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00:53:52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의 역임 직책
{{{#!folding ▼
세비야 FC 주장
페르난도 나바로
(2014~2015)
호세 A. 레예스
(2015~2016)
비센테 이보라
(2016~2017)
}}} ||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파일:JOES_ANTONIO_REYES_RIP.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José Antonio Reyes
본명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칼데론
José Antonio Reyes Calderón
출생 1983년 9월 1일
스페인 안달루시아주 우트레라
사망 2019년 6월 1일 (향년 35세)
스페인 안달루시아주 우트레라
국적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73kg
직업 축구선수 ( 윙어, 공격수 / 은퇴)
소속 선수 세비야 FC (1994~1999 / 유스)
세비야 FC B (1999~2001)
세비야 FC (2000~2004)
아스날 FC (2004~2007)
레알 마드리드 (2006~2007 / 임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07~2012)
SL 벤피카 (2008~2009 / 임대)
세비야 FC (2012~2016)
RCD 에스파뇰 (2016~2017)
코르도바 CF (2018)
신장 톈산 쉐바오 (2018)
에스트레마두라 UD (2019)
국가대표 파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1경기 4골 ( 스페인 / 2003~2006)

1. 개요2. 선수 경력
2.1. 세비야2.2. 아스날2.3. 스페인으로의 복귀
3. 사망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clearfix]

1. 개요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의 전 축구선수. 아스날,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세비야에서 활약했으며, UEFA 유로파 리그 통산 5회 우승으로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다. 2003년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2006년까지 21경기 4골을 기록했다.

2. 선수 경력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영광의 순간들

2.1. 세비야

1999년 16살의 이른 나이에 1군 스쿼드에 들어가 라리가에 데뷔한 레예스는 2001년 18살에 이미 팀의 주전을 차지한다. 2001년에 8골을 성공시키면서 맹활약한 레예스는 아쉽게도 호아킨 산체스에게 밀려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는데 실패하지만 이후 레예스는 빅클럽들에게 관심을 받게 된다.

2003년 그는 줄리우 밥티스타와 훌륭한 호흡을 보이며 맹활약해 프리메라리가 전반기 세비야의 돌풍을 이끌었다.

2.2. 아스날

2004년 1월, 이러한 레예스를 차기 팀의 에이스로 키우고자 했던 아르센 벵거는 당시 그 답지 않은 클럽의 최다 이적료를 투자하여 아스날로 데려온다. 아스날에서는 윙어로도 뛰었지만, 투톱에서 티에리 앙리의 파트너로도 많이 뛰었다. 본래 주전 공격수인 데니스 베르캄프는 나이가 꽤 많았고[1] 또다른 경쟁자인 로빈 반 페르시는 부상이 많았기 때문에 레예스에게 어느 정도 기회가 오게 된 것이었다.

입단 초기에 레예스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2] 적응 후에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팀의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에 공헌하고 다음 시즌에는 FA컵에도 우승한다. 2004년 8월에는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스페인 국적의 선수로서는 첫번째 수상이었다. 허나, 이후 다시금 적응을 하는데 실패를 하게 되는데 이는 게리 네빌 폴 스콜스의 공헌이 지대하였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스콜스가 얼마나 더티한 태클러인지 알 수 있다. 어쨋든 이후에 레예스는 EPL 특유의 피지컬 싸움과 거친 플레이로 인해 점차 소극적으로 플레이하게 되었고, 이에 겹쳐서 영국 생활 적응에 실패하면서 초기에 보여줬던 엄청난 퍼포먼스를 못 보여주게 되었다.

그래도 2005/06 레예스는 리그에서는 무난했지만[3]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내내 맹활약을 펼치며 아스날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이끌어낸다.[4] 하지만 정작 결승에서 레예스는 단 5분만 출전하였고, 레만의 퇴장 악재 속에 팀은 바르셀로나에게 1-2로 역전패하며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2.3. 스페인으로의 복귀

레예스는 2006년 여름 향수병을 호소하며 스페인을 그리워하였고, 결국 밥티스타와 1:1 맞트레이드로 아스날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임대 생활을 한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는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리그 최종전 마요르카를 상대로 극적인 2골을 기록해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한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레예스는 레알 마드리드로 완전 이적하는 것이 아닌 라이벌 구단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그러나 아틀레티코에서 극악의 부진을 보여준 레예스는 2008/09 시즌 벤피카로 임대를 다녀온다. 하지만 2009/10 시즌 복귀하였어도 팬들은 여전히 레예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레예스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맹활약을 펼쳐 팀의 3:1 승리를 이끈 것을 기점으로 디에고 포를란, 세르히오 아게로 등과 함께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며 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꾼다.

2010/11 시즌 그는 디에고 포를란의 부진과 시망 사브로사의 이탈로 인해 공격력이 반감된 팀의 공격진을 아게로와 함께 이끈다.

2011/12 시즌 레예스는 만사노 감독과 불화로 인해 겨울 이적 시장을 통해 고향팀인 세비야로 이적하지만, 유로파리그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으로 출전했고, 해당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유로파리그를 우승했기 때문에 우승 멤버로 인정받게 된다.

친정팀인 세비야로 돌아온 레예스는 팀의 주장이 되었고, 우나이 에메리의 지휘 아래 2013/14, 2014/15 , 2015/16 시즌 유로파리그 3연속 우승을 달성하여 유로파리그 통산 5회 우승을 기록한다.

2016/17 시즌에는 에스파뇰로 이적하였다.

에스파뇰에서 한 시즌을 뛴 이후 세군다 리가에서 활동하였고, 잠시 중국 리그에도 진출했으나 이내 스페인으로 돌아와 세비야 지역의 세군다 팀에서 뛰게 되었다.

3. 사망

2019년 6월 1일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세비야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함께 차에 타고있던 조카도 세상을 떠났으며 레예스와 같은 소속팀이었다고 한다. 향년 35세. 레예스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자 아스날,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세비야는 일제히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를 아스날로 데려온 아르센 벵거 감독 또한 애도했다. 마침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토트넘과 리버풀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경기를 앞두고 레예스를 추모하는 묵념을 갖기로 하였다[5]. 세비야 출신인 리버풀 수비수 알베르토 모레노는 챔피언스리그 우승 후 레예스를 추모하는 티셔츠를 입고 우승 세리머니에 참여했다.

그러나 스페인 언론에서 보도한 경찰 보고서에 의하면 레예스는 시속 237km/h로 질주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에 산티아고 카니사레스는 "과속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태도며 그 사고로 인해 본인 외에 동승하던 사촌도 사망하였다. 차가 전복했으니 망정이었지 다른 차와 충돌하였다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수도 있었던것. 사고가 발생한것은 유감이지만, 레예스는 영웅처럼 추모받을 자격이 없다"라며 레예스를 비판했다. 관련 자료

이후, 스페인 경찰 측은 사고의 최종 원인이 과속만은 아닐 수 있다고 언급하며 레예스가 무엇 때문에 과속을 했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본인이 스스로 과속을 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쫓겨서 과속을 했는지, 차량 결함으로 인해 급발진이 된 것인지, 아니면 급성 심근경색이나 부정맥으로 사고 당시 심정지 상태였을지 조사하고 있다.

참고로 2007년생인 레예스의 아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즈가 앞으로 돌보고 키운다고 하며 현재 스페인 연령별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주목받는 유망주이다.

최종적으로 최소 시속 187km/h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히 말하면 뒷바퀴가 갑작스레 터지면서 과속인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4. 플레이 스타일

스피드, 개인기, 창조성 3박자를 갖춘 스페인 정상급 테크니션이었으며, 공격적인 측면에서 매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윙어까지 모든 자리를 소화했기에, 아스날에서는 굉장히 요긴하게 써 먹었으며 그중 섀도우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했으나, 실제로는 왼쪽 윙어로 더 자주 출전 하였다. 아스날 FC의 전술상 실제로는 왼쪽 사이드 플레이메이커 역할이었고, 피레스의 부재시 그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 받아 뛰는 것이었으나, 레예스는 왼발잡이 플레이메이커라는 희소적인 가치가 있었으며, 장기 부상 이후 신체 능력이 하락한 피레스보다 훨씬 기동성이 뛰어나고 역동적이었다. 득점력에 있어서는 피레스가 여전히 우위를 가져 갔으나, 레예스가 좀 더 생동감 있는 플레이를 펼쳐 보였다.

레예스가 아스날에서 적응을 못했다는 세간의 정설과는 달리 순수하게 경기장 안에서의 활약 자체는 늘 뛰어 났으며, 경기도 거의 주전에 가깝게 꾸준히 소화하는 선수였다. 플레이에 결점이나 약점이 없는 선수였다. 창조적이며 기술적이고 속도를 갖췄으며 영리했다. 클래식한 플레이메이커가 아닌 현대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득점과 어시스트도 일관되게 충분히 기록하던 선수였으며 기복도 없었다.

단지 피레스, 융베리, 베르캄프 등 자신의 선배들처럼 한 시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는 폭발력이 없었던 것이 유일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아스날에서 저마다 크게 족적을 남긴 시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전성기 때는 경기력을 넘어서는 스탯 생산성이 뛰어난 선수들이었으나, 레예스는 그러한 폭발력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꾸준히 일관적으로 높은 수준의 활약을 성실히 했으나, 크게 터지지 못하여 2시즌 반을 보내다가 레알 마드리드 임대 이후 내리막을 걸었다. 이후 커리어 내내 클래스 있는 선수임에는 여전했으나, 세비야의 진주로 칭송 받았던 시절의 기대치대로 스타 플레이어 수준의 업적을 쌓지는 못하였다.

레예스는 따라서, 당시 셀타 비고 임대 이후 발렌시아 커리어 초기에 비센테를 대체하며 왼쪽 플레이메이커로 등장한 다비드 실바가 대두되기 이전에 활약한 왼발잡이 스패니쉬 플레이메이커였다고 볼 수 있다.

실바에 비하면 주력이 더 빠르고 공격수에 가까운 선수였으며, 득점력은 더 좋았다. 유려하고 부드러우며 신중한 경기 운영을 하는 실바와는 다르게, 당시 아스날의 경기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조금 더 직선적이고 대범하며 날카로운 패싱 센스를 보여 주었다. 이는 태생이 바르셀로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아스날에서 성장하면서 스타일이 직선적으로 바뀌게 되는 세스크 파브레가스와도 유사하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1] 1969년생으로 2005-06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2] 입단한지 얼마 안되어 미들즈브러와의 칼링컵 2차전에서 자책골을 넣어 아스날의 탈락을 이끌고만다... [3] 26경기 5골을 넣었다. 겨울에 이적해 13경기 4골을 넣은 엠마누엘 아데바요르에 비해 부족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본 포지션이 스트라이커인 아데바요르와 달리 레예스는 스트라이커가 주 포지션이 아니며 굳이 뛰자면 섀도우 스트라이커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 이 시즌, 레예스는 베르캄프를 제치고 1 시즌 동안 주전을 차지했는데 레예스의 부족한 골 결정력을 티에리 앙리가 완벽하게 채워주었다. 이 시즌 앙리는 32경기 27골이라는 상당한 기록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4] 당시 아스날은 리그와 챔스에서의 포메이션이 달랐고, 공격진의 구성도 조금씩 달랐다. 리그에서는 주로 아스날 특유의 4-4-2를, 챔스에서는 4-5-1을 구사했다. 겨울시장에서 이적한 아데바요르가 리그에서 투톱으로 뛰지만 컵타이로 챔스에 출전을 못했던 이유도 있고, 흘렙의 경우는 레예스처럼 리그에서는 적응이 더뎠지만 챔스에서는 그럭저럭 활약했다. 륭베리도 스피드 저하로 리그의 4-4-2에서는 제 역할을 못했지만 4-5-1의 공미 역할은 괜찮았다. 이에 따라 멀티포지션을 가장 잘 수행하는 레예스가 포지션을 옮겨다녔다. [5] 다만 경기 당일에는 묵념 대신 기립박수로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결승전 분위기 특성상 침묵을 진행할 정도로 통제하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한 듯. [6] 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