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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마켓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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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존 알트겔드의 사면4. 평가5. 관련 문서

1. 개요

The Haymarket af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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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의 유래가 된 사건. 미국 노동운동계에선 그 해에 AFL(미국노동총연맹, America Federation of Labor, 2023년 현존)이 탄생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미국 노동운동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념하고 있다.

2. 상세

1886년 5월 1일 토요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는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아나키스트들이 연대해 미시건 애비뉴에서 총 파업 궐기대회를 열었다.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한 집회는 이날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 30~50만이 동참했다. 당시 미국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아나키스트들 역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5월 3일 시카고 인근의 맥코믹 공장에서 경찰이 발포해 사상자가 나왔다. 공식적인 사망자는 4명인데 일부 언론은 6명으로 보도했다.

다음날인 5월 4일,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증언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평화 시위였으나, 오후 10시 30분 경찰의 해산 시도에 누군가가 경찰 쪽으로 사제폭탄을 던졌다.[1] 폭탄은 경찰 한가운데서 폭발해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2] 경찰은 즉각 대응 사격을 해, 노동자 측에 사상자 70명 이상을 낸다.

주동자 8명이 폭동죄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충분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부는 그 중 7명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최종 형이 집행된 것은 5명이었고 폭탄 제조자 루이스 링은 집행 전날 자살했다.

헤이마켓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없진 않으나, 학계의 주류설은 재판부의 사형 선고가 부당한 졸속 재판이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 폭탄 폭발로 사상자가 생겼을 때, 헤이마켓 사건으로 기소된 8명 대부분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사형당하거나 금고형을 받은 8명의 노동운동가들이 참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었기 때문에 이 판결은 세계적으로 많은 노동 운동가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오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모리스, 루시 파슨스, 오스카 와일드[4] 등 사회주의 계열 혹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지식인들은 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크게 비판했다. 버나드 쇼의 경우 "세상이 죄 없는 8명의 인민을 잃어야 한다면, 그보다 오히려 일리노이 대법원의 8명 배심원을 잃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5]라고 날선 반응을 쏟아냈다.

3. 존 알트겔드의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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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6월 26일 민주당 출신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알트겔드는 헤이마켓 사건 주동자들의 전면 사면을 1만 8천 단어짜리 장문의 글과 함께 선언했다. 그 덕택에 그나마 무기징역형에 놓였던 세명의 노동자는 자유는 물론 목숨까지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당대 미국에서 가장 노동 이슈에 대해 진보적이었던 인물로, 1894년 벌어진 풀맨 철도노조 파업 사건(The Pullman Strike)에서도 그는 주 방위군 투입을 반대했으며, 심지어 같은 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연방군 파견에 동의했음에도 이를 결사적으로 막았다. 이 사건은 민주당을 친기업 보수파와 윌리엄 J. 브라이언 등의 진보파로 분열시켰다. 또한 이는 대통령과도 파워게임을 벌일 수 있는 주지사의 권력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알트겔드는 당시 노동 운동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중산층과 그 공포를 타겟으로 한 공화당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이후 선거에 연거푸 패배하면서 그의 정치 커리어가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알트겔트는 "전혀(Never)! 내일 다시 이 사건을 다룬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할거요."라면서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알트겔드는 미국사에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걸고 신념을 지킨 정직한 정치인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

4. 평가

헤이마켓 사건 이후 시카고의 노동 운동은 크게 성장했고 8시간 노동도 현실화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국제적 기념일로 결정한다.

헤이마켓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노동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지만, 미국의 급진적 노동운동은 반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후 급진적 노동운동단체였던 노동기사단은 해당 사건에 엮여 '반국가 폭력집단'으로 몰려 국민들의 반감을 사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결국 미국 노동운동계는 1886년에 새뮤얼 곰퍼스(1850~1924)가 창설한 온건 산별노조연합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상돈 교수[6]는 국내에 헤이마켓 사건이 심하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시카고에서 30만 명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건 미국 전역에서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지 시카고에서 시위에 참여한 인원수가 아니며, 이 파업은 시카고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시카고에서 파업에 참가한 인원은 3~4만명에, 시위 참가인원은 그 2배에 달하는 8만 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7]

위 지적에도 불구하고 헤이마켓 사건의 본질은 시위 도중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을 구실로 삼아 테러와 연관성이 없던 아나키스트들을 죽이려 한 사법살인 행위라는 점에 있으며, 19세기 후반 미국 도금시대의 자본주의 성장과 눈부신 발전에는 한편으로 노동운동 탄압과 같은 그림자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5. 관련 문서


[1] 금속 공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채워넣고 불 붙이는 퓨즈를 연결한 물건이다. 터지면 파편 수류탄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이걸 만든 사람은 독일인인 루이스 링(Louis Lingg)이라는 아나키스트였고, 사건 이후 그의 집에서 같은 종류의 폭탄과 폭탄을 만들던 재료가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아래 사형선고를 받은 7명의 노동운동가 중에는 이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2] 위키피디아에는 경찰 7명이 사망했다고 나와 있다. [3] 사실 이런 상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경우 사건 개요와 가해자들을 정확히 밝혀낼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폭동의 주동자들에게 해당 사건의 책임까지 물어 기소한 사례는 이 외에도 굉장히 많다. 전문가들은 이런 관행을 미국 사법 체계의 뿌리 깊은 문제점으로 본다. [4] 버나드 쇼가 구명운동을 벌이러 다닐 때 당시 이름 있는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서명에 응했다. [5] https://www.sedaily.com/NewsVIew/1OFSJLHOHD에 따르면 이 말의 출처는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 저항사>. [6] 보수우익적 경제사고 방식을 가진 인물로 19대 총선의 박근혜 후보 캠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다. 제3공화국 헌법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고, 투발루가 바다로 가라앉는다는 주장은 좌파의 조작이라고 문화일보에 기재한 바 있다. 그러나 진짜로 투발루가 바다로 가라앉는게 드러나자 이에 대하여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7] 이 기사는 거의 제임스 그린의 '헤이마켓에서의 죽음'이라는 책을 인용하고 있어서 오해할 수 있는데, 헤이마켓의 죽음(Death in the Haymarket)이란 책은 절대 보수적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그 반대이며, 저자 역시 진보적 역사가이다. 미번역 도서라서 어차피 읽은 사람이 적을 테니 그냥 인용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