨다. [10] 이 소설의 더글러스 맥아더는 공산당의 암약을 막기 위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여객기를 들이박는 자작극을 통해 군정을 연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종래에는 롱을 암살하려고까지 하다가 방탄조끼를 입고 살아남은 롱에게 실각한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관련된 일부 노조위원장들이 소련의 스파이여서 후버가 용납할 수 없었다. [11] 주의 법률 상 결혼과 이혼이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다. [12] 방송을 할 때 방송국이 실수를 한건지 원본 영상의 자막을 보면 죽은 지 61일 된 후에 연설을 한 것처럼 자막이 나온다. (1935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