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16:20:34

하워드 켄달

하워드 켄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에버튼 FC 로고.svg

15대, 18대, 23대
파일:아틀레틱 클루브 로고.svg

39대
파일:맨체스터 시티 FC 로고.svg

30대
파일:셰필드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19대
}}} ||
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external/i.eurosport.com/1713287-36264133-640-360.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하워드 켄달
Howard Kendall
출생 1946년 5월 22일
잉글랜드 더햄 주 라이튼
사망 2015년 10월 17일 (향년 69세)
잉글랜드 사우스포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 (하프백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63~1967)
에버튼 FC (1967~1974)
버밍엄 시티 FC (1974~1977)
스토크 시티 FC (1977~1979)
블랙번 로버스 FC (1979~1981)
에버튼 FC (1981)
감독 블랙번 로버스 FC (1979~1981)
에버튼 FC (1981~1987)
아틀레틱 클루브 (1987~1989)
맨체스터 시티 FC (1989~1990)
에버튼 FC (1990~1993)
스코다 크산티 FC (1994)
노츠 카운티 FC (1995)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95~1997)
에버튼 FC (1997~1998)
이라클리스 피레우스 FC (1998~1999)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
3.1. 에버튼의 거인3.2. 아틀레틱 빌바오 시절3.3. 맨체스터 시티 시절3.4. 에버튼 2기3.5. 방랑기3.6. 에버튼 3기
4. 은퇴 후의 삶5. 수상
5.1. 클럽
5.1.1. 선수5.1.2. 감독
5.2. 개인

[clearfix]

1. 개요

하워드 켄달은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 모두 에버튼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는 축구계에 뛰어든 이래 많은 팀에서 활동했지만 유독 에버튼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반면 다른 팀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도 1980년대 에버튼의 최전성기는 이 사람이 이끌지 않았으면 결코 이뤄질 수 없었고 에버튼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복귀하여 있는 힘을 다해 헌신했기에 토피스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2015년 10월 17일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 수많은 이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2. 선수 경력

파일:external/www.101greatgoals.com/howard-kendall.jpg

켄달은 1961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그는 1963년 5월에 데뷔했고 1964년 웨스트햄 유나티드와의 FA컵 결승전에서 선발 출전했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는데, 이는 FA컵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결승전에 출전한 것이었다. 다만 경기 결과는 웨스트햄의 3:2 승리로 끝났고 그는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켄달은 1967년 3월, 해리 캐터릭 감독에 의해 8만 5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에버튼으로 입단했다. 그는 앨런 볼, 콜린 하비와 함께 에버튼의 미드필더진을 도맡았다. 사람들은 이들 세사람을 가리켜 "성스러운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세 선수들은 에버튼이 1969-70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후 켄달은 이듬해에 팀의 주장이 되었고 에버튼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1972-73 시즌 에버튼이 17위에 그치자, 보드진은 켄달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는 1974년 2월에 버밍엄 시티로 이적해야 했다. 켄달은 당시 강등권에 놓여있던 버밍엄 시티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여 버밍엄시티가 1부 리그에 잔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켄달은 1977년 8월 4만 파운드를 기록하며 스토크 시티로 이적했다. 그는 스토크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지만 정작 팀은 부진에 휩싸였고 그를 데려왔던 조지 이스트햄은 경질되고 말았다. 1978년 스토크의 새 감독으로 부임한 앨런 듀번은 켄달을 선수 겸 코치로 전향시키고 그에게 선수 관리를 맡겼다. 캔달은 스토크가 2부리그로 추락한 뒤에도 남았고 1978-79 시즌에 스토크를 3위로 이끌며 1부리그로 복귀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듀번은 켄달이 계속 남아서 스토크가 1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잇도록 도와주길 희망했다. 하지만 켄달은 자신이 팀을 주도하기를 희망했고 결국 1979년 여름 블랙번 로버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참고로 켄달은 잉글랜드 U-23 대표팀에 참여하여 1964년 유스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엔 단 한번도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3. 감독 경력

3.1. 에버튼의 거인

파일:external/i1.liverpoolecho.co.uk/howard-kendall-453204836.jpg

1979년 6월 블랙번 로버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한 켄달은 1979-80 시즌에 팀을 3부리그에서 2부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81년 5월, 켄달은 에버튼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켄달은 1981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감독 생활에 매진했다. 하지만 첫 3시즌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1984년 1월에 경질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리그컵 결승전까지 진출하여 리버풀에게 석패한 뒤 FA컵에서 왓포드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간신히 경질을 모면했다. 이후 그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1984-85 시즌은 그의 감독 경력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는 리그에서 2위 리버풀을 승점 13점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을 달성했고 유로피언 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해 에버튼 역사상 유럽 대회 첫번째 트로피를 획득했다. 그리고 FA컵 결승전에도 진출했지만 아쉽게 리버풀에게 패배했다. 그후 1985-86 시즌엔 리그와 FA컵 모두 준우승했고(리버풀이 리그, FA컵 모두 우승했다) 1986-87 시즌엔 주포였던 게리 리네커 FC 바르셀로나로 떠났음에도 리버풀을 9점차로 따돌리고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가 이렇듯 에버튼의 성공시대를 이끌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탁월한 영입 전략 덕분이었다. 그는 피터 리드, 트레버 스티븐, 네빌 사우스올 같은 어린 선수들을 영입하고 노장 선수들을 제 때에 고액에 팔아치워 팀의 재정을 잘 관리했다. 그 결과 에버튼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켄달은 유명 선수들도 적절하게 영입했다. 예를 들어 게리 리네커를 들 수 있는데, 켄달은 이 유명한 영국 선수를 1985년에 영입하였고 리네커는 1985-86 시즌에 38골을 몰아치며 대활약했다.

이렇듯 에버튼의 성공 신화를 이끌어낸 켄달은 1985년부터 리버풀 팬들이 헤이젤 참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잉글랜드 클럽들이 유럽 대회에 5년간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팀을 떠나 스페인의 축구 구단 아틀레틱 빌바오로 향했다.

3.2. 아틀레틱 빌바오 시절

파일:external/www.naiz.eus/kendall.jpg

켄달은 1987년 바스크 지역의 유명 구단 아틀레틱 빌바오로 부임했다. 그는 첫 시즌에 4위를 기록하여 유로파 대회에 참가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유는 바로 바스크 선수들만 육성할 수 있다는 정책 탓에 새 선수 영입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한때는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그는 빌바오에 정진할 것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1989년 11월 15일, 켄달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3.3. 맨체스터 시티 시절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바비 롭슨이 물러나면 빌바오에서 경질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켄달을 차기 대표팀 감독으로 지명하려 했다. 하지만 켄달은 1989년 12월 7일에 대표팀 감독 대신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의 맨체스터 시티는 14위로 머물렀다. 그 후 1990년 월드컵이 끝난 뒤 바비 롭슨이 사임하자, 축구 협회는 켄달을 새 감독으로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켄달은 이를 거부했고 그레이엄 테일러가 그 대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3.4. 에버튼 2기

파일:external/i2.liverpoolecho.co.uk/PA-4145352.jpg

1990년 11월 7일, 맨시티에서 감독 생활을 하던 켄달은 에버튼이 강등 위기에 직면하여 콜린 하비를 경질한 후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즉시 에버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맨시티는 1부리그 우승을 다투고 있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도 3:3 무승부를 거두는 등 강력한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켄달은 그런 팀을 떠나 강등권에 헤매고 있는 에버튼으로 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맨체스터 시티는 직업이지만 에버튼은 내 아내다.

이후 켄달은 강등권 싸움을 벌이던 에버튼의 성적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고 에버튼은 9위를 기록하며 중위권으로 도약했다. 또한 리버풀을 5라운드에서 격파하고 FA컵 준결승에 진출하여 팬들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에버튼은 갈수록 악화되는 재정과 선수 이탈에 시달렸고 결국 1993년 12월 4일, 켄달은 강등권을 헤매는 것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3.5. 방랑기

켄달은 1994년 그리스의 축구 클럽 스코다 크산티 FC에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성적 부진에 시달리다가 한 해를 못 버티고 경질되었다. 그 후 1995년엔 2부리그 노츠 카운티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역시 성적 부진에 빠졌고 결국 1995년 4월 경질되었다. 노츠 카운티는 켄달을 경질한 뒤 강등권을 탈출하지 못하고 결국 3부리그로 강등되었다.

켄달은 1995년 12월 챔피언십에서 강등될 위기에 처한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팀을 강등에서 구원한 후 이듬해에 팀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에 진출시켰지만 안타깝게도 결승전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에 패해 EPL 승격에 실패했다.

3.6. 에버튼 3기

파일:external/i1.mirror.co.uk/Howard-Kendall.jpg

켄달은 1997년 8월, 에버튼의 부름을 받고 3번째로 토피스들의 구단으로 복귀했다. 팀은 이번에도 강등 위기에 직면했고 시즌 내내 강등권 싸움을 벌이다가 리그 마지막 날에 간신히 강등을 모면했다. 이때 그는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건강이 악화되자 결국 피터 존슨 구단주와 상호합의하에 사임했다.

4. 은퇴 후의 삶

켄달은 1998년 12월에 그리스의 축구 클럽 이나클리스 피레우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4달 동안 고작 승점 8점만 획득하는 바람에 결국 1999년 3월 경질되었다. 이후 그는 아일랜드 공화국 축구대표팀 등 많은 팀들로부터 오퍼를 받았지만 모두 거부하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2005년, 그는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에버튼 구단은 그를 "에버튼의 거인"이라 지정하며 레전드로 추앙했다. 이후 평온한 말년을 보내던 켄달은 2015년 10월 17일 69세의 나이를 끝으로 사망했다.

5. 수상

5.1. 클럽

5.1.1. 선수

5.1.2. 감독

5.2. 개인

  • 스토크 시티 올해의 선수: 1978
  •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 1985, 1987
  • 잉글랜드 명예의 전당 헌액: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