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5-24 23:21:26

황진박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국서(國瑞) / 월정(月庭)
본관 평해 황씨[1]
출생 1888년 4월 17일
경상도 선산도호부 몽대면 성수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읍 성수리)[2]
사망 1942년 5월 26일[3]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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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황진박은 1888년 4월 17일 경상도 선산도호부 몽대면 성수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읍 성수리)에서 아버지 황봉수(黃鳳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이 일제에 강제로 병합되자, 약장수로 변장하여 각처를 두루 돌아다녔다.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귀향하여 장진홍· 김기용(金基用)·박관영(朴觀永)· 이내성· 장용희 등과 교유하며 지금까지의 구국 방법에 한계점을 절실히 느끼고 다 같이 결사대원이 되어 직접 행동으로 옮길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1927년 동지들과 함께 경상북도 도내의 주요기관이던 경상북도청·경상북도 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고 요인 암살을 계획하였으며, 김기용의 주선으로 고바야시 간이치(小林貫一)로부터 폭발물의 재료를 매입하여 폭탄을 만들었다. 거사 전에 그는 장진홍·박관영과 술을 마시면서 장진홍으로부터 폭탄을 던질 것을 권고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이에 장진홍은 10월 27일 직접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약을 던져 거사를 이루었다. 거사 직후 잠적하여 장진홍과 함께 일본으로 도항하였다. 황진박은 효고현에서 주방 조리사 및 토목 공사 인부 등 여러 일을 하는 한편, 일본에서 조선 노동자를 상대로 숙소를 차려놓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과 구국 사상을 불어넣으며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다시 동지를 규합하여 투쟁을 준비하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 경부(警部) 최석현(崔錫鉉)이 심어 놓은 밀정들에 의해 거취가 탄로나 1929년 3월 23일 장진홍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9년 12월 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의 예심에서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있었던 1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폭발물취체벌칙 위반·살인 예비의 혐의에 대해 다소 감형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이던 그해 7월 31일 동지 장진홍이 옥중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결하자, 감옥문을 파괴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재소자들과 함께 농성하며 옥중투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건조물 파괴죄로 8개월 더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각각 1936년 12월, 1941년 2월 제정·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등의 악법으로 인해 일경의 끝없는 감시 속에서 수차례 예비검속을 받으며 고군분투했으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고의 여독으로 1942년 5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하였다.

경상북도 구미시 3공단1로 191 동락공원 내 장진홍 의사 동상옆에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1] # [2] 평해 황씨 집성촌이다. [3] 2월 27일 별세했다는 기록도 있다. 디지털구미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