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6:32:54

호소노 하루오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FFFDF4"
{{{#!wiki style="margin:0 -10px -0px"
{{{#000 {{{#!folding [ 음반 목록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tablewidth=100%>
정규 1집 はっぴいえんど
1970/08/05
정규 2집 風街ろまん
1971/11/20
정규 3집 HAPPY END
1973/02/25
}}}}}}}}}}}}}}} ||

Yellow Magic Orchestra
호소노 하루오미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 {{{#!folding [ 디스코그래피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YELLOW MAGIC ORCHESTRA
1978.11.25
Solid State Survivor
1979.9.25
X∞MULTIPLIES
1980.6.5
BGM
1981.3.21
TECHNODELIC
1981.11.21
NAUGHTY BOYS
1983.12.14
SERVICE
1983.12.14
TECHNODON
1993.5.26
}}}}}}}}}}}} ||

호소노 하루오미
細野晴臣 | Haruomi Hosono
파일:190308_hh_1.jpg
이름 호소노 하루오미 | 細野晴臣 | Haruomi Hosono
출생 1947년 7월 9일 ([age(1947-07-09)]세)
도쿄도 미나토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베이시스트, 키보디스트
학력 릿쿄대학 사회과학부 (관광과 / 학사)
레이블 알파 레코드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핫피 엔도 시절2.3. 틴 팬 앨리, 솔로 시절2.4. YMO 시절2.5. 이후
3. 음악 스타일4. 디스코그래피5.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 음악가.

핫피 엔도,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하며 일본 대중음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1]

일본 외에서는 '해리 호소노'(Harry Hosono)라고도 알려져 있다.

타카하시 유키히로가 2023년 1월 11일에, 사카모토 류이치가 동년 3월 28일에 사망하면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일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47년 7월 9일 도쿄도 미나토구 출생. 친할아버지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생존자인 공무원 출신의 호소노 마사부미[2]이다. 외할아버지 나카타니 타카오는 피아노 조율사로 유명했다. 이외에도 이모가 외국계 영화 회사에서 일하는 등 예술과 관련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 호소노 히데오미는 자동차 회사에 근무했다고 한다.

15살 때부터 수많은 밴드를 거치다 1969년에 Apryl Fool이라는 밴드에서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그 해 같은 밴드 출신인 마츠모토 타카시, 스즈키 시게루, 오오타키 에이치와 같이 뭉쳐서 나온 밴드가 바로 그 핫피 엔도.

2.2. 핫피 엔도 시절

파일:hosono.jpg

포크 활동 시절 장발 + 수염의 모습. 이후 YMO로 활동하기 이전까진 사진 속 비주얼을 유지했다.

핫피 엔도 참조

2.3. 틴 팬 앨리, 솔로 시절

핫피 엔도가 72년 말 해체하면서 호소노는 73년부터 핫피 엔도의 멤버였던 스즈키 시게루 등등과 함께 틴 팬 앨리에 들어갔다. 틴 팬 앨리는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누키 타에코 같은 유명 뮤지션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마츠토야 유미가 아라이 유미로 활동하던 시절의 앨범들에서 연주를 맡은 바 있다. 이 밴드는 77년에 활동이 중단된다.

1972년 카네노부 사치코의 데뷔작 < み空>를 프로듀싱했고, 1973년 앨범 < HOSONO HOUSE>를 시작으로 솔로 활동도 열심히 했다. 1977년에는 이시다 아유미와 함께 틴 팬 앨리 패밀리라는 명칭으로 야마시타 타츠로, 요시다 미나코, 스즈키 시게루등등 함께 Our Connection이라는 앨범에 참여하고, 1978년에는 스즈키 시게루, 야마시타 타츠로와 함께 <PACIFIC>이라는 앨범을 작업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일렉트로닉에 빠져든 끝에 사디스틱 미카 밴드 출신 드러머 타카하시 유키히로, 키보디스트 사카모토 류이치를 모아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줄여서 YMO를 결성한다.

2.4. YMO 시절

YMO 참조

2.5. 이후

1983년 YMO의 활동정지 이후엔 주로 작곡가, 프로듀서로 활동했는데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토가와 준, 마츠바라 미키, 모리타카 치사토 등등 여러 아티스트들의 굵직한 히트곡들을 작곡했고 또 프로듀서로도 많이 관여했다.

이마와노 키요시로, 사카모토 후유미와 같이 프로젝트 그룹인 HIS로 잠시 활동한 적도 있다.

그 외에는 영화 음악도 간간히 제작하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스기이 기사부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나 어느 가족,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엔딩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노르웨이의 숲 영화판처럼 아예 카메오로 출연한 적도 있다. 애니메이션 음악 쪽으로는 키테레츠 대백과의 스페셜판 오프닝과 엔딩을 작곡했다. 게임 음악 쪽에서도 제비우스의 BGM을 편곡해서 음반에 수록하여 발매한 적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신곡도 발표한다.

3. 음악 스타일

핫피 엔도 시절엔 버즈(미국 밴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컨트리/포크 록을 했다. 1973년에는 포크, 보사노바 앨범인 < HOSONO HOUSE>[3]를 발표하고 이후 나온 <トロピカル・ダンディー(TROPICAL DANDY)ー>, < 泰安洋行(Bon Voyage co.)>, <はらいそ(PARAISO)> 앨범에는 당시 유행하던 트로피컬 사운드를 접목시켰다. YMO 결성 이후에는 전자음악으로 많이 기울어 현재는 앰비언트, 포크 쪽 성향으로 굳어진 편.

4. 디스코그래피

5. 기타

  • 핫피 엔도, 틴 팬 엘리 시절에는 베이스 기타를 맡았고 YMO 시절에는 신디사이저도 같이 담당했다. 그 밖에도 가야금 등등 연주 할 수 있는 악기가 많다고.
  • 할아버지 때문에 호소노 본인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관련인으로 간간이 등장하는 편.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가 사망해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어쨌든 유족이므로 2012년 사건 100주년 당시 피해자 위령비가 있는 핼리팩스에 가서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 나이가 일흔이 넘었는데도 가끔씩 예능에 출연한다. 개그나 콩트를 선보일 땐 최연자인 경우에도 은근 하찮은 포지션을 잘 맡는다.
  • 개그 속성이 강하고 권위의식이 없는 편이라 호시노 겐이나 오야마다 케이고 등의 후배 뮤지션들과도 친분이 깊다. 최근엔 호시노 겐과 교류가 많고, 음악적 멘토 역할을 맡고 있다. 호시노 겐의 첫 솔로 앨범은 호소노의 권유로 만들어졌기도 하다. 호시노 겐과 그의 예전 인디 밴드인 SAKEROCK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 밴드 동료 마츠모토 타카시 사카모토 류이치 못지 않게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꽤 많다. 앞에서 말했듯이 가야금을 배운 적이 있고 한국 느와르 영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 가수 김재중이 사진을 부탁하자 같이 찍어준 적이 있다고 한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래 음악 담당이었다. 그러나 관계자 측에서 호소노를 거부하며 당시 무명이었던 히사이시 조를 기용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대신 호소노는 야스다 나루미가 부른 엔딩곡을 작곡하였다.
  • YMO의 리더, 최연장자임에 불구하고, 다른 두 멤버에 비해 오히려 건강은 양호한 상태이다. 가장 생일이 늦었던 1952년 6월생인 타카하시 유키히로는 2023년 1월 폐렴으로 사망하였으며, 1952년 1월생인 사카모토 류이치도 두번의 암으로 인하여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3월 28일 타계했다.[5]
  • 2023년 해리 스타일스 내한 당시 호소노 하루오미를 만났다고 한다.


[1] 그가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영국 대중음악계에서 폴 매카트니가 차지하는 입지에 준한다. 마침 폴 매카트니도 베이시스트이고, 밴드를 여러 개 거쳤으며, 각 밴드가 대중음악계에서 큰 입지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나 첫 밴드가 단명했지만 각 국가의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밴드로 알려져있다. [2] 타이타닉호의 유일한 일본인 승객이자 생존자이다. 항해사가 자리가 남으니 타도 된다고 해서 탑승했는데, 혼자 살아남으려 여성과 아이 먼저 원칙을 어기고 구명정에 탑승하였다는 낭설이 퍼져 직장에서 해고되고 언론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죽은 이후에도 엄청나게 욕을 먹었으나 1997년에서야 진실이 겨우 드러나 명예를 회복했다. # [3] 싱글로 나온 恋は桃色(사랑은 복숭앗빛) 라는 곡이 아주 유명하다. [4] 자신의 첫 엘범 HOSONO HOUSE의 곡들을 본인이 샐프 리메이크 한 엘범. [5] 그로 인하여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