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0:06:13

핌 포르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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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핌 포르튀인 빌럼 1세 판 오라녀 빌럼 드레이스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 에라스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크루이프 미힐 더라위터르 안네 프랑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 빈센트 반 고흐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알레타 제이콥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안니 M.G. 슈미트 율리아나 여왕 요한 루돌프 토르베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알리다 보스하르 안톤 필립스 프레디 하이네켄 하니 스하프 빌헬미나 여왕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바뤼흐 스피노자 툰 헤르만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 마르코 반 바스텐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피트 피에테르손 헤인 요프 덴 아윌 얀 리흐워터 파니 블랑커스쿤 Van Kooten en De Bi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후고 그로티우스 요한 드 위트 안토니 포커 에뒤아르트 데커르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빔 코크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마르코 보르사토 에릭 하젤로프 로엘프제마 티에스토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베아트릭스 여왕 티투스 브랜즈마 코르넬리스 렐리 한스 테이우언 조셉 륀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레온티엔 반 무어셀 빌럼 요한 콜프 홋프리트 보만스 헨드릭 A. 로런츠 아벌 타스만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요프 반 덴 엔데 안드레 판 다윈 유스트 반 덴 본델 리누스 미헬스 미스 보우만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빌럼 바렌츠 페르디난드 도멜라 뉴엔하이스 뤼트 뤼버르스 얀 틴베르헌 빔 소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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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베르메르 딕 브루너 알베르트 프레스만 요프 주테멜크 헬라 하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엄 3세 케누 시몬스도흐터 하셀라에르 요하네스 디데릭 판데르 발스 부보 오켈스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안나 마리아 반 슈 헤르만 부르하버 루드 굴리트 모니크 판더 프레이크 드 존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안톤 피에크 바우더베인 드 그루트 윌렘 프레데릭 헤르만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알베르트 헤인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폴 드 리우 자크 P 티세 얀 볼커르스 피트 몬드리안 시몬 스테빈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하윌라우머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 륏허르 하우어르 하리 뮐리스 아브라함 카이퍼 마르턴 트롬프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빔 칸 폴 버호벤 이자벨 드 샤리에르 람세스 샤피 아베 렌스트라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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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빌헬뮈스 시몬 페트뤼스 포르튀인
Wilhelmus Simon Petrus Fortuijn
파일:Pim Fortuyn.jpg
출생 1948년 2월 19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펠선
사망 2002년 5월 6일 (향년 54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힐베르쉼
학력 암스테르담 대학교 ( 사회학 / 편입)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 사회학 / BSS)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 사회학 / MSS)
흐로닝언 대학교 ( 철학 / Ph.D.)
종교 가톨릭
성적 지향성 게이
소속 정당 [[노동당(네덜란드)|
노동당
]] (1974-1989)
[[자유민주인민당|
자유민주인민당
]] (1990년대)
[[살기 좋은 네덜란드|
살기 좋은 네덜란드
]] (2001-2002)
[[살기 좋은 로테르담|
살기 좋은 로테르담
]] (2001-2002)
[[핌 포르튀인|
핌 포르튀인 명단
]] (2002)
약력 흐로닝언 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에라스뮈스 대학교 사회학과 특임교수
주간지 Elsevier 편집장 (1993-2001)
로테르담 시의원 (2002)
1. 개요2. 생애
2.1.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사민주의자로2.2. 사민주의자에서 신자유주의자로2.3. 신자유주의자에서 반이민 운동가로2.4. 정계 입문2.5. 암살
3. 평가
3.1. 현대 네덜란드 정치에 미친 영향3.2. 현대 우익 정치에 미친 영향3.3. 네덜란드 내에서의 평가
4. 선거 이력5. 여담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의 정치인, 철학자, 사회학자.

오늘날 유럽 우익대중주의 정치의 아버지 격 대우를 받는 인물로, 특히 네덜란드의 현대사에서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현대 네덜란드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2004년 네덜란드 공영방송에서 조사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을만큼[1] 네덜란드 우파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 대우받고 있다.

2. 생애

2.1.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사민주의자로

1948년 2월 19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주의 펠선(Velsen)에서 중산층의 자녀로 태어났다. 포르튀인은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이후 보다 실용적인 학문인 사회학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967년 암스테르담 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981년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가 사회학도 시절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과 철학 전반이었다. 포르튀인 네덜란드의 사회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호했으며, 네덜란드 공산당(CPN)에도 호감을 가지고 공산당에 투표했다.[2]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재직하던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 갈등론 사회학을 가르치는 부교수였다. 포르튀인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그가 네덜란드 특유의 사회분위기를 혐오했기 때문인데, 그는 비록 개인적으로 가톨릭을 믿었지만 기독교 엄숙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1960년대 전후의 네덜란드 사회 분위기에 압박감을 느끼고 이를 변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화주의,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68년 혁명을 전후하여 프라하의 봄 등 여러 일련의 사태와 관해 포르튀인과 네덜란드 공산당 지도부의 생각이 같지 않아지자 포르튀인은 공산당에서 멀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포르튀인은 자신을 "무당파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면서 1970년대 후반에는 노동당에 가입하고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을 전환한다.

2.2. 사민주의자에서 신자유주의자로

1980년대 포르튀인의 정치 사상은 다시 변동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에서 복음주의 철학에 기반한 신보수주의를 주장하자, 포르튀인도 그 영향을 받아 사회민주주의보다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자유로운 시장이 개인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관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해 전체 공무원의 절반을 해고해야한다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했다. 결국 1989년 그는 노동당 당적을 정리하고 보수우파 정당인 자유민주인민당에 입당해 잠깐 활동한다. 그러나 자유민주인민당의 사회관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 얼마 안가 당을 탈당했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전통적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를 모두 혐오하였다. 그는 68혁명을 통해 확립된 네덜란드의 진보적 정체성이나, 그 이전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은 귀족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모두 반대했다. 그의 지향성은 가톨릭 공동체주의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 계몽주의였고, 고전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포르튀인은 68혁명으로 네덜란드를 떠받들고 있던 공동체 정신이 붕괴되며 아버지(공동체)도 어머니(종교)도 없는 "고아와 같은 사회"가 네덜란드 사회의 현주소라고 공격하며 네덜란드의 개방적인 정서를 비판했다. 하지만 동시에 LGBT 권리, 대마초 합법화, 세속주의, 페미니즘, 언론의 자유 등 되돌릴 수 없게된 네덜란드의 여러 가치를 지지했다. 그는 특히 공화주의를 지지하면서 보수적인 기독교 정신으로 되돌아자고 주장한 네덜란드의 상류 보수층과 네덜란드 왕실을 비난하는 양비론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동성애자에다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인 사회해방론을 공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무리하게 네덜란드 사회가 이미 합의한 의제에 대해서는 토를 달고자 하지 않았다. 대신 거시적으로 네덜란드 사회가 극단적 개인주의와 관료주의에 매몰되어있음을 지적하고, 네덜란드의 진보적인 가치 그 자체를 네덜란드의 새로운 국가적 정체성으로 삼아 68혁명으로 무너진 공동체주의를 되살리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포르튀인의 특이한 정체성은 네덜란드에서 논쟁 거리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과 뜻이 맞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언론 활동을 하며 대외적으로 인지도를 쌓아나갔다.

2.3. 신자유주의자에서 반이민 운동가로

파일:763.jpg
2000년대의 포르튀인[3]

1990년대 후반 포르튀인의 정치적 성향은 더욱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관심사는 이슬람교도들과 아랍권 이민자들이었다.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계속 무슬림 이민자들이 네덜란드로 유입되고 기존 네덜란드인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자 포르튀인은 무슬림들이야말로 네덜란드의 진보적 가치를 무너트릴 위협 요소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인 무슬림에 대한 주류 정치권의 공격은 금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포르튀인은 이 점을 노려 더욱 맹렬히 이슬람교를 "후진적 문화"라고 공격했고, 네덜란드가 상징하는 자유주의, 세속주의적 가치에 위배되는 반동적 보수주의의 세력이라고 칭했다.
저는 이슬람을 개인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후진적인 문화"에 갇혀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옛날 네덜란드의 개혁 개신교와 같습니다. 개혁교회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을만큼 가혹한 기준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네덜란드를 봅시다. 네덜란드처럼 동성애자 당대표가 공개적으로 선거유세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또 어디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네덜란드의 가치를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2002년 총선 때의 인터뷰
포르튀인은 미국 네오콘의 논리에 찬성했지만, 네오콘에 비해 공격적인 대외전술보다는 소프트파워를 통한 이슬람 "계몽"과 후진적 무슬림으로부터 세속주의 가치의 방어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이슬람 이민자를 반대하는 이유로 "다시 여성해방과 동성애해방을 이루어내야할만큼 사회가 퇴보하는것을 막고 싶다"라고 답했다. 또 경제적인 이유도 꺼내들었는데, 이미 인구가 1,600만인 네덜란드가 4만명씩 이민자를 받을 여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계속 난민이 밀려들어오면 네덜란드인들의 일자리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선동했다.

네덜란드의 좌우파는 포르튀인을 장 마리 르펜, 외르크 하이더[4] 같은 극우 리더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포르튀인은 르펜, 하이더 등 극우파를 혐오한다고 주장했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같은 중도우파나, 존 F. 케네디와 같은 좌파 인사도 존경한다고 밝혀 논란을 불식시키고자 했다. 그는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좌파적인 총리라고 평가받는 요프 덴 우일(Joop den Uyl)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슬람을 수용할 수 있다"라는 타협적인 노선을 내세웠다.

2.4. 정계 입문

2001년, 포르튀인은 공개적으로 정치 입문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그는 빔 코크 총리가 이끄는 당시 정부를 "보라색 내각"이라고 비난했다. 보라색은 노동당의 빨강, 자유민주인민당의 파랑, 기독교민주당의 초록을 섞은 색으로 세 당의 연정인 현 정부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애매모호한 엘리트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다. 포르튀인은 놀라울정도로 포퓰리즘적인 자세를 취하며 중도좌파의 엘리트성을 지적하고 자신을 "민중의 대변인"으로 삼았다. 선거 구호 역시 "국민 여러분이 명하신 대로!"였다. 정작 포르튀인 본인은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인문학을 공부하고 명문대학교 교수를 지낸 엘리트였다는 것이 아이러니.

포르튀인은 처음에 살기 좋은 네덜란드(Leefbaar Nederland)라는 당에 입당했지만, 이슬람 혐오 논란이 일어 당에서 제명당했다. 지역 정계에서는 자신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로테르담을 거점으로 삼고, 살기 좋은 로테르담(Leefbaar Rotterdam)을 창당해 활동했다. 포르튀인은 2002년 있을 네덜란드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지역정당을 통해 영향력을 입증하고자 했다. 선거 결과는 놀라웠는데, 살기 좋은 로테르담은 무려 37%를 득표해 30년동안 이어진 노동당의 일당우위 정권을 무너트리고 로테르담 지역 정계를 장악했다. 시의회 45석 중 17석을 차지한 대승리였다.

파일:Verkiezingsposters_Pim_Fortuyn_mei_2002-801x500.jpg
핌 포르튀인의 2002년 총선 포스터

포르튀인은 2002년의 총선을 위해 핌 포르튀인 명단(LPF)이라는 사당을 만들었다. 이 당은 초기 지지율이 2%에 불과했지만, 지방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선거 직전 지지율이 9%까지 상승했다. 포르튀인은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적으로는 다문화주의의 금기를 무너트리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인종, 피부색, 정체성 등에 따라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네덜란드 법 조항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5]

그럼에도 여전히 네덜란드 사회는 그의 급진적인 보수 공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좌우파의 주요 정당이 그의 당과의 연대를 거부하며 지지율은 정체되었다. 포르튀인은 기득권 세력이 자신을 "악마화"한다고 주장하며 포퓰리즘적 메시지를 두배로 강화하였다. 그런데...

2.5.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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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3.1. 현대 네덜란드 정치에 미친 영향

핌 포르튀인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네덜란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등장 이전까지, 네덜란드 사회에서 이민자나 소수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특히 다문화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나치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정치권에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포르튀인은 자신이 나치가 아님을 항변하고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바로 그 진보를 지키기 위해 다문화주의에 반대해야한다는 역설적인 이론을 내세우며 현대 네덜란드 우익 포퓰리즘 정치의 특징을 이루는 여러 담론을 만들었다.

그의 암살 이후 여러 우익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등장했으며, 네덜란드의 다문화주의와 이슬람 문화 수용에 비판적인 의견이 늘어났다. 2006년 총선에서 포르튀인의 정당은 몰락했지만, 사실상 포르튀인과 똑같은 정치 사상을 공유하면서도 더욱 대중적인 호소력과 정치력을 같춘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등장하며 포르튀인의 유산은 이어지고 있다. 빌더르스 역시 동성애, 여성 인권, 대마초 합법화, 안락사 등 네덜란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의제에 모두 공감하지만[6], 동시에 그러한 것을 거부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이민에 반대하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3.2. 현대 우익 정치에 미친 영향

현대 유럽과 미주대륙의 우파 정치에도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비록 포르튀인 그 자신이 극우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오늘날 우익~극우 정치의 담론에 포르튀인이 미친 영향력을 묵과할 수 없다.

포르튀인은 공화주의자이자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로서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표현의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네덜란드 헌법 7조가 다양성을 명시한 헌법 1조보다 우위에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포르튀인은 옛 나치처럼 노골적으로 인종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혐오표현을 할 자유, 특정 손님을 거부할 자유 등 개개인의 자유에 기반을 둔 차별을 저지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현대 서구권의 우익에서 자주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던 피터슨을 위시로 한 반-정체성 정치, 반-정치적 올바름 우파들은 다양성의 표현보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를 내세우며 혐오표현을 교정하려는 정부의 규제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이미 25년 전에 포르튀인이 내세운 핵심적인 주장이다. 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논리도 포르튀인이 몇십년 전에 앞서 주장한, 사회적 약자나 다양성 보호의 이유로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68혁명에 대한 비판적 담론은 현대 우파가 포르튀인에게 빚진 것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 포르튀인은 "극우"의 이미지를 바꾼 것으로도 평가된다. 포르튀인이 등장하기 전 에녹 포웰과 같은 극소수를 제하고는 극우의 이미지는 장 마리 르펜이나 이탈리아 북부동맹, 영국국민당 같이 시끄럽게 폭동을 일으키는 반유대주의 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젊은 대학교수인 포르튀인은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고, 그 자신도 동성애자로서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현상이며, 그저 우익 폭력배로만 여겨졌던 극우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일각에서 냉철하고 지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포르튀인의 영향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3.3. 네덜란드 내에서의 평가

파일:핌 포르튀인 동상.jpg
로테르담 중심가에 위치한 핌 포르튀인의 동상.[7]

네덜란드에서 핌 포르튀인은 좋은 방향으로나 나쁜 방향으로나 사후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언급될정도로 지명도 높은 중요 인물로 각인되어있다. 잘생기고 젊은 명문대교수 엘리트가 선거을 며칠 남겨두고 암살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신화가 되었고, 일부 정치학자들은 그를 로버트 F. 케네디에 빗대 "네덜란드의 케네디"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정치적인 면을 벗어나, 포르튀인의 개인적인 성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네덜란드에 적지 않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말하는 투쟁가로서의 이미지가 각인되어있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뷰-NSS의 2007년 조사에서, 포르튀인 사망이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네덜란드 인구 25%가 포르튀인이 살아돌아온다면 그에게 투표할 것으로 드러났다. 또 같은 조사에서 국민의 40% 이상이 "새로운 포르튀인"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57%는 그를 "좋은 연설가"로, 37%를 "불편한 진실을 말할 줄 아는 솔직한 정치 지도자"로 묘사했다. 우익 폭력주의자, 외국인 혐오자, 호전적 전투광 등 부정적으로 묘사한 여론은 각각 15%, 10%, 10%에 그쳤다.

2004년 네덜란드 공영방송국이 조사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포르튀인은 국부 빌럼 1세나 반고흐, 렘브란트, 준 국부 수준인 빌헬미나 여왕 등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해 네덜란드 정치 평론가들을 충격에 빠트린 바 있다. 하지만 이 투표 결과가 포르튀인 사망 2년 뒤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소 감정적으로 답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아예 투표 조작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죽음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종증손자이자 우익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테오 반 고흐는 그의 죽음이 좌파 기득권의 음모이며 이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한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그 자신도 2004년 암살의 대상이 되는 등 여러모로 네덜란드 정치가 포르튀인의 얘기만 나오면 분열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4. 선거 이력

<rowcolor=#2E498E>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2 로테르담 시의회 선거 로테르담 [[살기 좋은 로테르담|
살기 좋은 로테르담
]]
93,852 (37.8%) 당선 초선
네덜란드 하원의원 선거 네덜란드 [[핌 포르튀인|
핌 포르튀인 명단
]]
선거 전 피살[8]

5. 여담

  • 가톨릭 신자였다. 죽기 직전에 신앙심이 꽤 강력해졌다고 한다.
  • 그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네덜란드 왕실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왕가를 "구시대의 유산"이라고 생각했으며, 왕실을 폐지해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네덜란드의 근본적 기독교도들도 이슬람교도들만큼이나 혐오하였다.

[1] 다만 이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2주 전에 반이민 활동가 테오 판호흐가 암살당했고 2년 전 포르튀인 암살 사건의 영향으로 우파가 감정적으로 포르튀인에 몰표를 던졌다는 말이 많았다. 네덜란드 내에서 존경을 많이 받는건 사실이지만, 1위를 할만큼 존경받지는 않고 안티도 많아서 네덜란드 국내에서도 조사 결과가 조작되었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2] 하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3] 경례하고 있는 포르튀인의 포즈는 그의 상징이 되었다. [4] 오스트리아의 극우 리더로 네오나치로 악명높았다. [5] 헌법 1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냐며 비판받았는데, 자신은 형법 137조를 언급한거라며 한발 빼기도 했다. [6]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정책이나 표결 결과는 대단히 보수적이다. [7]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이 훼손되는 동상이라고 한다. [8] 사망 당시 이미 선거용지가 인쇄 된 상태였기에 출마가 철회되지 않았다.