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0:52:47

한상질

1. 소개2. 활동3. 여담4. 대중매체

1. 소개

韓尙質
(1350~ 1400)

여말선초의 인물.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한수의 아들, 개국공신 3등 한상경의 형, 한기의 아버지, 한명회의 조부.

2. 활동

청주 사람으로 성품이 총명하면서 민첩했고 1370년대에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성적이 좋았으며, 1374년에는 대군의 시학이 되었다.

1390년 4월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있을 때 대간들이 이색을 탄핵했다가 탄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두 사직했고 공양왕이 그들을 좌천해 수령으로 삼자 이전의 직책을 그대로 주라고 상소했지만 거절당했다.

우상시에 임명되었다가 5월에는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고 6월에 천추절과 함께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1392년에 예문관 학사를 지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화령, 조선 중에서 국호로 선택할 국호를 정하게 했다.
주문사(奏聞使) 한상질(韓尙質)이 와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전하니, 임금이 황제의 궁궐을 향하여 은혜를 사례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그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소. 삼가 본부(本部)에서 지금 성지(聖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앞서 가게 하오."

임금이 감격해 기뻐하여 한상질에게 전지(田地) 50결(結)을 내려 주고, 경내(境內)에 교지를 내렸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1393년에 첨서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 서북면(양광도) 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1400년에 사망해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3. 여담

민통선 지역인 파주 서곡리에 한상질의 묘가 있는데, 1991년 1월 묘가 도굴되면서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시작되자 한상질의 묘가 아니라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발굴된 묘지석 및 벽화 등 여러가지 사실로 한상질이 아닌 한상질의 외증조부인 권준의 묘로 밝혀져 재판에서 분묘기지권이 약 300년간 관리해오던 청주 한씨 문열공파에서 안동 권씨 창화공파로 바뀌었다. 실제 한상질의 묘는 권준 묘의 뒤에 있는 쌍분으로 추정된다.

4. 대중매체

의외의 미디어에서 제법 중요한 역할로 등장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에 가서 황제에게 국새와 국호를 받아오는 역할로 출현했다. 문제는 사고를 쳤다는 것. 배를 타고 개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괜히 지나가는 새끼 고래를 공격하는 바람에[1] 자극받은 어미 고래의 습격을 받고, 배가 침몰하고 국새마저 고래가 삼켜버려 잃어버린다. 이후 이성계의 분노를 피하기 위하여 정도전과 함께 해적의 습격으로 국새를 잃어버린 것으로 꾸민다. 극이 진행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역할이다. 배우는 오달수. 그 답게 진지한 연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꽤 웃긴다.

[1] 새 나라 왕조를 열 국새를 싣고 가는 배를 미물 따위가 막아섰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