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21:54:46

홍무제/생애


{{{#!wiki style="margin:-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파일:1280px-A_Seated_Portrait_of_Ming_Emperor_Taizu.jpg 홍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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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생애 <colbgcolor=#fff,#1f2023> 생애
평가 평가
전투 파양호 대전
연호 홍무
능묘 명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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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나라 건국 이전
2.1. 어린 시절2.2. 극심한 가난2.3. 탁발승2.4. 홍건군
3. 명나라 건국 이후
3.1. 통치3.2. 기강을 바로잡다3.3. 일세일원제3.4. 후계자 문제

1. 개요

홍무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명나라 건국 이전

2.1. 어린 시절

홍무제 주원장은 1328년 10월 29일 원나라 호주(濠洲)[1] 종리현(현재의 안후이성 추저우시)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 주세진[2]과 어머니 진씨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중팔(重八)이다. 중팔은 아버지가 46세, 어머니가 42세 때 태어난 늦둥이인데 부모의 나이를 합치면 88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는 원나라 말기로 극심한 혼란기였다. 주원장이 태어난 1328년 한 해에만 진종, 천순제, 문종 세 황제가 즉위했다.

명나라의 개국공신들이었던 서달, 탕화, 주덕흥 등은 마을 친구였다.

2.2. 극심한 가난

17살 때 마을에 가뭄, 메뚜기떼, 전염병이 돌았다. 중팔의 부모와 형이 이때 사망했다.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연이은 자연재해와 흉작, 가혹한 조세 수취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작에 굶주림으로 세상을 떴고, 하나 남은 형은 마지막 남은 쌀알 13개로 죽을 끓여 중팔에게 넘겨준 뒤 굶어서 죽고, 중팔만 살아남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땅을 구하지 못했는데, 중팔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줄초상이었다. 이때 유계조(劉繼祖)라는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땅을 내놓아 겨우 장례를 치렀다. 주원장은 지존의 황제가 된 후, 유계조에게 의혜후(義惠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2.3. 탁발승

굶주렸던 주원장은 절(불교)에 몸을 의탁했다. 당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체계적인 승려 육성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음식을 탁발하여 먹는 탁발승이 되었는데 불교 수행의 일환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걸하는 거지였다. 이때 구걸하던 기억 때문에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자신에게 올리는 문서에서 스님 승(僧),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등의 글자를 못 쓰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주원장은 도적인 홍건적 출신이었기 때문에 도적과 관련된 글자도 금지했다. 그래서 주원장으로부터 '내가 싫어한 단어들과 비슷한 발음의 글자를 일부러 사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2.4. 홍건군

혜종 지정 12년( 1352년) 정월, 호주 정원현의 토호였던 곽자흥이 손덕애(孫德崖) 등과 연합하여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수만 명의 농민이 곽자흥에게 호응했다. 이들은 군대와 종교가 결합하여 곽자흥은 자신이 백련회의 수령이라고 선포했다.

주원장은 25살에 홍건적 생활을 시작했다. 사서에 이 부분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단 1년 만에 곽자흥의 양녀 마수영[3]과 결혼하고 곽자흥 군단의 2인자가 되었다. 일개 병졸로 입대하여 순식간에 지도자가 된 것이다. 곽자흥이 한고조 유방처럼 주원장의 관상을 본 것인지, 주원장이 실력 발휘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중팔은 부대에서 '주 공자'로 불렸고 이름을 '주원장'으로 고쳤다.

호주성의 홍건군은 처음부터 곽자흥과 손덕애를 비롯하여 5개나 되는 파벌로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사사건건 대립했다. 원나라 말기의 승상이자 충신이며, 명장이었던 메르키트 토크토아(탈탈)가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홍건군의 주장 이이가 지키고 있었던 서주성을 함락했다. 이때 서주성의 백성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고, 이이도 포로로 잡혀 참살당했다. 팽대와 조균용이 지휘하는 홍건군은 서주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호주성으로 들어왔다.

곽자흥은 지모가 뛰어난 팽대를 우대한 반면, 산적 출신의 조균용을 무시했다. 이때 손덕애가 조균용을 부추겨서 곽자흥을 제거하자고 했다. 조균용은 반란을 일으켜 곽자흥을 포박하고, 손덕애 휘하 군진의 영창에 가뒀다. 당시 주원장은 화북에 있었는데 황급히 호주로 달려와 두 처남을 대동하고 팽대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팽대는 주원장과 함께 부하들을 끌고 가 파옥하고 곽자흥을 구했다. 파벌 싸움이 심해 호주의 홍건적은 밖으로 세력을 넓힐 수 없었다.

이런 일을 겪은 주원장은 사병이 없으면 자신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곽자흥에게 장인을 위해 병사를 증원하겠다며 의심을 피하는 말로 간청한 끝에 고향 종리로 돌아왔다. 지정 13년( 1353년) 주원장은 고향에서 병사를 모집했다. 주원장이 홍건군이 된 지 1년만에 두목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서달, 주덕흥, 곽영을 비롯해 700여 명이 모였다. 주원장은 이들을 데리고 곽자흥에게 돌아갔다.

곽자흥의 고향 정원은 호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정원의 장가보에는 원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민병 3,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홍건군에 귀부하지 않은 세력이었다. 주원장이 가서 3일 안에 귀순하라고 말했는데 수령이 거절하자 300여 명을 거느리고 계책을 세워 수령을 사로잡고, 병사 3,000여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활비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민병 800여 명도 주원장의 부대로 편입되었다.

병력 증강에 성공한 주원장은 밤을 틈타 정원의 횡윤산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영을 공격했다. 이때 원나라 장수 무대형이 투항하여 마침내 정원성이 주원장의 수중에 들어왔다. 주원장은 항복한 병사들 가운데 한족 출신 병사 20,000여 명을 뽑아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켰다. 정원이 함락되자 그곳의 토호였던 풍국용과 풍국승 형제가 농민군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주원장은 풍씨 형제가 사대부임을 알고 그들에게 천하를 취할 계책을 물었다. 풍씨 형제는 "금릉( 난징)을 취해 근거지로 삼은 후, 사방으로 나가 정벌하고, 인의를 제창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금은보화와 여색을 멀리한다면 천하는 어렵지 않게 평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원장은 크게 기뻐하며 풍씨 형제를 군영에 머물게 하고 참예기무로 삼았다.

정원을 평정하고 안휘성 저주로 진군하는 도중 1354년(지정 14년) 정원 사람 이선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가 통했다. 주원장이 예를 갖추고 "천하가 전란에 휩싸였는데 언제 안정을 찾을 수 있냐"고 묻자 이선장은 한고조 유방을 언급하며 "그는 도량이 넓고 사람을 잘 알아보아 적재적소에 썼으며, 함부로 죽이지 않았던 까닭에 군사를 일으킨 지 5년 만에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답하고는 "지금 원나라는 기강이 무너지고 사분오열로 분열되었는데 주원장의 고향 호주가 유방의 고향 패현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니 당신이 고향 선배의 장점을 배운다면 천하는 평정될 것"이라고 답했다. 주원장은 이선장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며 군영에 머물게 하고 각종 문서와 서적을 관장하는 서기의 직책을 맡겼다. 그리고 이선장의 책략으로 저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호주성에서는 홍건군 수령들 간의 반목이 끊이질 않았다. 겨울 팽대는 노회왕을, 조균용은 영의왕을 참칭하고 세력 다툼을 벌었다. 얼마 후 팽대가 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조균용의 위세가 곽자흥을 능가했다. 조균용은 곽자흥을 협박하여 우이와 사천을 공격하도록 하고, 기회를 보아 그를 제거하려 했다. 장인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들은 주원장은 사자를 보내 조균용에게 경고했다. 또 조균용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보내 장인을 돕도록 했다.

곽자흥은 병사 10,000여 명을 거느리고 호주성을 떠나 사위가 있는 저주성으로 입성했다. 주원장은 거느리던 30,000명의 병력을 장인에게 그대로 넘겼다.

원나라 승상 탈탈의 관군이 고우에서 장사성의 군대를 격퇴하고, 저주성에서 멀지 않은 육합성을 포위했다. 주원장은 심복인 경재성과 함께 와양루[4]에 진지를 구축하고 육합성을 도왔다. 그가 육합성의 노약자들을 호위하고 저주성으로 돌아오자 탈탈은 즉시 추격해와 저주성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유인작전으로 탈탈의 군사를 격퇴했다. 하지만 맹호처럼 날랜 원나라 기병의 재침을 우려하여 포로로 잡은 병사들과 노획한 말들을 탈탈의 군영으로 돌려 보내고, 아울러 지역의 원로를 사자로 보내 술과 고기로 원나라 장수들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도적떼로부터 저주성을 지킬 뿐인데 왜 더 큰 도적을 쫓지 않고 선량한 백성만 살육하냐"며 읍소했다. 탈탈은 원나라의 지배층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한학에 정통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중서성 우승상 직책을 맡았을 때 과거제를 부활시켜 한족 출신의 사대부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정도로 국정을 다스리는 안목이 있었다. 탈탈은 주원장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여 철군했다.

1355년(지정 15년) 주원장이 화주를 함락시켰다. 곽자흥은 사위인 주원장을 총병관에 임명하고 화주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곧 곽자흥이 사망했다. 홍건군의 가장 큰 우두머리였던 소명왕 한림아는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를 도원수로, 장천우(張天祐)를 우부원수로, 주원장을 좌부원수로 임명했다. 한림아로부터 관직을 받은 주원장은 푸념했다. 하지만 한림아의 송나라가 위세를 떨쳤기에 주원장도 한림아의 신하로서 군대를 통솔했다.

강남(중국)의 중심이었던 집경로(集慶路, 지금의 난징)를 공격할 때 곽천서와 장천우가 전사했다. 주원장은 대원수로 승진하고 곽자흥의 군대를 전부 거느리게 되었다. 화주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군량미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장강 남안의 태평과 무호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주원장에게는 수군과 선박이 없었는데 마침 안휘 지방의 소호에 주둔하고 있었던 홍건군의 수군이 주원장에게 귀부 의사를 밝히고 원나라군의 봉쇄를 뚫은 뒤 화주에 도착했다. 주원장은 병사와 군마를 배에 태우고 장강을 건너 우저산에 진을 치고 휘하의 장수 상우춘을 선봉에 세웠다. 상우춘의 저돌적인 공격은 우저산을 주원장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장강 하류의 태평[5]으로 진격해 역시 점령했다. 성에 입성하자마자 노략질을 엄금하고 백성의 재물을 보호했으며 민폐를 끼치는 병사가 있으면 즉시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주원장은 태평흥국익원수부를 설치하고 난 뒤 스스로 원수의 지위에 오르고 이선장을 수부도사로 임명했다.

1356년(지정 14년) 금릉을 점령한 뒤 오국공(吳國公)이 되고, 새로 설치된 강남행중서성(江南行中書省)의 총성사(總省事)을 겸하면서 군벌의 한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여러 지역을 공격하면서 만난 지식인 및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세력을 운영하는 한편, 이들을 기용하여 효과적인 행정 정책을 수립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상류층의 예법과[6] 역사, 각종 지식, 유교 경전을 배우면서 제왕 수업도 받았다.

주원장은 원나라와는 많이 싸우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한족 군벌들과 세력을 다퉜을 뿐, 원나라와의 다툼은 다른 한족 군벌들이 상대하도록 내버려뒀는데 이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원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홍건군의 유복통 차칸테무르에게 박살난 뒤에 주원장의 세력이 원나라의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지만 운 좋게도 차칸테무르가 원나라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를 못하게 된 덕에 주원장은 안심하고 진우량과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원장은 역사를 바꾼 결전인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지정 2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했다. 이후 오왕(吳王)이 되어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했다. 1367년(지정 27년) 몽골의 위협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 배가 침몰하여 한림아가 익사했다.

주원장은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을 공격하여, 근거지인 평강을 함락시키고 그를 사로잡아 남부 지방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후 주원장은 서달 상우춘에게 25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주어 북벌을 단행했다. 1368년(홍무 원년) 초 오왕 주원장은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명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3. 명나라 건국 이후

3.1. 통치

계속 북벌을 단행하면서 원나라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끝에 1368년 여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 조정을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몽골의 잔여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한 까닭에 실질적으로 중국 전 지역을 완전히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내 마지막 원나라 세력이었던 윈난의 양왕을 제압한 1382년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수도도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남경에 있었는데,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남(중국)에서 일어나 전국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왕조였다.[7]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훨씬 전이지만, 1382년을 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이때부터 확장을 멈추고 수성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단 그 곳을 점령하면 안정과 정비를 위해 군사와 관리들을 보내야 하는데,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고, 바깥 지역은 교역할 것도 없으며(어떻게 보면 중화사상), 지금 있는 땅으로도 농사를 지어 먹기 충분하니까 그랬다고 한다.

3.2. 기강을 바로잡다

명나라 초기에는 몽골족과 싸우면서, 원나라 말기 막장이 되었던 사회 기강을 착실하게 바로잡고, 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기틀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 있었던 과거 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및 감독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노력했다.

제일 많이 신경을 쓴 것들 중 하나가 지역별 과거 합격자의 안배였다. 이 문제는 북송 때부터 주된 정치 현안이었다. 남송의 멸망 이후에도 반쯤 자치를 누리며 학맥을 이어온 강남인들이 몽골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화북인들을 제치고 합격을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방법이 상당히 과격해서 부정이라며 급제한 강남 출신 유생들을 죄다 죽여 버리는 것도 거리끼지 않았다.

3.3. 일세일원제

이전의 중국 왕조들은 황제 한 사람의 치세때 연호를 두세 번 이상 교체하기 일쑤였다. 주원장은 즉위하자 연호를 '홍무'로 정하고 일평생 사용했으며, 이후의 황제들도 한 황제에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제를 정착시켰다. 일세일원제는 후대의 청나라 때도 유지되었다. 딱 하나의 예외가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꿀 때 청태종이 천총에서 숭덕으로 개원한 것인데, 이는 청으로의 국호 변경이 제2의 건국으로 간주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훗날 일본 제국에서도 메이지 덴노 때부터 일세일원제를 적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4. 후계자 문제

1398년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숨을 거두면서 손자인 주윤문이 제위에 올랐지만, 1402년에 끝난 정난의 변에서 최종 승리하고 남경을 점령한 연왕 주체가 조카인 혜종 건문제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제3대 성조 영락제로, 정화의 해외 원정과 몽골 원정, 북경 천도 등을 단행한 황제였다.


[1] 우연의 일치로 나라이름 호주와 한자까지 똑같다. [2] 명 건국 후 인조로 추존 [3] 곽자흥의 절친한 친구였던 마공의 딸이었다. [4] 강서성 육합현 서쪽에 있는 고와양성 [5] 지금의 안휘성 안산시 당도현 [6] 주원장의 출신상, 상류층에서 쓰는 교양있는 단어와 말투 등을 따로 배울 필요가 있었다. [7] 왕조가 아닌 국가까지 포함하자면 540여 년 뒤 장제스가 이끄는 중화민국에 의한 국민당의 통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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